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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범천소문경 제4권
15. 수현불퇴전천자별품(授現不退轉天子莂品)
그때 천제석(天帝釋)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비유하면 마니주(摩尼珠)가 들어가 닿는 곳에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구슬의 광명을 눈으로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세존이시여, 이 여러 바른 장부[正士]들이 사의할 수 없는 법을 받들어 행하여 구족하고 자재하게 두루 노니는 곳에는 모두 법의 보배에서 나는 광명이 스스로 밝게 비춥니다.
그리고 본래의 궁극적인 끝을 수습하고 드러내고 비추어서 자유자재로 변재(辯才)를 연설합니다.
그 자유로운 자는 모든 법에 기대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남과 자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반대가 없으며, 또한 전도(顚倒)되지 않으며, 항상 자재함을 얻습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지나간 과거에 있어 깨끗하며 미래를 얻지 않고 현재를 보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여러 믿지 못하는 자를 믿게 하고, 여러 해탈하지 못한 자를 제도(濟度)합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여러 교만한 자를 섭수(攝受)하여 열어 교화하니, 스스로 위대하게 여겨서 이단의 견해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여러 악마가 와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히려 경청하고 성찰하여 악마의 일을 초월합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여러 선한 법에 대한 권화(勸化)를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더하고 권하여 선한 법을 일으키도록 도와줍니다.
이미 생한 것은 나아가게 하고, 어기거나 잃지 않게 합니다.
번뇌[塵勞]가 만일 일어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번뇌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예 일어날 수 없게 합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그 여러 보살이 아직 덕(德)의 갑옷을 입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입도록 만듭니다. 그것을 입은 자는 곧 불퇴전(不退轉)을 이룹니다.
자유로운 변재를 지닌 자는 바른 법을 단절하지 않고 바른 경전을 장차 보호합니다.
그 비유와 예시로써 변재의 타당함이 능히 일체의 이교도를 항복시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작은 짐승에게서는 결코 사자의 울부짖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헤아리고, 사자를 보고서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니, 하물며 사자의 굴에 들어가고 나무 사이에서 노닐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세존이시여, 일체의 이교도는 결코 위없는 사자후를 연설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현불퇴전(現不退轉) 천자가 제석천에게 질문하였다.
“이전에 사자후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계셨는데,
구익(拘翼)이여, 무엇을 일컬어 사자후라고 합니까?”
답하였다.
“천자여, 제법에 대해서 기대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언설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사자후를 본다고 하니, 고요함에 기대어 말하는 바가 없음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요함에 기대고 집착하여 행하는 자는, 사자후가 벌레나 여우가 울부짖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설한 바가 있기 때문에 또한 천자여, 그대는 마땅히 다시 설해야 한다.
무엇을 일컬어 사자후라고 하는가?”
천자가 답하였다.
“구익이여, 아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래에 대해서도 기대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역시 언설이 없는 것이니, 하물며 나머지 다른 인연에 대해서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법을 이름하여 사자후라고 하며,
평등한 가르침을 받드는 것을 사자후라고 합니다.
제일의 품목을 강설하는 것을 사자후라고 합니다.
설하는 바가 있음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사자후라고 합니다.
경의 법을 설하되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자연의 본성도 없는 것을 사자후라고 합니다.
번뇌에 처하고 휩싸여도 품거나 맺히는 것이 없으며, 모이고 합하는 것이 없으니, 풀리고 흩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법처럼 설하는 것을 사자후라고 합니다.
사자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만일 능히 사람이 있다고 헤아리지 않아 나의 자아가 없다는 것과,
일체의 제법은 거짓으로 익힌 세속의 말이라는 데 오로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자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오로지 한 가지로 공성의 법[空法]을 드러내고 선양한다는 것입니다.
사자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입으로 바른 법을 강설하고 보호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자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일체 중생의 괴로움과 근심을 제거하고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성취하여 그 가르침을 선양한다는 것입니다.
사자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재물을 얻는 사업을 생각하되 그 근본을 청정히 하며, 멈추고 만족할 줄을 알며, 그 가르침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사자후라고 말하는 까닭은 한가한 거처에 있으면서 행하는 바를 결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시의 근본을 으뜸으로 만드는 것이 사자후입니다.
금기와 계율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자후입니다.
친한 벗이나 원수에 대해서 마음을 평등하게 갖는 것이 사자후입니다.
멀리 있다고 소원(疎遠)하게 대하지 않고 가까이 대하는 바도 없는 것이 사자후입니다.
여러 가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사자후입니다.
동등하게 관찰하는 지혜가 사자후입니다.”
천자가 이러한 사자후에 대해 설할 때 삼천대천세계가 여섯 종류로 진동하였고, 백천 가지 악기들이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울렸다.
그리고 큰 광명이 두루 세간과 여러 천궁을 비추었다. 그리하여 백천의 여러 천신들이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우리는 이미 염부제에서 법륜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는 천자가 사자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미소를 지으셨다.
바르게 깨달으신 부처님의 법에서는 만일 미소를 지을 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광명이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다.
푸르고 노랗고 빨갛고 희고 검으며, 자줏빛과 붉은색들이 헤아릴 수도 계산할 수도 없이 많은 여러 부처님 세계를 비추었으니, 두루 가득하지 않은 곳이 없어서 위로 범천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모두 해와 달의 밝음을 덮어 버렸다.
그런 뒤 몸을 세 번 돌고는 정수리의 상호로 들어가 나타나지 않았다.
지심 범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한 뒤 부처님을 향하여 게송으로 아뢰었다.
여러 신통한 지혜는 수승하고 특이하니
두루 일체의 존재를 알며
3세(世) 중생의 행에 대해
모두 다 분별하고 요지합니다.
믿고 기뻐하는 바에 따르고
지혜의 해탈에 입각하여
그 마음은 초월하였고 특출하니
일체에 모두 수기합니다.
여러 성문과 연각은
모두 그 경지가 아니며
부처님의 지혜만이 이와 같아서
측량할 수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중생의 마음을 환희 알아서
거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니
수승하여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뜻으로 즐거워하는 바를 따르고
좋은 구절을 품어 더러움을 제거하니
그 광명이 적절히 나타나
해와 달과 제석과 범천을 가립니다.
철위산(鐵圍山)을 꿰뚫어 비추고
억해(億垓)의 여러 수미산에도 그러하오니
원하옵건대 그 취지를 설하십시오.
어떤 인연으로 기쁨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성냄과 싫어함을 영원히 제거하여
능인께서는 고요하고 담백하며
자애로움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천상과 인간을 두루 관찰하십니다.
불조(佛祖)께서는 싫어함과 만족함이 없어
몸으로 이익과 안락을 얻었음을 보나니
기쁘게 미소 지은 원인, 그 유쾌한 의미를
안락하게 머물며 설하십시오.
제법을 결택하고 관찰하되
그 자유로움이 허공과 같으며
구름과 안개와 번개나 불꽃같고
비어 있는 취락이고 거품이고 환상이라.
존재하는 것은 꿈과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음을 보니
무엇 때문에 기쁘게 미소 지었는지
훌륭하게 그 의미를 연설하십시오.
일체의 생각과 견해를 제거하여
능인께서는 공성(空性)마저 초월하시며
여러 신통의 지혜가 있어
여러 생각과 집착을 소멸시키고 항상 떠나게 하십니다.
3처(處)에서 원하는 것이 없고
선정을 평등으로 행하시오니
광명을 떨치신 까닭을
오직 바르게 분별하고 설해주십시오.
문자와 언사가 없으며
음향(音響)에도 집착하지 않으시고
안락하게 머물며 경을 설하시니
중생의 법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대중의 모임을 일일이 요지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밝히려 하시며
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을 아시니
가장 수승하고 훌륭하게 설하십니다.
부처님이란 의술의 왕이시니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하시며
용맹하게 제어하여 안정한 곳에 이르게 하고
우둔하고 방일한 자들을 제도합니다.
그 세력이 갈고리와 쇠사슬을 초월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귀의하오니
인간과 신 중에 존귀한 분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기쁘게 미소 지으셨는지 밝게 설하소서.
부처님께서 지심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현불퇴전(現不退轉) 천자를 보았는가?”
답하였다.
“보았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현불퇴전 천자는 헤아릴 수 없는 32아승기겁을 지나서 마땅히 부처를 이룰 것이며,
그 명호는 수미등왕(須彌燈王)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라고 할 것이다.
그 세계의 이름은 선화(善化)이고, 겁의 이름은 정탄(淨歎)이다.
그 부처님의 국토에는 두 가지 보배가 있는데 감색 유리와 자마금이며, 그것으로 땅이 이루어져 있다. 순전히 보살만이 승단을 이루며, 악마 또는 원수에게 항복을 받는다.
거주하는 집과 음식과 입는 옷은 마땅히 여섯 번째 화응성천(化應聲天)과 같다. 여래가 열심히 노력하여 개화시킨 자가 많을 것이다.”
이에 지심 범천이 현불퇴전 천자에게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미 그대에게 수기를 주셨습니다.”
답하였다.
“여래께서 이미 수기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본래 주는 것도 없고 본래 기별과 법계도 없는 것처럼, 나에게 기별을 주는 것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렇다면 본래 법계가 없으니, 곧 기별도 없는 것입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본래 없는 법계의 기별을 주지 않으시니, 일체의 보살에 대해 설해진 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수기하는 바가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또 질문하였다.
“어진이여, 그대는 정각자(正覺者)를 따라서 머물고 범행을 깨끗이 닦으면서 부처님께서 수기하시는 것처럼 분별하고 환히 알지 않았습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범천이여, 이들 범주와 부류는 수습하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범행을 닦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수습하는 바가 없는 것이 범행을 닦는 것이라고 합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그것은 욕계 또는 색계 또는 무색계에서 수습하지 않으니, 이러한 방식이 범행을 닦는 것입니다.
다시 범천이여, 수습하는 바가 없으니, 거주한다 해도 자아의 거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다고 수습하지 않고 목숨이 있다고 수습하지 않고 영혼이 있다고 수습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바른 것이니, 곧 범행을 닦는 것입니다.
요점을 들어 말한다면 만일 제법에서 제법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범행을 깨끗이 닦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범행을 깨끗이 닦는다는 말은 무엇을 일컫는 말입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범행을 깨끗이 닦는다는 것은 두 가지 도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두 가지 도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두 가지 도에 머물지 않게 되면 곧 일체 법의 말을 건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우는 바가 없다면 이것이 곧 현자와 성인이 준수하고 수행하는 바이니, 그리하여 제도와 해탈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하였다.
“어떤 것들을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입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준수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행에 떨어지지도 않고 행을 떠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다시 법에서 행함이 없다는 것과 또한 법을 떠남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여 행하고 정성스럽게 순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어떤 것들로써 행하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입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가르침도 없고 얻음도 없고 또한 증득하는 것도 없으며, 일체 법에서 행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여 행한다고 합니다.”
또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견고하고 굳세게 정진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만일 보살이 법의 행에 한 가지 일도 있음을 보지 않고, 또한 몇 가지 행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견고하고 굳세게 정진하는 것이라고 하고,
계율과 덕의 갑옷을 입은 것이라고 합니다.
법계에서는 부서지는 것이 없으니, 이미 부서지는 바가 없다면 가까운 바도 없습니다.
또한 법을 떠나지 않으니, 어기는 바도 없습니다.
번뇌도 없으니, 맺힌 원한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제일의 행이며 정진입니다.
일체 법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으며, 받들어 수행하고 정진합니다.
만일 범천이여, 몸[身]의 인연도 없고 입[口]의 인연도 없고 마음[心]의 인연도 없다면, 이것이 제일가는 정진의 행입니다.”
이에 세존께서 현불퇴전 천자를 찬탄하시며 말씀하셨다.
“옳고 옳다. 그대가 말한 그대로이다.”
다시 지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범천아, 지금 천자가 말한 것이 바로 제일가는 정진의 행이다.
그것에는 몸의 행도 없고 입의 행도 없고 마음의 행도 없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과거 지나간 아주 오래된 세상부터 기억한다.
그때 나는 일체지(一切智)와 고요한 덕을 갖추고, 오로지 수행하고 정진하고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었다.
한가한 곳에 거처하면서 널리 배우고 들었으며, 중생의 부류에 대하여 자비와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였다.
그런데 어떤 행들에 입각하여 일체에 있어 준수하고 수행하고 또한 전폭적으로 정진을 드러내었기에 여래께서 나에게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의 기별을 주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몸과 입과 뜻에 입각하여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범천아, 나는 지금의 천자가 말하는 대로 이와 같은 모습으로 준수하고 수행하며 정진하는 그러한 행을 구족하였다.
그러자 후세에 정광불께서,
‘마땅히 내세에 부처를 이룰 것이니, 명호가 능인(能仁)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ㆍ천인사ㆍ불세존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수기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범천아, 보살이 빨리 수기를 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고 정진해야 하니, 제법을 환히 알아 행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범천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일컬어 행하는 바가 없다고 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궁극적인 평등함이다. 정당함ㆍ균형ㆍ공성(空性)ㆍ없음이 곧 정진이다.”
“무엇을 일컬어 궁극적인 평등함ㆍ정당함ㆍ균형ㆍ공성ㆍ없음이 곧 정진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여 말씀하셨다.
“과거의 마음은 멸하였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머물지 않는다.
그렇게 멸진하는 자라면 곧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설사 획득하는 자라고 해도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렇게 머무는 자는 항상 머무는 바가 없다.
법이라는 것은 바른 법이라면 평등한 것이다.
그리고 일으키는 자에게는 곧 일어나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일어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곧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현재도 없다는 것이다.
만일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현재도 없다면, 문득 본래 청정한 것이어서 일어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범천아, 이것이 궁극적인 평등함과 정당함과 균형과 공(空)과 없음이어서 곧 정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면 보살은 빠르게 수기를 얻고 법인(法忍)을 체득하고 온갖 행을 구족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일체 법에서 수습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을 보시라고 부른다.
장차 일체 법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계율을 받드는 것이라고 부른다.
만일 일체의 제법을 사념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인욕이라고 부른다.
제법에서 인연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을 정진이라고 부른다.
일체의 제법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이것을 선정이라고 부른다.
일체 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늘어나지도 않고 터럭만큼도 줄어들지 않으며 짓는 것도 없고 짓지 않는 것도 없다고 한다.
항상 보시를 행하되 희망하는 바가 없고,
금기와 계율을 보호하고 간직하되 동등한 모습이다.
인욕을 준수하고 수행하되 안팎으로 청정하고,
정진을 받들어 행하여 구족하고 성취하였다.
선정으로 한마음이니 어디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고,
지혜를 공경하니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욕을 구족하여 행하는 자는, 보살로서 행을 구비하여 온갖 행을 두루 드러내되 어디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간의 법에 대해 동등하다.
이익을 얻는다고 기뻐하지 않고 이익이 없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칭찬과 비방, 명성과 악명, 즐거움과 괴로움을 만난다 해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으며,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미 세간에서 존재하는 법을 넘어선 것이다.
그것으로 괴로워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그것으로 번민하지 않고 그것으로 오그라들거나 떨치지 않는다.
상념이 없고 상념하지 않음도 없으니, 곧 두 가지 일이 없다.
여러 인연을 떠나니, 두 가지 법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
그는 두 가지 견해에 떨어지는 자를 보면 큰 자비를 일으키므로 자신의 마음을 일으켜 중생을 열어 교화한다.
범천아, 이것이 제일의 정진이니, 무아를 터득하여 법인을 삼은 까닭이다.
그는 곧 온갖 중생들을 향하여 큰 자비와 애민함에 들어가 생하는 곳마다 섭수하고 구호한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정진의 행을 설하실 때, 팔천의 보살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고, 부처님으로부터 모두,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얻을 것이고 모두들 동일한 명호인 견강정진(堅彊精進)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리고 각각 다른 부처님 세계를 일으킬 것이다’라는 수기를 받았다.
그때 대가섭이 세존께 아뢰었다.
“비유하면 여러 큰 용들이 비를 내리려고 할 때는 큰 바다에 비를 내리는 것과 같이,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마치 큰 바다와 같으니, 그러한 모습을 일으켜야 큰 법의 비를 내리는 것입니다.
여러 큰 바른 장부들이 바로 거대한 바다입니다.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진실한 성품으로써 법의 비를 연설합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이 여러 큰 용들이 탐욕과 질투 때문에 염부제(閻浮提)에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염부제의 천하의 땅으로써는 큰 비의 물방울을 능히 감수할 수 없다.
만일 가섭아, 이 여러 큰 용들이 큰 비를 내놓으면 비의 천하가 되어 염부제의 고을과 수도의 현ㆍ읍ㆍ산ㆍ구릉ㆍ계곡은 모두 떠내려가고 잠기어 영원히 다하게 되어 떠내려가는 나뭇잎과 같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큰 용왕들은 큰 비를 염부제에 방출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이 가섭아, 이 여러 바른 장부들이 법의 비를 아끼는 것이 아니다.
연설되어 나온 법의 못이 사람과 중생의 부류를 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가섭아, 그 근기가 마땅히 부처님 법을 감당해 낸다면, 이 여러 바른 장부들은 곧 바다의 뜻에 입각해 여러 중생들을 깨닫게 한다.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대로 법의 비[法雨]를 연설하여 내놓는다.
가섭아,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용들이 비를 내릴 때 큰 물방울들을 떨어뜨린다.
그런데 그것은 차의 바퀴만하니, 큰 바다만이 빠짐없이 수용한다.
이 큰 비도 바다는 만족시키지 못하고 가득 채우지 못한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다.
만일 1겁 또는 백천 겁 동안을 설해진 법을 듣는다 해도 제법에는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으니, 그것으로 충만하지는 않는다.
비유하면 가섭아, 다음과 같다.
그 큰 바다에는 곳곳에서 온갖 하천과 네 가지 흐름의 여러 물들이 흘러들어 모두 바다로 돌아간다.
그 물들은 모여서 한 가지 짠맛뿐이니, 심한 것이 소금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은 여러 가지 음성으로 각각 다른 가르침을 연설하고 법을 듣게 한다.
그리고 적합하게 성찰하고 청취하게 한 뒤에 모두 한 가지 의미로 돌아가게 한다.
곧 해탈의 맛으로 나아가게 하니, 그것은 공이어서 맛이 없는 것이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청정하며 때가 없는 보배가 있으니, 정결하여 하자가 없다.
그것으로 바다는 적절하지 못한 때의 물은 수용하지 않으며, 더러운 것도 수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다.
청정하고 때가 없으니, 일체의 맺힌 원한과 나태함과 싫어함과 진노함의 하자를 수용하지 않는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지극히 그윽하고 깊고 얻기 어려운 바닥의 끝이 있으니, 그것은 한계를 두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으니, 요지한 성스러운 지혜는 매우 깊고 먼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그윽하고 미묘하고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 측량하기가 어려우니, 성문(聲聞) 및 연각(緣覺)이 미칠 수 없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헤아릴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물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다.
한량없는 지혜바라밀[智度無極]을 쌓고 심어 놓았으니, 제법을 모으고 합한 까닭에 큰 바다와 같다.
그와 같은 모습을 지닌 자를 바른 장부라고 부른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한량없는 여러 종류의 보배가 쌓여 있는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다.
여러 종류의 가르침으로써 한량없는 법의 보배가 자연히 충만해 있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세 부류의 보배가 있으니,
진실한 몸이라는 보배이며,
맑은 물이라는 보배이며,
재산과 사업을 위한다는 보배인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다.
경의 법을 설할 때에 사람의 근기와 근원을 따르니, 마음으로 마땅히 해탈할 만하면 그를 제도시킨다.
그렇게 성문승(聲聞乘)을 얻게 하고, 연각승(緣覺乘)을 얻게 하고, 나아가 대승(大乘)을 얻게 한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차츰차츰 넓고 큰물이 점차 유입되어 점점 깊고 넓은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다.
보살도 그러하니, 여러 신통한 지혜에 뜻을 두고 여러 신통한 지혜를 행하여 점점 위대한 성인의 도를 성취한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시체를 수용하지 않으니,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다.
성문과 연각의 마음을 수습하지 않으니,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
탐욕을 지니고 질투하고 계율을 허물고 원한이 맺혀 있고 게으르고 자폐되어 있고 진에의 마음을 지닌 자와는 함께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게으르고 자폐되어 있고 뜻이 혼란하고 사악한 지혜로 행하는 자와도 함께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라고 하는 자아와 사람과 목숨과 영혼을 있다고 보는 자와도 함께 노닐거나 거처하지 않는다.
가섭아, 비유하면 불의 재앙과 변고는 하천을 태우고 고갈시키니, 큰 강과 깊은 못이 모두 고갈되고 그런 뒤 큰 바다도 다하여 남음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가섭아, 바른 법이 유포되어 여러 토지 위에 두루 할 때에도,
먼저 보시로써 행하여 바른 법을 수습하고, 그 뒤에 바다의 뜻에 입각하여 온갖 깨달음을 베푼다.
여러 바른 장부들은 바른 법이 있으니, 그것에 돌아간다.
다시 가섭아, 이 여러 바른 장부들은 정녕 신명(身命)을 버릴지언정 바른 법을 버리지는 않는다.
여러 바른 장부의 무리들은 바른 법을 유포하니, 마땅히 그들도 고갈된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비유하면 큰 바다에 여의주가 있으니, 그 이름이 금강(金剛)이다.
그것이 여러 보배들을 모아 7일 동안 솟아 나와 있자 위로 범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타 버린다.
아울러 여러 세계에 있는 삼천대천불국토도 모두 진멸하여 남음이 없으니, 다른 방향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그 여의주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니, 그것이 타고 부서지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이 가섭아,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일체 법이 다하도록 일으키고 드러내고 발흥한다.
곧 일곱 가지 바른 법을 일으키어 세간으로 하여금 의지하고 믿게 하고 문득 다른 곳의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노닌다.
무엇을 일곱 가지라고 하는가?
여러 외도의 다른 도이고,
나쁜 도반을 따르고 가까이 하는 것이고,
사견(邪見)에 떨어져 행하는 것이고,
서로서로 적이 되어 피해를 주고받는 것이고,
여러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고,
여러 덕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고,
동등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 이 일곱 법을 일으키고 드러내고 발흥하니, 그 여러 바른 장부들은 상응하는 근기인 것이다.
그리고 중생들이 본래 그 부처님 국토에서 노닐면서 여러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을 본다.
또한 그들은 항상 정각자를 친견하고 경전을 듣고 중생들을 권하고 교화하여 덕의 근본을 심게 하는 것이다.
가섭아, 비유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생명을 지닌 무리[含血之類]들은 큰 바다에 의지하고 그 가운데 노닐고 거주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그와 같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온갖 서민의 무리들이 모임에 모두 와서 모여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함께 노닐고 거주하니, 세 가지 거취로 함께 돌아간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천상에 태어나는 것과, 인간을 구족하는 것과, 멸도를 성취하는 것이다.
가섭아, 비유하면 큰 바다 가운데는 용과 아수라들이 자재를 얻는 것과 같다.
이 여러 바른 장부들도 역시 그와 같으니, 일체의 악마의 무리들을 두루 빠짐없이 항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때 장로 대가섭이 세존께 아뢰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큰 바다에 대해 오히려 헤아리고 측량하여 그 끝을 다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여러 바른 장부들은 한계를 측량할 수 없고, 그 바닥의 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가섭아,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여러 티끌을 알려고 한다면 그 수효는 오히려 헤아려 알 수 있지만, 이 여러 장부들의 지극히 진실한 행은 그 궁극적으로 돌아가는 거취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때 세존께서는 이러한 게송을 설하셨다.
비유하면 큰 바다와 같아
온갖 물을
빠짐없이 수용해도
넘치지 않는다.
법에 뜻을 두고 구하는 자
역시 그러하니
바른 경전을 좋아하고 즐기되
그것으로 가득 차지 않는다.
또한 큰 바다와 같아서
무량한 물들이 수용되니
모두 다 빠짐없이 돌아와도
막거나 되돌리지 않는다.
총명하게 통달한 무리들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으로 지혜가
구족되지는 않는다.
오염되고 탁한 물들을
큰 바다는 싫어하지 않으며
그 여러 청정한 흐름들도
역시 귀일하여 들어온다.
훌륭하게 수행하는 자
그도 역시 그렇다.
더러움과 피로함과 때와 티끌을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큰 바다와 같으니
한계를 측량할 길 없이
지극히 넓고 크고 멀어
끝내 알 수 없다.
지혜와 덕의 바다도
역시 그러하니
중생은 이미 도탈한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창달할 수 없다.
큰 바다 가운데는
몇 종류가 귀일하여 들어가니
온갖 하천과 네 가지 흐름이
합하여 한 가지 맛을 이룬다.
몇 종류의 사람이라도
모두 와서 법을 들으니
빠짐없이 일승(一乘)의
동일하게 선양한 경전에 귀일한다.
한 가지 품목과 종류만이 아닌 물이 모여
그것을 바다라 부르니
앞의 것이 바다를 이룬 것은
뭇 생명이 그것에서 건립되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는 자도
뜻과 원이 그러하니
두루 중생을 위하여
도에 뜻을 일으키게 한다.
비유하면 큰 바다와 같아
온갖 보배가 쌓인 덩어리가
그 바다 가운데 있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여러 보살의 무리도
진귀한 보배를 쌓아 둔 것과 같아서
그것으로 드러내고 일으키니
세 가지 보배가 이루어진다.
비유하면 강과 바다와 같으니
세 가지 보배가 있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그 바다에는
역시 상념이 없다.
여러 성스럽고 통달한 장부도
이렇게 법을 설하니
곧 3승(乘)으로써
중생을 열고 인도한다.
비유하면 강과 바다와 같아
점점 더욱더 광대해져서
온갖 흐름이 빠짐없이 귀일하여
충만함을 얻는다.
여러 보살의 무리들도
여러 신통한 지혜에 뜻을 두어
온갖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항상 준수하고 수행한다.
비유하면 큰 바다가
시체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그 바다의 법은
그와 같은 것이다.
보살이 도를 구하고
건립하는 것도 그와 같아
결코 몸을 따르지 않아
함께 귀일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바다 속과 같으니
온갖 보배를 일으켜
수미산(須彌山)처럼 미묘함을 이루고
견고하게 거처하고 수립한다.
겁을 태우는 불이 일어날 때에도
끝내 그것을 태울 수는 없으니
그것은 다른 부처님 세계로
문득 넘어가서 노닌다.
바른 법이 멸할 때에도
역시 그와 같아서
굳세게 정진하는 자는
바른 법을 굳게 간직한다.
그 법을 감당할 근기가 없음을
이미 관찰하고 본 뒤에
다른 방위의 부처님 처소로
문득 나아갈 뿐이다.
계곡과 강과 하천과
샘의 근원마저 고갈되고
그런 뒤에 바닷물이
또한 소진되고 고갈된다.
겁을 태우는 불이 일어날 때에도
곧 그와 같으니
대천세계가
빠짐없이 붕괴되어 무너진다.
범부의 무리들은
이 국토에서 머물고 행할 뿐이라
만일 바른 법이
이미 멸진하였다 해도
용맹스런 무리는
법을 보호하는 것이 그와 같으니
그 몸을 버려야 할 때에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미 바른 법을 깨달았고
애욕이 완전히 멸진되었으니
정각자가 지금 계시거나
멸도한 뒤라 해도
그들의 뜻과 성품은
청정하기가 그와 같으니
법을 건립한 자는
마땅한 바를 준수하고 수행한다.
수억의 중생들이
바다에 의지하는 것과 같으니
한 품류만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 크다는 명칭대로
뜻과 원이 그러하니
일체 중생의
마음을 두루 이해한다.
부처님 세계에 있는
여러 큰 바다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한계가 측량되어
분별하여 알 수 있다 해도
그 보살들이 행하는 것은
연각의 무리와
성문들로서는
분별하고 알 수가 없다.
동등하게 짝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밖으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
여러 보살은
견고하고 강력한 정진을 행한다.
마음이 그러한 자는
머리 조아리는 인사를 당연히 받으며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이루어
중생의 근원을 열어서 제도한다.
이러한 온갖 보배는
비유하면 큰 바다와 같아서
마땅히 여기에 공양해야 하니
언제나 복덕의 밭이다.
이것은 또한 훌륭한 땅이며
높고 미묘한 의술의 왕이라서
일체의 모든
질병을 가진 자를 치료한다.
그렇게 구제하여
귀의를 받고 제도하고 해탈시키고
장차 등불을 보호하여
광명을 드러낸다.
검고 어두운 세상에
밝고 철저한 눈을 일으키니
그 눈을 얻은 자는
나아가서 감로를 성취한다.
그리하여 곧 제왕이 되니
그를 항상 법왕(法王)이라고 일컫되
그는 천신들의 제왕이 되어
훌륭한 이익을 많이 생각한다.
또한 범천(梵天)의 황제가 되어
네 가지 선정을 사유하나니
곧 정법의 수레바퀴를
문득 굴린다.
그는 곧 이끄는 스승으로서
나아갈 길을 열어서 제시하며
다투고 싸우는 곳에 처해서는
지름길을 나타내준다.
용맹하기 때문에
항복받는 바가 많으며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여
청정한 장부가 된다.
청정하고 결백한 법을 준수하니
성대함이 충만한 달과 같으며
광명을 널리 방사하니
마치 해가 떠오른 것 같다.
지혜가 탁월하고 초월적이니
수미산과 같으며
삼계에 거처하며
감로(甘露)를 비처럼 내린다.
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비유하면 사자와 같고
그 마음은 조화롭고 부드러우니
비유하면 현명한 코끼리 같다.
마치 대지 위에
모든 산과 육지가 실려 있듯이
일체의 모든
외도와 이교도를 항복시킨다.
행동거지는 항상 신선하고 정결하니
비유하면 마치 물과 같으며
떨치는 위의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그것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
막히고 걸리는 것이 없으니
비유하면 바람과 같고
게으름과 스스로 포기함을 여의었으니
또한 땅과 같다.
이들은 교만함을 버렸고
진에(瞋恚)를 뽑고 떠났으니
약 나무[藥樹]와 같아서
상념하는 바가 없다.
그 계율이 청정하니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라.
세간의 여덟 법에 대해
의지하는 바가 없다.
그 행하는 바를 비유하면
우담발화(優曇鉢華)와 같아서
무수한 억 겁 동안
부처님의 음성에 어렵게 도달한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 중에 존귀한 분께
그 은혜를 갚게 되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머물고
바른 경전을 단절하지 않는다.
뜻과 서원이 견고하고 강력하며
불쌍하고 애민한 마음을 품으며
자비로운 마음을 굳게 준수하고
희열과 기쁨이 절대적이다.
다섯 가지 색에 대한 애욕을
그것으로 구호하며
합하고 모이는 것을 잘 추구하니
이것이 가장 뛰어난 재산과 사업이다.
이들은 보시하니
수승하고 특이하며
금기와 계율을 받드는 바에서는
같거나 짝할 이가 없다.
인욕의 힘으로써
뜻을 겸손히 하고
용맹정진으로 이해하고 통달하되
싫어하거나 물리치는 일이 없다.
이러한 선정과
신족과 신통한 지혜로써
헤아릴 수 없는 억해(億垓)의
부처님의 국토에 이른다.
여러 부처님을 친견하고서
경전을 터득하여 듣고
들은 바대로
수습하고 간직한다.
온갖 사람들이 행하는 바를
능히 창달하고 요지하여
그 응하는 바에 따르고
믿는 바와 여러 근기에 따른다.
안온하게 진리를 배우고
잘 권하며 방편을 베풀고
외도를 위해서는
드러내고 보여주고 증명해 준다.
문득 변재에 통하게 되어
일체의 제법이
모두 화합하여 동일하니
그 상응하는 과보를 분별한다.
교법과 율법에 인연하여
능히 이해하고 요달하니
나의 자아라는 견해를 떠나서
항상 평등함에 머물게 된다.
그것으로 순응하는
법대로 관찰하니
이것이 곧
출가하여 배운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일체 제법과
이미 머물고 있는 법에서
법계를 종합적으로 요지한다.
공의 지혜[空慧]로 명민하게 식별하니
유형과 무형의 것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일으키며
특별하고 각별한 애긍심을 낸다.
힘들게 고생하는 중생들을
능히 섭수하고 보호함은
해탈을 준수하고 수행하는 데
마땅히 행해야 할 법이다.
나의 자아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은
망상에 빠져 있는
우둔한 자의 소행으로
삿된 견해를 따라서 방일한 것이다.
이러한 허위의 법을
깨닫고 단련시키며
또한 여러 견해를
제거하도록 강설한다.
무상한 것을 상주한다 하고
공한 것을 알맹이가 있다고 하며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삼고
몸이 아닌 것을 몸이라고 일컫는다.
범부인 자들은
전도된 것을 포섭하고 취하여
그리하여 생사의 근본을
분별하지 못한다.
만일 능히 이치를 베풀어
전도된 것의 근원을 포섭한다면
곧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되고
영혼이 없고 목숨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한 행을
이미 능히 깨끗하게 닦은 자는
곧 상주(常住)하는 것이란 없으며
괴로움과 공과 몸이 없음을 환히 안다.
가섭아, 이들을
공덕이라고 이름하니
나아가 그것을 제어한다는 것은
마치 땅을 간직한 것과 같다.
한량없는 것을 듣게 만드니
지혜는 한계 지을 수 없으며
만일 능히 준수하고 수행하면
보살이 역시 그러하다.
설령 뜻을 세운 보살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가득 채우고 있다 해도
빠짐없이 공경하고 시봉해야 한다.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으로
그 수효를 배로 한다 해도
보살의 뜻을 세운 자에게는
끝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역시
이러한 부류를 건립하고
과거의 정각자와
미래의 정각자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지금 현재의
시방세계에 있는 성스럽고 존귀한 이들도
부처를 이루고자
뜻을 세운 자들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