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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3권
3. 섭념부(攝念部)
〔여기에는 네 가지 연(緣)이 있음〕
3.1. 술의연(述意緣)
생각해 보면 무릇 평범한 정(情)은 금(禁)하기 어렵다. 비유하면 산에 있는 원숭이가 항상 바깥 경계를 따르는 것 같고 또한 미쳐 날뛰는 코끼리와 같다.
세 가지 업이 고동(鼓動)치므로 연(緣)이 얽혀져 번성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정립하여 항상 제어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 말하였다.
“마땅히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지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業)이 악과 교류하게 하지 말고 몸의 계율과 마음의 지혜를 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게 하라.”
또 경전에서 밀하였다.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해 두면 무슨 일이든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나 심성(心性)이 미혹하고 전도되는 것은 아견(我見)이 먼저이다.
번뇌의 미혹은 조섭하기 어렵고 혼란스런 번뇌[亂使]는 항상 작용하면서 어느 때에나 교만을 부리므로 굴복시키기 어렵다.
스스로 그르다고 여겨 고요함에 처하면 삼독(三毒: 貪ㆍ瞋ㆍ癡)을 꺾어 항복시킬 것이다.
몸은 돌아다니지 않고 입은 잠자코 말하지 않으며, 잠자는 시간은 적고 깨어 있는 시간은 많으며, 항상 좌신하고 음식을 절제하며, 바른 법만을 생각하고 있고 없는 것[有無]이 아님을 알며, 몸을 곧게 하고 뜻을 바르게 하며, 생각을 매어 앞에 두는 등 이와 같은 따위의 가르침을 이름하여 섭념(攝念)이라고 한다.”
3.2. 십념연(十念緣)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닦아 행하면 곧 신통(神通)을 이루며 많은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첫째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念佛]을 말하고,
둘째는 법을 생각하는 것[念法]을 말하며,
셋째는 대중을 생각하는 것 [念衆]을 말하고,
넷째는 계율 생각하는 것[念戒]을 말하며,
다섯째는 베풂을 생각하는 것[念施]을 말하고,
여섯째는 하늘을 생각하는 것[念天]을 말하며,
일곱째는 휴식을 생각하는 것[攝念息]을 말하고,
여덟째는 안반을 생각하는 것 [念安般]을 말하며,
아홉째는 몸은 항상 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는 것[念身非常]을 말하고
열째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 [念死]을 말하나니, 마땅히 잘 닦고 행해야 하느니라.
부처님과 법과 성중(聖衆)을 생각하고
계율과보시, 그리고 하늘을 생각하며,
휴식(休息)과 안반(安般)을 생각하고
뒤에는 몸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까지 말하였네.
첫 번째의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을 오로지하여 부처님을 생각하되 여래의 형상은 공덕을 구족(具足)하였고 몸과 지혜가 가이없으며, 돌아다님과 가고 옴을 다 갖추어 아는 것이다. 하나의 법을 닦고 행하면 저절로 열반을 성취할 것이다.
부처님 생각하기들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하리니,
이것을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의 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을 오로지하여 법을 생각하되, 모든 욕애(欲愛)를 제거하여 번뇌[塵勞]가 없고 갈애(渴愛)하는 마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며, 욕심과 욕심 없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결박과 모든 덮음[蓋]의 병을 여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여러 가지 향기와 같아서 어떤 흠이나 어지러운 생각도 없으면 곧 신통을 성취하여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법 생각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하리니,
이것을 법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의 대중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정선을 오로지하여 여래의 성중(聖衆)을 생각하되, 질박하고 정직함을 성취하여 삿됨과 왜곡이 없으며, 위아래가 화목한 것이다.
여래의 성중인 사쌍(四雙)과 팔배(八輩)를 마땅히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며,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면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승려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할 것이니,
이것을 승려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네 번째의 계율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계율이란 여러 가지 악(惡)을 멈추게 하기 때문에 계율은 능히 도를 이루어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하게 하며, 계날의 영락(瓔珞)을 몸에 차고 있으면 온갖 좋은 것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길상병(吉祥甁)과 같아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성취하고 곧바로 여러 가지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면 저절로 열반을 이룩할 것이다.
계율 생각하는 것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하리니,
이것을 계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의 베풂[施]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정신을 오로지하여 베풀기를 갱각하되 이미 베풀어준 이상 영원히 후회하는 마음이 없고 보답받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 유쾌하게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꾸짖거나 헐뜯고 칼이나 몽둥이를 쓰더라도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내가 베풀어 준 사람에게는 보시할 뜻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온갖 어지려운 생각들을 버리면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베풀어줄 생각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하리니,
이것을 베풂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하늘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정신을 오로지하여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을 깨끗이 하고 더러운 행위를 짓지 않으며 계율을 지켜 몸을 완성하면 몸에서 광명을 놓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저 하늘 몸을 성취하는 것은 선업(善業)의 과보 때문이요, 저 하늘의 몸을 성취하는 모든 행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온갖 어지러운 생각들을 제거해 버리면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하늘을 생각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하리니,
이것을 바로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곱 번째의 휴식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마음과 뜻의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지성(志性)이 자상하고 또한 갑작스러움과 사나움이 없으며,
항상 전일(專一)한 마음으로 마음이 한가롭게 있는 것을 좋아하고 늘 방편을 구하여 삼매의 선정에 들어가며,
항상 탐하지 않기를 생각하여 흘륭한 광명이 맨 꼭대기까지 사무칠 것이다.
여러 가지 어지러운 생각들을 제거해 버리면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휴식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하리니,
이것을 바로 휴식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덟 번째의 안반(安般)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정신을 오로지하여 안반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숨이 길 때에는 〈나는 지금 숨이 길다〉고 관(觀)하여 알고,
만약 다시 숨이 짧으면 그 또한 마땅히 〈나는 지금 숨이 짧다〉고 관하여 알며,
만약 숨이 지극히 차거나 지극히 뜨거워도 또한 마땅히 〈나는 지금 숨이 차고 뜨겁구나〉 하고 관하여 알고,
드나드는 숨의 길고 짧음을 분별하고 헤아려야 한다.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버리면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이 안반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할 것이니,
이것을 안반을 생각한다고 말하느니라.
아홉 번째의 몸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정신을 오로지하여 몸을 생각하는 것이다.
발모(髮毛)ㆍ손톱ㆍ발톱ㆍ이ㆍ피부ㆍ살ㆍ근육ㆍ뼈ㆍ담ㆍ간ㆍ폐ㆍ심장ㆍ비장ㆍ신장ㆍ대장ㆍ소장의 곡직(曲直)과 방광(旁光)ㆍ똥ㆍ오줌ㆍ백엽(百葉)ㆍ창탕(滄蕩)ㆍ비포(脾泡)ㆍ눈물ㆍ침ㆍ가래ㆍ고름ㆍ피ㆍ지방ㆍ해골ㆍ뇌 등 그 어느 것이 이 몸인가?
이 몸은 흙이라는 요소, 물이라는 요소, 불이라는 요소, 바람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모두가 바로 부모님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온 것이며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이 육근(六根)은 여기에서 죽으면 장차 어느 곳에 태어날 것인가?
이렇게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버리면 저절로 열반을 이룩할 것이요,
몸을 생각히는 것을 여의지 않으면 곧 공덕을 획득할 것이니,
이것을 몸을 생각한다고 말하느니라.
열 번째의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정선을 오로지하여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며 여러 갈래 세계로 오고 가면서 목숨은 자꾸 가서 멈추어 있지 않는 것이다.
모든 감관은 흩어지고 무너져서 마치 부패(腐敗)한 나무와 같다.
명근(命根)은 단절되고 종족은 나뉘어 헤어지며, 형제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며 또한 아무 모양도 없다.
여러 가지 산란한 생각들을 없애버리면 저절로 열반을 이룰 것이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 으면 곧 공덕을 획득할 것이니,
이것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게송을 말한다.
부처님과 법과 그리고 거룩한 승가[聖衆]
나아가 몸과 죽음까지도 생각하였네.
비록 위의 것과 이름은 같으나
그 뜻은 각각 다르니라.
3.3. 육념연(六念緣)
또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에서 말하였다.
“첫 번째,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몸은 금강(金剛)으로서 어떤 번뇌도 없다.
만약 다닐 때에는 발이 땅에서 네 치쯤 떨어지고 천 개의 수레바퀴 같은 모습의 무늬 자국이 땅에 나타나며, 발 밑에 모든 벌레들은 이레 동안 안온하거니와 만약 그것이 목숨을 마치더라도 모두 천상에 태어난다.
옛날 어떤 한 악한 비구는 본래 외도(外道)였으나 부처님을 비방한 것을 거짓으로 사과하고는 여래의 뒤를 좇아서 가다가 스스로 날벌레 한 마리를 죽여 부처님의 발자국에 놔두고 부처님께서 밟아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죽었던 그 벌레는 부처님의 발자국을 만나고는 잠시 후에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다.
만약 성읍(城邑)에 들어가셨을 때 그 문지방을 밟으면 천지가 크게 진동하고 온갖 종류의 음악 소리는 악기를 치지 않아도 저절도 울리며, 귀머거리ㆍ장님ㆍ벙어리 등의 모든 병이 저절로 나으며 부처님의 상호를 본 사람은 그 행을 따라 해탈하는 등 공덕으로 구제되는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온갖 행을 다 보았으나 운재(運載:실어서 운반함)가 제일이다.
이른바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그 뜻은 이와 같다.
두 번째, 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법이란 곧 번뇌[漏]의 주인이다.
법은 모든 부처님을 출현시키고 법은 또 부처님의 도를 생겨나게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법을 생각하라는 말을 먼저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라는 말을 나중에 하지 않있습니까?
[답] 법이 아무리 미묘하다 해도 그것을 능히 아는 이가 없으니, 그것은 마치 복장(伏藏)은 어느 곳에나 없는 곳이 없건만 반드시 누군가 그것이 있는 곳을 전부 보여주어야만 비로소 스스로의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법도 이와 같아서 이치가 아무리 현묘(玄妙)하다 하더라도 여래가 아니면 드러낼 수 없나니, 그런 까닭에 부처님 생각하는 것을 먼저 말하고 법 생각하는 것을 뒤에 말하였다.
세 번째, 승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사쌍(四雙)ㆍ팔배(八輩) 등 열두 현사(賢士)함으로써 이들이 곧 중생들의 좋은 복밭이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 어떤 박복한 비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범달마(梵達摩)였다.
[율명(律名)은 나순(羅旬)이니 비구를 비유한 것이다.)
그는 일천 이백오십 명의 대중들 가운데 있으면서 대중 스님들로 하여금 밥을 얻어 먹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탓인지 아무도 몰랐다.
부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두 패로 나누어 결식하러 보냈는데, 한 패는 밥을 얻고 한 패는 밥을 얻지 못했다.
얻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다시 두 패로 나누어 보냈는데 반은 얻고 반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 점점 진행되다 마침내 마지막에는 두 사람을 보냈는데, 한 사람은 음식을 얻고 한 사람은 음식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복이 없으면 아무리 발우가 앞에 이르러도 음식이 저절로 소멸하여 변화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처님께서 그의 액난을 불쌍히 여겨 손수 음식을 주시어 그의 발우에 있게 하였는데 복력(福力)으로 만든 음식이라서 변화하여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의 현재의 몸으로 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두 멸진(滅盡)비구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함으로써 그는 즉시에 복을 얻게 되었다.
그 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이 박복한 범마달을 불쌍하게 여겨 부처님께서 음식을 주셨다는 말을 듣고는 나도 지금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복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곧 쌀을 보내기로 했다.
그 때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서 쌀 한 톨을 물고 갔다.
그러자 사람들을 시켜 까마귀를 꾸짖었다.
‘왕이 범마달을 위해 복을 베풀었는데 너는 어째서 그것을 가져갔느냐?’
까마귀는 곧 쌀을 물고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 이유는 이 비구가 승려가 된 복의 힘을 입어 새짐승조차도 침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좋은 복전은 이미 자신을 제도하고 다른 사람도 구제하여 삼승(三乘)의 도에 이른다는 것을 증험하여 알 수 있다.
승가 대중을 생각하는 법의 그 뜻은 이와 같다.
네 번째, 계율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계(五戒)ㆍ십계(十戒)ㆍ이백오십계(二五十戒)로부터 오백계(五百戒)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과 입을 금지하고 제어하여 온갖 삿되고 그릇된 것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육정(六情)을 제어하여 모든 욕념(欲念)을 끊고 안팎이 다 깨끗해져야 마침내 계의 성품에 호응하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두 비구가 있었다. 그들은 함께 부처님의 처소로 가다가 가는 도중에 넓은 못[澤]에 이르러 물과 미음이 갑자기 다 떨어졌다.
그 때 조그만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 온갖 벌레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 비구는 금지한 계율을 범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 여겨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약 내가 이 물을 마시면 매우 많은 살생을 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계율을 완전하게 지키다가 목숨을 마치리라.〉
그 때 그는 목숨을 마치고 곧 천상에 태어났다.
한 비구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이 물을 마시고 목숨을 보전해야만 부처님의 처소에 갈 수 있다. 죽은 뒤에 장차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는 곧 벌레가 우글거리는 물을 마셔 매우 많은 벌레를 살해하였다. 그는 비록 부처님을 뵈을 수는 있었지만 나의 법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부처님을 향하여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 도반이 목숨을 마쳤습니다.’
부처님께서 위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 하늘을 아느냐? 이 사람이 곧 너의 도반이니 계율을 보전한 공덕으로 곧 천상에 태어났다.
지금 그대는 비록 여기에 와서 나를 보았다 해도 나와는 거리가 매우 멀고,
저 사람은 비록 목숨을 잃었다 해도 항상 내 곁에 있다.
그대는 지금 나를 보지마는 그것은 곧 내 육신의 형체를 보는 것이니, 어떻게 참다운 계율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곧 너의 큰 스승이니,
만약 계율을 잘 지켜 계속하여 실천하면 그것은 곧 여래의 법신(法身)이 항상 머물러 있어 멸하지 않는 것이니라.’
대개 계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속계(俗戒)요, 둘째는 도계(道戒)며, 셋째는 정계(定戒)이다.
오계(五戒)ㆍ팔계(八戒)ㆍ십계(十戒)ㆍ구족계(具足戒) 등을 속계라 하고, 무루(無漏)의 사제(四諦)를 도계라고 하며, 삼매에 대한 선(禪)의 생각을 정계라고 한다.
지혜[慧]로써 계율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무루가 되게 하면 곧 도계(道戒)에 합해진다. 성문(聲聞)집안의 계율은 무릎 아래에 있는 꽃[膝華]과 같아서 움직이면 흩어져버리고, 보살[大士]이 계를 지남은 머리 위에 꽂은 꽃과 같아서 다니거나 멈추거나 간에 동요하지 않는다.
소승(小乘)은 몸을 단속하지만 움직이면 위의가 어긋나고 보살의 원심(願心)은 바깥의 법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대승과 소승의 궤법이 서로 다른 것은 형상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안과 밖이 다르다 해도 모두 열반에 이를 수 있으니 그러므로 계율을 생각함이라고 말한다.”
또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에서 말하였다.
“또 도에 가까워지고자 하면 마땅히 네 가지 기쁨이 있어야 하나니, 그것을 잘 생각하고 행하라.
첫째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에 기쁨을 여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생각하고 마음에 기쁨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승가 대중을 생각하고 마음에 기쁨을 여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계율을 생각하고 마음에 기쁨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쁨을 생각하고 반드시 그것들을 구족(具足)하게 하면 스스로 분명하게 깨달을 것이다. 부디 바른 법도를 생각하여 몸의 요점을 알기 바라면 지옥ㆍ축생ㆍ아귀의 길을 끊어 없앨 수 있을 것이요, 비록 천상과 인간 세상을 왕래하더라도 일곱 생(生)를 지나지 않고스스로 고제(苦際)를 끊을 것이다.”
[염시(念施)와 염천(念天)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마땅히 생각하는 것에는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마땅히 부처님의 경계(經戒)를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땅히 부처님의 지혜를 생각하는 것이요,
넷째는 마땅히 부처님의 은혜는 너무도 커서 갚기 어려운 것임을 생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마땅히 부처님의 정진과 나아가 열반까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마땅히 비구 승가를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마땅히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땅히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요,
넷째는 마땅히 동문수학하는 친구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마땅히 일체 사람들을 모두 해탈시켜 모든 고통을 여의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 『처처경(處處經)』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큰 바닷가의 모래를 이루 다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전후에 지은 선악(善惡)의 재앙과 복에 대해서도 이루 다 헤아려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 마칠 때 악을 지었으면 나쁜 곳을 만나게 되고 선을 지었으면 좋은 곳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재앙과 복은 모두 마리 마련된 곳이 있고, 또한 부모ㆍ형제ㆍ처자 등 권속들까지도 미리 다 마련되어 있어서 도를 증득하면 그것이 모두 정지되지만,
만약 도를 증득하지 못하면 곧 이런 것들이 다 끊어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스스로의 몸이 덧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느나라.’
그러자 어떤 비구 한 사람이 곧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항상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기간은 기껏해야 오십 년 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그러자 또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삼십 년은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또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십 년은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또 다른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일 년은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또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한 달은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또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하루는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또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한 시간은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또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숨 한 번 쉬는 동안은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이 곧 뒷세상이니라. 사람의 목숨은 너무도 빨라서 호흡 사이에 달려 있느니라.’
또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설법하는 비구는 또한 마땅히 항상 생각해야 한다.
즉, 이 몸은 괴롭고 공(空)한 것이며, 덧없는 것이요 나[我]란 것도 없는 것이며,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관찰하여 그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
왜냐 하면 열두 가지 생각을 꼭 얻어야 성인의 법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무엇이 그 열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기 자신을 성취시키겠노라고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다른 사람 성취시킬 것을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사람의 몸 얻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넷째는 종성가(種姓家)에 태어나기를 생각하며,
다섯째는 불법 가운데 신심을 얻기를 생각하고,
여섯째는 태어나는 곳에 그 공(功)을 더하지 않고 깨닫는 법을 얻기를 생각하는 것이니라.
일곱째는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감관이 완전하게 갖추어지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여덟째는 불ㆍ세존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만날 수 있기를 생각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바른 법 연설하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열째는 설한 법이 항상 오래도록 머물러 있기를 생각하는 것이며,
열한째는 법을 오래도록 닦아 행하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열두째는 항상 모든 중생들을 가없이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기를 생각한 것이니라.
그런 까닭에 이 열두 가지 생각을 원만하게 갖추면 성인의 법을 얻을 수 있느니라.”
3.4. 발원연(發願緣)
불과(佛果)는 아주 멀고 멀어서 거기에 오르는데에는 계단이 있고, 법운(法雲)은 지극히 높고 높아서 거기에 이르는데에는 절차가 있다.
그런 까닭에 큰 정성을 내면 곧 현묘한 덕은 미래 세상을 버추고 처음으로 큰 서원을 세우면 곧 미묘한 소원은 허공 세계에 두루하게 된다.
한 생각이라도 뜻을 일으키면 곧 진겁(塵劫)의 상서로운 꽃이요,
반 시각이라도 정생을 다하여 실천하면 곧 대천(大千)세계의 감로(甘露)이다.
대개 이것은 대승의 뿌리이고 터전이며 종지(種智)의 나루요 거리[衢]인 젓이다.
또 『지지론(地持倫)』에서 말하였다.
“보살의 발원에는 대략 말하면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발심원(發心願)이요, 둘째는 생원(生願)이며, 셋째는 경계원(境界願)이요, 넷째는 평등원(平等願)이며, 다섯째는 대원(大願)이다.
저 보살은 처음에 최상의 보리심(菩提心)을 내었으니 이것을 발심원이라고 말하고,
미래 세상의 중생을 위하여 좋은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나니 이것을 생원이라고 말하며,
모든 법과 한량없이 많은 등류의 여러 가지 선근(善根)을 바르게 관찰하고 경계(經戒)생각하기를 원하나니 이것을 경계원이라고 말하고,
미래 세상의 일체 보살들이 일을 잘 섭수하기를 원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평등원이라고 말하며, 대원이라고 하는 것은 곧 평등원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또 열 가지 큰 서원을 말한다.
첫째, 온갖 종류로써 한량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원한다.
둘째,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보호하고 지니기를 원한다.
셋째,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 통달하기를 원한다.
넷째,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 마침내 반열반(般涅槃)에 들기를 원한다.
다섯째, 보살의 일체 바른 행 수행하기를 원한다.
여섯째, 일체 중생을 성숙(成熟)시키기를 원한다.
일곱째, 일체 세계에서 다 나타나 변화하기를 원한다.
여덟째, 일체 보살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방편을 가지고 대승(大乘)으로 제도하기를 원한다.
아홉째, 온갖 바른 행(行)과 방편에 걸리는 것이 없기를 원한다.
열째, 최상의 경지인 정각(正覺) 성취하기를 원한다.
이 보살은 초지(初地)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펀과 깨끗한 믿음을 현재에 수행하고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열 가지 큰 서원을 세운다.
첫째,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모든 부처님 공양하기를 원한다.
둘째,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 수호(守護)하기를 원한다.
셋째, 모든 부처님께 일찍이 없었던 법 굴리기를 권청(勸請)한다.
넷째, 보살의 바른 행(行)을 따르고 수행한다.
다섯째, 일체 가세간[器界]을 다 완전하게 성숙시키기를 원한다.
여섯째, 일체 세계에 다 변화된 몸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일곱째, 스스로 부처님의 세계를 깨끗하게 하기를 원한다.
여덟째, 일체 보살의 동일한 방편을 가지고 대승으로써 교화하기를 원한다.
아홉째,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되 모든 것이 헛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열째, 일체 세계에서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증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일 짓기를 원한다.”
게송을 말한다.
목장(牧杖)엔 믿음이 제일 급하고
조현(調絃)엔 사치하지 않는 게 가장 귀하다네.
등원심(騰猨 :心)을 어떻게 제어할거나.
일마심(逸馬:心)란 본래 염추게 하기 어려운 것을.
마음이 치달려 소리와 색(色)만 익히고
관개(冠蓋)는 호화로움을 서로 다투네.
이미 왕손(王孫)의 집에 들어왔건만
도로 계륜(季倫)의 집으로 가려고 하네.
고요한 마음은 업장의 번뇌를 맑게 하고
생각을 덜면 몸의 티끌 제거하네.
바라노니 이 칠각지(七覺支)를 의지하고
때로 작용하되 세 가지 삿됨을 변하기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