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27.월요일..안동 도산서원앞 '시사단'
새처럼 훨훨 날아간 곳은 경북땅이다.
영월‧봉화‧안동‧영주
1편:영월주천면 요선정.요선암-판운리섶다리-선암마을-봉화군청앞 첫숙박
2편:숙소앞 둔치 아침산책-봉화지림사-축서사-이몽룡생가-닭실마을청암정
3편:봉화 청량산 청량사-청량산입구에서 둘쨋날숙박-안동농암종택
4편:안동퇴계종택-이육사문학관-도산서원-영주흑석사-서울 마이홈
2012.2.25.토~27.월(2박3일)
4편: 여행마지막 세쨋날이야기
도산서원에서 피어나는 봄기운은 향기로웠다.
안동퇴계종택‧이육사문학관‧도산서원‧영주흑석사‧마이홈
2012년 2월27일(월) 여행 3일째 마지막날 아침일찍
안동농암종택을 2시간여 둘러 본 뒤, 다음코스인 도산서원 가는 길목에서
퇴계종택부터 둘러 보며 4편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퇴계종택 [退溪宗宅]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택(宗宅).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종택이다.
원래의 가옥은 없어졌으며,
지금의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의 크기는 총 34칸으로 ㅁ자형이며, 전체 면적은 2,119㎡이다.
종택 오른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햇살이 결 곱게 내려 앉은 화창한 오전,
川을 끼고 있는 양지바른 넓은 마당에서 시비부터 읽어 본다.
퇴계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한데,
학문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퇴계의 가에 비로소 거처 정하고,
시냇물 굽어보며 날로 반성해 보네.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종택 뒤편(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4번지)에 위치해 있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지금부터 10년 전 2001년 10월
퇴계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뜻있는 지역유림인사들이 모여
한국 유학의 요람인 도산서원의 교화이념 아래 국민의 도덕성 함양과
선비문화의 계승․창달에 기여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아
설립되었다고 한다.
설립 후 초기 수련생들은 주로 교원과 학생들이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다양한 계층의 많은 국민들이 참가한다고 한다.
솟을 대문 앞에서 뽐도 잡아 보며..
솟을대문 위로 열녀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烈女通德郞行司醞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
열녀 통덕랑(정5품관) 행(현직) 사온서(궁중에서 쓰이는 술을 관장하던 관청)
직장(종7품관) 이안도 처 공인(문.무관의 처 정5품관) 안동권씨의 여(집)
*반려자의 해석
하단은 인터넷에서 옮김
비록 새로 지어진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지만
퇴계종택에는 이미 그 이상 가는 세월의 연륜이 엿보인다.
퇴계종택으로 들어 설려니 솟을대문에 쓰여진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퇴계종택의 사랑채와 안채로 들어서는 이 솟을대문은 드물게도
대문의 구실과 더불어 퇴계종택 답게 열녀문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열녀문의 주인공은 퇴계의 손부인 권씨, 즉 이안도의 처이다.
권씨는 남편이 일찍 죽자 거적자리에서 밤낮으로 다섯달 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그 후로 23년간 머리 빗질도 하지 않고 띠도 풀지 않았다 한다.
그녀는 이런말을 했다한다.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가는 것은 다만 후사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
결국 후사가 조카였던 '억'으로 결정되고 억이 혼인하여 며느리와
함께 들어 오던 날, 손부는 목욕을 재개하고 소복을 입고 자결했다 한다.
나라에서는 그녀의 상중에 이미 열녀문을 하사했다 한다.
출처:느림보 안동여행기에서
열녀문 안으로 격조가 느껴지는 문살문이 인상적인 사랑채이다.
퇴계종택 오른쪽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의 솟을대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란 현판은 주자의 제거감흥(齊居感興)
이십수 가운데 제 10수에서 나온 글귀에서 따 왔다 한다.
공유천재심恭惟千載心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
'삼가 천년을 내려 온 마음을 생각해 보니
가을 달이 차가운 물을 비춤과 같다'는 의미이다.
티끌 한점없는 도학자로서 살았던 퇴계 이황 선생의 생, 그리고
후세에도 마당히 이어 나가야 할 선생의 뜻, 그리고
후세로서 갖춰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 등을 동시에 표현한 글귀같다.
퇴계 이황의 自銘
이황 자기 스스로 살아 생전에 지은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은 없어도 전통있는 사대부 가옥으로서
위엄과 품격이 느껴지는 고택을 다 둘러보곤
이곳에서 지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이다.
이육사문학관
이육사의 생애
호는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활(活).
1904년 음력 4월 4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다.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형님 및 동생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한다 1931년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한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교목(喬木)》《절정(絶頂)》《광야(曠野)》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해방을 1년 남짓 앞둔 이듬해 1944년 1월 16일 새벽5시에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지금은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연인처럼..
친구처럼..
6형제가 태어나고, 거처했다하여 육우당-六友堂
육우당(六友堂)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전
보존되고 있으며 이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선생을 비롯하여
육사 원일 원조 원장 원흥 6형제 분이 태어나셨다 하여 당호를
육우당(六友堂)이라 한다.
이건물은 생가를 본뜬 모형 집으로서 구조는 "二" 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 마루 한칸이고
뒤쪽안채는 방두칸, 마루 한칸,부엌 한칸으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청포도샘
청포도(靑葡萄)/ 이육사(李陸史)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학관 내부는 월요일 휴관일이어서 관람을 못하고
도산서원으로 이동이다.
추로지향(鄒魯之鄕)
맹자가 추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로 성현을 존경하며 도덕을 지니고 학문을 숭상하고
예의를 지키는 고장을 말한다.
퇴계 이황선생을 기리는 고장이라 안동을 "추로지향"이라고 부른다.
이와 비견되는 고향은 "풍패지향(豊沛之鄕)"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고향 함흥을 일컬른다.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를 상징하여 건국자의 시조의 고향을 풍패지향이라고 부른다.
낙동강물 건너에 시사단이..
도산서원 내부 관람이다.
이 곳은
1970년 12월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사업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청와대의 금송을 옮겨 심었던 곳이나
1972년 고사(枯死)됨에 따라
1973년 4월 동 위치에 같은 수종(樹種)으로 다시 식재하였다.
도산서당으로..
도산서당 앞마다에 있는 '정우당'
도산서당(陶山書堂)
처음에는 서당을 세워 퇴계 선생이 직접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 선생의 사후
강학(講學)공간과 제사(祭祀)공간이 같이 모시는 도산서원으로 발전했다.
進道門
道를 공부하며 닦으러 나아가는 문
도산서원 전교당(陶山書院 典敎堂)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선조7년(1574)에 건립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었으며,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대청(大廳)과 거실(居室)인 온돌방(한존재,閑存齋)으로 구성되었다.
전면은 개방되어 있고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두었다.
대청의 윗부분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선조임금이 이름을 내린
현판의 글씨는 명필인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쓴 글씨라고 한다.
전교당 전면 좌우에는 원생의 기숙사인
동재 박약제(博約齋)
서재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퇴계선생의 사당-상덕사,尙德祠 (보물제 211호)
主理論
주리론은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理로 보는 퇴계 선생의 학설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철학이다.
理와 氣가 어디까지나 두 가지이지 한 가지가 아니며,
氣는 결코 항상 존재하지 않고 생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理는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氣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
이며, 능동성을 가진 理가 발동하여 氣를 주재(主宰)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心性論의 주요 논제인 사단칠정을 설명함에 있어 심성 내부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선한 본성인 四端은 理가 발동한 것이고, 선과 악이
섞여 있는 七情은 氣가 발동한 것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四端七情論
퇴계 선생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이다.
사단이란
맹자가 실천 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이란
예기와 중용에 나오는 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퇴계선생은
4단이란 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7정이란 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理와 氣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理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氣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理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과 氣質의 성이 다른 것과 같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도산서원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낙동강물 건너 시사단이 시야에 시원히 펼쳐진다.
왕버들
호숫가나 물이 많은 곳에서 자란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며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고 잔톱니가 있다
도산서원을 자세히 돌아보고 돌아가는 대학생 3명의 뒷모습과 마사토 길
도산서원에서 여행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가는길에 우연히 만난 흑석사..
도산서원에서 서안동IC 로 찾아가던 중,
점심식사차 도로옆 일미식당(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4리)에 들리게
되었는데 그곳에 식사하러 오신 분이 서울가는 지름길을 알려 주었다.
5번국도로 달리다가 중앙고속도로 풍기IC로 들어 가란다.
약도까지 그려가며 자세히 알려 주셔서 잘 찾게 되었다.
운 좋게 귀인을 만났던 것이다. 감사는 허공에 남기고..
영주흑석사도 국보1점 있어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시간이 모자라
접고 있던 차에 5번 국도 달리다가 우연히 7Km거리표시 사인보드를
만나게 되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들리게 된 곳이다.
2박3일여행일정으로 두었다가 빠듯한 일정으로 포기했던 흑석사를
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니......
일미식당에 들려 식사하면서 귀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흑석사를 들리지 못했을텐데 감사와 놀라움이었다.
지금 한창 새로 짓고 있는 대웅전
흑석사(黑石寺)
경북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산200
흑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간한 사찰로
인근에 검은 빛깔의 바위가 있어 흑석사라 불리는 마을의 이름을
따와 흑석사라 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폐찰로 내려오다가 8.15광복후 순흥초암사에
계시던 김상호 스님에 의하여 초암사 재목을 옮겨와 중창되었다.
흑석사에는 국보 제 2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복장유물이 있고
보물 제 681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마애불(磨崖佛)은 자연상태의 바위에 새긴 것으로 중앙의
본존불(本尊佛)과 좌우 협시 보살상(協侍 菩薩像)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존 모두 입상이지만 본존불은 가슴 부분 이하, 협시보살은
목 부분이하를 새겨 넣지 않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본존불은 살상투가 뚜렷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옷 주름은 마모되어 명확하지가 않다.
좌우 협시 보살상은 모두 둥근 두광(頭光)에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우협시에 비해 좌협시의 얼굴이 더 넓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원형이 유지되어 있고 소박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선의 표현
등에서 그 제작연대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자연암벽에 새긴 동상
국보 제282호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극락전의 주련(柱聯)
極樂堂前滿月容 [극락당앞에 가득찬 달의 얼굴]
玉毫金色照虛空 [옥같은 털 부처님이 허공을 비추네]
若人一念稱名號 [만약 사람이 명호만 부르기를 염원한다면]
頃刻圓成無量功 [잠깐동안에 무량 공적을 원만하게 이루리라]
흑석사의 국보를 마지막으로 관람하고 서울 마이홈으로 달린다.
여행중 아름다운 절경에 반해 사진을 마구마구 주워 담다 보니
게시물에도 사진이 넘쳐나 이번엔 4편제작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자료모음을 겸한 여행기입니다.
숙소사진은 올릴때마다 늘 좀 거시기합니다만
오지여행을 다니다 보면 그곳 정보를 전혀 모르고 갔다가 숙소 찾아
밤길을 헤맨적이 많아 여행자를 위한 안내차원이랍니다.
애초 계획된 일정에서 현장 이동중 만나는 관광지까지,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절경과 비경으로 그 벅참은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그때 그 느낌 그대로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나그네 길을 자꾸 떠나나 봅니다.
여보게
가끔은 이처럼 쉬었다 가세나!
감사합니다.
사진편집및제작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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