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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사모(국악을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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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
3부 - 생명의 차
빽빽한 원시 밀림. 아주 오래된 나무들이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미얀마. 태국과 인접한 중국 윈난성의 푸얼시입니다. 푸얼의 하니족 사람들이 밀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매년 3월 하니족 사람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산 닭을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뿌립니다. 저 커다란 나무가 이들의 신인데 바로 차나무입니다. 깊은 밀림 속에서 천년 넘게 야생으로 자랐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차는 수천 년 동안 부족의 생명을 지켜준 신이 내린 잎사귀입니다. 하니족 노인은 올해도 풍성한 차 수확을 기원합니다.
푸얼에는 26개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민족마다 나름대로 각각의 차 신을 모십니다. 부랑족의 차신 바이랑. 그는 2천 년 전 부랑족에게 차를 전해준 조상입니다. 해마다 부랑족 여인들은 첫 수확한 차를 조상에게 가장 먼저 바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요?"
"저희 지역의 차입니다."
"차는 왜 준비하신 겁니까?"
"조상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아침에 차밭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부랑족의 차밭. 이곳의 차나무는 키가 4, 5미터를 훌쩍 넘기 때문에 여인들은 나무에 겨우 올라가야 차를 딸 수 있습니다. 나이가 몇 백 년 이상 된 이런 차나무를 고차수라고 합니다. 고차수는 오랜 세월동안 부랑족에 전부였습니다.
"밭과 가축 남겨주면 얼마 못 가 없어지고
많은 재물 남겨줘도 도적놈 가져가면 그만
탈 없이 자라는 차 남겨주노니
나보듯 섬겨 자자손손 전해주면
어느 도적도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이곳 사람들은 차를 마시는 방법도 독특합니다. 차 잎을 불에 구운 다음 뜨거운 물로 우려냅니다. 예부터 이렇게 차로 마실 뿐 아니라 약과 음식으로도 이용했습니다. 차는 이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차야 말로 온 세상 차의 처음이요 중심이라고 여깁니다.
중국 윈난성 남부는 세계 모든 차의 기원지입니다. 바로 이 나무가 차의 어머니 차모입니다. 이 차나무의 나이는 1800년이나 됩니다. 사람이 차를 따기 위해 키워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이죠. 끝도 없이 펼쳐진 초록의 바다. 푸얼의 차밭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보이차라고 부르는 푸얼 차의 고향입니다. 이렇게 키가 작은 차나무는 커다란 고차수의 변조입니다. 아주 자연적으로 재배와 수확에 편리하게 변화했습니다.
차마고도는 바로 차의 기원지인 이곳 푸얼에서 시작됩니다. 중국인들은 한(漢)나라 이전부터 황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 때 일반인들도 마시기 시작하면서 중국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화가 됩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엄청난 양의 차를 마시는데 쓰촨 지역 사람들의 경우 일인당 하루에 4리터의 차를 마십니다.
쓰촨성 몽정산. 역대 중국 황제들에게 차를 재배하여 바치던 황다운이 있는 곳입니다. 중국 황실에 차밭인 셈이죠. 2천 년 전 오리진이라는 승려가 처음 차를 재배하여 중국의 황제에게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오리진은 중원으로 차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150년 전 청나라 황제에게 바쳐졌던 차가 고향인 푸얼로 돌아오는 귀양 행사. 이 차는 150년 동안 자금성 박물관 지하 창고에 방치돼 있다가 한 연구원에 의해 발견이 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다른 차는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반면 이 푸얼 차만이 유일하게 남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수용단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차는 중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차입니다. 150년이 지나도 색과 모양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황제가 마셨던 이 차는 그 가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 5억 원 정도는 될 거라고 합니다. 차를 즐기는 중국 사람들은 푸얼 차를 살아있는 골동품, 마실 수 있는 유물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차가 1년만 지나도 변질되는데 푸얼 차는 오래 될수록 맛과 향이 좋아지기 때문이죠. 오래된 차들은 드물게 거래되곤 하는데 가격이 엄청납니다.
왕위 / 중화푸얼차협회 이사
“2002년 거래된 푸얼차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이 500g에 10만 달러(9,300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차에 비하면 그것은 좀 더 늦은 1937년에 생산된 겁니다. 이 차는 1927년대의 것으로 그것보다 10년이나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차의 품질이나 발효기간이 훨씬 좋아 거래된 그 차보다 비쌉니다.”
오래 될수록 맛과 향이 좋아지고 값이 좋아지는 푸얼 차의 비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푸얼 차는 만드는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잘 덖는 차를 맷돌 같은 큰 돌 밑에 넣고 장정들이 올라가서 30분 정도 밟습니다. 그러면 둥글고 평평한 모양이 되는데 이것은 운반할 때 부피도 줄이고 또 찻잎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섭니다. 차 하나의 무게는 357g. 이들은 왜 357g이라는 무게를 고집했을까요? 보통 푸얼 차 7개를 하나로 묶어 대나무와 죽순 껍질을 이용해 포장을 하는데요. 이렇게 하면은 한 덩어리가 총 2.5kg, 말 양쪽에 12개씩 실으면 말이 하루에 운반 할 수 있는 60kg을 마칠 수 있습니다. 차마고도를 가기 위해 차의 중량을 표준화 한 것이죠.
윈난 남녘은 사철 습기가 많고 덥습니다. 특히 차를 많이 생산하는 봄, 여름에는 우기가 겹쳐 차를 운반할 때 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차를 싣고 이런 길을 가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는 스스로 발효되지요. 특히 바람이 잘 통하는 대나무 속에 보관된 차들은 섞지 않고 특유의 색깔과 향을 내며 알맞게 발효됩니다. 처음에 마방들은 누렇게 변한 차를 보고 낙담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발효가 오래될수록 맛과 향이 좋아지는 푸얼 차만의 독특한 특징이 될 것을 당시에 누가 알았을까요.
차마고도의 첫 관문 따리. 1300년 전 윈난의 소수 민족을 통일했던 남조국의 수도입니다. 차를 싣고 푸얼을 출발한 마방들은 모두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마방들은 푸얼에서 차를 사와서 이곳에서 다른 마방에게 되팔아 큰 이득을 남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따리는 큰 도시로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이곳에는 차를 교역하던 많은 상점들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석판길이 그 때의 번성을 짐작케 합니다.
후안규슈 / 바이족 마방
“예전의 따리에는 마방들이 머물고 장사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마점에 머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많은 마방들이 저런 외양간에서 지내곤 하였습니다.”
윈난의 소수 민족들은 지금도 따리에 와서 장을 봅니다. 아직도 큰 시장은 이곳에서 주로 열리기 때문이죠. 윈난에서 차무역을 독점했던 남조국은 그 세력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중국 역대 왕조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지요. 특히 당나라는 남조국의 차무역을 독차지 하고 싶어 했습니다.
724년 드디어 당 현종은 차무역을 차지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일으켜 남조국과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20만 대군은 얼하이 호수에서 모두 수장당하고 맙니다. 현재 따리에는 윈난에서 가장 큰 차공장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공장들은 모두 푸얼 차를 생산합니다. 발효차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자 1970년대 이후에는 인공으로 발효하는 기술을 개발해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푸얼 차의 수효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당나라 때부터입니다. 그 수효의 중심에는 바로 티베트가 있었습니다.
장 시루 / 바이족 마방
“우리 마방들이 푸얼에서 차를 사가지고 와서 따리, 리장, 티베트로 갔습니다. 이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차 공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분류하고 상품으로 만들어내면 우리 마방들이 주로 값이 싼 차를 티베트로 운송해 갑니다.”
차는 말에 실려 차마고도 5000km를 갑니다. 윈난 푸얼에서 시작하여 따리를 거쳐 히말라야 동쪽 끝 횡단산맥을 넘어 티베트 라싸, 인도, 네팔로 이어지는 멀고 먼 길입니다. 새와 쥐만이 다닐 수 있다는 험한 길, 이 길이 바로 윈난과 티베트를 잇는 차마고도입니다. 이 길의 주역은 마방입니다. 이들은 윈난의 차를 싣고 3개월을 걸어 티베트 라싸로 갑니다. 이들 앞에는 높은 산이 만들어낸 실 같은 길이 이어질 뿐입니다.
마방들은 왜 이 험한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차를 주고 말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차와 말의 교역으로 인해 차마고도는 시작됩니다. 7세기 티베트 왕 송첸캄포는 티베트를 통일하고 당나라를 위협하는 강국을 만듭니다. 송첸캄포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결혼하는데 이 때 티베트 땅에 불교와 차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때 전해진 차가 티베트의 운명을 결정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티베트 고원은 황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목동들은 야크를 몰고 풀 한포기를 찾아 매일 돌아다닙니다. 곡식과 채소가 자라지 않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야크에 기대어 삽니다. 영양분의 대부분을 야크 고기에서 얻는 것이지요. 이런 식생활로 인해 티베트 인은 비타민이 절대 부족했습니다. 그런 티베트 인들에게 차는 거의 유일한 비타민 공급원입니다. 그래서 차를 흑금자, 즉 검은 황금이라고 부릅니다. 야크 버터와 차를 함께 넣어 만든 수유차를 하루에 50잔 이상 마십니다. 실제로 티베트 인들은 세계에서 차를 가장 많이 마신다고 하네요.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차. 티베트 인들에게 차는 피요, 살이요, 생명입니다.
그윽하게 퍼지는 티베트 나팔 소리가 사원의 아침을 알립니다. 사원에서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예불을 올립니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라마들의 정진 수행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차를 마시는 것이지요. 예불이 진행되는 동안 당번 스님은 수유차를 준비합니다. 차 끊이는 양을 보면 사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에서 가장 먼저 차를 이용했던 사람은 사원의 라마였습니다. 야크 버터와 차를 함께 넣어 마시는 수유차를 처음 만들 것도 사원이라고 하는군요.
사원에서 차를 마실 때는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차를 라마의 수행 등급에 따라 순서대로 따라야 하며 마실 때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원을 중심으로 차 수요는 늘어났고 티베트 인들에게 차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됐습니다.
차를 얻기 위해 티베트가 내놓을 것은 말 뿐이었습니다. 티베트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잘 달리고 전투에 강했습니다. 중국의 왕조들은 티베트의 말을 얻기 위해 차마 무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듭니다. 북방의 유목민족과 싸우기 위해서는 말이 반드시 필요했고 차마 무역을 통해서 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했습니다.
쓰촨성 야안. 이곳은 차와 말을 바꾸던 차마 호시가 있던 곳입니다. 지금도 야안은 쓰촨성 최대의 차 생산 기지입니다. 야안의 차 공장에서는 대부분 티베트 사람들만을 위한 차를 만듭니다. 티베트과 같은 변방지역에 공급한다하여 변차 혹은 장차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윈난에서 생산하는 푸얼 차와 달리 장차는 큰 찻잎과 줄기를 이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값이 싸고 품질이 떨어집니다. 장차는 주로 티베트의 서민들이 수유차를 만드는데 이용하는 차입니다. 장차의 생산의 중요한 기지로서 야안은 송나라 때부터 번성해 왔습니다.
송나라는 야안의 ‘차마사’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국가가 차마 무역을 독점합니다. 송대에는 말 한필에 차 1800근 하지만, 명대로 오면서 말 한필에 차 120근, 찻값은 점점 비싸지고 말 값은 싸집니다.
티베트 왕국은 한때 이 강의 서쪽이 무도 자신의 영토인 만큼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차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대도하를 통해 티베트로 가는 차무역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차가 절실히 필요했던 티베트는 명나라에게 무조건 복종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말을 대량으로 바치고 서야 차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야안에서만 1년에 11만 톤의 장차를 생산합니다. 6백만 명의 티베트 인구가 1년 동안 거의 20kg씩 소비할 수 있는 양입니다. 쓰촨에서 라싸를 잇는 천장공로는 예전 차마고도 위에 새로 닦여진 길입니다. 차를 통해 티베트를 통제하려 했던 중원의 왕조들이 가장 먼저 개척했습니다.
후안규슈 / 바이족 마방
“당시 운송수단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지고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과 말,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차를 나를 수 없지요. 마방들의 일과는 가다가 머무르고 다음날 이면 다시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큰 길이 뚫리기 전만에도 말이 귀한 쓰촨에 한족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직접 짐을 지고 산을 넘었습니다. 횡단산맥의 설산과 만나는 지점에서 티베트 마방에게 차를 전해줍니다. 티베트 마방들은 차를 살 수 있는 차마 호시가 모두 한족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2천 킬로미터의 먼 길을 와서 차를 싣고 다시 라싸까지 돌아갔습니다. 윈난에서 이어지는 차마고도가 민간 무역로였던 반변 쓰촨에서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오로지 국가에서 관리하던 관무역로였습니다.
마방은 험한 차마고도에서 거대한 메리설산과 만납니다. 주봉 아래로는 2천 미터에 이르는 빙하가 흐르는 만년설산입니다. 마방은 메리설산에 눈이 녹기 시작하는 6월이 되어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메리설산은 티베트 8대 신산 중 하나입니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메리설산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폭포를 찾습니다. 사람들은 폭포 주위를 돌며 메리설산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마방도 메리설산에서 자신들의 무사 안녕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메리설산을 넘으면 4천 미터가 넘는 곳에서 고원 목장과 만납니다. 설산에 눈이 녹으면 주위의 목동들이 푸른 풀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듭니다.
이곳의 목동들은 야크의 젖에 기대어 삽니다. 라싸로 가는 마방들에게 팔 물건을 만드는 것이지요. 야크 젖을 큰 나무통에 넣고 하루 종일 젓습니다. 노랗게 변한 것이 바로 야크 버터인 수유입니다. 이것을 차에 섞어 수유차를 마시는 것이지요. 수유는 차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티베트 인의 주식입니다. 이곳의 목동들은 메리설산을 지나는 마방에게 티베트 내륙으로 들어갈 수유를 팔며 삶을 이어왔습니다.
츠리자시
“17-18일에 한번씩 만듭니다.”
“수유 하나의 가격은 얼마나 받아요.”
“500g에 17~18위안(2000원)을 받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차마고도의 유서 깊은 도시 리장. 리장은 차마고도를 오가는 마방들이 모여들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 대규모 마방을 조직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마방과 말들로 가득 찼습니다. 상인들은 윈난에서 온 마방으로부터 차를 사서 티베트 마방에게 되팔거나 직접 마방을 조직하여 라싸, 인도로 차를 싣고 다녔습니다. 당시 마방들의 규모는 엄청났다고 하는군요.
셴 자우 / 나시족 마방
“리장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말이 수천 필이나 되었고 게다가 티베트로 운송하는 야크들도 최소한 8~9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아니 거의 만 마리는 될 겁니다. 그렇게 많이 운송 했습니다.”
리장 인근에서 발견된 티베트 왕국의 비석입니다. 리장에 모여들던 마방의 길을 안내하기 위해 13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변의 맹수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이기도 했습니다. 차마고도의 석판길. 큰 상인들은 차를 나르던 말을 위해 흙 길에 돌을 놓았습니다. 깊게 파인 것은 이 길을 지나다니던 말발굽의 흔적입니다.
지금도 차마고도 주변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 말을 몰고 라싸와 인도로 다녔던 마방 일을 하던 말몰이꾼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장 시루 / 바이족 마방
“14살 때부터 50년 동안 마방 일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입니다. 부친도 말몰이를 했고 모두가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였습니다. 남의 말을 몰다가 조금 돈을 벌고 나서 저의 말 10여 마리를 직접 몰았습니다. 마방이 가는 길은 정말 위험하고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가 저에게 달려 있으니 수십 년 동안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오 루루 / 장 시루 부인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 모두 변방에 차를 나르기 위해 멀리 가야 했습니다. 남편이 떠나면 저는 집에서 그를 그리워하며 집안일을 혼자 해야 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가는 길이 워낙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에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30일 저녁에 결혼하고 초하룻날에 길을 떠난다구요?
떠나려거든 나랑 결혼이나 하지 말지
당신 정말 양심도 없군요.
당신과 결혼하느라 빚을 많이 졌네.
떠나지 않으면 빚을 갚을 수 없어.
당신이 빚을 겼어도 괜찮아요. 내가 베를 짤게요.
노새를 팔아서 갚으면 되지요.
당신 정말 양심도 없군요.
돌도 기왓장도 말할 수 있는데 왜 당신은 대답이 없나요?"
실제로 많은 마방이 협곡과 강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루셔라는 외줄을 타고 협곡을 건너기도 하고 강을 건널 때는 양가죽에 바람을 불어 넣고 헤엄을 쳤습니다. 오로지 차를 팔아 돈을 벌기 위한 모험이었습니다.
셴 자우
“(라싸에 가면) 차를 몇 배를 주고 바꾸었습니다. 이곳에서 10위안이라면 라싸에 가면 5-60위안 정되 됩니다. 6배는 되지요.”
“왜 그렇게 비싸게 받지요?”
“길도 너무 멀고 마방이 3개월이나 걸어가야 하는데 당연히 비싸지요. 3개월 가는 동안 우리가 쓰는 돈도 많습니다. 말과 사람들에게 돈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비싸게 받지 않으면 차를 팔수가 없습니다.”
마방은 진사강, 난창강, 누강이 함께 흐르는 거대한 3강 병류 지역을 지납니다. 깎아지른 절벽에 난 이 길은 험하기로 이름난 곳입니다. 이 험한 길이 다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일본군의 침략으로 인해 중국으로 통하는 모든 국제 교역로가 끊어졌을 때입니다. 차마고도만이 열려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마방만이 이 길을 통해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길 차마고도.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차마 무역에 꽃을 피우고 1400년을 이어왔습니다. 거대한 횡단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으로 가로막힌 차마고도는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방만이 이 길에 주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길이 라싸에 이르렀을 때 마방은 말의 끈을 풀고 생명의 차를 전하였습니다.
차마고도를 통해 라싸에 도착한 차는 이곳에서 티베트 전역으로 팔려 나갑니다. 티베트 유목민들은 아주 오랜 전부터 차를 사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라싸는 차마고도의 종착지이면서 또 다른 길을 가는 출발지입니다.
치왕상주 / 티베트 장족 마방
“쓰촨성 야안에서 구입한 차를 티베트 라싸에서 판매합니다. 라싸에서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로 장사하러 갑니다. 차와 각종 약재를 싣고 인도, 네팔에 가서 팔고 돌아올 때는 천을 가져와서 윈난의 리장, 따리에 가서 다시 팝니다.”
거대한 히말라야를 앞에 두고 길은 다시 이어집니다. 인도, 네팔로 가는 길. 이제 차는 야크에 등에 실려 히말라야를 넘습니다. 길은 앞에 있고 그 길에 끝에서 사람들은 다시 생명의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KBS 방송국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