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 기념관(02-3142-4434~5)
서울 마포구 합정동 96-1
미사 시간 오전10시,오후3시(월요일없슴)
face="굴림" color="red">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border="0" alt="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기념 동상." width="249" height="160">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border="0" alt="동굴 성모상. 순례자들의 기도 흔적이 촛불로 남아 있다." width="350" height="266">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border="0" alt="순교자들의 마지막 숨을 끊는데 사용되었던 형구 돌" width="173" height="125">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선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난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border="0" alt="성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성인들의 유해" width="265" height="189">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border="0" alt="순교자 기념상" width="119" height="163">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 등 큰 소리로 부르면 화답할 수 있는
순교지들은 도시의 소음에 묻히고 아파트 그늘에 가려 그 옛날의 아픔도 함께 가려진
듯하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과 같이 고요함속에서도 우리에게 굵고 강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꿋꿋한 신앙을 가르친다.
첫댓글 형님 오랜만에 들어오니 새로운 방이 많이 꾸며졌네요^*^... 3월에 예비자들과 함께 추운 날씨에 다녀왔던 생각이 나네요...형님이 올려주신 자료 참고로 서울 근교에 있는 성지라도 시간 나는대로 찾아보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