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계 옥고(玉沽)선생 묘갈명_출처:창설재집
묘갈명은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비석에 새기는 글로
창설재 권두경선생이 저작하여 할아버지 묘소 비문에 기록되어있다.
창설재집에 14권에 수록되어 있다.
형태서지 |
권수제 |
蒼雪齋先生文集 |
판심제 |
蒼雪先生文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9世紀中葉刊(高宗初 追刻後刷本) |
권책 |
18권 9책 |
행자 |
10행 21자 |
규격 |
22.3×17.7(㎝)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
古3648-文07-76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169 | |
저자 |
성명 |
권두경(權斗經) |
생년 |
1654년(효종 5) |
몰년 |
1725년(영조 1) |
자 |
天章 |
호 |
蒼雪齋 |
본관 |
安東 |
특기사항 |
李玄逸의 門人. 李栽, 權斗寅, 金聖鐸, 李鳳徵 등과 교유. 南人 學者 | |
출처: 蒼雪齋集(창설재집)-권두경(1654~ 1725)
-蒼雪齋先生文集卷之十四(창설재선생문집권지십사)
-墓碣銘(묘갈명)
司憲府掌令凝溪先生玉公墓碣銘 幷序
사헌부장령응계선생옥공묘갈명 병서
軍威縣北於應谷。有墓枕乙。爲凝溪先生掌令玉公之葬。
군위현북어응곡 유묘침을 위응계선생장령옥공지장
葬在明正統元年。距今二百八十有餘年矣。於乎遠哉。葢公生洪武中。
장재명정통원년 거금이백팔십유여년의 어호원재 개공생홍무중
未弱冠擢嵬科。仕 太宗 世宗盛治之世。始置集賢殿學士。爲極選。
미약관탁외과 사 태종 세종성치지세 시치집현전학사 위극선
而公旣登焉。時重淸白吏。公議爲至嚴。而公實與焉。
이공기등언 시중청백리 공의위지엄 이공실여언
公之標望重於世可見已。公有雋才精識。早孤服母訓。
공지표망중어세가견이 공유준재정식 조고복모훈
從吉冶隱先生聞爲學大方。旣通籍。任學職則以師道著。
종길야은선생문위학대방 기통적 임학직칙이사도저
綰左符則以異政聞。峩豸秉簡則百僚震肅。居閒頤養則玩索有得。
관좌부칙이이정문 아치병간칙백료진숙 거한이양칙완색유득
國初學士大夫鮮有能及之者。其履歷國子由學諭至典籍兼敎授。
국초학사대부선유능급지자 기리력국자유학유지전적겸교수
集賢殿爲校理。司諫院爲正言。春官爲郞中。太常爲少尹。
집현전위교리 사간원위정언 춘관위랑중 태상위소윤
御史府爲掌令。外則爲安東府通判。大丘知郡。
어사부위장령 외칙위안동부통판 대구지군
其爲治不但冰檗自將。聦明絶人。凡米鹽叢雜。囊篋瑣細。
기위치부단빙벽자장 총명절인 범미염총잡 낭협쇄세
不煩籌簿。無遺失毫毛。至其秉嚴斷而懾舞文之猾。
부번주부 무유실호모 지기병엄단이섭무문지활
聞哭聲而識殺夫之奸。雖古所稱神明吏。未或過之。葢天得。
문곡성이식살부지간 수고소칭신명리 미혹과지 개천득
非學得也。其學之所造。觀於所作人心善惡相反。
비학득야 기학지소조 관어소작인심선악상반
陰陽變易成卦兩圖。可見其資深析微。契乎周邵之旨者矣。
음양변역성괘량도 가견기자심석미 계호주소지지자의
公諱沽字待售。宜寧人。曾祖全伯生員。追封軍器少尹。
공휘고자대수 의령인 증조전백생원 추봉군기소윤
祖安德業進士。考斯美珍城監務。移居金海。公又移居軍威。
조안덕업진사 고사미진성감무 이거김해 공우이거군위
年五十五卒。夫人盧氏。生一女適趙思贇。後夫人金氏。葬公墓左。
년오십오졸 부인노씨 생일녀적조사윤 후부인김씨 장공묘좌
有一男二女。男衒進士司醞署副直長。女適縣監康耆金寶仁。
유일남이녀 남현진사사온서부직장 녀적현감강기김보인
衒二子參軍自英習讀自華。又五世而國子生員世寶兄弟五人。
현이자참군자영습독자화 우오세이국자생원세보형제오인
世寶生國子生員振韶。亦兄弟五人。胤胄詵。詵文史彬彬。
세보생국자생원진소 역형제오인 윤주선 선문사빈빈
玉氏殆將再奮歟。公之遺事。後孫掇拾稗官地志而傳之。
옥씨태장재분여 공지유사 후손철습패관지지이전지
近世士論始尸祝于臨河之默溪。振韶謁余銘其墓。銘曰。
근세사론시시축우림하지묵계 진소알여명기묘 명왈
宜春之玉。肇牒勝國。公奮孤童。脫穎之夙。玉署霜臺。靡職不克。
의춘지옥 조첩승국 공분고동 탈영지숙 옥서상대 미직부극
論思繩糾。僚著肅穆。或試其外。民懷吏束。秉我冰心。愧彼掊墨。
논사승규 요저숙목 혹시기외 민회리속 병아빙심 괴피부묵
心法易象。成圖揭軸。絶響斯傳。跫然空谷。我銘斯丘。公藏攸卜。
심법역상 성도게축 절향사전 공연공곡 아명사구 공장유복
<번역문>
군위현(軍威縣) 북쪽 어응곡(於應谷) 을좌(乙坐)에 있는 묘는 응계 선생(凝溪先生) 장령(掌令) 옥공(玉公)을 장사지낸 곳으로 명(明)나라 정통(正統) 원년(1436년 세종 18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80여 년 전이니 아, 참으로 멀다고 하겠다.대체로 공은 홍무(洪武) 연간에 태어나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과거에 높은 등수로 발탁되어 태종(太宗)ㆍ세종(世宗)의 성대한 시대에 벼슬하였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를 처음 설치하였는데, 이는 당대의 극선(極選)으로 공도 여기에 등용되었다. 당시에 청백리(淸白吏)를 중시해서 공의(公議)가 매우 엄하였는데 공이 실로 거기에 들었으니 공의 명성과 신망이 당대에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다.공은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이 정확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으로부터 학문하는 큰 방법을 들었다. 벼슬에 나간 뒤로 학직(學職)을 맡아서는 사도(師道)가 드러났으며, 수령(守令)이 되어서는 뛰어난 정사(政事)로 알려지고, 법을 다스리는 관원이 되어서는 백료(百僚)들이 두려워하고 숙연해졌으며, 한가하게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수양하면 완미(玩味) 탐색(探索)하여 얻는 바가 있었으니, 나라 초기의 학사 대부(學士大夫) 가운데 능히 공에게 미칠 자가 드물었다.공의 이력을 살펴보면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전적(典籍)과 겸 교수(兼敎授)에 이르고,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춘관 낭중(春官郎中)ㆍ태상시 소윤(太常寺少尹)ㆍ어사부 장령(御史府掌令)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안동부 통판(安東府通判)ㆍ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를 지냈다. 그 다스림은 몸가짐을 청빈(淸貧)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자질구레한 일이 몰려들고 서류가 복잡했지만 번거롭게 장부(帳簿)를 하지 않고도 조금도 유실(遺失)되거나 축나는 것이 없었으며, 정사에 이르러서는 엄하고 결단성 있게 해서 교활(狡猾)하게 농간을 부리는 자들이 두려워 떨었다. 곡성(哭聲)만 듣고서 남편을 죽인 간악(姦惡)을 알아내어 비록 옛날 신명(神明)하다는 관리도 공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는 대개 천부적인 것이지 배워서 얻은 바가 아니라고 하겠다. 공이 학문에서 성취한 바는 공이 지은 ≪인심선악상반도(人心善惡相反圖)≫와 ≪음양변역성괘도(陰陽變易成卦圖)≫ 두 도설(圖說)에서 드러나니, 그 자질이 깊고 분석이 정미(精微)하여 주돈이(周敦頤)와 소옹(邵雍)의 뜻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공의 휘(諱)는 고(沽)이고, 자(字)는 대수(待售)로 의령(宜寧) 사람이다. 증조 휘 전백(全伯)은 생원으로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에 추봉(追封)되고, 조(祖) 휘 안덕(安德)은 진사(進士)이고, 고(考) 휘 사미(斯美)는 생원으로 진성 감무(珍城監務)를 지내고 김해(金海)로 이거(移居)하였다가 다시 군위(軍威)로 이거하여 졸(卒)하였는데, 향년 55세였다.부인(夫人) 노씨(盧氏)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조사빈(趙思贇)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 김씨(金氏)는 공의 묘 왼쪽에 장례하였는데,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옥현(玉衒)은 진사로 사온서 부직장(司醞署副直長)이고, 딸은 현감 강기(康耆)와 김보인(金寶仁)에게 시집갔다.옥현의 두 아들은 참군(參軍) 옥자영(玉自英)과 습독(習讀) 옥자화(玉自華)이다. 옥자화의 5세손 국자 생원(國子生員) 옥세보(玉世寶)는 형제가 다섯이고, 옥세보가 국자 생원 옥진소(玉振韶)를 낳았는데, 역시 형제가 다섯으로 별도의 자손록(子孫錄)이 있다. 자손들이 번성하고 문사(文史)가 찬란하니 옥씨들이 장차 다시 분발(奮發)하게 될 것인가? 공의 유사(遺事)를 후손들이 패관(稗官) 지지(地志) 등에서 철습(掇拾)하여 전해왔는데, 근세의 사론(士論)이 비로소 임하(臨河, 안동(安東))의 묵계서원(默溪書院)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옥진소가 나를 찾아와 묘비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의춘 옥씨(宜春玉氏)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네. 공은 고아로서 분발하여 일찍부터 재기(才氣)를 드러내었네. 옥서(玉署)와 상대(霜臺)의 직책을 모두 잘 수행했네. 임금을 보좌하고 관원을 규찰(糾察)하니 관원들이 엄숙해졌네. 더러는 외직(外職)으로 나가니 백성들이 의지하고 아전들이 단속되었네. 내 마음가짐을 얼음처럼 깨끗하게 하여 저 탐욕스러운 자를 부끄럽게 했네. 심법(心法)과 역상(易象)을 그림으로 그려 축(軸)으로 만들어 걸었네. 그런 학문 끊어져 전하지 않으니, 빈 골짜기만 쓸쓸하네. 내가 비명(碑銘)을 새겨 공의 무덤에 세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