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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4권
5. 사품(使品)[2], 일체에 두루한 번뇌 등
[일체에 두루한 번뇌]
이제 일체에 두루한 번뇌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자기 경지]
두루 고(苦)와 인(因)에 존재하는
의심[疑]과 견(見)과 무명(無明) 등
이 번뇌의 모든 종류는
말하자면 한 경지에 있다.
고제를 밝히고 집제를 밝혀 끊어야 할 의심[疑]과 견(見), 그리고 그와 상응하는 무명(無明) 및 불공무명(不共無明)등 이 열한 가지 번뇌는 지지(地地)13)에 모두 두루 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넓은 경계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경지[自地]에서는 이와 같이 다섯 가지를 연(緣)하여 번뇌가 생긴다.
위[上]는 아래를 부리지 않는다.14)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고 욕심을 끊었기 때문이고 단지(斷知)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위를 부리지 않는다. 열등하기 때문이며, 부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의과(依果)로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밝혀 끊어야 할 것은 곧 일체오염법의 원인[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곧, 누군가가]
‘어째서 성인은 애욕 없고 노여움에 얽매임 없고 교만의 씨앗 없음을 일으켜 눈앞에 드러내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응당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한다. 곧,
‘전개되는 것이 분(分)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애욕이 없음은 단견(斷見)이 장양하는 바이며 단견을 좇아 일어나지만 그 [성인]에게는 사견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의 씨앗은 신견(身見)이 장양하는 바이며 신견을 좇아 일어나지만 그 [성인]에게는 신견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이미 자기 경지에 대하여 두루 설명하였으니,
[다른 경지]
이제 다른 경지를 설명하겠다.
타지(他地)를 경계로 삼음은
이견(二見)을 제외하니, 이는 앞에서와 같다.
경지마다 아홉 가지 두루 한 번뇌 있으나
비상[非想]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한 열한 가지 일체에 두루 한 번뇌를 설했다.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을 제외한 아홉 가지는 모두 욕계에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기까지에 두루 존재한다. 이것이 다른 경지의 일체변이다.
그것은 욕계의
[1] 고제(苦諦)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는 사견(邪見)의 경우 독자적이건 혹은 함께 하건 색계ㆍ무색계의 과보를 비방하는 것,
[2] 견취견(見取見)으로 자기의 견해를 제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3] 계취견(戒取見)으로 그것이 청정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것,
[4] 의혹을 품거나 혹은 [5] 무명으로 실상에 요달하지 못한 채 욕계에서 집제(集諦)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는
[6] 사견의 독자적이건 함께 하건 색계와 무색계의 음(陰)의 인을 비방하는 것,
[7] 견취견(見取見0의 인을 제일이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8] 의심 및 [9] 무명으로 실상에 요달하지 못한 것 등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선의 경지에서 고제ㆍ집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는 사견의 경우,
독자적이건 혹은 함께 하건 [위의] 일곱 경지의 고제(苦諦)ㆍ집제(集諦)를 비방하는 것 내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기까지 고제와 집제를 밝힘으로 끊게 되는 사견의 경우,
그것이 독자적이건 혹은 함께 하건 한 경지의 고제ㆍ집제를 비방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널리 설명되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서는 다른 경지의 일체에 두루 한 번뇌도 없다. 그보다 더 높은 경지가 없기 때문이다.
계(界)도 역시 이와 같이 설명된다.
무색계에는 다른 계의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없다. 그 보다 높은 계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두루 한 번뇌]
【문】모든 곳에 두루 한 번뇌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답】모든 유루의 씨앗을 두루 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일체에 두루 한 번뇌의 뜻이다.
연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 이것이 일체에 두루 한 번뇌의 뜻이며,
일체에 일어나고 일체중생에게 존재하고 일체의 사(事)에 두루 하기 때문에 ‘일체에 두루 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범부로서 유루법에 대해 본래 아(我)등의 행을 취하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문】왜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을 자기 경지[自地]에서 일체에 두루 하는 번뇌라고 하고 다른 경지에 대해서는 아닌가?
【답】이 두 견은 현재 나타난 경계를 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견은 현재의 경계만을 보는 것으로, 낮은 경지에 태어난 자가 높은 경지를 보는 것이 아니다.
비록 높은 경지에 태어나서 낮은 경지를 보는 경우도 이미 설명한 것처럼 높은 경지의 번뇌는 낮은 경지를 연하지 않는 것이다.
애착과 노여움과 오만은 자상(自相)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종류를 연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물며 타지(他地)를 연하겠는가?
아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비록 그 높은 경지를 즐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욕(欲)이지 탐(貪)은 아니다.
만약 고(苦)를 연하는 사견(邪見)이라면
이는 고제를 밝히는 일에는 위배된다.
한 경지의 사견이 아홉 경지를 연하니
집(集)을 연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
"만약 고(苦)를 연하는 사견(邪見)이라면, 이는 고제를 밝히는 일에는 위배된다. 한 경지의 사견이 아홉 경지를 연하니"라고 한 부분은 욕계(欲界)에서 고(苦)를 밝혀서 사견을 끊고 구지(九地)의 고를 연한 것이다.
욕계로부터 비상(非想)과 비비상(非非想) 처에 이르는 것은 한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은, 욕계는 색계(色界)도 무색계(無色界)도 아니다.
만약 다르다면 지괴(知壞)와 계괴(界壞)를 끊게 되니, 초선(初禪)은 8지(地)에, 2선(禪)은 7지에 연하여, 내지 비상(非想)과 비비상(非非想)은 비상과 비비상에 연한다.
"집(集)을 연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라고 한 부분은 고를 밝혀서 사견을 끊는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집(集)을 밝혀서 사견을 끊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문】어찌하여 단지 번뇌만 모든 곳에 두루 하는가? 다시 나머지 법도 두루 하는가?
【답】
만약 일체에 두루 한 번뇌와
동일한 과의 여러 행은
일체에 두루 함을 알아야 하나니
여러 득(得)이 되지는 않는다.
가령 일체에 두루 한 번뇌와 상응하는 수(受) 등의 법 및 공유하는 생(生) 은 그것 역시 일체에 두루 하게 된다.
동일한 과인 까닭에, 화합한 까닭에, 서로 따라다니는 까닭에, 전후로 합쳐지지 않는 경우가 없는 까닭에 이것을 일체에 두루 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과(果)등이 다른 성질이기에 득(得)은 일체에 두루 한 것이 아니다. 일체에 두루 한 번뇌는 세 가지 일 때문이니, 이른바 [1]다섯 종류의 인(因)인 것과 [2]다섯 종류를 연하는 것과 [3]다섯 종류를 부리는 것이다.
그것과 상응하는 법은 다섯 종류의 인이 되고 다섯 종류를 연하지만, 다섯 종류를 부리지는 못한다. 번뇌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유하는 법은 다섯 종류의 인이 되나, 다섯 종류를 연하지 못하고 다섯 종류를 부리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가령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일체에 두루 한 인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마땅히 네 구(句)를 지어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1] 일체에 두루 한 번뇌이면서 일체에 두루 한 인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미래의 세계에서 일어날 일체에 두루할 번뇌가 그것이다.
[2] 일체에 두루 한 인이면서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과거와 현재의 일체에 두루 한 번뇌와 상응하고 공유하는 법이 그것이다.
[3] 일체에 두루 한 번뇌이면서 일체에 두루 한 인인 경우가 있으니, 과거와 현재의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그것이다.
[4] 일체에 두루 한 번뇌도 아니고 일체에 두루 한 인도 아닌 경우가 있으니,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경우가 그것이다.
사견(邪見)과 의심과 상응
그리고 불공(不共)무명은
멸제와 도제로 끊어짐은
무루연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멸제를 밝히고 도제를 밝혀서 끊게 되는 사견과 의심과 상응무명(無明)의 이 여섯 가지 번뇌는 그 경계마다 무루(無漏)와 연함을 알아야 한다.
그 멸제를 밝혀서 끊게 되는 사견은 멸제를 비방하며, 의혹과 무명으로 실상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도 멸처(滅處)에서 전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는 도처(道處)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문】멸제를 밝혀서 끊게 되는 사견은 멸제를 밝히고도 비방하는 것인가, 아니면 밝히지 못한 채 비방하는가?
만약 멸제를 밝혔다면 응당히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밝히지 못한 채 비방한다면 무루를 연한 것은 아니리라.
【답】밝히고도 비방하는 것이다.
다만 이 사견은 마치 어떤 곳에서 사람이 비방할 곳을 상상하고 있듯이, 이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문】욕계에서는 고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은 아홉 경지의 고를 연하게 되고 내지 비상비비상처에서는 한 경지를 연한다.
그렇다면, 멸제를 밝혀서 끊는 경우 역시 그런가?
【답】그렇지 않다.
【문】어떻게 되는가?
【답】
만약 멸을 경계로 하는 견(見)은
자기 경지(自地)의 제행의 멸이다.
이것은 경계이지 다른 것이 아니니
멸진은 인(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멸을 경계로 하는 견(見)은 자기 경지(自地)의 제행의 멸이다. 이것은 경계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은,
욕계에서 멸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邪見)은 욕계의 제행의 멸을 연하고 나머지 초선(初禪)은 아님을 말한다.
초선에서 비상비비상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문】왜 다른 경지는 아닌가?
【답】멸진은 인(因)이 아니기 때문이다.
멸진은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전전(展轉)하는 인이 아니다.
전전하는 인이 아닌 까닭에 자기 경지의 제행의 멸을 사견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경지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지혜(善智)도 역시 이와 같은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 하면 전전하며 생기는 것(轉生)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선한 지혜란 행해진 진리[行諦]이니, 전생과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전개됨이 다르고 오염됨도 다르다. 유루의 경지는 인과(因果)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제(苦諦)를 밝혀서 끊는 사견의 경우에도 자기 경지의 고제만을 경계로 삼는가?”라고 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전전하면서 서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생하건 혹은 의지하건 혹은 세우건 혹은 원인이 되건 그 전전의 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도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고제ㆍ집제를 밝혀서 끊는 경우와 같은가?
아니면, 멸제를 밝혀서 끊는 경우와 같은가?
【답】다르게 전개된다.
【문】어떻게 되는가?
【답】
도제의 경계의 견(見)은
곧 도제를 연한다.
전전하면서 서로 인이 되는 까닭이니
여섯 경지 및 아홉 경지이다.
도제(道諦)란 전전하면서 서로 인이 되는 까닭에,
욕계에서 도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은 여섯 경지15)의 법지품(法智品)을 연한다.
색계ㆍ무색계에서 여덟 경지의 도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은 아홉 경지16)의 미지지품(未知智品)을 연한다.
법지와 미지지는 전전하며 서로 인이 되기는 해도 만약에 그 법이 욕계의 애착에 젖어 나(我)와 나의 것[我所]를 보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의 여러 대치(對治)는 욕계에서 도제를 밝혀 끊는 사견을 연해야 한다. 이 번뇌는 다른 경지의 연은 아니다.
이와 같이 논하듯이 미지지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한다.
【문】멸제와 도제의 법지(法智)는 색계ㆍ무색계의 법을 대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까닭에 그 지혜는 마땅히 색계와 무색계에서 도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약 경계가 아니라면,
“그 법이 색계ㆍ무색계의 애착에 젖어 나와 나의 것을 보아 받아들일 경우 그 여러 대치는 마땅히 색계ㆍ무색계에서 도제를 밝혀서 끊는 사견을 연하게 될 것이다”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답】두 가지 모두가 완전한 것이 아닌 까닭에 어떻게 말하든 허물은 없다.
완전한 법지가 그 경계의 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멸제ㆍ도제의 법지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고제ㆍ집제의 법지는 아니다.
또한 멸제ㆍ도제의 법지도 모두가 색계와 무색계의 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수도(修道)의 법지만이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를] 대치하는 것이지 견도는 아니다. 그 [견도의 단계의] 처음은 비분(非分)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대가 말한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낙근(樂根)의 의행(意行)과 같다.
근심과 기쁨과 평정한 마음은 의지(意地)에 있다. 육식과 인하는 까닭에 십팔 의행(意行)이 세워지는 것이다. 욕계의 낙근은 의지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의행을 세우지는 않는다
【문】왜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과 견취(見取)와 계취(戒取)는 무루(無漏)를 연하는 것이 아닌가?
【답】
탐을 연함을 책망만 해서는 안 되나니
요익됨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적정은 제일의 청정이나
그것도 무루의 연이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탐의 허물을 본다. 그러나 만약 무루의 연이라면 응당 탐의 허물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허물을 보지 못한다면 응당 탐을 끊지도 않을 것이다.
가령 열반을 원한다면 이것은 선법에 대한 욕구이지 탐애(貪愛)가 아니다.
요익되지 않은 까닭에 성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요익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적정하지 못하기에 오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도 적정인 것이다.
견취견은 제일행(第一行)으로 전개되어 무루법이 제일이 된다.
만약 그것이 무루와 연한다면 응당 이것은 정견(正見)이지 번뇌가 아닐 것이다.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취견(戒取見)의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모든 번뇌를 부리는 번뇌]
【문】모든 번뇌(使)는 무엇이 부리는 바인가?
【답】
욕계의 모든 종류는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부리며
자기 경지[自地]를 연하여 얽매인다.
위의 경지도 또한 그렇다.
‘욕계의 모든 종류는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부리며 자기 경지를 연하여 얽매인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욕계의 다섯 종류를 연하여 부린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색계ㆍ무색계는 어떻게 되는가?
【답】위의 경지도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의 자기 경지에서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자기 경지의 다섯 종류를 연하여 부리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 모든 번뇌는
자기 종류를 연함을 알아야 하다.
자기 경계를 연하여 부리니
모든 것이 의지하는 품계이다.
‘그 밖의 나머지 모든 번뇌는 자기 종류를 연함을 알아야 한다. 자기 경계를 연하여 부린다’고 한 것은,
나머지는 일체에 두루 하거나 일체에 두루 한 번뇌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상(自相)이 경계이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종류의 법을 연하여 행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의지하는 품계’라고 한 것은,
일체에 두루 한 것이든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이든 혹은 유루(有漏)를 연하든 무루를 연하든 그 각각의 번뇌는 그 스스로의 품계와 상응하는 법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번뇌가 무루를 연하거나
다른 경지를 연한 번뇌라면
스스로의 품계와 상응하는 번뇌이니
경계해탈이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무루를 연하거나 다른 경지를 연한 번뇌라면 스스로의 품계와 상응하는 번뇌이다’라고 한 것은,
가령 번뇌가 무루를 연하거나 다른 경지를 연한다면 스스로의 품계에 상응하는 번뇌이지, 연하여 부리는 것(緣使)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경계해탈이기 때문이다.
곧, 이 번뇌의 경계는 해탈이며 무루법으로써 일체의 번뇌를 해탈시키니, 위 경지의 제법은 아래 경지의 번뇌를 해탈시키기 때문이다.
【문】하나하나의 번뇌는 몇 가지 번뇌로 부려지는가?
【답】
그것이 신견을 부림은
고제를 밝혀 끊는 종류이며
집제를 밝힘은 일체에 두루 한 번뇌이다.
고제를 밝혀 끊는 나머지도 또한 그렇다.
‘그것이 번뇌가 신견을 부림은 고제를 밝혀 끊는 종류이며, 집제를 밝힘은 일체에 두루 한 번뇌이다’라고 한 것은,
신견(身見)이란 고제를 밝혀서 끊는 모든 번뇌에 의해 행사된다는 것이다. 자기 종류이기 때문이다.
또한 집제를 밝혀서 끊는 것은 일체에 두루 한 번뇌에 의해 행사되는데, 경계가 넓기 때문이다.
【문】고제를 밝혀서 끊는 다른 번뇌는 어떻게 되는가?
【답】고제를 밝혀 끊는 나머지도 또한 그렇다.
즉 신견을 설명한 것과 같으니, 고제를 밝혀서 끊게 되는 다른 번뇌 역시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고제와 마찬가지로 집제 역시 그렇다.
멸제와 도제의 유루연은
모두 자기 종류를 부리니
수도에서 끊는 것 역시 그렇다.
‘고제와 마찬가지로 집제 역시 그렇다’고 한 것은,
고제를 밝혀서 끊는 경우와 같이 집제를 밝혀서 끊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멸제와 도제의 유루연은 모두가 자기 종류를 부리니, 수도에서 끊는 것도 역시 그렇다’고 한 것은,
이와 같이 멸제를 밝히고 도제를 밝히고 수도의 단계에서 끊는 번뇌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다만 차별이 있다면 멸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와 도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로서 자기 종류의 유루연의 번뇌는 모두 자기 종류를 부리며, 아울러 일체에 두루 한 번뇌에 의해 부려지고 또한 무루연에 상응하는 번뇌에 의해 부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문】이미 번뇌와 다른 여러 번뇌가 부리고 부려지는 바를 알게 되었다.
[연하거나 상응하는 번뇌]
여러 번뇌의 사(使)로서 그렇다면 무엇이 연번뇌[緣使]의 부림[使]이면서 상응하는 번뇌의 부림이 아닌 것인가?
나아가 무엇이 연번뇌의 부림도 아니고 상응하는 번뇌의 부림도 아닌 것인가?
【답】
고제를 밝히는 번뇌의 자기 품계는
연하는 번뇌 또는 상응하는 번뇌이다.
견(見)에 상응하는 무명은
연하는 번뇌이다. 나머지도 또한 그렇다.
신견(身見) 및 신견 상응하는 무명(無明)이라는 두 종류의 번뇌의 부림은 연 및 상응이다.
나머지 고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나 집제를 밝혀서 끊는 것으로서 일체에 두루 한 번뇌는 연번뇌이기는 하나 상응하는 번뇌는 아니다.
신견에 상응하는 것은 번뇌의 법에 속하지 않는다.
신견 및 상응하는 무명은 상응하는 번뇌이면서 또한 연번뇌이다.
그 밖에 고제를 밝혀서 끊는 번뇌와 집제를 밝혀서 끊는 것으로서 일체에 두루 한 번뇌는 연번뇌이지 상응하는 번뇌는 아니다.
그 나머지 번뇌는 상응[번뇌]도 아니고 연[번뇌]도 아니다.
신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변견(邊見)과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는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ㆍ의심ㆍ탐욕ㆍ노여움ㆍ오만도 또한 이와 같다.
고제를 밝혀서 끊는 무명은 고제를 밝혀서 끊는 무명 및 집제를 밝혀서 끊는 일체에 두루 한 번뇌에 있어서 연번뇌이지 상응번뇌는 아니다.
그 나머지 고제를 밝혀 끊어지는 번뇌는 또한 연번뇌이기도 하고 상응번뇌이기도 하다. 그 밖에는 연번뇌도 아니고 상응번뇌도 아니다.
고제를 밝혀 끊는 번뇌의 경우처럼 집제를 밝혀 끊는 번뇌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또한 멸제를 밝혀서 끊고 도제를 밝혀서 끊는 유루를 연한 번뇌 및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차별이 있다면 가령 어떤 번뇌로서 상응함을 얻게 된다면 곧 그것은 상응번뇌 및 연번뇌인 것이다.
만약 멸제를 경계로 하는 견이면
그것은 무명과 함께 생기며
일체에 두루 한 여러 번뇌와
유루연과는 서로 어긋난다.
‘만약 멸제를 경계로 하는 견이면 그것은 무명과 함께 생긴다’고 한 것은, 멸제를 밝혀서 끊게 되는 사견(邪見)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의 상응번뇌임을 말한 것이다.
그 무명은 사견의 상응번뇌이다. 그 상응하는 법은 둘 모두 상응하는 번뇌이다.
【문】다른 번뇌는 또 어떻게 되는가?
【답】모든 것에 두루 한 여러 번뇌의 유루의 연과는 서로 어긋난다. 가령 일체에 두루 한 번뇌 및 멸제를 밝혀서 끊는 종류의 유루연에 의한 번뇌는 연번뇌에 속한다. 나머지는 상응 번뇌가 아니고 연번뇌도 아니다.
이러한 내용이기 때문에 나머지 무루연에 의한 번뇌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불공무명(不共無明)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상응번뇌의 부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번뇌와 미입(微入)과
수입(隨入)과 수축(隨逐)이다.
이는 세 가지 일을 좇아 일어나니
끊어지지 않는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번뇌와 미입과 수입과 수축이다’라고 했는데,
번뇌란 작용하는 것이며 미입(微入) 즉 미세하게 들어온다는 것은 번뇌의 본질을 말한 것이고,
수입 즉 따라 들어온다고 한 것은, 상응함을 말한 것이며,
따라 쫓아다닌다[隨逐]라고 한 것은, 얻음[得]을 말한 것이다.
또한 번뇌란 어린아이가 젖을 빠는 것과 같은 것이고 미입이라 하는 것은 젖줄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 것이며,
따라 들어온다는 것은 삼(麻) 속에 들어가는 기름과 같은 것을 말한 것이며,
따라 쫓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공중에서 나아가면 그림자가 물에 비쳐 따라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 것이다.
【문】어떻게 그러한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가?
【답】이는 세 가지 일에서 일어나니, 알아야 한다.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들이다. 즉 인의 힘과 경계의 힘과 방편의 힘이 세 가지 일 때문에 탐욕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의 탐욕의 번뇌를 끊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인의 힘이며
탐욕에 얽매여 속박당하는 것은 경계의 힘이며
거기서 옳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방편의 힘 때문이다.
이것을 번뇌가 구족한 인연이라고 말하며 반드시 세 가지 일이 갖추어질 필요는 없다.
만약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번뇌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 번뇌는 아마도 불퇴전의 번뇌가 될 것이다.
모든 다른 번뇌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번뇌와 선ㆍ불선ㆍ무기]
【문】모든 번뇌는 불선한 것인가? 무기(無記)인 것인가?
【답】
신견과 수변견(受邊見)과
그에 상응하는 무명 등은
욕계 가운데에서는 무기(無記)이며
색계ㆍ무색계에서는 일체이다.
‘신견과 수변견과 그것에 상응하는 무명 등은 욕계에서는 무기이다’라고 한 것은, 욕계에서의 신견과 수변견 및 상응하는 무명은 무기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 하면 보시[施]ㆍ지계[戒]ㆍ수행[修]에 있어서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나〔我]를 헤아리는 자는 보시를 행해 나로 하여금 후세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한다.
또한 계율을 지니어 나로 하여금 천상에 태어나게 하고자 하고, 도를 닦아 나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고자 한다. 곧, 단멸의 견해도 해탈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나는 것은 자기의 일 가운데에서 어리석기 때문이니, 남을 핍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나라는 것을 헤아리는 자는 눈이 색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내가 색을 보는 것으로써 남을 핍박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불선(不善)이 아닌 것이다.
나머지 욕계의 번뇌는 곧 불선(不善)이다.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일체이다’라고 한 것은,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는 모두가 무기임을 말한 것이다. 삼매[正受]를 허물기 때문이며, 괴로운 느낌의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불선한 것은 괴로운 느낌의 과보가 있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그러한 과보가 없다. 색계ㆍ무색계에는 욕계의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과보가 [욕계의] 경지를 끊은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가 전개되는 곳]
【문】어떤 번뇌가 어느 곳에서 전개되는가?
【답】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은
과거에 혹은 연기(緣起)이며
미래는 일체라고 설한다.
나머지의 두 세(世)는 모두가 결박되어 있다.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함은 과거에 혹은 연기이다’라고 한 것은, 과거의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함은 자상(自相)의 번뇌이기 때문에 모든 유루(有漏)의 법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탐욕이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경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니, 방편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활활 타오르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눈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나 다른 몸의 일부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노여움과 오만도 또한 이와 같다.
‘미래는 일체’라고 한 것은, 미래의 탐욕과 노여움과 오만은 삼세의 모든 유루법을 연하여 묶여 있음을 말한다. 삼세의 연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세(世)는 모두 결박되어 있다’라고 했는데, 견(見)과 의심과 무명이 곧 나머지이다.
그것들은 공상(共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만약 과거와 미래에 얽매인 번뇌일 경우 그것은 삼세에 걸친 유루법을 결박한다.
현재의 번뇌는 정해지지 않은 번뇌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자상(自相)의 번뇌가 현재 눈앞에 나타났다면 그것은 곧 현재와 미래의 결박이다.
과거[의 번뇌]라면 가령 그것이 일어나 이미 소멸되었는데도 끊어지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문】과거의 번뇌는 끊어진 것이 아니다. 곧,
그것은 미래에서 끊어지는 것인가?
무슨 까닭으로 과거에 일어났다가 이미 소멸된 것도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는가?
【답】같은 종류의 번뇌가 아닌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증장된 번뇌 가운데 있는 번뇌가 먼저 일어날 경우도 있다.
만약 그것이 과거에 끊은 번뇌일 경우에는 곧 그것은 미래의 세계에서도 끊게 된다. 그 일 가운데 미래의 약한 번뇌가 결박된다. 때문에 잘못된 말이 아니다.
만약 공상(共相)의 번뇌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는 삼세의 모든 유루법을 결박한다. 이것은 번뇌를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가령 오식신의 번뇌가 과거라면 과거를 결박하고 현재라면 현재를 결박한다.
또 만약 미래의 생법이라면 미래를 결박한다.
그러나 만약 불생법이라면 이는 삼세의 일을 결박한다.
만약 의지(意地)라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모두 삼세의 일을 결박한다.
【문】어떻게 결박하게 되는가?
【답】가령 안식신(眼識身)의 번뇌는 소연의 색을 결박하며 그것과 상응하는 법은 상응하는 것을 결박한다. 여기서 상응하는 법이란 [십이입 가운데] 의입(意入) 내지 법입(法入)을 말한다.
이와 같이하여 이윽고 신식신(身識身)의 번뇌는 소연의 촉을 결박하며, 그것과 상응하는 법은 상응하는 것을 결박한다.
가령 의지(意地)의 번뇌는 소연의 십이입을 결박하고, 그 상응하는 법은 상응하는 것을 결박한다. 여기서 상응하는 법이란 의입(意入) 내지 법입(法入)을 말한다.
저 바차부(婆蹉部)17)는 말하기를,
“사람이 생기면 번뇌도 생기고 일도 생긴다”라고 하였다.
또 아비담(阿毘曇) 논사는 말하기를,
“사람은 생기지 않아도 번뇌는 생기고 일도 생긴다”라고 하였다.
비유자는 말하기를,
“번뇌가 생기고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일은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계가 일정하지 않으며 욕망이 있는 경우도 있고 욕망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는 욕망도 일어나고 노여움도 일어나고 오만함도 일어나고 질투심도 일어나고 염오(厭惡)의 마음도 일어나고 비심도 일어나며 평정심[捨]도 일어난다.
이미 번뇌의 세계가 건립되는 과정을 설명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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