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79)
녹명리 구만마을의 교리재校理齋)와 풍암재(豊巖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각남면 녹명1리 구만마을의 교리재校理齋)와 풍암재(豊巖齋)릎 찾았다
교리재의 배향 인물은 도하(都夏, 1418∽1479) 선생이다. 공은 세조 3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장원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 서학교수(西學敎授), 형조정,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제주점마사, 통정대부 정평부사(通政大夫定平府使)를 지냈다. 또한 문장(文章)이 높고 시를 잘 지어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이름이 높았다.
이 마을에 약 450년 전 처음 입향한 분은 교리공의 증손인 경신(慶新)이며 교리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사로 1998년에 건립하였다.
풍암재(豊巖齋)의 배향 인물은 풍암 도순호(豊巖 都順浩, 1832∼1901)선생이다. 공은 부사용(副司勇)으로 출사후 장사랑(將仕郞), 도사(都事) 등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소에 즐겨 탐구하던 성리학을 연마하여 그 천리를 깨닫고, 후학들의 훈도에 전력하였다. 또한 재물을 풀어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으니 세상 사람들이 군자라 칭송하였다. 청도를 빛낸 사람들 175명 중의 한명이다.
그 아들 상읍(相邑, 1855∼1919)은 통훈대부 행 선산부사(通訓大夫行善山府使)를 역임했다. 아버지에 이어 늘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 편에 서서 구휼을 했다. 이에 동민들이 마을 입구에 송덕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리고 있다..
풍암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915년에 지었으며 그 동안 여러 차례 중수했다.
성주 도씨는 옛 신라시대 수창군 중심지였던 팔거현(八莒縣, 현재 대구 칠곡)의 대표적 씨족집단이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도진(都陳)이 건국공신으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진 이후 팔거도씨(八莒都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1752년 대동보(大同譜)를 편찬할 때 종회(宗會)의 결의로 당시 팔거현(八莒縣)이 속한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서 성주도씨(星州都氏)로 개칭하였다. 고려 중기 이전의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아니하여 고려 명종조의 전리상서 도순(都順)을 기세(起世) 시조(始祖)로 삼았다.
이 마을 운정산(雲亭山) 아래 높이 20여 미터의 널따란 죽바위가 있다. 바위의 모양이 죽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죽암(粥岩)이라 했는데 어떤 스님이 장군이 날 바위인데 죽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나무를 심었다고 죽암(竹岩), 남자의 성기 모양이기에 비슷한 발음으로 불렸다고도 한다(실제 이웃 동리 이름인 옥산, 함박 등 여성을 상징하는 이름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한다), 또 신라군에 쫓긴 구만명 이서국 군사들이 바위 속에서 죽을 먹으며 견뎠다고 죽바위라고도 한다. 이 바위 속에 창녕까지 연결되는 굴도 있었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구만 명을 수용할 수 있겠으나 그 당시 그렇게 많은 군사는 없었을 것 같다. 그 외에도 다른 전설들도 있다. 이 바위 위에 바위를 지키는 파수병인 양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름하여 일송정(一松亭)이다.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명품 바위이다. 전설에 곁들어 가꾸면 청도의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 같다.
이날 교리재 후손인 도정기(전교장, 시인) 님이 성주 도씨 자료를 정리해 주었다.
‘구만 마을’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교리재 문을 열고 도하 선생 뵈옵고
풍암재 길목에서 송덕비 뜻 새기며
수 많은 죽바위 전설 일송정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