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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입문 하권
제39장 나쁜 장애를 대치하는 법
대치對治란 병의 증상에 따라 상반되는 약으로 상대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뜨거움은 차가움으로 다스리고, 차가움은 뜨거움으로 다스리는 것이 대치이다.
그러므로 지止를 행하다 병이 생기면 관법으로 다스리고, 관觀을 행하다 병이 생기면 지법으로 다스린다.
지관문止觀門에서 열다섯 가지 방법을 세운 것은 바로 열다섯 가지 병의 증세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의술에는 바로 대치하는 방법뿐 아니라 바꾸어 치료하는 방법(轉治)과 겸해서 치료하는 방법(兼治)도 있다.
바꾸어 치료한다는 것은 병이 바뀌면 치료법도 바뀌는 것을 말하고, 겸해서 치료한다는 것은 병이 두세 가지 증상을 겸하고 있으면 치료법 역시 겸하는 것이다.
법문의 방편도 이와 같으니 해당하는 사람에 따라서 잘 분별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약 지나치게 날카로운 마음에서 각관覺觀이 일어나는 병이 있다면 응당 호흡을 세도록(數息) 가르쳐야 한다.
왜 그런가?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세면서 중간에 잊어버리지 않으면 어지러운 생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살피면서 숫자를 분명하게 세면 능히 날카롭게 따지는 마음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흡을 세는 법으로 그 병을 없애는 것이다.
만일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운 각관의 병이 있다면 호흡을 따라야만(隨息)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따라 마음이 항상 호흡을 의지하면, 호흡이 거칠 때에는 마음도 따라 거칠어지고 호흡이 가늘 때에는 마음도 따라 미세해진다.
마음과 호흡이 미세할 때 각과 관을 깨뜨릴 수 있고, 마음이 밝은 거울처럼 고요해지고, 호흡의 길고 짧음과 가고 옴을 알게 되며, 비추는 작용이 분명할 때 혼침을 깨뜨릴 수 있다.
(이런 병에) 만약 호흡을 세는 법을 닦으면 혼침을 부추기는 허물이 있고, 호흡을 관찰하는 법을 수행하면 들뜨고 어지러워지는 과실이 있으니, 그것은 잘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호흡을 따르는 법만이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운 각관의 병을) 바로 대치할 수 있다.
만일 어둡고 가라앉은 마음에서 각관이 일어나는 병이 있다면 호흡을 관찰해야만(觀息) 한다.
숨이 들어올 때 이 숨이 어디로부터 와서 중간에 어디를 거쳐 어디까지 이르는지 자세히 관찰한다. 그 숨이 나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이렇게 그 근원을 찾아보면 나가도 흩어짐이 없고 들어와도 쌓이는 것이 없어 정해진 모습을 볼 수 없다. 밝은 마음으로 관찰하고 비추면 마음의 눈이 곧장 열리기 때문에 혼침을 깨뜨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호흡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 산란함을 부순다.
그러므로 호흡을 관찰하면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다.
만일 바깥 대상에 대해 탐욕이 많고 음란한 마음이 쉬지 않으면 더러움을 살피는 구상관九想觀을 닦아야만 한다.
생각만으로 대적할 수 없다면 직접 무덤으로 가서 시신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그 시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인연 있는 자라 여기고 위아래를 자세히 보며 안팎으로 잘 헤아린다. 그러면 부풀어 오르고 썩어 문드러져 피고름이 흘러나오며 대소변이나 탐내는 온갖 벌레들이 갉아 먹는 것만 보게 된다.
“지금 내가 반연하는 대상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니 어디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면 음란한 마음이 저절로 쉬게 된다.
그러므로 구상관으로 그런 병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안팎으로 탐욕을 부르는 번뇌의 병이 있다면 배사背捨 등의 관법을 행해야만 한다.
내 몸의 더러움을 자세히 관찰하여 안(자신)에 대한 탐욕을 부수고, 또 바깥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여 바깥에 대한 탐욕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초배사初背捨이니, 더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안팎의 색을 관찰하여 안팎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병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배사로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다.
만일 온갖 곳에 모두 탐욕과 애착을 일으킨다면 모든 곳을 반연하는 대부정관大不淨觀을 행해야 한다.
모든 남자와 여자, 자기 몸과 다른 사람의 몸, 토지와 집과 의복 등 세간의 모든 존재를 관찰하여 그것은 모두 더러운 것으로 어느 한 곳도 욕심내고 집착할 것이 없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온갖 곳에 대해 모두 싫어하여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긴다. 싫어하여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기면 곧 탐욕이 일어날 만한 연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대부정관으로 그 병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도리에 맞지 않게 잘못 성내는 병이 있다면 중생을 반연한 자심(衆生緣慈)을 닦아야만 한다.
가까운 한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취하여 그것을 반연해 선정에 들어간다.
가까운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별 감정이 없는 사람이나 원한이 있는 사람까지 모두 즐거움을 얻게 하여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게 하여 기쁘다는 생각을 낼 수 있으면 중생들 틈에서 성내고 괴롭히고 원수지고 해치려던 마음이 저절로 파괴된다.
그러므로 자심관慈心觀으로 성내는 마음의 병을 없앨 수 있다.
만일 그릇된 짓을 하는 사람을 보고 이치에 맞게 성을 낸다면 법을 반연한 자심관(法緣慈觀)을 닦아야만 한다.
“오음은 헛되고 거짓된 것이라서 중생을 찾아볼 수 없는데, 어떻게 지켰느니 범했느니 하며 시비할 수 있겠는가? 다만 느낌 가운데 법의 즐거움을 반연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심과 사랑하는 생각을 베풀어야지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이렇게 관하면 시비가 저절로 없어지고 성내는 마음도 자연히 쉬게 된다.
이것이 법을 반연한 자심을 행하여 그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일 법에 대해 논쟁하며 성을 낸다면 반연함이 없는 자심(無緣慈)을 닦아야만 한다.
왜 그런가?
이 사람은 자기 견해를 옳다고 여겨 자신과 같으면 기뻐하고 자신과 어긋나면 성을 내는데, 기뻐하거나 성내는 마음은 법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 것이다.
만약 반연함이 없는 자심을 행한다면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둘 곳이 사라져 온갖 법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게 된다.
이미 기억하고 생각함이 없는데 어찌 말다툼이 일어나겠는가? 큰 사랑과 평등으로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이 없게 한다.
그러므로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삿된 견해가 있다면 삼세三世의 십이인연을 관찰해야만 한다.
과거에 두 가지가 있고, 현재에 여덟 가지가 있고, 미래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이것이 십이인연이다. 삼세가 서로 원인이 되어 영원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십이인연은 다음과 같다.
과거의 번뇌를 무명無明이라고 하고,
과거의 업을 행行이라 한다.
현세에서 처음 모태에 드는 것이 식識이고,
태에 들어가 눈ㆍ귀ㆍ코ㆍ혀 네 근이 갖춰진 때가 명색名色이며,
네 가지 근이 갖춰졌어도 촉감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육입六入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분별하기 전을 촉觸이라 하고,
물들어 익숙해진 것을 오로지 좋아하는 것이 수受이다.
다섯 가지 욕망을 익히고 가까이하는 것이 애愛이고,
안팎으로 탐내며 구하는 것이 취取이며,
신ㆍ구ㆍ의 삼업을 일으키는 것이 유有이다.
현세의 식이 내세의 생生이 되고,
현세의 명색ㆍ육입ㆍ촉ㆍ수는 내세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된다.
따라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식을 연하여 명색이, 명색을 연하여 육입이, 육입을 연하여 촉이, 촉을 연하여 수가, 수를 연하여 애가, 애를 연하여 취가, 취를 연하여 유가, 유를 연하여 생이,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는 것이다.
이 십이인연법은 그 모습이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영원한 것도 아니고,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완전히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삼세가 서로 원인이 되어 돌고 돌아 끝이 없는 것이다. 만약 십이인연을 잘 관찰할 수 있다면 삿된 견해의 병인 단견과 상견을 다스릴 수 있다.
만일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의 삿된 견해를 일으킨다면 과보果報의 십이인연관을 관찰해야만 한다. 현세의 가라라歌羅邏 때를 무명이라 하고, 나아가 태어남ㆍ늙음ㆍ죽음 등 현세에 존재하는 것들은 오음ㆍ십이입ㆍ십팔계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모두 인연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 가라라 때에는 곧 명命ㆍ난暖ㆍ식識 세 가지만 있다. 따라서 무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연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에 고유한 자기 성품이 없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나아가 늙음과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공도 아니고 존재도 아님을 안다면 공견空見과 유견有見 두 가지 견해의 병을 깨뜨릴 수 있다.
만일 세간의 성품을 헤아리는 삿된 견해가 있다면, 그는 미세한 본성이 만법을 낳을 수 있다고 헤아리게 된다.
그럴 때는 일념一念의 십이인연관을 닦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일념 가운데 십이인연이 갖춰져 있음을 깊이 관찰하면 일념은 십이인연이 아니요, 십이인연은 일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념에 의거하여 십이인연을 설하고, 십이인연에 의거하여 일념을 설한다.
따라서 일념에는 고정된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이미 일념에 고정된 성품이 없다면 세간의 성품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관으로 그 병을 깨뜨릴 수 있다.
만일 어둡고 가라앉아서 캄캄하게 막히는 장애가 있다면 응신불의 삼십이상 중 먼저 한 모습을 취해 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면 눈을 감고 먼저 부처님 미간의 백호상을 관찰한다.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의 불상을 마주한 뒤 한마음으로 그것을 반연한다.
이렇게 하여 선정에 들었는데도 여전히 명료하지 않으면 눈을 뜨고 쳐다본 후 눈을 감고 다시 관찰한다.
이와 같이 정진하면 하나의 상호가 분명해진다. 이렇게 차례대로 삼십이상을 두루 관찰하여 마음의 눈이 밝게 열리게 하면 어둡고 가라앉고 침침하고 졸리던 마음을 깨뜨릴 수 있다.
염불의 공덕이 죄의 장애를 없앤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일 나쁜 생각의 장애가 있다면 보신불의 공덕을 생각해야만 한다.
바르게 염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십력ㆍ사무소외ㆍ십팔불공법ㆍ일체종지로 원만히 법계를 비추고, 항상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두루 색신을 시현하여 일체에게 이익을 주며, 그 공덕이 무량하고 불가사의함을 반연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즉시 장애를 대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염불공덕은 뛰어난 선법善法을 반연하여 따르는 가운데 생겨나는 심수법이고, 악념의 사유는 악법惡法을 반연하여 따르는 가운데 생겨나는 심수법이기 때문이다.
선은 악을 깨뜨릴 수 있으니, 마음을 항상 선한 연에 머물게 하면 흠모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겨나 찰나찰나 생각하는 가운데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만일 경계가 핍박하는 장애가 있다면 법신불을 생각해야만 한다.
법신불이란 바로 평등한 법성이니,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모양과 빛깔도 없고 텅 비고 고요한 무위無爲이다. 무위 가운데 이미 경계가 없는데 무엇이 핍박하겠는가?
만일 경계가 공함을 안다면 곧 이것이 대치한 것이다. (경계가 핍박하는 장애가 있을 때) 만약 삼십이상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장애를 대치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다.
왜 그런가?
이 사람은 이미 경계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데 여기에 다시 상호까지 취한다면 이로 인해 마귀가 붙어 어지럽히게 되고 그 장애가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공을 관하여 경계를 제거하고, 법신불의 한량없는 공덕을 염하는 일에 마음을 두면 중죄가 없어지고 모든 장애가 제거된다.
제40장 편안한 마음으로 선을 닦음
선악을 이미 증험했다면 그 편의에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닦아야 한다.
선근이 발생했을 때는 그 현상을 따라 알아차려야 한다. (예를 들면)
“과거에 이미 수식관을 닦은 적이 있으니 금생에서도 다시 수식관을 닦아야 옳다. 과거의 습기가 서로 도우면 선정이 쉽게 성취되고 이로 인해 도에 들어가게 된다.”고 알아야 한다.
나쁜 현상이 발생했을 때는 법에 따라 그것을 대치해야 하고, 그 병이 제거된 뒤에는 곧 더욱 정진하고 이로 인해 선정을 얻어야 한다.
이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닦고 익히는 것이라 한다.
또한 수행자가 스스로 얕은 곳에서 깊은 곳까지 모든 법을 빠짐없이 닦고자 하면
마땅히 아나파나문 가운데 수식관數息觀부터 가르쳐 사선과 사공정을 증득하게 하고,
다음에 수식관隨息觀을 가르쳐 십육특승을 증득하게 하고,
다음에 관식을 가르쳐 통명관을 증득하게 하고,
다음에 부정관을 가르쳐 구상과 배사 등의 선에 들어가게 하고,
다음에 마음의 성품을 관하여 구종대선九種大禪에 들어가게 해야 한다.
수행자는 깨닫기 쉬운 하나의 법문을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정진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제41장 병을 치료하는 법
무릇 도를 닦다 보면 간혹 본래 가지고 있던 병이 지금 마음을 잘못 써 마음과 호흡이 거칠게 요동침으로 인해 발동하여 병이 되는 경우가 있고, 혹은 몸ㆍ호흡ㆍ마음이 잘 조절되지 못하여 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대四大가 늘거나 주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오장五臟으로부터 (병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오근五根으로부터 (병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외상이나 내상으로 인해 (병이) 발생하기도 하고, 혹은 귀신으로 인해, 혹은 마귀의 짓으로 인해, 혹은 업보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이를 잘 분별해 병에 따라 즉시 치료하면 쉽게 낫지만 오래 경과해 병이 깊어지면 치료해도 낫기가 어렵다.
이미 병의 원인을 알았다면 방법을 써서 그것을 치료해야만 한다.
그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으니
기식법氣息法을 쓰는 경우가 있고,
가상법假想法을 쓰는 경우가 있고,
주술법呪術法을 쓰는 경우가 있고,
마음으로 경계를 주관하여 치료하는 경우가 있고,
관찰하고 분석하여 치료하는 경우가 있다.
무릇 이 다섯 가지 법의 요지를 잘 알면 즉시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다면 또한 사용할 수가 없다.
(첫째) 어떻게 기식氣息으로 병을 치료하는가?
취吹ㆍ호呼ㆍ희嘻ㆍ가呵ㆍ허噓ㆍ희呬의 여섯 글자에 담긴 기의 비결을 말한다.
‘취’로 한기를 없애고, ‘호’로 열기를 없애고, ‘희嘻’로 통증과 풍증을 없애고, ‘가’로 번열을 없애고 또 기를 내릴 수 있으며, ‘허’로 염증을 흩어 버리고 또 과식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으며, ‘희呬’로 피로한 부분을 보충한다.
또 ‘호’와 ‘취’ 두 가지 기로 심장을 치료하고, ‘허’로 간을 치료하고, ‘가’로 폐를 치료하고, ‘희嘻’로 비장을 치료하고, ‘희呬’로 신장을 치료한다.
또한 열두 가지 호흡으로 치료하는 법이 있다.
즉 올리는 호흡(上息)ㆍ내리는 호흡(下息)ㆍ채우는 호흡(滿息)ㆍ메마른 호흡(燋息)ㆍ늘어나는 호흡(增長息)ㆍ없어지는 호흡(滅壞息)ㆍ따뜻한 호흡(煖息)ㆍ차가운 호흡(冷息)ㆍ부딪히는 호흡(衝息)ㆍ지탱하는 호흡(持息)ㆍ조화로운 호흡(和息)ㆍ보충하는 호흡(補息)이다. 이 열두 가지 호흡은 모두 마음으로 상상하여 사용한다.
가령 올리는 호흡은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치료하고, 내리는 호흡은 허공에 매달린 것을 치료한다.
채우는 호흡은 파리하게 마른 것을 치료하고, 메마른 호흡은 붓고 살진 것을 치료한다.
늘어나는 호흡은 줄어드는 기운을 치료하고, 없어지는 호흡은 늘어나는 기운을 치료한다.
따뜻한 호흡은 냉기를 치료하고, 차가운 호흡은 열기를 치료한다.
부딪히는 호흡은 막히고 맺혀 통하지 않는 것을 치료하고, 지탱하는 호흡은 전율하고 요동치는 것을 치료한다.
조화로운 호흡은 사대의 부조화를 통틀어 치료하고, 보충하는 호흡은 사대를 보충해서 북돋워 준다.
(둘째) 어떻게 가상假想으로 병을 치료하는가?
『잡아함경』에 일흔두 가지 치료법이 있으나 요즘 사람들은 근기가 둔하여 그 요지를 알기가 어렵다.
(셋째) 어떻게 주술呪術로 병을 치료하는가?
비록 여러 경전에 갖가지 방법이 나와 있으나 그 요지를 알기가 어렵다.
(넷째) 어떻게 마음으로 경계를 주관하여 병을 치료하는가?
비유하자면 국왕이 이르는 곳에는 도적들이 흩어져 도망치는 것과 같다. 마음은 몸의 왕이니 병이 생긴 곳에 마음을 머물고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게 하면 병이 저절로 없어진다. 혹은 마음을 단전에 두거나 혹은 마음을 발바닥에 두어 안정시키면 모든 병을 통틀어 치료할 수 있다.
(다섯째) 어떻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병을 치료하는가?
병을 잡아들이려고 지혜로 살폈을 때 병의 실체가 이미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사대의 병환은 자연히 소멸한다.
만약 그것이 귀신이나 마귀의 짓이라면 마땅히 굳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고, 또 관조觀照 등의 법으로 그 치료를 도와야 한다.
만약 그것이 숙세의 업으로 생긴 병이라면 반드시 복을 닦으며 참회하거나 전독轉讀하는 등의 법을 써서 그 치료를 도와야 한다.
무릇 이런 치료법을 사용하는 자가 병의 원인을 잘 분별하고 거기에 알맞은 방편을 선택해 믿고 시행하며 정진한다면 땀을 내고 차도를 보이게 될 것이니, 찰나찰나 항상 대상을 생각하면서 빈틈없이 오래도록 실행하라.
이익이 있으면 부지런히 행하되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손해가 있으면 버리되 의심하거나 비방하지는 말아야 한다.
제42장 마사魔事를 밝힘
마라魔羅는 중국말로 ‘살자殺者’이다. 공덕의 재산을 강탈하고 지혜의 생명을 죽이므로 마라라고 한다.
마魔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마煩惱魔,
둘째는 음입계마陰入界魔,
셋째는 사마死魔,
넷째는 욕계천자마欲界天子魔이다.
번뇌마와 음입계마 두 가지는 자기 마음에서 생긴다. 만약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허공처럼 보아 덮이거나 막히지 않을 수 있다면 마귀의 짓을 파괴할 수 있다.
사마는 자기 몸에서 생긴다. 만약 잘 분별하고 법에 의지하여 다스린다면 마귀의 짓을 파괴할 수 있다.
천마는 바로 파순波旬이니,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주인으로서 불법의 원수이다. 그는 항상 수행자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날까 두려워하기에 모든 귀신의 권속들을 시켜 괴롭히고 어지럽히니, 법 가운데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귀신마鬼神魔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정미精媚, 둘째는 부척귀埠惕鬼, 셋째는 마라魔羅이다.
무엇을 정미精媚라 하는가?
십이지(十二時)에 해당하는 짐승들이 갖가지 형상으로 변화해 나타나는데, 사랑스러운 몸으로 변해 수행자를 미혹시키기도 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어떻게 그것을 식별하는가?
묘시卯時에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여우와 토끼 같은 부류이니, 그들의 이름을 부리면 감히 다시 나타나지 못한다. 십이지에 해당하는 짐승들도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시는 쥐, 축시는 소, 인시는 호랑이와 같은 종류이다.
무엇을 부척귀埠惕鬼라 하는가?
이것 역시 잘 변화하니, 작은 벌레처럼 사람의 머리나 얼굴에 달라붙어 콕콕 찌르거나 스멀스멀 기어 다니기도 하고, 혹은 사람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를 세게 때리기도 하고, 혹은 갑자기 끌어안기도 하고, 혹은 반복해서 말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짐승의 형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면 수행자는 곧바로 알아차리고 한마음으로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나는 지금 너를 알고 있다. 너는 바로 이 염부제에서 불을 먹고 향기를 맡으며 납길지臘吉支를 훔치고 사견으로 파계를 즐기는 종자이다.
나는 지금 계를 지키니 끝내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출가자라면 계의 서문을 암송하고, 재가자라면 삼귀의, 오계와 보살의 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 등을 암송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곧 물러간다.
무엇을 마라라고 하는가?
그들은 간혹 감정을 거스르는 짓을 저질러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제정신을 잃게 하기도 하고, 혹은 감정에 순응하는 일을 하여 사람들이 애착하며 도를 잃게 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세 가지 법을 사용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첫째,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아는(知) 것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면 그것은 곧 사라진다.
둘째,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 마음을 돌이켜 관하기만 하면 생기는 곳을 볼 수 없는데 무엇에 대해 괴로워하고 어지러워하겠는가? 이와 같이 관할 때 받아들이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게 되어 그것이 곧바로 저절로 사라진다.
셋째, 위와 같이 관해도 여전히 물러나지 않으면 마땅히 바른 생각을 되새기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그러면 불법이 눈앞에 나타나고 마귀는 스스로 물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