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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6권
3. 변차별품②
3.6.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1]
1) 불상응행법이란 무엇인가?
무색법 중의 심과 심소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불상응행이란
득(得)과 비득(非得)과 동분(同分)과
무상과(無想果)와 두 가지 정(定)과 명(命)과
상(相)과 명신(名身) 등의 종류이다.59)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등’이라고 함은 구신(句身)과 문신(文身) 그리고 화합성(和合性)을 동등하게 취[等取]한다는 말이며,
‘종류[類]’라고 함은 그 밖의 생각해 보아야 할 법으로 바로 앞의 종류를 나타내니, 이를테면 ‘득’ 등을 떠나 온(蘊)과 관계하는 ‘득’ 등의 법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60)
이와 같은 온갖 법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심불상응행’이라 이름한 것으로, 심소처럼 마음과 동일한 소의와 소연을 함께 함으로써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심(心)’이라는 말을 설한 것은, 여기서 설한 ‘득’ 등은 바로 이러한 마음과 관계하는 종류[心種類]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소의와 소연이 모두 마음의 그것과 동일한 모든 심소법 역시 마음과 관계하는 종류이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불상응’이라고 말하였다.
나아가 온갖 무위법 역시 마음과 관계하는 종류이지만 소의와 소연을 갖지 않기 때문에 역시 ‘불상응’이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해 다시 ‘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2) 득(得)과 비득(非得)
① 총설(總說)
이상 전체적으로 개괄하였으니, 다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먼저 득(得)과 비득(非得)의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61)
게송으로 말하겠다.
득(得)이란 말하자면 획득[獲]과 성취이며
비득은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니
득과 비득은 오로지
자상속(自相續)과 두 가지 멸(滅)에 대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득(得)과 획득[獲,prātilambha]과 성취(成就,samanvāgama)는, 그 뜻은 비록 동일하지만 관점[門]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적인 명칭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즉 득(得)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찍이 얻지 못한 것과 일찍이 이미 얻은 것의 [‘득’이] 바로 그것으로,
일찍이 얻지 못한 것의 ‘득’을 설하여 ‘획득’이라 하고,
일찍이 이미 얻은 것의 ‘득’을 설하여 ‘성취’라고 한다.62)
그리고 비득(非得)은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얻지 못한 것과 얻고서 상실하는 것의 [비득이] 바로 그것으로,
아직 얻지 못한 것의 비득을 설하여 ‘불획(不獲)’이라 하고,
이미 상실한 것의 비득을 설하여 ‘불성취’라고 한다.
그래서 이생성(異生性)을 설하여 ‘성법(聖法)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63)
어떠한 법에 득과 비득이 존재하는 것인가?
먼저 유위법 중에서는 자신의 상속[自相續]에 대해서만 득과 비득이 존재하며,
타인의 상속이나 상속하지 않는 것[非相續, 무정물을 말함]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만약 온(蘊)이 자신의 상속 중에 떨어져 존재하는 경우라면 [그것에 대한] 성취와 불성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타인의 상속 중에 존재하는 온이나 무정물[非情]에 존재하는 온에 대해서는 필시 성취와 불성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64)
그럴지라도 전륜왕(轉輪王)을 설하는 계경과 어긋나지 않으니, 7보(寶)에 대해 자재(自在)한 것을 ‘성취’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65)
그러나 선 등의 법을 성취하는 경우는 이러한 설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으니, 현재에 존재하는 자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자재함이 없기 때문이다.
즉 현재에 존재하는 자는 오로지 현재에 대해서만 자재력을 지니며,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전륜왕도 현재의 7보에 대해서만 자재력을 갖지만, 그것은 뜻에 따라 수용하는 증상과(增上果)이기 때문에, 항상 현전하기 때문에, 원하는 바에 따라 생겨나므로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법이나 불선법의 경우는 결정되어 있지 않으니, 예컨대 선법이 현재전할 때 그가 만약 과거ㆍ미래의 선법이나 온갖 불선법에 대한 현재의 득을 떠났다면 어떠한 자재가 있어 그것을 성취한다고 말할 것인가?
불선이 현전하여 선을 배척할 때도 역시 그러하거늘(선에 대한 자재를 성취할 수 없거늘) 하물며 과거ㆍ미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無體]고 주장하는 종의(즉 경량부)에서는 무엇에 근거한 어떤 것을 설하여 ‘성취’라고 말할 것인가?
만약 “당래 능히 그것을 낳을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을 일컬어 ‘성취’라 한다”고 말한다면, 이치는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럴 경우 최후 존재[最後有, 윤회의 마지막 단계의 존재]의 이생을 마땅히 성자라고 해야 할 것이며, 최후심의 무학도 마땅히 이생이라고 해야 한다.66)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경우에는 다수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득과 비득은 결정코 개별적인 실체[別體]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유위법 중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온(즉 自相續)에 대해서만 득과 비득이 존재할 뿐 그 밖의 다른 것(타상속이나 무정물)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위법 중에서는 오로지 두 가지 멸(滅,택멸과 비택멸)에 대해서만 득과 비득이 존재한다.
즉 일체 유정으로서 비택멸을 성취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래서 대법(對法) 중에서
“누가 무루법(곧 비택멸무위)을 성취하는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정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67)
또한 초 찰나에 든 구박(具縛)의 성자(聖者)와 그 밖의 번뇌에 속박된 일체의 이생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유정은 다 택멸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68)
그렇지만 결정코 허공을 성취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허공에 대해서는 ‘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불성취하는 일도 없으니, 비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법에 득이 존재한다면 비득 역시 존재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떤 법에 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득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득’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
“색온과 행온은 하나의 득에 의해 획득되며, 그 밖의 다른 온(수온 내지 식온)과 행온도 역시 이와 같다고 설한다. 유루와 무루는 하나의 득에 의해 획득되며, 유위와 무위도 하나의 득에 의해 획득된다”을 설하게 된 것이니,69)
이와 같은 따위의 존재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득’은 바로 이미 획득한 법을 상실하지 않게 하는 근거[不失因]이기 때문에,
이것(所得法)이 저것(能得法)에 계속(繫屬)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지식의 징표[幖幟]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득’은 이러한 작용을 갖기 때문에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70)
그리고 만약 ‘종자(種子)에 이러한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71)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종자는 그 밖의 다른 법(즉 그것에 의해 생겨난 법)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하든 다른 것이 아니라 하든 다 같이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득’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다른 이름으로 설정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선과 불선, 잡염과 청정은 그 자체 마땅히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좋고 좋지 못한 업과 그 과보가 뒤섞이고 말며,72)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해탈 자체도 역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일체의 백법(白法)을 남김없이 끊은 자에게도 선법이 다시 생겨난다”고 설하고 있으므로
[그대들이] 주장한 종자는 마땅히 아무런 쓸모가 없어야 한다.
또한 예컨대 세존께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선법이 은몰(隱沒)하고 악법이 출현하였다”고 설하셨는데,
이는 곧 수구행(隨俱行)의 선근으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근으로부터 그 밖의 다른 선근이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그 후 일체 모든 선근을 끊었을지라도 그는 그 후 결정코 선근을 다시 상속한다.73) 그러므로 [그대들이] 주장한 종자는 결정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법자(對法者)가 말한 온갖 ‘득’은 바로 법의 생인(生因)이 아니니,74) 현견하건대 득을 떠나 (득과 관계없이) 이미 획득된 법이나 아직 획득되지 않은 법 역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러 논사들이 주장한 수계(隨界)ㆍ훈습(熏習)ㆍ공능(功能)ㆍ부실(不失)ㆍ증장(增長)에 대해서도 이미 모두 비판한 셈이니,75) 이는 그 의미상 종자와는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② ‘득’의 제문분별
이와 같이 득과 비득의 자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것의 차별되는 뜻에 대해 널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득’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세법에는 각기 세 가지 득이 있으며
선법 등에는 오로지 선 등의 득이 있고
유계(有繫)에는 자계(自界)의 득이 있으며
무계(無繫)의 득은 네 가지와 통한다.
비학비무학법에는 세 가지 득이 있으며
비소단법에는 두 종류의 득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3세법(三世法)의 득에는 각기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과거의 법에는 과거의 득이 있으며, 미래의 득이 있으며, 현재의 득이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와 현재법에도 각기 세 가지 종류의 득이 있다.
이는 즉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설한 것으로, 그 차별에 대해서는 바로 뒤(다음 본송)에서 마땅히 다시 분별하게 될 것이다.76)
또한 선법 등의 득은 오로지 선 등이니, 이를테면 선과 불선과 무기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선ㆍ불선ㆍ무기의 세 가지 득이 있는 것이다.77)
또한 유계법(有繫法,3계에 繫屬되는 유루법)에는 오로지 자계(自界)의 득만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오로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세 가지 득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계법(無繫法,3계에 계속되지 않는 무루법)의 득이라면 네 가지 종류와 통한다. 즉 계속(繫屬)되지 않는 법(즉 무루법)의 전체적인 종류로 말한다면 네 가지 종류의 득을 갖추고 있으니, 3계의 계(繫)와 불계의 득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해 본다면, 비택멸의 득은 3계계(界繫)와 통하지만, 그러나 만약 택멸의 득일 경우 색ㆍ무색계의 계(繫)와 불계(不繫)이고, 그것에 이르는 도제(道諦)의 득은 오로지 불계일 뿐이다.78)
또한 유학법(有學法)의 득은 오로지 유학이며, 무학법(無學法)의 득은 오로지 무학일 뿐이다. 따라서 유학과 무학법의 득에는 각기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학비무학법(非學非無學法)의 득에는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하여 보면, 5취온 전부(즉 일체의 유루)와 세 가지 무위법의 득을 모두 비학비무학법이라고 이름하니, 바야흐로 5취온과 비택멸과 그리고 성도에 의해 증득된 것이 아닌 택멸은 오로지 비학비무학의 득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유학도에 의해 증득된 택멸의 득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유학일 뿐이며, 만약 무학도에 의해 증득된 택멸의 득이라면 오로지 무학일 뿐이다.
또한 견(見)ㆍ수소단(修所斷)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견소단과 수소단의 득이 있으며,
비소단법(非所斷法)의 득에는 모두 두 가지가 있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해 보면, 온갖 무루법을 비소단이라고 이름하니, 만
약 비택멸의 득과 성도에 의해 증득된 것이 아닌 택멸의 득이라면 오로지 수소단 한 가지 종류일 뿐이며,
만약 성도에 의해 증득된 택멸과, 도성제(道聖諦)의 득이라면 오로지 비소단 한 가지 종류일 뿐이다.
③ 3세의 제법과 3세의 ‘득’
앞에서 3세법에는 각기 세 가지의 득이 있다고 말하였다. 모든 유위법이 다 결정코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부무기의 득은 [본법(本法)과] 구기하지만
두 가지의 신통과 변화심은 제외된다.
유부무기색의 경우도 역시 구기하며
욕계색의 경우에는 앞서 일어나는 일이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부무기법(無覆無記法)의 득은 오로지 [생겨나는 본법과] 구기(俱起)할 뿐 앞이나 뒤에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79)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무기무기법의 득은 모두가 다 결정코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천안통(天眼通)과 천이통(天耳通), 그리고 능히 변화하는 마음[能變化心]을 제외하니, 이를테면 천안ㆍ천이통의 혜(慧)와, 능히 변화하는 마음은 그 세력이 강성하기 때문에,80) 가행의 차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비록 무부무기의 성질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앞(즉 法前得)과 뒤(즉 法後得), 그리고 동시에 생기하는 득(즉 法俱得)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위의로(威儀路)의 네 가지 온의 득은 대개 삼세단(三世斷)이고 찰나단(刹那斷)이지만, 오로지 모든 부처님과 마승필추(馬勝苾芻)와, 그리고 그 밖의 선한 위의로를 수습한 자는 제외된다.
혹은 공교처(工巧處)의 네 가지 온의 득 역시 대개 삼세단이고 찰나단이지만, 오로지 비습박갈마천신(毘濕縛羯磨天神)이나 그 밖의 선한 공교처를 수습한 자는 제외된다.81)
오로지 무부무기법의 득만이 [생겨나는 본법과] 구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유부무기색(有覆無記色)의 득도 역시 그러하니,82) 이를테면 오로지 색계 초정려의 염오한 신ㆍ어표업의 득만은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만 [생겨나는 본법과] 구기(俱起)할 뿐이다.
비록 상품의 염오함(번뇌심)에 의해 일어난 것일지라도 역시 능히 무표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세력이 미약하다. 이에 따라 본법(즉 생겨나는 법)보다 앞에, 혹은 뒤에 생겨나는 득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계의 온갖 색에도 역시 오로지 [본법과] 구기(俱起)하는 득만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이를테면 욕계계(繫)로서 선ㆍ불선인 색의 득에는 본법보다 앞에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함께 생겨나거나 뒤에 일어나는 득만이 존재할 뿐이다.83)
아비달마장현종론 제7권
이와 같이 ‘득’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④ 비득(非得)의 제문분별
그렇다면 비득(非得)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비득은 정(淨)의 무기로서
과거ㆍ미래세에 각기 세 가지가 있다.
3계의 계(繫)와 불계의 법에도 세 가지가 있으며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異生性)이라고 이름함을 인정하며
법을 획득하고, 지(地)를 바꿈으로써 비득을 버리게 된다.1)
논하여 말하겠다.
3성(性)의 차별에 대해 말해보면, 일체의 비득은 모두 오로지 무부무기성에 포섭된다.2)
3세의 차별에 대해 말해보면, 과거와 미래법에만 각기 세 가지 종류의 비득이 존재한다.
즉 과거의 법과 미래의 법에는 각기 3세의 비득이 존재하며, 현재의 법에는 오로지 과거와 미래의 비득이 존재할 뿐 결정코 현재의 비득이 존재하는 일이 없으니, 현재의 법은 불성취(즉 비득)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3)
어떤 이도 말하기를,
“현재법에 현재의 비득은 존재하지 않으니, 자성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즉 현재 성취될 수 있는 법[可成法]은 반드시 득과 함께 하는 것으로, 여기에 결정코 비득이 존재하지 않으며, 성취될 수 없는 법의 비득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법에는 현재의 비득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界)의 차별에 대해 말해보면, 3계계(界繫)의 법과 불계(不繫)의 법에는 각기 세 가지의 비득이 존재한다.
즉 욕계계의 법에는 3계에서의 비득이 존재하며,4)
색계ㆍ무색계의 계(繫)와 불계의 법에도 역시 그러하다.5)
결정코 비득으로서 무루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異生性)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니, 본론(本論)에서
“무엇을 일컬어 이생성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6)
여기서 ‘획득하지 않는 것[不獲]’이란 바로 비득의 다른 명칭으로, 무루법을 어찌 이생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떠한 성법을 획득하지 않아야 이생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일체의 성법을 모두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7)
아니면 오로지 고법지인(苦法智忍,견도의 첫 번째 果位)만을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일체의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 이생 아닌 자가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일체의 성법을 모두 성취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8)
만약 ‘획득하지 않음[不獲]’만 존재하고, ‘획득한 것[獲]’이 조금이라도 섞여있지 않다면, 이것은 바로 이생성일 것이며,
만약 ‘획득한 것’이 섞여있다면 이생성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9) 따라서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본론(本論)에서는 마땅히 ‘순전히[純]’라고 하는 말을 설했어야 할 것이다.10)
반드시 그 말을 설할 필요는 없으니, ‘[성법이] 섞여있다[雜]’는 말에도 그러한 뜻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으로, 이러한 유형의 말은 ‘물을 먹고 바람을 먹는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11)
즉 여기에 비록 ‘순전히’라는 말이 없을지라도 그것들은 순전히 물과 바람만을 먹으며, 거기에 다른 어떤 것도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고법지인을 획득하지 않은 것을 [이생성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후(集法智忍 내지 道類智를 획득할 때)에 이를 버릴지라도 다시 이생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니, 앞(고법지인을 획득할 때)서 이미 그것의 비득을 영원히 해손(害損)시켰기 때문이다.
‘비득’이라 이름하는 실유의 법[實法]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근거에서 알게 된 것인가?
계경 중에서 성취와 불성취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만약 6법(法,眼 내지 意根)을 성취하면 순인(順忍)을 성취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6법이란 경(經)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만약 “아직 성법을 낳지 않은 상속(相續)의 상태[分位]를 차별하여 이생성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면,12)
이는 계경에 어긋나니, 세존께서
“이와 같은 이를 일컬어 수신행자(隨信行者)라고 하는데, 그들은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 때 이생의 경지를 초월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여기서 이생의 경지란 바로 이생성을 말하는 것이다.13)
어떠한 근거에서 [계경에 어긋남을] 알게 된 것인가?
이를테면 획득[得]과 버림[捨]을 설하였기 때문으로,
다른 법[異法,즉 고법지인]을 획득하기 때문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이며,
마땅히 다른 법(즉 이생성)을 버리기 때문에 ‘초월한다’고 말한 것이다.
즉 그 때(정성이성에 들 때) 일찍이 획득한 안근 등 제법 중 어떠한 법도 버리지 않았지만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성법을 획득하였다는 사실로써 [계경에 어긋남을] 알게 된 것이니,14)
따라서 ‘아직 성법을 낳지 않은 안 등의 상속이 바로 이생성이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생에게만 존재하고, 모든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며, 성도의 획득을 방해하는 어떤 별도의 법을 이생성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성법을 바로 성성(聖性)이라고 설하며, 이러한 존재[性]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성자’라고 이름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생법을 마땅히 이생성이라고 해야 하며, 이러한 존재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어찌 이와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다.
즉 온갖 성법은 오로지 성자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에 성법을 설하여 성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이생법은 성자에게도 역시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이생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생법이 오로지 이생에게만 존재하고, 모든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생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법인] 악취와 무상정(無想定)과 북구로주(北俱盧州) 등은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밖의 명근 등은 비록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성자에게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방론(傍論)에 대해서는 이미 마쳤으니, 이제 다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비득은 어느 때 응당 버리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법의 비득은 이러한 법을 획득할 때, 혹은 지(地)를 바꾸게 될 때, 이러한 비득을 버리게 된다.15) 즉 성법(聖法)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성법을 획득할 때 3계 [성법]의 비득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무루심(즉 고법지인)에 머무는 자는 고법지(苦法智)에서, 나아가 내지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에 머무는 자는 아라한[과]에 대해 존재하는 비득을,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이러한 법을 획득함에 따라 이러한 법의 비득을 버리게 된다.16)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 아라한과로서 시해탈자(時解脫者)는 아라한으로서 불시해탈자에 대해 존재하는 비득을, 이러한 법(불시해탈)을 획득할 때 이러한 법의 비득을 버리게 된다.17)
그 밖의 법의 비득에 대해서도 이에 유추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비득을 버린다고 함인가?
만약 비득의 ‘득’이 끊어지면 비득의 비득이 생겨나니,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비득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득과 비득에는 각기 여타의 또 다른 득과 비득이 있을지라도 무한소급[無窮]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즉 득의 세력에 의해 본법(本法)과 득의 득[得得]이 성취되며,
득의 득의 세력에 의해 본법과 함께 생기는 득이 성취되는 것이니,
어찌 무한소급에 빠질 것인가?18)
비득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득의 비득은 비득과 필시 함께 생기하지 않는다.
또한 하지로부터 상지에 태어날 때 하지의 비득 일체를 모두 버리게 되며, 상지로부터 하지에 태어날 때에도 이에 유추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소의(所依)의 힘에 의해 비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득과 비득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3) 동분(同分)
동분(同分)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동분이란 유정의 동등함이다.19)
논하여 말하겠다.
또 다른 개별적 실체[別實物]가 존재하니, 이름하여 동분(同分)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온갖 유정이 존재로서의 동등함[類等]을 갖고 전전(展轉)하는 것을 말하는데, 본론(本論)에서는 이를 중동분(衆同分)이라고 이름하였다.20)
즉 동일한 취(趣)에서 동등하게 태어난 온갖 유정은 동일한 신체적 형태와 제근(諸根)의 작용을 소유하며, 나아가 먹고 마시는 것 등이 서로 유사한데, 이러한 유사성의 근거와, 아울러 그들이 전전하면서 서로 욕락(欲樂)하는 근거를 중동분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선명한 정색(淨色)이나 업ㆍ마음ㆍ대종과 같은 것도 모두 바로 그러한 [유사성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신체적 형태 따위는 오로지 업만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신체의 형태를 지금 바로 보건대, 이것은 서로 유사한 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이니, 제근의 작용이나 먹고 마시는 것 등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21)
그러나 만약 ‘만업(滿業)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도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을 것이니, 어떤 [유정의] 신체적 형태는 오로지 서로 유사한 인업(引業)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중동분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작용 등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22)
그런데 만약 신체적 형태 따위가 오로지 업의 과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욕락하는 바에 따라 작용 등의 일을 혹은 버리기도 하고, 혹은 행하기도 하므로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을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23)
여기서 신체적 형태나 작용, 욕락은 서로 유사하게 전전하기 때문에 ‘동(同)’이라고 일컬은 것이며, ‘분’이란 바로 근거[因]의 뜻이다.
즉 어떤 개별적인 실체가 존재하여 바로 이러한 동등함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동분을 오로지 온갖 유정에 근거하여 설하셨을 뿐 초목 등에 근거하여 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이것은 천(天)의 동분이며, 이것은 인간의 동분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중동분의 실유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온갖 유정의] 형색이 서로 유사하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界,3계)ㆍ취(趣,5취)ㆍ생(生,4생)ㆍ처(處,4종성)ㆍ신(身,남여 등의 신체) 등의 차별에 근거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유정동분이 존재한다.24) 또한 법의 동분도 존재하니, 이를테면 온(蘊)ㆍ처(處)ㆍ계(界)에 수반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즉 중동분의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25) 그리고 비유정(非有情,즉 무정물)에는 동분이 존재하지 않는다.26)
나아가 이생의 동분은 정성이생(正性離生:견도위를 말함)에 들 때 버려지고, 유정의 동분은 열반에 들 때 버려진다.
그렇다면 어찌 이생성을 바로 이생의 동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27)
이는 응당 그렇지가 않으니, 작용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생의 신체의 형태라든지 작용, 욕락이 상호간에 서로 유사한 근거를 일컬어 ‘동분’이라 하였으며,
성도(聖道)의 성취와 상위(相違)하는 것으로서 이생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이생성’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중동분의 경우 정성이생에 들 때 역시 버려지고 역시 획득되지만(이생의 동분은 버려지고 성자의 동분은 획득됨), 이생성의 경우 버려지기만 할뿐 더 이상 획득되지 않는 것이다.
동분은 색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용이 있어 능히 무차별의 현상[事類,즉 유정의 동류상사성]를 낳는다고 하니,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28)
그 같은 [동류상사성이라는] 결과가 관찰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함을 아는 것으로, 이를테면 현재 업에 의해 획득된 결과를 보고서 전생에 일찍이 지었던 업이 존재함을 아는 것과 같다. 또한 관행자(觀行者)는 지금 바로 깨달아[現證]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비유정[無情]의 동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29)
마땅히 이와 같이 힐책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커다란 과실을 범하기 때문이다.
그대 역시 인간이나 천(天) 등의 취(趣)나 태생(胎生)이나 난생(卵生) 등의 생은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어찌하여 암라수(菴羅樹) 등의 취나 녹두 등의 생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불세존께서는 일찍이 [비유정의 동분에 대해서는]설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니, 세존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유정에 대해서만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시고, 풀 따위에 대해서는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는지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어떻게 이와 같은 동분이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 하면,
우리는 바야흐로 이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한다.
즉 그러한 풀 따위는 어떠한 경우라도 전전(展轉)하는 작용이나 욕락이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별도의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풀 따위는 필시 유정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에 오로지 유정에 대해서만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선행된 업과 현재의 근용(勤勇)에 의해 이러한 법은 능히 생겨날 수 있지만, 그런 풀 따위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으니, 그래서 동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실유[實物]의 동분이 존재함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또한 목소칠주화(木素漆雕畵) 등의 상(像)과 그것의 진짜 형상 사이에는 비록 각각에 전전하는 색채나 형태의 상호 유사함이 있을지라도 한 가지만을 실물(實物)이라고 말하지 오로지 그것들 사이의 상호 유사함만을 보고서 이것이 바로 실물이라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상호 유사하게 차별되는 존재에 대해 비로소 ‘실물’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실로 이 같은 차별의 법(즉 유차별동분)이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곧 이러한 ‘실물’이라고 하는 말은 이 같은 법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초목 등에 동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어떻게 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신체의 형태를 지금 바로 보건대, 이것은 서로 유사한 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이니, 제근의 작용이나 먹고 마시는 것 등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온갖 동분은 전전(展轉)하며 차별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동분)에 대한 또 다른 동분 없이 [다른 동분과] 차별이 없다는 인식[覺]과 시설(施設)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30)
온갖 동분은 바로 동류(同類) 현상의 근거가 되는 존재[因性]이기 때문이다.
즉 동분은 동류로 전전하여 서로 유사한 인식과 시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眼)과 이(耳) 등은 대종과 소조색에 의해 비로소 색의 성질을 성취한다. 그러나 대종은 비록 그 밖의 다른 대종에 의해 조작되는 일이 없을지라도 색의 성질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땅히 승론(勝論)이 주장하는 총동구의(總同句義)와 동이구의(同異句義)를 드러내어 성취하게 될 것이다.31)
만약 승론이 주장한 이러한 두 가지 구의가, 그 본질이 단일하지 않으며, 찰나멸하는 무상한 것이며, 소의지(所依止)가 없으며, 전전하며 차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설혹 그것과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32)
그러나 승론에서는 안 등의 근이 능히 색 등을 행해(行解)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뿐더러 불교도[釋子]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견해를 버리고 달리 해석하라고 한다.
따라서 그(경주 세친)가 논란하였던 바는 바로 그들 패거리의 말일 뿐으로, 정리(正理)를 구하는 이라면 마땅히 채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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