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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I, 기원들에서부터 스콜라철학까지:
리보(A. Rivaud), PUF, 1960 수정판, (초1948) xxiii+665
- 리보(Albert Rivaud, 1876-1956) 프랑스 철학자. 정치가. 1900교수자격시험 통과, 1906 문학박사. 스피노자와 플라톤 연구, 1927년 소르본 교수. 첫째 독일에 관한 책에서(1932년)에는 독일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는 책을 썼으나, 둘째 책에서(1938)는 반대로 반유대주의와 히틀러 찬사로 채워졌고, 나찌즘으로 고발당했다. 1939년 정치도덕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당시 “전술정보전쟁학교”(L'École de guerre: 옛 명칭 Collège interarmées de défense, CID)에 속하는 협력교수들 중의 하나였다. 1940년(64살) 초기 페땅 정부의 문교부 장관이 되었다. 그런데 독일 정부의 요구에 따라 그를 사임시켰다. 그는 1944년(68살) 자유 프랑스에서 모든 공식적인 직업에서 배제되었으나, 다음해 그가 반나찌 군대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참작하여 면소처분을 받았다. / 스피노자 철학에서 본질과 현존(Les notions d'essence et d'existenc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Éditions Félix Alcan, 1905) 플라톤(Platon: Timée, suivi de Critias)(trad. Albert Rivaud, Timée ; suivi de Critias, vol. no 10, Paris, Les Belles Lettres, coll. « Collection des universités de France »,1925, 274 p).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PUF, 1948, réimpr.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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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철학사I, 기원들에서부터 스콜라철학까지:
제11장 소크라테스와 그 학파들 Socrate et les socratiques 143 -167
제1절 정치적 조건들과 사회적 조건들 Les conditions politiques et sociales 143
아테네의 첫 철학자는 소크라테스 이다. 그에 앞서서 또는 그의 시대에 이방인들은, 즉 밀레토스지방의 아폴로니아 출신인 디오게네스(Diogène d'Apollonie, Διογένης, 전450년경 활동), 트라키아지방 아브데라 출신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d'Abdère, Πρωταγόρας 전490경-420경), 시실리아 지방의 레온티노이 출신인 고르기아스(Gorgias de Léontium, Γοργίας) 아틱지방의 동쪽에 있는 케아 섬 출신인 프로티코스(Prodicos de Céos, Πρόδικος Κέα, 전 470/460경-399이후), 현 터키의 북서부로서 흑해의 연안에 있는 비튀니아 지방의 칼케온 출신인 트라시마코스(Thrasymaque de Chalcédoine, Θρασύμαχος Χαλκηδών), 이탈리아 남부 크로톤에서 망명하여 테베에 은신했던 필로라오스(Philolaos, Φιλόλαος, 전485경-385경) 주변의 피타고라스학자들은, 아테네를 거쳐 갔으며, 이들은 밖으로부터 온 사유형식들을 아테네에 도입했다. 구식인 아테네인들은 이들에게 걱정스럽고 의심스런 눈길로 보았다. 아테네는 당시 페리클레스(Périclès, Περικλῆς, 전495경-전429) 통치하에서 전성기 시기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인물이 사라지고 난 후, 급속한 정치적 몰락의 표시들이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특이하게 일치하는 것으로는, 아테네의 사상과 아테네의 예술은 도시국가 가장 침잠했던 순간에 가장 웅장한 진수를 보여주었다.
전404년부터 338년까지, 즉 아이고스 포타모이(L'Aigos Potamos, Αἰγὸς Ποταμοί) 해전에서부터 카이로네이아(Chéronée, Χαιρώνεια)의 재앙에까지는 아테네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가장 치욕적인 시기였다. 전자는 아테네 함대가 스파르타의 뤼산드로스(Lysandre, Λύσανδρος)의 임시방편의 해군에게도 굴복한 사건이며, 후자는 아테네의 최후의 군대가 마케도니아 왕 필립2세(Philippe II, Φίλιππος, 전382-336)의 밀집군단에 의해 괴멸된 사건이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 정복자[뤼산드로스]의 압력으로 성립했던 쿠데타가 있었다. 이 정복자는 전404년 4월에 추방되었던 귀족정치가들을 불러들였다. 8개월 동안에 테라메네스(Théramène, Θηραμένῆς), 크리티아스(Critias Κριτίας, 전460/450경-전404/3), 카르미데스(Charmide, Χαρμίδης)와 그 친구들은 절대 권력을 잡았고. 그들은 그 권력을 남용했다. 그들은 법률들을 바꾸었으며, 그들의 반대자들과 스파르타에 반대자들을 가차 없이 감옥에 가두고,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을 집행했다. 2만5천명의 아테네인들 중에서 그들은 1천5백명이상을 사형시키고, 자신들에 반대에 대해 무서운 증오의 단체들을 집결시켰다. 아마도 403년 9월 추방되었던 무리들 중에서 트라쉬불로스(Thrasybule, Θρασύϐουλος)가 이끈 힘있는 무리가 30인 참주라고 부르는 이들을 갑자기 전복시켰다.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둘 다 플라톤의 친척인데, 그들의 배단에 대한 생명의 값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종말이후에 에우클리데스(Euclide, Εὐκλείδης)는 민주정에 닮은 정체를 세웠는데 그래도 여전히 강압적이었으나, 아주 권위적인 스파르타적인 의지들을 부드럽게 실행하는 집행자였다. 그러한 것은 전378년에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예기치 못한 패배를 하는 시기까지 지속한다. 전378년에서 전371년까지 몇 년 동안에, 스파르타의 약화 덕분에, 아테네는 부흥하려는 열정의 노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전371년에, 스파르타 군대는 레욱트라 전투(La bataille de Leuctres, Λεῦκτρα)에서 회복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하였고, 테베의 주도권이 스파르타의 지배를 대체했다. 테베의 장군인 에파메이논다스(Épaminondas, Ἐπαμεινώνδας, 전418경-362)가 죽자, 전362년 7월에 테베의 몰락도 아테네의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 도시는 모든 내적인 동인을, 모든 자존심을, 삶의 힘과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 도시에는 새로이 작동함이 없이 평화주의자들의 미약한 노래가 모든 대가를 치루더라도 퍼졌다. 아마도 이 도시에는 전355년 이래로 자기들의 조국의 치료할 수 없는 몰락으로 정복되어버린 철학자들 자신들의 이야기들만이 갑작스레 들렸다. 조금 지나서 헛되기는 하지만, 데모스테네스(Démosthène Δημοσθένης, 전384-전322)는 마케도니아의 왕의 구상들을 매우 고집스럽게 매번 폭로할 것이다. 또한 헛되이 도시의 외곽 지역에 대해 마케도니아인들이 자질구레한 잠식들이 증가할 것이다. 아테네와 테베에 관한 한, 이 두국가는 오랫동안 경쟁적이었던 힘들을 결합하면서 필립2세의 야망들에 반대하여 일어났으나, 그들의 군대는 전338년에 이들의 군대는 카이로네이아(Chéronée, Χαιρώνεια)에서 괴멸되었다. 전336년에 필립2세의 암살조차도 억압되어 있었고 자기의 분할통치에 만족했던 인민을 외국인의 신탁통치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아테네 도시는 현존하는데 그쳤다. 그 시기에 마케도니아 당의 지지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옛 제도들의 메카니즘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막 분석했다. 정치적 상황은 지적인 삶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이 시기에 조차 위대한 천재들의 몇 명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아테네는 자기 영토 안에서 예술가들, 시인들, 과학자들, 철학자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사상은 더 이상 강화되는 것도, 과감한 것도 다양한 것도 아니었으며, 기술도 더 이상 찬탄할 만하지 못했다. [철학자들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극작가들로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 Εὐριπίδης, 전480-전406),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 Ἀριστοφάνης, 450-386), 조각가들로서 스코파스(Scopas, Σκόπας, 전420경–330), 플락시텔(Praxitèle Πραξιτέλης, 전400경-326경), 뤼시포스(Lysippe, Λύσιππος 전395경-전305경), 화가로서 아펠레스(Apelle, Απελλής), 과학자들로서 수학자인 테오도로스(Théodore de Cyrène, Θεόδωρος, 전465경-전398), 테아이테토스(Théétète, Θεαίτητος, s.d.)있고, 그리고 나중에는 연설가들로서 데모스테네스(Démosthène, Δημοσθένης, 기원전 384-322), 아이스키네스(Eschine, Αἰσχίνης, 전390-322), 위대한 발견물들과 걸작들을 불러온 자들(les évocateurs 강령술사 降靈術師)로서 이 모든 이름들은 기원전 4세기에 속한다. 경이로운 지적이고 예술적인 운동과 급속하게 변하는 정치적 퇴폐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치적 몰락을 재촉했던 것, 증가하는 무도덕성, 아테네인들이 하얗게 고생했던 전430년의 페스트 창궐 이후에 출생에 관한 의지적인 제한 등도 한 몫을 한 것이다. 기원전 4세기 과정 내내 인구는 축소되기를 끝이지 않았다. 전390년경에 아테네 거주민이 3만 명이었는데, 전310년에는 2만 명이었다. 시골에도 사람들이 떠났다. 사람들은 쾌락과 물질적 만족으로 몰렸다. 부유한 중계상인 계급이 형성되고, 반면에 원주민의 빈곤층은 확대되어 늘어났다. 사회의 구조자체를 위협하는 불평등을 끝내기 위해서, 이론가들은 좋은 기획들을 만들었다. 공산주의(le communisme)는 밀레토스 출신 히포다모스(Hippodamos de Milet, Ἱππόδαμος 전498-408)와 더불어 출현하게 되었다. 퀴니코스 학파의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기원전 444-365)와 플라톤은 대타협으로 공산주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예술과 과학은 앞 시대의 기술적 발견물들을 이용했다. 이것들은 또한 인민의 삶에 대해서 최상계층의 무관심도 또한 이용했다. 모든 사람이 참주와 선동가의 소명을 갖는 것도 아니고, 연설을 통한 경재시합은 모욕과 비방의 교환과 같은데 이것은 최상계층의 취향이 아니었다. 최상계층에게 예술적 연구, 탐구, 창조는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아직도 아틱지방은 지적 힘들로 넘쳐났다. 이 힘들을 사유의 즐거움으로 방향을 돌리려 할 것이다. 대신에 가장 마땅찮은 이들에게 행동의 즐거움들을 넘겨주었다.
여러 전통들에 집착했던 몇 시민들은 철학자들이 교육을 통해서 조국의 생생한 활력들을 파괴시켰다고 고발하게 될 것이다.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를 불경건하다고 고발했던 시인 멜레토스(Mélétos, Μέλητος), 연설가 리콘(Lycon, Λύκον), 상인 아뉘토스(Anytos, Ἄνυτος)은 스스로를 정직한 시민들로서, 자신들의 영혼과 양심상 아마도 약간 상위 인물들로서, 한 소피스트[소크라테스]를 희생하더라고 민족적(또는 국가적) 이익을 방어해야 한다고 믿었다. 고발의 행정정식은 평범했고, 모든 소피스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관한 한, 이 정식은 시인 받은 동기들로부터 그 힘을 끌어냈는데,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이에 대해 언급할 때 경계를 할 것이다. 우선 이 고발정식은 스파르타의 체계에 대한 찬사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게다가 이 정식은 30인 참주들 가운데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 크리티아스(Critias, Κριτίας, 전460/450경-전404/3)와 카르미데스(Charmide, Χαρμίδης)와 또한 플라톤의 가족과 친구를 목표로 삼았다. 플라톤도 처음에는 크리티아스가 만들었고 3천명 민병대 하수인들에게 가담했었는데, 민병대의 권력은 크리티아스가 장악했었다. 만일 플라톤이 399년 이후에 매우 오랫동안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 친척에게, 즉 과두정 인물들의 한사람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민의 반동은 단순하였다. 그 반동은 이 오랜 전통의 용도들을 파괴시킨 자들[크리티아스와 참주들]을 단죄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스파르타를 높이 찬양하였고, 그 침략자들의 휴대 장비[배낭]들에서 승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과 더불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어느 날 나타나리라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발명적 재능에 의해라기보다 적어도 예술[기술]과 지식에 의해서 그들보다 앞서 살았던 선각자들보다 우수한 이 사상가들에게서, 문제들의 자료들은 앞선 시대로부터 거의 항상 제공되었다. 아마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시대의 수학자들, 천문학자들, 음악가들, 의사들의 새로운 발명품들의 합류점에 있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소크라테스 앞 시대 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사실들과 가정들의 폭넓은 목록을 이용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끊임없이 펼쳐져서 알려진 사실들을 배열할 것이고, 그것을 확장하면서 수정할 것이고,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d’Abdère, Δημόκριτος, 전460경-370)의 백과전서를 현대화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 도시가 나아갈 방향에 협력할 욕망이 끊임없이 타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399년에 그는 이 도시를 서둘러 떠나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행동을 취하는 것을 부정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탁월함(la vertu)에 근거한 아주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정치가편과 법률편은 유토피아의 영역 밖에서 차례로 후퇴하는 정치적 단계들을 주목하게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다음 차례로 정치적 문제에 접근하면서, 단번에 사회를 개혁한다는 그 꿈을 재빨리 부정할 것이다. 그의 정치학에서 분명하게 표현한 수정은 플라톤의 [정치적] 진화보다 더 완전한 진화를 증언한다. 행동하는데 무능했던[어쩌면 마케도니아 출신으로서 최소한 중립자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철학자로서 자기 진영에 남아서 관찰하고 판단하는데 그쳤다. 그가 곧바로 관찰하게 될 것은 새로운 세계[마케도니아 제국]의 탄생이었다. 거기에서 아테네의 도시국가(la Polis)는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었고, 또한 거기에서 군대와 행정조직의 힘으로 건설되었던 제국들은 옛 도시국가의 자치로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의 거대한 희망이 소크라테스, 플라톤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순간에서는 아주 자주 실망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럴 것 같았다. 이 희망은 마케도니아의 정복과 알렉산더의 원정이후에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이상은 옛 도시국가들의 이상을 대체할 것이고, 그리스 세계는 무너지고, 그러고 나서 이 이상은 사실들 속에서 어떤 표현으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7RMH)
제2절 소크라테스 146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몇 반대자들에 더하여 몇 찬사자들의 증언들을 통해서 알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전설 속에 들어있었다. 우리는 그를 상상의 많은 노력에 의해서만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오랫동안 희극작가들에 의해 조롱하는 대상으로 쓰였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 Ἀριστοφάνης, 전450-386), 에우폴리스(Eupolis, Εὔπολις 전446-411), 아메입시아스(Ameipsias Ἀμειψίας, s.d.) 텔레클에이데스(Téléclidès, Τηλεκλείδης) 등은 그를 중상비방했다. 특히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를 구름들(les Nuées, Νεφέλαι, 전423)에서 머리가 약간 돈 사람으로 그렸다. 아테네의 스페티오스 구역 출신인 아이스키네스(Eschine de Sphettos, Αἰσχίνης Σφήττιος, 전390-322),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 전440경-전355경)과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전427-347)이 그를 알리는데, 약간씩 다른 초상화들을 그렸는데, 종합하면, 본질적인 측면에서 일치한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화해하기 어려운 견해들을 오직 소크라테스에게 넘기고 있다. 이 견해들이 그의 예언에 진솔한 범위에 관해서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몇 몇 사실들은 별 것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교외에서 기술자의 가정 출신으로 기원전 470년/469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que Σωφρονίσκος)는 아마도 직업적인 조각가였으며, 그가 파이돈편에서 상기하듯이, 그의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는 조산원이었다. 그의 가족 사정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좋은 교육을 받았거나 주어졌을 것을 같다. 우리가 모르는 조건들에서 그는 그 시대의 과학자들을 자주 만났으며, 또한 많은 것을 읽었을 것 같다. 그는 활동적이고 용기있는 시민이었다. 그는 10년 이상동안 군사적 의무를 수행했으며, 기원전 432년 포티다이아 전투(La bataille de Potidée, Ποτίδαια), 기원전 424년 델리온(Délion, Δήλιον) 전투,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Amphipolis, Ἀμφίπολις) 전투에 참여했다. 플라톤의 향연 속에서, 사람들은 암피폴리스 전투의 힘든 퇴각에서 그의 용기와 그의 경탄할만한 인내에 대해 과장한다. 그는 또한 아주 자유로운 아테네인으로서, 공적인 행정직들을 수행했으며, 기원전 406년에는 아르게누사이(Arginuses Ἀργινούσ(σ)αι) 군도에서 전투한 장군들을 단죄하는 데 거절하면서 독자성의 시험대를 거쳤다. 그러나 오래 과정에서 그는 선동가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소심하고 선량한 시민들에 의해서도 노리는 대상이 되었다. 이 선량한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불경건하고 야심찬 귀족 정치가들, 즉 소위 말해서 크리티아스(Critias Κριτίας 전460경-전404경), 알키비아데스(Alcibiade, Ἀλκιβιάδης, 전450-전404), 카르메니데스(Charmide, Χαρμίδης, 기원전 5세기경) 같은 자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놀랐다. 399년에 거의 71살이 되어서, 그는 이름께나 높은 시민들의, 즉 시인 멜레토스(Mélétos, Μέλητος), 무두쟁이 아뉘토스(Anytos, Ἄνυτος), 연설가 리콘(Lycon, Λύκον)의 표적이 되었고, 멜레토스에 의해 최고 집정관(Archonte-Roi, ἄρχοντες, 9명의 집정관 중의 수장)에게 전해준 ‘불경건하다는 고발’의 표적이었다. 일상적 형식에서 생각된 불평은 소크라테스가 도시의 신들을 무시했고, 새로운 신성을 도입했다고 비난으로 되었다. 그 불평에는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것도 덧붙여졌다. 고발의 주동자들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이루어진 다양한 재판들에도 공통적이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반대자이지만 이들의 제자들과 친구들과 계속적인 접촉관계에 있었기에, 대중들에게는 간단하게 소피시트들 중의 한사람으로 비쳤다. 전399년 2월에 감옥에 갇혔으며, 법정에 소환되어 501인 심판관들로 된 새로운 대중법정에 서게된 소크라테스는 차례로 고발당했다. 먼저 멜레토스가 가한 맹렬한 고발은 거의 성공하지 못한 것 같고, 다음으로 아뉘토스는 보다 순화되었지만 교묘했다. 아뉘토스는 [전404년에] 30인 참주 정부 동안에 테라메네스(Théramène, Θηραμένῆς)편에 선 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교묘한 인간은, 스파르타가 아테네인들로 권력을 세운 순화된 민주정부 도래 이후에, 30인 참주들을 위해 너무 과도한 호의로 용서하려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응답들 중에서 약간 묵중한 아이러니 때문에 그리고 자기변호의 역설적 특성 때문에 이 모든 친구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반대 220표와 찬성 281표로 죄있다고 심판 받았고, 결국 사형에는 368표로 언도되었다. 사형언도와 사형집행 사이에 예기치 않은 의례적 연기를 이용해서, 자기의 탈출을 준비했던 자기 친구들의 제안들을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그는 용감하게 독약(la ciguë)를 마시고 죽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죽음 이후 곧바로 그의 친구들에 만들어진 전설이 그의 인격을 덮어씌어서 그를 굉장하게 만들 것이다.
434년부터 그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소크라테스는 학교를 세우지 않고서 자기 방식대로 가르쳤던 것 같다. 그는 즉흥적이거나 또는 합의된 논쟁을 열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현학자들과 무지자들의 주장들을 토론에 부쳤다. 그의 주변에는 모든 범위의 관점들에 관심으로 찾아온 열렬한 제자들과 찬미자들의 핵심들이 형성되었다. 플라톤은 예외이지만, 진실로 위대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용법들을 변경할 의사가 아무것도 없는 귀족정에 관심자들, 평민이든 이방인이든, 지식에 열정 있든 자신들의 구원을 걱정하든, 자신을 표본으로 삼으려는 젊은 애호가들, 그들 중의 몇몇은 그에게서 불타는 듯한 열정적으로 감화되었든, ... 그러나 그의 청강자들 각각은 소크라테스를 자기 방식으로 보았다. 크세노폰은 군인이며 자기 자신에게 굳건하여 의무감 강한 인물인데, 그를 투사(un combattant)로서 표현했다. 그 투사란 거의 야생적인 에너지로 자신들의 정열에 반대에 대해 투쟁하는 데 소비했던 [퀴니코스 학파들의] 안티스테네스계의 인물들에 닮은 투사이다. 또는 도덕론자(un moraliste)로 표현했다. 그 도덕론자란 구체적인 문제들과 개별적 탁월함(la vertue)에 전념하는 도덕론자이다. 이에 비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인격의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으나, 그는 그의 영혼의 확고함과 그의 성격을 높이 샀다. 그러나 그는 그를 유행하는 과학에 대해 열심히 비판하는 비판자(le critique)로, 소피스트들에 대해 또는 그 소피스트들 중의 몇사람에 대해 결정적인 반대자(l'adveraire)로, 도시국가드의 종교를 새롭게 하고 새로이 활기 있게 할 것을 제안하는 학설들을 제시하는 공정한 심판관(le juge)로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데몬”(demon, δαίμων)이 충고하고 가장 높은 진리를 예언하게 하는 천재적 예언가(le visionnaire génial, 전망가)이며, 플라톤 자신이 앞으로 가담할 길들의 미리 그렸다는 전망가였다. 겉보기에 서로 반대되는 이 두 초상화들 중의 어는 것이 그 원본(소크라테스)에 가장 정확하고 가장 부합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도덕론자였던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금욕주의자였던가? 또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형이상학자, 종교적 정신가, 게다가 플라톤의 철학과는 구별하기 어려운 새로운 철학의 창조자였던가? 여러 해석가들이 오랫동안 논의했던 것이다. 우선 가장 합리적인 것은 크세노폰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에 장점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이 정직한 인간의 관점의 한계들, 즉 상상과 도약이 너무 빠져 있다고, 애써 표현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기상학에 전념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가 아폴로니아 출신 디오게네스(Diogène d'Apollonie, Διογένης Ἀπολλωνία)와 기하학자들의 생각들에 열중하여 구름들을 논의였던 것으로 보아서이다. 이 증언는 플라톤의 증언과 간접적인 확인에 기여하지 않는가? 이것은 너무 단순한 해결책들이며, 문제는 아마도 더 복잡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판단에 호소하여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연학에 전념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는 논리적 질서와 방법적 질서의 두 가지 발견물들에, 다시 말하면 귀납추론 담론과 일반적 정의라는 것에, 자기작업을 이끌어갔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즉 소크라테스가 도덕적인 문제들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크세노폰의 증언을 확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들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소크라테스 주변인물들, 그의 스승과 그 친구들인, 플라톤, 에라스토스(Erastos Ἔραστος, s.d.) 코리스코스(Coriscos, s.d.) 등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태어나기 앞서 15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를 그 자신은 만난 적이 없었다. 이 두 초상화를 그 자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닮은 점들과 차이점들을 강조해야 한다. 이 둘 모두는 우선은 몇 가지 관점들에서 일치점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인격성은 그의 학설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따라서 두 진술들로부터 한 철학자를 즉 소크라테스적 체계를 분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둘 모두에게서 소크라테스는 항상 각성한 비판자로서, 보다 일반적으로는 소피스트들을 가차 없이 공격하는 비판자로서 보이며, 끝내는 다소 쉽게 보는 방식 때문에 거짓 기술자들의 적으로서, 일상에서 너무 자만하여 편협한 직업인들의 적으로서 혼동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특징은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외적인 측면과 인격성 사이에서 대비되는 것은 일반 헬레나(un Hellène, 그리스) 사람에게는 감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작은 인간이 [디오뉘소스의 스승 겸 양아버지인] 사일레노스(Silène, Σειληνός)를 닮았으며, 위협적인 추한 모습과 차림새를 무시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맨발로 지내며, 자신을 씻은 것도 잊고 살지만,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저항적 인물이고, 아이러니를 사용하며 자기 자신의 견해를 표하는데도 건방지며, 순진함을 가장하여 상대방을 성가시게 하기를 즐기는 인물이며, 이런 점에서 퀴니코스 학자들과 스토아학자들에게, 게다가 이방인들에게도 야만인들에게도 표본(모델)으로 이용될 수 있다. 이 외적인 초상화의 세부 사항들은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톤, 플라톤에게서 일치하는 점이다.
그러나 셋째 초상화는 지배적인 특성에 의해 다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그 소크라테스는 진솔한 자연 학자였다. 그는 대기현상들을 관찰하고, 벼룩의 높이뛰기를 측정하고, 구름들과 회오리 신(Dieu Tourbillon, 회오리 바람)을 추론했다. 사람들은 철학에 문외한인 아리스토파네스를 상상할 수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직접 말한 것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소크라테스를 이해했다고 여기고서, 그를 특별나게 우스꽝스러운 한 소피스트로서 연극의 연출 장면에 올렸다.
크세노폰의 그 소크라테스는 질박(금욕)주의를 열망하는 한 도덕론자이며, 경건하고 심지어는 헌신적인 한 인간이며, 고상한 사색들을 경멸하며 냉소적인 설교자에 닮았다. 그는 엄격한 훈육에 복종하고 피곤을 견디는 인간이다.
플라톤의 그 소크라테스에 관해서 보면, 플라톤 자신의 사상을 정확히 하는 정도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측면들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의 변호편과 프로타고라스편에 앞섰던 일련의 모든 작은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는 많은 소피스트들과 수사학자들에 대해서 반대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문성을 정통할 수도 없고 자신들의 사회적 인간적 성격들을 알지도 못하는 편협한 직업인들에 대해서 반대자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프로타고라스편과 고르기아스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과 수사학자들의 편에 서서, 플라톤주의로 간주되는 학설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엘레아의 그 이방인[파르메니데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지워지게 되는 논리적 대화편에 이르기 전까지, 소크라테스는 차례로 정치가, 자연학자, 심리학자가 되었다. 그는 영혼의 실재성에, 미래의 삶에, 세계의 질서에, 섭리(la Providence)와 신들의 역할에, 관한 생각들을 발전시켰다. 폴리테이아편에서 그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플라톤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는 형상들과 이데아들의 이론을 제시하고 옹호하였다. 플라톤이란 대변인은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에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딜레마 앞에 놓여 있을 것 같다. 플라톤은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다음으로 반복하게 될 모든 것을, 이미 말했다. 또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허수아비(l'effigie, 초상화) 아래다 자기 자신을 그려놓았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을 그 스승에게서 빌려주었다.
아마도 다른 해결책이 가능할 것이다. 딜레마는 아마도 인위적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서 기인하는 것을 연장하였고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과 그의 친구들과 토론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많은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설명되게 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가설들을 그렸고, 적어도 플라톤이 따라갈 법한 사유의 방향들을 지적해 놓았다. 아주 겸손하게도 플라톤은 자기 스스로를 장면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무한히 빚지고 있다는 감정을 가졌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정의(justice)로 충만하게 만들었으며, 그에게서는 그자신이 말하게 될 거의 모든 초안을 발견했다. 그리고 플라톤의 겸손한 증거는 특이한 가치를 지닌다. 결국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유명하게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 인민이 심판했고 단죄했던 원인에 대해 그를 변호인으로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농부인양 가장 하는 원시적 인간인데, 수사학도 모르고, 또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무용한 단어들에 적대적인 그런 원시적 인간이다. 그는 잘난체하는 현학자들의 과장을 폭로하고, 그 현학자를 무지와 허풍에 마주하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모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조잡한 척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언어에 민감하지 못한 척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굳건함을, 사유에서 정직함을, 사실들에 대한 존중을, 좋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소피스트들과 변증론자들의 절차들을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재능있는 인간이며, 심정(심장)이 자신에 말하는 경우에 그것을 완전히 소화하여 그 절차들을 사용할 줄 아는 재능 있는 인간이다. 진리에 있어서, 고르기아스편이나 나아가 유티데모스편에서 서투른 논증자들은 자신들의 약간 건방진 짓거리로 그에게 상당한 편을 들게 된다. 모든 아테네인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정치에 관한 자기 관점들을 가졌다. 그는 선동가들과 참주들의 적이었고 그만큼이나 플라톤 자신도 그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플라톤의 목적은 소크라테스를 전통의 옹호자들 편에 둠으로써 플라톤 자신도 속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하는데 있다.
소크라테스는 실재적인 지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 지식은 도덕성관 연관없이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학문(la science)는 탁월함이라는 것을 플라톤을 통하여 그가 말하게 될 것이다. 탁월함 없이는 지식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행동과 지식의 총괄적 일치를 원했다. 만일 상위 질서가 있지 않다면, 그리고 만일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이 광기와 착란일 뿐이라면, 그러한 학문(지식)은 가능하지 못하다. 그리고 신들, 섭리, 사물을 지배하는 관대한 이성, 인간적 과업들을 고려하는 이성 등이 없다면, 이러한 질서는 불편하다. 결국, 인간에 관한 한에서, 이 질서는 인간이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는 경우에만 실현되는데, 미래가 현존 한다는 점에서 그 영혼이 바로 여기에서 범했던 잘못의 대가를 치를 것이고, 또는 그의 덕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주장들의 한 관점은 여기에서 일치하는데, 가끔은 논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모든 탁월함(덕)은 학문(지식)이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서 “아무도 의지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최근의 한 해석가가 그리스 도덕에 대해 “주지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원리가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정식들의 의미는 더 단순할 것이다. “아무도 의지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는 이 말은 근본적으로 낙관주의를 표현한다. 플라톤은 사실들의 중압감으로 이것을 약화시켜 나갈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본성에 대해 크게 신뢰하였다. 그는 정상적 인간에게서 초기부터 퇴폐적인 의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즉 태어나면서 악한 짓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보같은 짓도 선천적이다. 이 바보 짓은 교육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나쁜 영혼은 무지하여 속고 있고 영혼이며, ... 그것을 고치고 밝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 원리들인데, 플라톤은 이것들을 변형하려고 할 것이다. 영혼들은 선함에 있어서 불평등하다. 마치 이 영혼들을 받아들인 신체들이 힘에서도 아름다움에서도 차이가 있듯이.
플라톤의 그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의 그 소크라테스처럼, 때때로 자기의 다이몬(le démon, δαίμων)을 불러왔다. 그는 가끔 영감을 받은 자의 태도를 취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겉보기에 낙담과 용기 상실의 위기들에 빠지곤 했다. 그는 부재의, 정신적 공허의, 불모성의 인상을 느꼈다. 그러나 이 의기소침의 순간들 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지혜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친밀함에서 오는 것과 같은 고양된 문구들과 종교적 도취가 뒤 따랐다. 심지어는 그가 깊숙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상태들에 처했을 때도,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신호”(un signe), 즉 “상층의 견해”(un avis d'en-haut)를 기다렸다. 그에게 특별한 “다이몬”은 비판해야 할 경우들에는 이것을 가끔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소크라테스가 좋은 이유들을 믿어서 기회에 맞지 않은 결단을 하도록 시도되었을 때, 그 “다이몬”은 일종의 보호 천사처럼, 그것을 유보하게 경고하고, 그에게 행동의 거부할 것을 충고한다. 아마도 이 특별한 사실들을 고려하기 위하여, 정신적 병리학을 환기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실로 그 천재성(재능)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 경고들을, 게다가 드물게는 지나칠 정도인 경고들을 믿었던 것 같다. 그것은 특히 신중함의 증거이다. 그 신중함으로 그는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l'exaltation) 자기의 임무(sa mission)를 생각했다. 이 내적 고양은 사소한 의지적 현상들 아래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와 동일한 특성은 수많은 개혁가들에게서, 특히 크리스트교 전통의 성자들에서와 쟝세니스트들에게서 발견된다. 내적 공허, 이 심리적 불안(l'anxiété), “신호”로부터 오는 해방감 등은 어떤 신비주의에 감화받은 모든 자들에게서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발견된다.
모든 사람들이 또한 이 낯선 유혹을 알려준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은총을 받지 못한[즉 태어날 때부터 못 생긴] 이 인간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한 메논의 젊은 노예에게와 마찬가지로 아테네의 정중한 사회에서 가장 잘 훈련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실행했던 유혹이다. 이 유혹의 힘, 매력, 마음 사로잡기(l'envoûtement) 등은 알키비아데스(Alcibiade, Ἀλκιβιάδης, 전450-404)같이 싫증난 한 인간에게는 민감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수사학자들과 소피스트들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일상적인(usuelle 상식적)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점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일깨웠다.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감동을 체험했다. 이 감동 속에는 그리고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여러 풍습들의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약간 혼란스런 요소가 섞여 있었다.
다른 한 특징도 성격적인 것이다. 고대인들이 소크라테스가 토론에서 사용했던 두 개의 중요한 방법들에서 탐구하는 기술을 “아이러니”(l'ironie εἰρωνεία)라, 정신을 낳게 하는 기술을 “산파술”(la maïeutique, μαιευτικη)이라 불렀다. 교묘하게 인도되는 질문들에 의해서, 누군가[소크라테스]는 어느 한 소피스트에게 그의 술책들을 발견하게 하고 그의 생각들을 정확하게 하는 데로 이끈다. 아이러니는 거만한 질문자들 혼동시키는 훌륭한 수단이다. 아니러니는 그 “반박자”[소크라테스]에게는 중요한 장점으로 표현된다. 이는 숙고하여 준비되었던 끝없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또는 장황한 화려한 대목에서 간단하게 잘라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들과 화려한 대목들에 의해서 소피스트는 그의 질문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아이러니는 소피스트에게서 토론의 방향을 제거하고, 그 소피스트를 그의 반대자[소크라테스]의 진도 방향에 굴복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소피스트 자신이 처해있는 황당함을 너무나 잘 보일 수 있게 하여, 당황하게 함으로서 그를 조롱한다. 그러나, 마치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많은 인물들처럼 열정과 선한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젊은이에게는 적용해서 이 아이러니는, 그 젊은이의 정신이 진리에 대해 아직 조잡하고 또 그가 진리에 대해 의식하고 있지 못할 지라도, 그에게 진리를 밝히는 데로 이끈다. 산파술은 조산원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의 기술이다. 산파술은 [대화자의] 정신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죽 품고 있었던 개념들을 나오게 한다. 산파술은 그들이 지상의 삶의 과정에서 아직 배우지 않았던 무엇을 말하게 한다. 이 정신을 낳게 하는 기술은, 진리가 이 정신들에게 미리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는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산파술은 하나의 조건으로서 이전의 생애, 회상을 함축하고 있고, 그에 이어서 영혼 불멸을 함축한다.
이 모든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들은 공통적인 특징들을 갖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서 이 특징들은 매우 돋보기에 나타난다. 그에게서 만은 자기 스승의 모든 성격들 마다 동등한 정확성으로 드러내어, 우리에게 그 성격들의 겉보기에 모순인 것들과 본질적인 통일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소묘들을 해주었는데, 이들 각각은 자신의 인간적 성향에 따라서 그 자신을 놀라게 했던 모습을 밝혀준다. 그런데 플라톤만이 [소크라테스의] 한 초상화의 요소들을 완전히 지적해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그 자체보다 더 표현적인 초상화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광범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모든 가능성을 지닌 한 인간의 전부를 가질 수 있다. 플라톤의 초상은 위대한 드라마 작가 또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처럼, 모델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고, 우리에게 그의 깊은 삶의 근원들 앞에 있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계시의 보편적 범위를 보게 해준다. 플라톤이 가능한 상태로서 소크라테스에서 보았던 모든 것이, 또한 소크라테스의 말투에까지 더 나아가 그 말투의 고유한 표정과 모방할 수 없는 음정에까지 꼼꼼하고 충실하게 그가 표현했던 모든 것이, 그 초상화에 있었다. 플라톤의 그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세속인의 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작품이다. 거기에서 겉보기에 불충실한 어떤 것은 보다 완전하고 보다 깊은 충실성의 표시이다. 플라톤은 다른 청강자들이 몰두하지 못했던 주장들의 폭넓은 범위들을 예상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가까이에서 보냈던 8년 동안에, 그는 심오한 사유의 본질적인 것을 수록했으며 스승의 귀납방식들을 이어갔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한 허수아비는 고발자들이 전력을 다해 의미 있는 특징들로 고발되었던 그 스승의 초상화처럼 닮았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교육은 약간은 단순한 정식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사유의 내용과 도덕적 가치와는 독립적으로 소피스트적이고 수사적으로 사용하는 어떤 용법에 대해서 또는 순수 기술적인 것에 대해서 결정적인 반대자였다. 기술(la technique)은 시시하고 헛될 수도 있고, 그 자체로 모순일 수 있다. 소피스트는 그가 모르는 것도 아는 것같이 하는 자이다. 더 나아가 그자신의 말투와 술책에 의해 도시 국가의 진리와 선에 반대되는 이익에 대해 봉사하는 자이다. 자신의 고유한 무기들 때문에, 즉 자신의 고유한 방법들의 매우 능란한 용법 때문에 궤변술[논변술]과 혼동당하면서도, 소크라테스는 야심가들과 선동가들에 의해 독배를 마시게 했던 이 도시에게 각별한 봉사를 제공했다. 게다가 그의 비판은 정치적 사회적 틀을 넘어섰다. 이 비판은 소위 소피스트들이 과학이라고 하는 무모한 주장들과 부정들에 대해 타격을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한 과학자들, 즉 진실로 자기 직업을 아는 기하학자들, 음악가들, 의사들, 입법가들 등이 성공적으로 확립해야 했던 것을 그래도 여전히 존경했다. 둘째로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소피스트들과 반대로 종교적 전통과 도덕적 전통의 주의해야 할 부분에는 한편이 되었다. 게다가 플라톤은 크세노폰처럼 불경건의 비난으로부터 소크라테스를 깨끗하게 하는데 집착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방식으로 보면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아테네인들의 권위를 널리 알렸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매료되었던 시적 이미지들에, 그리고 신적인 어떤 것을 간직하는 시적 이미지들에 이해심을 넓게 가졌다[관대했다]. 그는, 철학자들이 유행에 과감한 것은 도시의 토대들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는 정도로 생각해서, 일반인들이 자신과 닮은 것으로 간주했던 개혁가들에게는 반대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참주정에 동침했던 선동가들에게는 재판받게 되는 적이었다. 그래도 그의 관대함은 반동적 폭력에도 혁명에도 똑같이 반대했던 보수주의자들에게 유효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속임수를 쓰는 질문놀이에서 무장해제 시킬 수 있으며, 토론의 기술에서 스승이며, 소피스트들 중에서 가장 능란한 스승이었다. 그는 엘레아학인들과 피타고라스학인들이 초벌로서 그려놓았던 변함없는 형상들의 학설에 가담하였다. 만일,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고 또 이 현세 세상에서 사물들 중에 아무것도 그대로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진리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로는 진리 즉 불변하는 질서, 완전이라는 영원한 전형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불합리하고, 신도 현존하지 않는다. 신적 질서에 대한 정력적인 주장만이 덧없는 우리 삶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 주장은 또한 우리에게 물질적 재산들과 유혹들을 신뢰하지 않게 하고 용기를 불어넣고, 모든 것에 심지어는 생명에조차도 위험에 처하게 하는데 대해 질서와 선을 옹호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행동하게 용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 불멸성의 교육, 변신의 교육, 미래 삶에서 상벌의 교육 그리고 섭리의 주장은 한 종교를 구성하는 요소들일 것 같다. 거기에서 새로운 종교가, 즉 이 도시국가의 전통적 숭배들과는 약간 다른 종교가 문제거리였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발설한 초기 인물들 중의 한사람이다. 아마도 그는 플라톤이 그에게 전가했던 그 용어들로 그렇게 발설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새로운 신앙의 정신은 에게는 분명하게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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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아테네 젊은이의 지적이고 도덕적 교육은 장정기(l'éphébie, ἔφηβος, 18세) 이전에 시작하지 않았다. 7살의 경에, 좋은 가문의 어린이는 신분이 낮은 교육 안내자(paidagogos παιδαγωγός 노예들이 담당)를 따라 학교에 간다. 이 안내자 수업에도 참여하고 그 학생의 덕목을 보호하지만, 가르치지는 않는다. 외투를 두르고 회초리를 쥔 교육자는 가끔은 학식은 없지만 신뢰받는 노예였다. 플라톤의 시기보다 조금 앞서 5세기경에는, 김나지움 선생(paidotribēs, παιδοτρίβης) 즉 체육훈련 교사가 학교를 열었다. 거기서 젊은이들은 장정기를 예비하는 신체 훈련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삶의 체계적인 준비를 위한 생각이 나타난 것은 소피스트들의 환경에서였다. 소피스트들은 스스로가 탁월한 교육자라고, 즉 젊은이를 수용력이 풍부하고 덕성 있는 학력을 형성하게 하는 교육자라고, 부풀려서 말했다. 이 새로운 선생에 반대하여 소크라테스는 나쁜 교육에 대해 비판했다. 왜냐하면 이미 소피스트들은 우리시대에 실행되는 악랄한 계획(le plan diabolique)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들을 파괴적인 감정들로 채우는 것, 진리를 거짓말로 그리고 오류를 진리로 변형하는 것, 흉악범들, 신중함이 없이 교활한 야망가들, 풋내기 참주들을 맞춤으로 제조하는 것 등이다.
소피스트들의 반대하는 교육 개혁가로서 소크라테스 주위에는 다음 환경을 생각해보야 한다. 그 환경이란 대중은 숭배자들(요즘 말로 팬)로, 비판가들로, 정신적인 대결을 즐기는 증인들로 떠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표본들이 소피스트들이다. 다른 부류들로는 [알키비아데스 같이] 야망을 지녔으나 열정적이고 천성을 부여받은 젊은 귀족정치가들, 아리스티포스(Aristippe de Cyrèn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 같이 지적인 우아함을 열망하는 신사들 또는 부르주와들, 안티스테네스 같이 도덕적 완전함과 진실한 평등을 갈망하는 인민의 인간들, 아이스키네스(Αἰσχίνης)와 크세노폰과 같이 약간 순진한 구경꾼들 ... 등도 있다. 복합적인 이 다양한 환경에서 각각은 소크라테스 속에서 다른 영웅적인 모습을 찬미하였으며, 이 다양함이 바로 소크라테스학파들의 다양함을 설명해 줄 것이고, 또한 이 학파들의 겉보기에는 명백한 모순으로 보이는 교육들을 설명해 줄 것이다. 또한 이 다양함은 이 위기의 시대에서 아테네의 작은 세상을 사로잡은 낯선 누룩 같은 것을 증거할 것이다. (47RMI)
제3절 소크라테스학파들 157
소크라테스의 예언은 파이돈, 안티스테네스,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 아리스티포스, 플라톤, 크세노폰,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학설들은 공통적인 요소들이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급진적 유물론을 공언했으며, 다른 이들은 플라톤의 용어에 따르면 “형상들의 친구들”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원용하면서 유물론을 거부할 것이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을 제외하고서, 우리는 다른 모든 철학자들을 매우 잘 못 인식하고 있다. 이들의 교육에 두 가지 특징들은 그것들만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 모두는 순수 이론보다 도덕과 정치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진술의 절차로서 대화편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학파들의 대다수는 오래 지속되었고 또한 기원전 3세기에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시대에도 그리고 때로는 훨씬 나중에도 존속했다.
1. 엘리스와 에레트리, 파이돈과 메네데메스 Elis et Erétrie, Phédon et Ménédème 157
우리는 엘리스(Élis, Ήλις)학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이 학파는 펠로포네소스 반도 북서쪽에 있는 엘리스 태생으로 스파르타 귀족 출신인 파이돈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아테네에 의해 자기 고향이 함락되었을 때 노예로 전락했으며, 소크라테스의 청강자들 중의 한사람이 그를 되사서 해방시켰다. 그는 스승의 친한 사람이 되었고, 스승의 마지막 순간인 기원전 399년에 참석해 있었다. 소크라테스 죽음 후에 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한 학교를 열었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 중의 세 사람의 이름을 안다. 플레이스타노스(Pleistanos), 아르키퓔로스(Archipylos), 모스코스(Moschos)이다. 이 중 마지막 두 사람에게는 에레트리에우스 출신인 메네데모스(Ménédème, Μενέδημος)가 있다. 메네데모스는 자신의 고향에다가 학교를 옮겼다. 파이돈은 대화편들을 작성했다. 이들 중의 두 편, 조퓌로스(Zopyros, Ζοπυρος)와 시몬(Simon)은 분명한 출처에 의해 증명되었다. 파이돈은 이 책들에서 교육의 매력적인 효과들에 대해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소크라테스를 만난 관상학자 조퓌로스는 소크라테스를 태생에서부터 바보이고, 교양 없으며, 불완전하다도 선언한다. 그 참석자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조퓌로스에게 이유를 말하며, “그러한 것이 실재로 나의 자연적 모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교육에 의해 개조했다”. 시몬(Simon)편에서는 혼자 배운[솜씨없는] 구두수선공을 등장시킨다. 그 수선공은 스스로 탁월함(la vertu)을 형성해 나갔다.
우리는 에게 해의 큰 섬에 있는 도시 에레트리에우스(Érétrie ὁ Ἐρετριεύς) 출신인 메네데모스(Ménédème, Μενέδημος, 전350경–(전277경 또는) 전265경)에 관해서 몇 가지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는 클레이스테네스(Clisthènes, Κλεισθένης)의 아들이다. 우리의 유일한 출전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ène Laërce, Διογένης Λαέρτιος)는 그를 플라톤주의자인 퓌라(Pyrrha, Πύρρα) 출신인 메네데모스와 섞어 놓았으며, 헤라클레이데스(Héraclide de Lembos, Ἡρακλείδης Λέμβος)[전2세기활동]는 그를 에피큐로스 학파의 콜로테스(Colotès, Κολώτης)의 제자인, 파시콘(Pasicon)출신 메네데모스와 동일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기원전 339/7년경에 메네데모스는 에레트리에우스에서 귀족 가문이었으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 도시에서 그의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자기 동족들에 의해 메가라에 임무들 띠고 왔던, 그는 여기서 318년경에 메가라학파에 속하며, 스틸폰(Stilpon, Στίλπων, 전360경-전280이후)의 제자인, 아스클레피아데스(Asclépiade de Phlionte Ἀσκληπιάδης)를 만났다. 메네데모스는 아스클레피아데스와 함께 엘리스에 갔다. 거기서 파이돈의 제자들인 아르키퓔로스(Archipylos, s.d.)와 모스코스(Moschos, Μόσχος, s.d.)에게 강의를 들었다. 메네데모스는 이들의 학설로 개종했고, 이들 다음으로 학파의 학장이 되었다. 기원전 4세기 말경에서 그는 학파의 근거지를 엘리스에서 에레트리에우스로 옮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명성을 얻었고, 여러 번 이 도시의 자문위원장을 맡았으며, 데메트리오스 1세(Démétrios Ier Poliorcète, Δημήτριος ο Πολιορκητής, 전336년경-전283),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émée Ier, Πτολεμαῖος, 전368/366경-전283), 뤼시마코스(Lysimaque, Λυσίμαχος/Lysimakhos, 전361년경-전281) 가까이에서 임무들을 수행 했다. 메네데모스는 포키스 지방의 델포이(Delphes, Δελφοί)에 보존된, 에레트리에우스에서 파견하는 대표자들(hiéromnémons, ἱερομνήμων) 명단에 기원전 274년까지 들어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 당파에는 적대적이어서 자기가 태어난 도시로부터 추방되었고, 우선 그는 자기 부인의 조국인 오로포스(Oropos, Ωρωπός)로 피신했다. 오르포스의 보물로 황금으로 된 것을 훔쳤다고 고발당했는데, 그는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Cassandre, Κάσσανδρος, 전358-전297) 사후에 에레트리에우스로 되돌아 갔다. 에레트리에우스는 과두제(oligarchie)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메네데모스는 이 정부에 가담하여, 자기 조국에 부여된 공물의 축소에 대해 데메트리오스와 협상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데메트리오스가 몰락하고 난 뒤에는 프톨레마이오스, 뤼시마코스, 안티고노스(Antigone, Ἀντίγονος, 전382-전301)와 좋은 관계를 유지 했다. 에레트리에우스에서 과두정이 전복되었을 때, 메네데모스는 안티고노스 2세(Antigone II Gonatas, Αντίγονος B΄ Γονατᾶς, 전277-전239) 가까이에 우호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67년경에 안티고노스 2세는 에레트리에우스를 점령했다. 그는 기원전 265년에 일흔네살의 나이로 안티고노스 궁정에서 죽었다. 아마도 스토아학자인 [제논의 제자] 페르사이오스(Persée, Περσαῖος, 전307-전243)와 일련의 분쟁으로 자살했을 것이다.
그는 구리빛 얼굴을 지닌 정력적인 인물이며, 그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며, 예리하고 신랄한(비꼬는) 말투를 사용한다. 그는 변증법을 실행했으며, 또한 거칠고 물어뜯는 듯한 언어로 가득 찼지만 그의 친구인 아스클레피아데스의 언어보다 덜 조잡한 언어로, 엄한(austère) 도덕론을 공언했다. 그의 변증법은 스틸폰의 변증법과 유사하며, 좀 거친 단순화를 통해서 진행했다. 주어와 속성의 동일성에 근거한 오직 긍정 판단들만이 있다. 계사(couple)는 없다. 메네데모스는 이다(être)의 동사를 잉여로서 간주했다. 사람들은 “내가 걷고 있는 [중]이다.”(je suis marchant)이라 하지 않고, “나는 걷는다”(je marche)라고 말한다. 그의 엄격한 도덕론은 소크라테스적 방식으로 탁월함과 학문(지식)에 동일하다. 그리고 그 도덕론은 탁월함의 불가분의 통일성이라 공언했다. 지적임 탁월함도 있다. 이 지적 탁월함과 다른 여러 탁월함들(덕목들)의 이름들은 다양한 관점들로 번역하였다. 우리는 그의 학설과 메가라학자들의 학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47RNA)
2. 퀴니코스 학자들: 안틴스테네스, 디오게네스 Les Cyniques: Antisthènes, Diogène 158
퀴니코스 학파의 창설자인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기원전 444년-365년)(79살)는 기원전45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낮은 신분의 한 아테네 남자와 트라키 출신 여자 노예 또는 프뤼기아 출신(Phrygienne, Φρυγία) 여인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un bâtard)이다. 그는 427년에 아테네로 온 고르기아스의 제자였던 것 같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가깝기 전에는 수사학자이며 소피스트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장면에 참석했다. 그는 또한 프로타고라스, 히피아스, 프로디코스를 알았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썼으나 사라졌다. 그의 대화편들로는 아르켈라오스(Archélaos, Ἀρχέλαος), 아스파지아(Aspasie, Ἀσπασία), 헬라클레스(Héraclès, Ἡρακλῆς)와 한편의 진리론(Vérité), 노예제와 자유에 대한 개론(Traité de l'esclavage et de la liberté) 등이 있다. 그의 제자들에게 붙여진 퀴니코스((Le Cynique, Κυνικός)라는 이름은 퀴노사르게스(le Cynosarge, Κυνόσαργες)(개의 영묘)라는 것에서 온 것 같다. 퀴노사르게는 아테네에 있는 한 체육관(un gymnase)인데, 이 가까이에 있는 거류 외국인들(les métèques)들의 구역에서 태생이 의심스런 이방인들이 모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 퀴니코스 학파의 이름은 훨씬 나중에 안티스테네스의 학생들에게 붙여졌는데, 이 이름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또한 안티스테네스학파에게도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la Rhétorique)에서 그렇게 보고한 대로, 디오게네스(Diogène, Διογένης, )가 개(Chien, ὁ κύων)란 별명을 첫째로 얻은 사람일 것이다.
안티스테네스는 처음에는 시인들의 비유적(allégorique) 해석에 관해서,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Ἡράκλειτος)의 제자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연구한 것들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나서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그의 소명을 발견하게 했다. 스승의 삶에서 금욕적인 성격에 대해, 그의 아이러니 대해, 사회적 협약에 대한 그의 멸시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안티스테네스는 자신 속에 있는 소크라테스적 인격의 몇 가지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그는 단호한 어법을 지닌, 그리고 범주적 주장에 익숙한 혁명가가 되었으며, 자기 동시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불신한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똑같은 건방진 태도로 플라톤과 그의 이데이론,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쾌락에 대한 정의, 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 기하학자들, 천문학자들, 의사들을 [편파적인] 당으로 취급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토아학자들, 에피쿠로스 학자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들에게 동일한 풍자적 기지와 하층민의 상스런 말투로 대했다. 이 냉소주의(cynisme)는 어느 누구도 존경받지 못하는 전통이 단절된 환경에서 생겨난 것 같다. 이 철학은 자기 혼자서 자율로 학습한 이들의 철학이며, 이들의 태생에서부터 또는 이들의 과거를 통해 규제적인 질서의 여분으로 살도록 강요되었던 이방인들의 철학이다.
우리는 안티스테네스의 학설의 세부사항 전체를 알지 못한다. 플라톤은 아마도 테아에테토스편에서 안티스테네스를 목표로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암시들의 진실한 범위가 아디까지 인지 아직도 토론 중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퀴니코스 학자는 아마도 그에 앞선 선배들에는 아마도 알려지지 않았던, 총체적 유물론자라고 공언했을 것이다. 가장 실재적인 것, 그것은 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저항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아무것도 없다]. 사유의 모든 실재성은 물질적인 것인 단어들 속에 남아있다. 게다가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이행하는 것, 판단하는 것,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명제에서 속사는 주어와 동일하며, 그 어떤 새로운 것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유는 어떠한 진전도 없고, 소위 말해서 사람들은 반대로 말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정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모순에 의해, 그 퀴니코스 학자는 지식의 실재성을 막 부정했던 순간에, 모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과장한다.
진리란 순수하게 실천적이다. 이 진리는 풍습과 현재 행동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 진리는 상식에 빠진 조잡한 명증으로 이루어진다. 생의 목표는 아주 명증하게 보아 생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탁월함의 실천에 의해 얻어진다. 그 진리는 행복에 만족한다(αὐτάρκη πρός εὐδαίμονίαν: 행복에 자기만족). 사람들은, 마치 악을 고통과 잘못에 동일하다고 하듯이, 진리를 행복과 동일시 할 수 있다. 이러한 탁월함(덕목)은 의지의 태도에, 현자를 신들의 모방자(l'émule, 경쟁자)로 만드는 의도의 공정함에 있다. - 그러나 그 깊이에서보면, 이러한 이론 모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이들은 탁월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육은 훈련(l'exercice, ἄσκησις)에 의해 이루어지며, 실천이 본질적인 것이다. 양식(le bon sens)은 행동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지, 토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진다. 현자가 행위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모방하면서, 사람들은 탁월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 현자(안티스테네스)는 모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판단을 혼자서 가지고 있고, 그 판단은 모든 정념을 감추고 안전하게 전개된다. 오직 혼자인 그 현자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 견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견해에 따라 사는 자는 누구나 노예이다. 모든 합의와 모든 순응주의에 무관심하며, 모든 인간적인 존경과 모든 인위적인 것에 낯선(이상한) 듯이, 정중하고 감상적인 모든 유혹에 무감각하지만, 모든 사물들에서 진솔한 그 현자는 기원적인 자기 힘과 자기의 순진함에서 나온 자연의 인간이다. 그는 세속의 부들 경멸한다. 만일 그가 부자라면, 그는 자기의 재산을 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마치 크라테스(Cratès de Thèbes, Κράτης, 전365-전285)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현자는 스스로를 위하여 가족 없이, 부모 없이, 자식 없이 혼자서 산다. 그는 조국이 없다. 모든 인간은 태생과 혈통의 구별 없이 그의 형제들이다. 그 퀴니코스학자는 전쟁, 야망, 영광, 쾌락 등에 반대를 선언 했다. 그는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는 개인적인 개혁을 원했지 사회적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스테네스는 이상적 도시의 계획을 제시했었다. 결혼이 없음, 여성 공동체, 다음 날이 없이 사라지는 쾌락, 방기되거나 공동으로 키우는 어린이들 등을 제시했다. 그러면 국가는 사라질 것이다. 매 시대마다 많은 철학자들에게 공통하는 정신의 성향들도, 현존하는 질서에 도전하거나 모욕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어떠한 종교적 이상도 안티스테네스에게서 정식들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허무주의자들, 그리고 모든 사회적 질서를 경멸하는 자들의 긴 계열을 열었다. 이 계열은 오늘날 몇 맑스주의자들[무정부주의자들]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니코스학자는 자신의 파라독스를 전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열성적 포교주의(le prosélytisme)를 실행했고, 제자들을 모았으며, 매우 잘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의 원리들을 극단적인 귀결에까지 밀고 나갔다. 디오게네스(Diogène de Sinope, Διογένης, 전413경–전327경)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와 동시대에 “세계시민주의자”(Cosmopolite)이며, 실천에 있어서 자기의 생각들을 끝까지 밀고갔다. 그는 환전소(은행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위조 화폐를 주조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그는 아테네로 피신했다. 그는 여기서 재빨리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통상의 정장도 없이, 단지 망토만 걸치고, 걸승같이 바랑과 지팡이를 지니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서, 추접하여 냄새가 나는 대로, 거주지도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욕설하면서, 거리마다와 광장마다 돌아다녔다. 예의도 염치도 없이 저녁마다. 자기가 누울 은신처를 찾아다녔다. 약간의 빵, 무화과 조금, 양파, 몇 개의 잠두콩, 만족할 만큼의 물이 전부였다. 디오게네스는 어느 날부터는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기 위하여 날고기로 끼니를 이어가기를 시도할 것이다. 그를 따르는 광기있는 자들 모두 이 식이요법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디오게네스는 자기에게 동냥을 주는 자들에게 욕하면서도 자기 양식을 구걸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재빨리 퍼져나간 입으로 전승된 이야기들에 의해서였다. 그를 대표하는 이야기는 통 속에 산다는 것과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대화한 것인데, 아마도 그 이야기는 우화일 것이다. 알렉산드로는 디오게네스가 죽고 난 뒤에야 아시아에서 되돌아 왔다.
한 가지 특징은 주목할 만하다. 디오게네스는 자기 방법의 금욕적 특성을 강조한다. 이 확고한 식이요법은 힘을 정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위대한 교육 방법은 피곤하며, 가장 투박한 작업이다. 그 퀴니코스학자는 고통, 추위, 더위, 구타에도, 배고품, 욕설들에도 무관심하게 지냈다. 모욕당하는 것도 불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인격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플라톤도 수학자, 천문학자, 기하학자, 의사 같은 과학자들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소위 말하는 그들의 지식은 탁월함을 모욕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회화, 조각, 음악, 연극 같은 예술들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미신들을 조롱했으며, 종교, 마술, 예언(점), 꿈의 해석, 불가사의, 모든 자연에 대한 숭배들도 동일한 수준으로 보았다. 그는 “선량한 야생인”(le bon sauvage)에 대한 찬사로 시작한다. 이 찬사는 이때부터 타키투스(Tacitus, 58-120)와 루소(Rousseau) 에까지 끊임없이 유지되어 왔다. 원초적 인간으로 자연적 지혜와 기질로 산다는 것, 이것은 문명인에게 덕성의 교육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안티스테네스 이후로, 소위 말해서 퀴니코스학설의 조직화된 교육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이 분파의 많은 신봉자들은 각각의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주변인들보다 한술 더 떠서 부풀렸다. 사자들을 위한 존중을 벗어나고자, 사원들을 파괴하고, 예배(제사)의 의식들을 풍자할 필요가 있었다. 퀴니코스학자는 자주 하역인부들과 창녀들을 자주 만나서, 모욕적인 용어들을 풍부하게 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기 욕구를 실행하였고, 방탕(la carpule)으로 만족했으며, 신화에 나오는 테르시테스(Thersite, Θερσίτης)같이 헐뜯기 매우 잘하는 악당 같은 인물들을 변호한다.
이 특이한 학설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안티스테네스 계보 학인들은 기원후 6세기 까지 이어졌다. 안티스테네스에게 청강자들로는 메가라의 스틸폰, 알렉산드로스 아시아 원정에 따라갔던 오네시크리토스(Onésicrite, Ὀνησίκριτος; 전360경–290경), 유명한 여성학자인 히파르키아(Hipparchia, Ἱππαρχία)의 남편인 크라테스가 있다. 크라테스는 자기 차례로서, 메니포스(Ménippe de Lycie, Μένιππος, s.d.)와 메네데모스(Ménédème de Pyrrha, Μενέδημος, s.d.)로 이어진다. 훨씬 나중에는 시인들, 포이닉스(Phénix de Colophon, Φοῖνιξ, s.d.), 287년경에 활동한 케르키다스(Cercidas de Mégalopolis, Κερκιδᾰς), 240년경에 활동한 텔레스(Télès, Τέλης) 들이 따라 올 것이다. 이 [시인들] 분파는 기원후 2세기에도 생생하게 활동하였다. 루키아누스(Lucien de Samosate, gr. Loukianos, 125경-192경)는 퀴니코스 학인인 페레그리노스(Pérégrinus de Parium, Περεγρῖνος, 95경–165)의 모험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 퀴니코스 유랑자는 165년에 죽기로 결심했는데, 자신의 몸을 장작에 태워서 죽었다. 페레그리노스는 선량하고 부유한 가정의 한 아들이었는데, 거지 철학자로서 팔레스타인에서 떠돌이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 가족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어떤 크리스트교 공동체를 만나서 개종했다.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크리스트교의 형제들의 모금 덕분에 풀려났었다. 파리온(Parium, Πάριον)으로 되돌아와서 그는 퀴니코스 학자이며 데모낙스(Démonax, Δημώναξ, 70–170경)의 스승인 아가토불루스(Agathoboulos)를 만났다. 결국 그는 그리스에 정착하여, 떠돌이 설교자의 삶을 살면서, 앞으로 4년 이후에 자살한다는 결심을 예고했다. 루키아누스는 또한 테아게네스(Théagènes, Θεαγένης)에 대해 말하는데, 그를 의사인 갈레노스(Claude Galien, en lat. Claudius Galenus, gr. Γαληνός, 129경-201)도 또한 언급하였다. 루키아누스는 에모낙스의 견해들도 인용했다. [초기 호교론자인] 오리게네스(Origène, Ὠριγένης, 185경-253경) 시기에, [현재 요르단에 있는] 가다라 출신으로 퀴니코스 학파인 오이노마노스(Oenomaüs, Οἱνόμαος)는 신탁들을 조롱했다. 황제 율리아누스(L'Empreur Julien, Julianus, 331-363)는 퀴니코스 철학을 반박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믿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 354-430)는 또한 퀴니코스학파를 하나의 운동조직 분파로서 인식했다. [네오플라톤철학자인]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Σιμπλίκιος, 480경-549)는 6세기경에 퀴니코스학파인 살루스티오스(Sallustius d'Émèse, Σαλούστιος)를 언급했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에는 퀴니코스의 예언에 대한 추억이 들어있다. 공산주의는 아마도 안티스테네스 학파 사람들의 발명일 것이다. 크리스트교의 초기 종파들의 몇몇 실천들에도 퀴니코스적인 것이 있다. (47SKG)
3. 퀴레네 학자들. 아리스티포스 Les Cyrénaiques. Aristippe 161
표면상의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퀴니코스 학파와 퀴레네의 아리스티포스의 학파와 메게라의 유클리드 학파 사이에서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 것 같다.
퀴레네 학파는 아리타다스(Aritadas)의 아들 아리스티포스(Aristippe de Cyrèn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에 의해 창설되었다. 아리스티포스는 일찍이 자기 조국을 떠나서, 아테네로 왔다. 여기서 그는 우선 프로타고라스의 청강자가 되었다. 프로타고라스가 전411년에 죽었을 때, 아리스티포스는 소크라테스파에 속하는 아이스키네스(Eschine, Αἰσχίνης)보다는 더 나이가 많았는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아직 살아있는 아테네에서 변론술(la sophistique)를 실행했었다. 아마도 그는 전435년보다 앞서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안티스테네스 하고는 좋은 관계 속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리고 퀴니코스 학자들을 찬양했던 크세노폰은 그에게 눈에 띄게 적대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삶에 대해 천 가지 특별힌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화류계 여인 라이스(Laïs de Corinthe, Λαίς)를 사랑했다. 라이사는 아이기나(Égine, Αἴγινα)섬에 체류했던 그를 되돌아 갈 여비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시라쿠사(Syracuse, en it. Siracusa)에 체류했고, 나중에 [다른 곳에서 살다가] 시실리로 되돌아 오는 과정에서 리파라(Lipara, Λιπάρ)에서 죽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는 해,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를 떠나서, 자기 고향에 학교를 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25편의 대화록과 6편의 비평, 한편의 뤼비아의 역사(Histoire de Lybie)가 그의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의 자료들에 관하여 극히 작은 옛 정보들만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렐레스의 여러 글들 속에서 아리스티포스에 대한 암시들을 발견하고자 원했으나, 그 적용은 의심스럽다. 플라톤의 필레보스편에 소개되어 있는 소위 말하는 “즐거움의 도덕”(morale du plaisir)에 관한 중요한 비판은 아마도 아리스티포스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크니디오스 출신의 에우독소스(Eudoxe de Cnide, Εὔδοξος, 전406경-전355경)의 것이다. 사람들이 퀴레네학파의 견해라고 인용했던 히피아스, 폴리테이아, 테아에테토스 편들의 글들은 이 학파를 목표로 하지 않은 것 같다. 고대 사람들은 아리스티포스를 소크라테스학파들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원리들은 소크라테스의 원리들과 대척점에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최근의 해석가들은 아리스티포스를 소크라테스에 보다 프로타고라스와 프로디코스에 접근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아리스티포스는 즐거움(le plaisir, 쾌락)을 삶의 목표자체로 삼았다. 자신에 의해 착하게 욕망할 수 있는 즐거움은 최고선과 뒤섞여 있다. 쾌락은 자연적인 용어로 정의되었다. 즉 부드럽고 가벼운 운동인데, 거칠고 폭력적인 운동들인 노력과 고통에는 반대된다. 이것은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같은 조용한 바다에 닮은 “휴식”(repos)의 상태가 아니다. 모든 운동은 신체(물체)의 운동이기 때문에, 신체의 쾌락이외 다른 쾌락은 없다. 퀴니코스 학자들처럼 퀴레네 학자들도 근본적인 유물론을 선언한 것 같다. 게다가 각각의 즐거움은 개별적 기관들의 여러 쾌락들로 세분화되고, 이 개별적 쾌락들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확실히 소크라테스적인 관점은 없다. 그러나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편에서 프로디코스에게 이와 비슷한 학설을 할당하였다. 프로디코스는 환희(la joie, χαρά)와 쾌락 또는 향유(la jouissance, τέρψις)를 구별한다. 사람들은 배움을 익히고 이해하는 데 환희를 체험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먹는 경우에, 즉 오직 신체만을 위한 기분 좋은 어떤 감동의 경우에, 향유를 느낀다.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 Ἱπποκράτης, 전460경-370)의 논문 「삶의 방식에 대해(De victu)」의 한 구절을 아리스티포스 아리스티포스에게 적용하고자 원했다. 그 논문에서 즐거움은 시각, 청각, 미각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감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추정하기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아리스티포스는 아마도 소크라테스보다 더 변론술(la sophistique) 집착했던 것 같다.
지혜는 즐거움을 스스로 얻어서 멋있게(avec agrément) 사는데 있다. 그러한 것은 반성과 분간을 요구하며, 쾌감(la volupté, 향락)은 지성(φρόνησις, inteliigence) 없이는 잘 나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티포스는 주지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지혜가 전혀 목표가 아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욕망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론도 없고, 선(le Bien)의 과학도 없고, 착한 것들(biens 재산?)의 체계도 없다. 게다가 여기서 자연에서 알아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협약(la convention, νόμος)과 관습(la coutume, ἔθος)의 영역 속에 있다. 여기서부터 항상 변할 수 있는 조건들 속에서 쉼없이 우리스스로를 적용시키는 필연성이 나온다. 거기에서 프로타고라스에게 친숙한 생각들이 있다.
프로타고라스처럼 그리고 퀴니코스 학자들만큼이나. 아리스티포스는 법률들, 협약들, 용법들과 싸웠다. 그러나 그는 신랄한 폭력 없이도 그것을 실행했다. 이 모든 것은 현자의 눈에는 하찮은 것이었다. 사회적 질서는 아리스티포스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자의 삶은 변형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자는 향유를 발견하기 위하여 사회적인 착한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착한 것들이란 도시국가, 가정, 결혼, 그만큼이나 남아도는 협약들 등이다. 현자의 진실한 선, 그것은 내적 자유, 즉 진솔한 독립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냉정하게 정념을 가미하지 않고서 매순간마다 현재 상황과 양립할 수 있는 즐거움의 가치를 분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인 즐거움에 끌려서 휩쓸리지 않게 침착성을 유지하자.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어야 한다하더라도 유혹들에 저항할 줄 알자. 이로부터 아마도 아리스티포스의 유명한 금언이 나온다. 나는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나를 가지지 못한다(ἔχω οὔκ ἔχομαι). 종교와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하는 모든 도덕론은 이런점에 있다.
종교는 인간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에 관한 것이다. 종교는 우리들 삶 속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테오도로스가 무신론을 말했다. 아리스티포스의 제자는 신적인 것을 다루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이 주제를 부정에까지, 즉 완전한 불가지론에까지 밀고 갈 것이다.
아리스티포스는 행복하고 인자한 특성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낙관주의를 공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를 완전히 모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수가 많았으며,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그의 부인 아레테(Arété de Cyrène Ἀρετή), 메트로디닥토스(μητροδίδακτος)[어머니의 교육을 받은 자]라는 별명을 얻은 아들 아리스티포스(Aristippe le Jeune), 아이티옵스(Aithiops, Αἰθίοψς)[얼굴 탄, 까만 자, 에티오피아인), 안티파트로스(Antipater de Cyrène, Ἀντίπατρος)[4세기경], 앞의 제자 헤게시아스(Hégésias, dit Peisithanatos, Ἡγησίας, 전 290년경-?), 앞의 제자 안니케리스(Anniceris, Ἀννίκερις)[전 300년 활동], 무신론자인 테오도로스, 손자 아리스티포스(Aristippe le Jeune, 전380경-300경)등이다. 이 손자 아리스티포스는 제자로서 비온(Bion de Borysthène, Βίων Βορυσθενίτης, 전325경–전250경)이 있었다. 헤게시아스는 프톨레마이오스(Ptolémée Dagi, Πτολεμαῖος)의 동시대 인으로써 알렉사드리아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그 이유는 연설이 추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라 한다. 전승에 의하면, 헤게시아스는 영원한 지복에 이르지 못한다는 절망으로, 자기 친구들에게 자살은 권한 후에 결국에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7SKJ)
4. 메가라 학파 학자들 Les Mégariques 163
우리는 이 메가라 학파, 즉 “소크라테스 학파”의 넷째 학파의 초기에 대한 거의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에우클레이데스(Euclide de Mégare, Εὐκλείδης Eukleidês, 기원전 450경-전366경)는 이 학파의 창설자이며, 그의 계승자들로는 잌튀아스(Ichthyas, Ἰχθύας), 파시클레스(Pasiclès, s,d. s.l), 디오클리데스(Dioclide), 브뤼손(Bryson d'Achaïe, Βρύσων)등이 있으나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에우클리데스는 소크라테스의 가장 오랜 청강자들 중의 한사람인 것 같다. 파이돈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감옥 속의] 대화들에 참석했다. 전368년에 테아에테토스가 죽을 때, 그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에우클리데스는 450년 경에서 340년에 살았음이 틀림없다. 파나이티오스(Panaetius, Παναίτιος, 전185경-전110/109경) 시대에 그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여섯 편의 대화편은 진본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에우클리데스가 자기 동생에 보낸 편지의 토막글을, 즉 동생에게 화를 다스리는데 충고하기 위한 글을, 가지고 있다. 메가라학자들은 엘레아 학파의 주제들, 존재의 단일성과 불변성, 일자와 선의 동일성, 변하고 죽는 모든 것은 현존이 아니라는 설 등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에우클리데스는 이데아들의 학설에는 매우 적대적인 것 같다. 그는 이것을 엘레아의 제논의 방법과 그 귀결들을 따라서 반박했다. 아마도 에우클리데스에게 응답하기 위하여, 플라톤은 엘레아 학설을 토론했던 것 같다.
메가라 학파의 섯째 학장은 메가라 출신의 스틸폰(Stilpon, Στίλπων, 전360경-전280이후)은 잌튀아스의 계승자이며, 전380년경에서 300년경에 살았음이 틀림없다. 에우클리데스가 350년 경에 아직 살아있었기에, 엄밀하게 에우클리데스 사상을 이해했을 것 같다. 스틸폰은 또한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의 청강자였던 것 같다. 그는 메가라를 떠나서 아테네로 갔는데, 거기서 그의 교육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서 아카데미아학파와 스토아학파를 불안하게 했다. 그는 아카데미아에서 메네데모스(Ménédème, Μενέδημος)를 빼왔다. 스틸폰은 자기 조국[메가라]으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에 기원전 307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émée Ier Sôter, 전368/366경-전283)가 기원전 308년에 데메트리오스 1세(Démétrios Ier Poliorcète, 전336년경-전283)가 차례로 그의 조국을 장악한 시기이다. 이 두 정복자들은 그를 보호했다. 그는 실재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곱편의 대화편을 썼다. 그 인물들이란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티포스, 아리스토텔레스, 에케크라테스(Échécrate, Ἐχεκράτης), 수사학자 아낙시메네스 등이다. 대화편 중의 하나는 퀴니코스 학자인 메트로클레스(Métroclès Μητροκλῆς)의 영향으로 잘못 방향을 잡은 자기 딸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방했다. 그는 또한 회상록(Souvenirs)을 작성했다. 거기서 그는 스스로를 장면에 올렸고, 스토아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했다. 그는 명석하고 날카로운 공격성을 띤 분명한 말투를 사용했던 작가였다.
메가라 학자들이 플라톤의 소피스트편에서 언급된 “이데아들의 친구들”였다고 믿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스틸폰은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이론에 비해 아마도 자신들이 앞선(선배)로서 처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반 형상들은 현존하지 않으며, 단지 개별자들만 현존한다. 류적 인간은 전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류적 차원에서(in genere) 채소도 전혀 없다.
스틸폰의 고유한 학설은 엘레아학파들의 학설과 이웃하는 것 같다. 그는 감각과 꼭 마찬가지로 속이는 상상을 믿기를 거부했다. 추론만이 존재의 본성에 관해 우리에게 정보제공한다고 한다. 존재의 본성은 하나이며, 불가분이며, 영원하며, 모든 변화에는 이방인이다[낯설다]. 이 존재는 아마도 물질적[재료적]이다. 이 원리들에 힘입어 스틸폰은 아마도 유클리네스처럼 서로 다른 두 항의 통합하는 것과 주어를 속어에 의해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부정했던 것 같다. 인간은 인간이며 선은 선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없다]. 이것은 스틸폰이 변증법을 실행하는 것과 다른 모든 철학자들을 반박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제자인 에우불리데스(Eubulide, Euboulide de Milet, Εὑϐουλίδης)와 디오도로스(Diodore Cronos, Διόδωρος Χρόνος, ?-296경)보다 덜 능란하여, 스토아학파의 크뤼시포스(Chrysippe, Χρύσιππος, 전280경-206년경)가 그를 풋내기 변증법론자라 불렀다.
그의 철학의 본질적 부분은 퀴니코스학파의 강한 영향을 입은 도덕론이었다. 그러나 스틸폰은 아주 모범생이어서 매서운 혹평 보다는 더 짓궂은 농담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였기에 퀴니코스학파의 거친 혹독함을 상실했다. 아마도 그는, 건강, 재산, 명예 등의 외적인 착함들에 대해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협약들을 경멸했다. 그는 애국힘을, 심지어는 죽은 자들을 위한 경건함도 단죄했다. 그는 내적 평화만큼, 즉 자기 유혹과 악에 반대하여 자신을 사로잡는 승리에서 오는 조용함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들 결점들 속에서 수많은 뉘앙스를 구별하여 죄들과 과오들의 분류를 정교하게 했다. ἀμαρτήματα - ἀμαρτήμα 실패 잘못 죄 , διαπτώματα δια(멀어짐?) πτϖμα 비방 잘못 타락, ἀποπύγματα - ἀπο πύγμα τα, ἀτύχήματα ἀτύχήμα 불운. 이런 형식 하에서, 메가라 철학은 부드럽고 인간화된 퀴니코스주의에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이 철학은 스토아 학파에게 눈에 띄는 영향을 줄 것이다. 스틸폰은 많은 제자들을 얻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에는 아마도 퀴니코스 학자가 아닌 어떤 크라테스(un Cratès)와 포이니케(Phénicie, Φοινίκη)출신의 제논 등이다. 아마도 이 후자는 아마도 키티온(Citium, Κίτιον) 출신의 제논, 즉 스토아학파의 창설자일 것이다. (47SLA)
5. 크세노폰 Xénophon 164
기원전 405년경에 소크라테스의 청강자들 중에 젊은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 전440경-전355경)이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20대였을 것이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430년과 425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사단에 가입했을 것이다. 그는 30인 참주정에서 장교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모험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친구, 보이오티아(La Béotie, Βοιωτία) 지방 출신(도시 테베)인 프록세노스(Proxène, Πρόξενος)는 그를 에페소스로 불러서, 페르샤의 젊은 왕자(Cyrus le Jeune, Κῦρος, 전424- 전401)의 여러 기획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곧바로 일군의 상인들과 함께 출발하여, 전399에 아시아의 그리스 군대에 참여했다. 그는 전 396년에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Agésilas, Ἀγησίλαος, 전444–전360)(왕위 전398-360)와 함께 이오니아에서 전투를 했다. 그는 보이오티아(La Béotie, Βοιωτία)지방의 코로네이아(Coronée, Κορώνεια)에서 스파르타 대열 속에서 자신을 추방했던 아테네인들과 전투했다. 그 당시 그는 스파르타가 그에게 영지를 제공한 [펠레포네소스 반도 서쪽의 엘리스(Élide, Ἦλις ou Ἠλεία) 지역의] 한 도시인 스킬룬티아(Scillonte, Σκιλλουντία, en lat. Scillus)에 정착했다. 기원전 371년에 엘리스인들에 의해 스킬룬티아에서 추방당하여 이리저리 여러 도시에서 살았으며, 마지막으로 코린토스에서 살았다. 367년에 추방법령이 폐기되었을 때, 늙고 지친 그는 자기 조국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는 354년에 죽었다. 그는 가솔들과 정치가들을 천 가지로 뒷바라지하는 행동하는 인물, 무엇보다도 실천적 인간이었다. 순수 이론으로 그가 만든 것은 없다. 그는 퀴니코스의 무관심으로 유연한 비밀을 항상 간직했고, 한 군인으로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는 매우 경건했으며, 스파르타 체계에 대해, 쉽게 순진하게 믿는 중요한 찬양자였으며, 산문을 통한 양식(bon sens)의 어조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스킬룬티아에 은퇴한 지 20여년기간에 그는 역사적 작품들과 철학적 작품들을 구성했다. 소크라테스 생애에 대한 회상록(Mémorables, Ἀπομνημονευμάτων),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을 반박하고자 쓴 퀴로스의 교육(Cyropédie, Κύρου Παιδείας) 시루스의 원정 이야기(Cyrus le Jeune)와 일 만군의 퇴각이야기를 쓴 아나바시스(Anabase, Ἀνάϐασις) 등이 있다.
그가 소크라테스 말년 몇해를 접근해야 했기에,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한사람의 철학자도 아니며, 학파의 스승도 아니다. 그는 상상이 없는 거의 세속적인 도덕론자이며, 몇몇 급습을 능란하게 행한 좋은 전략가이며, 정력적이고 양심적인 한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서 그는 도덕적 스승을, 게다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이길 줄 알고 고통과 유혹에 저항할 줄 아는 인간을, 그리고 안티스테네스가 묘사했던 현자를 보았다. 그는 신비가라기보다 쉽게 믿는(crédule) 사람이다. 그는 많은 전망을 보이지 못했을 지라도 교훈적인 역사가이다. 왜냐하면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몰랐었을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그는 우리에게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퀴로스의 교육은 약간 침울한 교육학적 유토피아, 즉 퀴니코스의 이상에서 영감을 받은 유토피아이다. 쉽게 읽혀 접근 가능한 그의 작품들은 매우 기꺼이 도덕적이고자 하는 현대 부르주아 정신에는 잘 맞지만, 과도한 자들의 적이다. (47SLA)
# 참고문헌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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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레스피(C. M. Gillespie, s.d.), 「On the Megarian」 A.G.P., 1921(24)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 메가라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 개념: 존재론적 양상문제의 역사에서 관한 기고(Der megarische und der Aristotelische Möglichkeitsbegriff: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s ontologischen Modalitätsproblems. 1937)
* 메네데모스 Ménédème
프리쯔(Kurt von Fritz, 1900–1985), 「에레트리에우스의 메네데모스(Menedemos Eretriae)」, in P.-W., 1931(29)
* 아리스티포스 Aristippe Ἀρίστιππος
퀴레네 학파(I cirenaici, testimonianze et frammenti, 1958) ed. G. Giannantoni, Firenze, 1958.
뒤멜러(Georg Ferdinand Dümmler, 1859-1896), 아카데미아(Akademika, 1889)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Ulrich von Wilamowitz-Moellendorff, 1848–1931), 플라톤: 생애와 작품(Platon. Leben und Werke, 1919(초판 1919,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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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에르스베르게르(Arno Mauersberger, 1897–1976), 「플라톤과 아리스티포스(Plato und Aristippos」, in H., 1926(41)
* 안티스테네스 Antisthènes
뒤멜러(Georg Ferdinand Dümmler, 1859-1896) 안티스테네스 학파(Antisthenica, 1882)
게프켄(Johannes Geffcken, 1861–1935), 퀴니코스학파와 그 방계(Kynika und Verwandtes,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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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에(G. Rodier, s.d.), 그리스 철학 연구(Etude sur la philosophie grecque,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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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게네스 Diogè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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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스타드(R. Hoistad, s.d.), 퀴니코스 영웅과 퀴니코스 왕, 인간에 대한 냉소적 개념의 연구(Cynic hero and cynic king, studies in the cynic conception of man, 1948)
* 크세노폰 Xénophon
퀴로스의 교육(Cyropédie, Κύρου Παιδείας)(페르샤 통치자 퀴로스 2세에 대한 허구적 전기biographie en partie fictive du souverain perse Cyrus II), éd. Gemoll, 1912.
회상록(Mémorables, Ἀπομνημονευμάτων)(소크라테스 생애에 대하여), éd. W. Gilbert, 1910. C. Hudde, 1934. tr.fr., Chambry, 1932-1935.
스크립타 미노르(Scripa Minor), éd. Thalhaim et Knell, 1910-1912.
샨츠(E. Schanz, s.d.), 크세노폰의 국가 이상과 이익집단 이상, 그리고 그의 시대(Xenophons Staats- und Gesellschaftsideal und seine Zeit, 1920)(Halle)
프리쯔(Kurt von Fritz, 1900–1985), 「크세노파네스의 소크라테스 변호의 진실성에 대한 질문(Zur Frage der Echtheit der Xenophontischen Apologie des Socrates, 1931」, in Rh. M.(1931)
들라뜨(A. Delatte, s.d.),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추억들에 대한 셋째 책, 비판적 연구(La troisème livre des souvenirs socratique de Xénophon. Etude critique, 1933)」, in Bul. Fac. des Lettres de Liège(58, 1933)
가스터(M. Caster, s.d.), 「크세노폰의 경제에 관하여(Sur l'Economique de Xénophon, 1937)」, in Mélanges Desrousseaux, 1937.
네스틀레(Wilhelm Nestle, 1865–1959), 「크세노폰과 변론술(Xenophon und die Sophistik, 1939)」, in Phil., 94, 1939
도른자이프(Franz Dornseiff, 1888-1960) 독일 고문헌학자. 「크세노폰을 통해 본 플라톤의 ‘향연’에 관한 시대규정(Zeitbestimmung von Platons Sumposion durch Xenophon, 1942)」, in H.
올로프 지공(Olof Gigon, 1912-1998), 크세노폰 회상록의 초기 책들에 관한 주석(Kommentar zum ersten(...zum zweiten) Buch von Xenophons Memorablien, 1953-1956)
루키오니(J. Luccioni, s.d.), 크세노폰과 소크라테스 주의(Xénophon et le socratisme, 1953
라케다이모니아 지방들의 공화제La République des Lacédémoniens, Λακεδαιμονίων Πολιτεία), texte trad. comm. F. Ollier, Lyon, 1934.
(26:9 47S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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