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중권
12.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연설하는 복덕
【經】
“또 수보리야, 살고 있는 곳에 따라 이 법문을 설명하거나 해서 마침내 4구게 등에 이르기까지를 설명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상과 사람과 아수라가 모두 마땅히 부처님 탑묘(塔廟)에 공양하듯이 공양해야 할 것이니라.
그런데 더구나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모조리 다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것이겠느냐?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가장 으뜸가는 최상의 희유(希有)한 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라.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곧 부처님께서 계신 곳이니, 마치 부처님을 존중하듯이 해야 할 것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장차 이 법문(法門)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들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만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문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라고 하라.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이름으로 받들어 지녀야 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설하신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법이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세한 먼지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 미세한 먼지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이 모든 미세한 먼지를 미세한 먼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을 미세한 먼지라고 부르며,
여래께서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을 세계라고 부르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서른두 가지 큰 사람의 모습[大人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서른두 가지 큰 사람의 모습은 곧 모습이 아니므로 이것을 일컬어 서른두 가지 큰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論】
무엇이 저렇게 뛰어난 복을 성취하게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곳이 존중받는 까닭은
원인을 익혀 큰 몸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저 원인을 익힌 까닭에 번뇌에 찌든 사람도
번뇌를 항복시켜 복으로 승화시킨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두 곳이 존중받는다’는 것은
첫째는 법을 설명할 처소이니, 어떤 종류의 처소를 따라 이 경을 설명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신기하고 특별한 모습을 존중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둘째는 법을 설명하는 사람이니, 어떤 종류의 사람을 따라 능히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법하여 경론(經論)을 존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보배 등을 가지고 어떤 곳을 따라 보시하거나 어떤 사람을 따라 보시함으로써 이와 같은 존경과 존중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이 법문은 모든 불ㆍ여래가 증득한 법과 더불어 수승한 원인을 짓기 때문이다.
경에
“수보리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법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어느 한 법도 유독 여래 혼자서만 하신 말씀도 없었고, 다른 부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진귀한 보배를 보시하여 얻은 복덕은 곧 더러운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니, 능히 번뇌의 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번뇌의 원인을 멀리 여의어야 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지의 미세한 먼지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경에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이 모든 미세한 먼지를 미세한 먼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을 일컬어 미세한 먼지라고 부르며,
여래께서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을 세계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
저 미세한 먼지는 탐욕 등 번뇌의 바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대지의 미세한 먼지라고 부른 것이다.
저 세계는 번뇌에 물드는 인자(因子)가 없는 세계이니, 그런 까닭에 세계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저 복덕은 곧 번뇌의 먼지에 의해 더럽혀지는 원인이 된다.
이런 까닭에 비록 이것이 밖의 무기(無記)라 하더라도 먼지는 저 복덕과 선근(善根)을 행하는 데 가장 비근(卑近)한 것이니,
어찌 이러한 복덕이 불보리(佛菩提)를 이룩할 수 있는 것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또 저것은 대장부의 모습을 성취한 것이어서 복덕 중에 가장 뛰어난 복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은 능히 불보리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저 복덕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저 모습은 불보리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며, 저것은 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장부의 모습이라고 말한 것은 저것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문을 받아 지녀서 다른 이에게 설법한 복덕이 능히 불보리를 성취하므로 저것(보시의 복덕)은 이것(경을 지닌 복덕)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 저 복덕은 능히 진귀한 보배 등으로 보시하여 얻은 복덕을 항복시킬 수 있으니, 어찌 이 복의 원인 때문에 저것(보시의 복덕)을 항복시킬 수 있는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복은 가장 비근하면서도 가장 수승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아서 저 단(檀:布施) 등의 복덕 중에 이 복덕이 가장 뛰어나다는 이런 이치가 성립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