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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6권
5. 십유편(十喩篇)[1]
5.1. 보살의 주장과 그 도사의 주장에 열 가지 다른 점에 대한 대답
황건(黃巾)을 쓴 이중경(李仲卿)의, 학문은 관규(管窺)만도 못하고 지혜는 신도(信度)에 부끄러운 이로서 흰 새의 날개를 자랑하여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을 놀라게 하기를 바라고 횃불의 빛을 짊어지고 해와 달의 빛남을 다투려 하여서 이에 열 가지의 다름과 아홉 가지 미(迷)함을 지어서 지극한 성인을 폄량(貶量)하려 하였기에 내가 그의 무식함을 개탄하여 저가 무슨 죄인가를 생각하여 열 가지의 깨우침을 들어 깨닫게 하고, 아홉 가지 잠언으로 경계하여서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써서 밝히니, 군자는 이의 취지를 자세히 할지니라.
1) 외적인 첫 번째 다른 점
[주] 태상노군은 신(神)을 현묘한 옥녀(玉女)에게 의탁하였으며 왼쪽 옆구리를 가르고 나왔다.
석가모니는 마야(摩耶)부인에게 태를 의지하였으며 오른쪽 옆구리를 열고 나왔다.
내적인 첫 번째 깨우침
노군은 상(常)에 거슬려서 목녀(牧女)에게 의탁하여 왼쪽으로 나왔고, 세존께서는 화(化)에 순응하여서 성모(聖母)로 인하여 오른쪽으로 나왔다.
보살이 말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노경유(盧景裕)와 대선(戴詵)과 위처현(韋處玄) 등의 『집해오천문(集解五千文)』과 양나라 원제(元帝)와 주홍정(周弘政) 등의 『고의류(考義類)』 소(疏)에
‘태상(太上)에 네 가지가 있으니, 3황(皇)과 요와 순이다. 상고(上古)에 이러한 큰 덕의 임금이 있어서 만 백성들 위에 임하였기에 태상이라 한다’ 하였다.
곽장(郭莊)은
‘시대의 현명한 자는 임금이 되고 재주가 세상에 맞지 않는 자는 신하가 된다.
그런데 노자는 제(帝)도 아니고 황(皇)도 아닌데 네 가지의 제한이 있지 않다.
그런데 무슨 전거(典據)가 있어서 문득 태상이라 일컫는가?’ 하였다.
도가(道家)의 『현묘경(玄妙經)』과 『중태경(中台經)』과 『주도옥궤경(朱韜玉机經)』 등의 경과 아울러 『출색기(出塞記)』를 검사하여 보니,
‘노자는 이씨(李氏) 여인의 소생이다’ 하였고
‘현묘 옥녀가 있다’고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미 정설이 아닌데 더욱이 빌려서 잘못 말하였다.
『선인옥록(仙人玉籙)』을 조사하여 보니,
‘선인은 아내가 없고 옥녀는 지아비가 없어서 비록 여자의 형체를 받았으나 필경에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만일 이러한 상서로움이 있었으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 하겠는데 어찌하여 『사기(史記)』에 이러한 글이 없고 『주서(周書)』에 싣지 않았는가?
허망한 것을 구하여 사실인 양 책하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자의 말이다.
『예(禮)』에
‘관직에서 물러나 지위가 없는 자를 왼쪽으로 옮긴다’ 하였으며,
『논어』에 ‘왼쪽으로 옷깃을 하는 자는 예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니 만일 왼쪽이 오른쪽을 이긴다고 하면 도사들이 도를 행할 적에 어찌하여 왼쪽으로 돌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나라의 조서(詔書)에다 ‘오른쪽과 같다’ 한 것은 아울러 하늘을 순종하는 상도(常道)이기 때문이다.”
2) 외적인 두 번째 다른 점
[주] 노군은 교훈을 드리움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장생(長生)을 열었다.
석가는 가르침을 베풀 적에 불멸불생(不滅不生)의 영멸(永滅)을 보였다.
내적인 두 번째 깨우침
[주] 이담(李聃)의 타고난 바탕은 생이 있고 멸이 있어서 환생(患生)의 생을 두려워하고 근심하였기에 도리어 머리가 희어졌다[白首]고 불렸다.
석가모니의 드리운 행적은 멸을 보이고 생을 보이면서 적멸(寂滅)의 멸로 돌아갔기에 이에 금구(金軀)를 빛냈다.
보살이 말하였다.
“노자는 ‘큰 근심은 몸이 있는 데서 생긴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몸이 없게 할 수 있다면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근심이 말미암는 것은 몸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노자가 이미 몸이 있음을 근심하면서 번뇌가 없는 것을 구하고자 하여 머리털이 희어짐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세속과 다르지 않다.
그가 만일 오래 살기를 말하였으면 무엇 때문에 일찍 죽었는가?”
3) 외적인 세 번째 다른 점
[주] 노자는 생에 응하여 이 중국[東夏]에서 나왔다.
석가모니는 행적을 내리어 저 서융(西戎)에서 나왔다.
내적인 세 번째 깨우침
[주] 이이(李耳)는 형체를 낳아서 동주(東周)의 고현(苦縣)에서 살았다.
석가모니는 행적을 내리어 중하(中夏)의 신주(神州)에서 나왔다.
보살이 말하였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천(千)과 천의 거듭된 수이기에 3천(千)이라 말하고, 이에 다시 천을 곱해서 대천(大千)이라 말한다.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이 그 중간에 있다’ 하였다.
『누탄경(婁炭經)』에서는
‘파밀고원의 동쪽을 진단(震旦)이라 이르니, 그것은 해가 처음 나와서 동쪽부터 비추기에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어떤 책에는 그러기에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러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심에 다 중주(中州)에 나고 변읍(邊邑)에는 나지 않는다. 만일 변읍의 땅에 나면 땅이 기울어진다’고 하였다.
『법원전(法苑傳)』ㆍ『고승전(高僧傳)』ㆍ『영초기(永初記)』 등을 고찰하여 보니, 모두
‘송(宋)나라의 하승천(何承天)ㆍ지엄(智嚴)ㆍ혜관(慧觀) 법사가 함께 변지(邊地)와 중앙을 논하였을 적에 법사가
≺서역(西域)의 땅에는 입하(立夏)의 날[어떤 책에는 하지(夏至)의 날이라 하였음] 정오에 나무를 세우면 그 나무는 그림자가 없는데, 한나라 영대(影臺)에는 입하 날에[어떤 책에는 하지의 시기라 하였음] 표(表)를 없애면 오히려 남은 그늘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산경(算經)』에 의하면
‘하늘 위의 한 치가 땅 아래에서는 천 리라 합니다’ 하니,
하승천이 이에 깨달아서 중간과 변지의 이론이 비로소 정하여졌다.
일을 가지고 따지면 중천축국(中天竺國)이 땅의 중간이니 진단은 동쪽이 된다 하겠다. 어느 책에는 본래 중심에 있기에 지방별(地方別)로는 바다에서 거리가 5만여 리라 하였다. 그런데 만일 이 땅에 준하면 동쪽으로 바다가 된다. 그러니 가유라위국을 서쪽이라 할 수 없음은 그 이치가 징험한다 하겠다.”
4) 외적인 네 번째 다른 점
[주] 노군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때니 융성한 주나라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주나라의 장왕(莊王) 때가 되니 계빈국(罽賓國)의 교주(敎主)가 되었다.
내적인 네 번째 깨우침
[주] 노자[伯陽]는 직책이 말단 신하에 처하여서 장리(藏吏)에 충당되었으며 문왕의 때에 있지 않았고 또한 융성한 주나라의 종사[師]도 아니었다.
석가모니는 지위가 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몸소 특히 높은 분임을 증명하셨고, 나심이 주나라 소왕(昭王)의 전성인 해에 해당하였고 염부제(閻浮提)의 교주가 되었다.
보살이 말하였다.
“『전한서(前漢書)』에
‘공자는 상상류(上上流)가 되니 이 분이 성인이요, 노자는 중상류(中上流)가 되니 이 분은 현인(賢人)이다’라고 하였다.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은
‘노자는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교론(二敎論)』에
‘주사(柱史)는 조정에 있어서 본래 해찬(諧贊)이 아니다. 주나라에서 나와 진(秦)의 땅에 들어갔으며 윤희(尹喜)를 위하여 도를 말하였으나 제후에게 소문이 나지도 않았으며, 천자(天子)를 보지도 아니하였다.
그리고 주나라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 역사에 분명한 증거가 없어서 정설(正說)에 부합(符合)되지 않으니 그래서 되겠는가?’ 하였다.
『사기(史記)』와 왕검(王儉)이 지은 『백가보(百家譜)』에
‘이씨 노자는 고양(高陽)의 후예이다. 그의 시조 구요(咎繇)는 순임금의 이관(理官)이 되었기에 그로 인하여 씨가 되었다’ 하였다.
이씨의 일어남은 노담으로부터 일어났다. 노담의 전에는 이(李)씨라는 성이 있지 않았고 다만 이(理)를 씨로 하였는데, 노담이 자두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씨라고 일컬었으며,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으로서 위(魏)나라 문후(文侯)에게 벼슬하였으니 대개 춘추(春秋)시대의 말기로서 6국 시절의 사람이다.
주나라 문왕의 시대에는 이미 이씨라는 성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담이 나와서 주나라의 스승이 되었겠는가? 연대가 어긋나서 분명한 의거(依據)가 없다.
『포박자(抱朴子)』에
‘주나라 문왕의 세상에 나왔다’ 하였고,
혜강(康)과 황보밀(皇甫謐)이 모두
‘노자가 은(殷)나라 말기에 나왔다 한 것은 대개 도교의 거짓된 글로서 국전(國典)에 실린 것이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5) 외적인 다섯 번째 다른 점
[주] 노군은 주나라 문왕의 시대에 나왔으며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난 것이 5백여 년이다.
석가모니는 오랑캐 나라의 때에 응하여 나왔으며 한 번 멸하고 한 번 생하여 수명이 오직 80세였다.
내적인 다섯 번째 깨우침
[주] 노자의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난 것이 이미 분명한 근거가 없다. 가령 5백여 세를 살았다 하여도 거북과 따오기의 수명에는 부끄럽다.
그런데 법왕(法王)은 한 번 멸하고 한 번 생하는데 미진수(微塵數)와 같이 많은 모습을 보였고, 80세를 사시는 동안에 항하(恒河)의 모래같이 많은 대중을 열어 주셨다.
보살이 말하였다.
“여러 역사의 정전(正典)을 검사하여 보니, 노자가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나서 출몰하였다는 글이 없다.
오직 장긍(臧兢)과 제조(諸操) 등이 지은 『노의례(老義例)』에
‘노자가 공자를 위하여 인의예악(仁義禮樂)의 근본을 설한 것이 제1의 때이고,
주나라 난왕(赧王) 때에 1천 집이 질병을 앓을 적에 노자가 1백80가지의 계와 아울러 『태평경(太平經)』 1백70편을 준 것이 제2의 때이고,
한(漢)나라 안제(安帝) 때에 이르러 장천사(張天師)에게 정일 명위(正一明威)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때에 스스로 주나라 주사(柱史)라고 일컬었으며 태상이 보내셨다고 한 것이 제3의 때이다.
대저 형체에 응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데는 반드시 인연 있음을 의뢰하고 교화를 권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데는 도중(徒衆)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5백 년 동안 전혀 제자가 없었는가?
노자가 세 번 나오고 세 번 숨었다 하나 문인들이 학문을 품수하여 친히 받듦을 보지 못하였으니 아득하기가 은하수와 같아서 오유(烏有)의 말이 거리에 공연히 전하여졌다.
주나라에 있을 적에 열가(劣駕)와 작은 수레를 탔으며 수염을 드리우고 머리털은 희었으며 한나라에 와서는 소고(蕭鼓)와 운화(雲華)와 우의(羽儀)가 공중으로부터 떴다.
천보(千寶)의 『수신(搜神)』에도 아직 그러한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제해(齊諧)의 『이기(異記)』에도 이러한 영험을 싣지 않았으니 가슴을 어루만지고 심장을 논하여도 속이고 망령됨이 더욱 심하다.”
6) 외적인 여섯 번째 다른 점
[주] 노군이 세상에 내려온 것은 처음 주나라 문왕의 때로부터 공자의 때에까지 이르렀다.
석가모니의 하생(下生)은 정반왕(淨飯王)의 가문에서 비롯된 것이니 우리 주나라 장왕(莊王) 때에 해당한다.
내적인 여섯 번째 깨우침
[주] 가섭(迦葉)이 난 것이 주나라 환왕(桓王) 정묘년이고 죽은 것이 주나라 경왕(景王) 임오년이어서 비록 공자의 때에까지 이르렀다 하나 문왕의 세상에 나지는 않았다.
부처님[調御]의 탄생은 주나라 소왕(昭王) 갑인년이고 돌아가신 것은 주나라 목왕(穆王) 임신년이다. 이는 정반왕의 아들로서였고 본래 장왕의 이전에 나신 것이다.
보살이 말하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이르러서 노담을 보고 예를 물었다는 것은 『사기』에는 모두 나타나 있으나, 문왕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은 책으로 징험할 수 없다.
주나라 말기에 나왔음은 그 일을 찾아볼 수 있으나 주나라 초기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글에 실려 있지 않았다.
또한 『주례(周禮)』의 관제를 검사하여 보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세상에는 모두 주사(柱史)와 장사(藏史)의 이름이 없다.
이런즉 이는 정품(正品)에는 빠진 조목으로서 주나라 말기의 말단 관리라 하겠다.”
7) 외적인 일곱 번째 다른 점
[주] 노군은 처음에는 주나라에서 태어났고 만년에는 유사(流沙) 지방으로 갔기에 그가 죽은 곳을 헤아리지 못하고 방소(方所)를 알 수 없다.
석가모니는 서역 나라에서 태어났고 저 발제하(跋提河)에서 돌아가셨기에 제자들이 가슴을 치고 여러 오랑캐들이 크게 절규하였다.
내적인 일곱 번째 깨우침
[주] 노자는 뇌향(賴鄕)에서 나고 괴리(槐里)에 장사지냈다. 진시(秦矢)가 조문한 일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결박을 면하고 형체를 숨겼다는 것을 꾸짖었다.
석가모니[瞿曇]는 왕궁에서 태어났고 곡수(鵠樹)에서 돌아가셨으며, 그 법이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중국에 전하여져서 은밀하게 난대(蘭臺)의 서고에 있다.
보살이 말하였다.
“『장자』 내편(內篇)에
‘노담이 죽음에 진시가 조문할 적에 세 번 소리 내어 곡하고 나오니 제자가 괴상하게 여겨
≺부자(夫子)의 무리가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진일은
≺전번에 내가 들어가서 보니, 젊은이가 곡하기를 마치 자신의 아비가 죽었을 적에 하듯이 하였고, 늙은이가 곡하기를 마치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적에 하듯이 하였다.
옛날에 이르기를 그러한 것을 둔천(遁天)의 형체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그러한 사람으로 여겼더니, 지금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둔(遁)이라 함은 숨는다는 뜻이요, 천(天)이라 함은 결박됨을 면한다는 뜻이요, 형체라 함은 몸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노자를 결박을 면하고 형체를 숨긴 신선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아첨하고 왜곡하여서 사람들의 감정을 취하였음을 슬퍼한다. 그러기에 죽었는데도 내가 친구로 여기지 않음을 면하지 못한다.”
8) 외적인 여덟 번째 다른 점
[주] 노자는 다섯[五]을 밟아 열[十]을 잡으며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모가 났으며 쌍주(雙柱)ㆍ참루(參漏)ㆍ일각월현(日角月懸)의 모습이니, 이는 중국 성인의 모습이다.
석가모니는 코는 금정(金挺)과 같고 눈이 정성(井星)과 같으며 눈동자가 푸른 연꽃과 같고 머리에 나발(螺髮)이 났으니 이는 서역 부처님의 모습이다.
내적인 여덟 번째 깨우침
[주] 노자는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모가 났으니 이는 장자(長者)의 형체이다.
그러나 천위(天位)의 다섯을 밟고 지위(地位)의 열을 잡았다는 것은 아직 성인의 모습이 아니다.
바가비(婆伽婆)는 해를 모으고 금을 융합한 빛이 있으니 이미 희유(希有)함을 드러냈으며, 만자(萬字)와 1천 폭의 기특함은 참으로 성인의 모습이라 하겠다.
보살이 말하였다.
“『노자중태등경(老子中胎等經)』에
‘노담은 누런빛이요, 이마가 넓고 귀가 길며 눈이 크고 이가 드물며 입술이 두터우며 손에는 십자(十字)의 글을 잡았고 발로는 음양의 이(二)와 오행의 오(五)의 그림을 밟았다’ 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특이한 모습일 뿐이고 성인의 기이한 자세는 아니다.
전기에 모두
‘노자는 코가 우뚝 솟았고 머리가 성글며 입이 뾰족하고 높으며 이가 드물고 눈은 곁눈질을 하고 귀가 둥글고 머리털은 푸르고 검은 색이며 입술은 두텁고 귀는 길다’ 하였으니,
그의 모양이 이와 같을 뿐이니 어찌 부처님께 견주겠는가?
부처님은 몸의 길이가 1장 6척(尺)이고 방정하여서 기울지 않았으며 원광(圓光)이 일곱 자로서 모든 깊은 명부세계를 비추고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있으며 머리털은 감청색(紺靑色)이고 귀를 덮었고 귓불은 드리워져 있다.
눈은 밝음을 열었으며 뺨은 사자와 같은 모양이고 칠합상(七合相)이 있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는 얇은 막이 있으며 입에는 40개의 이가 모나고 희며 가지런하고 평평하고 혀는 능히 얼굴을 덮었으며 연꽃과 잎의 형체이고 손은 안팎으로 쥐어서 손바닥 무늬가 다 이루어졌다.
말은 우레가 치는 듯하며 여덟 가지 음성이고 가슴 위에는 만자(萬字)가 있고 발에는 1천 바퀴가 둘러 있으며 빛은 자마금색(紫磨金色)이어서 상호(相好)를 이름하기 어렵다.
서른두 가지의 모습과 80가지의 좋은 상서를 갖추었으며, 하나의 광명을 놓아 지옥의 괴로움을 쉬게 하고 하나의 법을 연설하여 고통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여러 경전에 모두 나열되어서 번거롭게 자세히 가리킬 수 없다.”
9) 외적인 아홉 번째 다른 점
[주] 노자가 가르침을 시설하니 위의가 공경되고 사양하여서 스스로 중국에 의지한다.
석가모니께서 법을 제정하시니 위의와 용모가 공경ㆍ정숙하여서 인도는 물론이요 외국까지 따른다.
내적인 아홉 번째 깨우침
[주] 노자는 세속 사람으로서 벼슬이 겨우 말품(末品)이었으며 옷 입고 갓 쓰고 절하고 복종하며 스스로 조정의 법도를 따랐다.
석가모니는 성스러운 임금으로서 도가 세속과 어긋나서 복장과 모습과 위의가 보통 제도와는 달랐다.
보살이 말하였다.
“옛적에 단양(丹陽)의 여구여(余玖與)가 『명진론(明眞論)』 19편을 지어서 도사들이 거짓되고 허망한 데서 나왔다고 반박하였음은 저 논에 자세히 나와 있다. 말하자면 건갈(巾褐)의 복장은 바로 옛날 유교(儒敎)와 묵교(墨敎)에서 입던 것이다.
옛적 5제(帝)의 녹건(鹿巾)과 허유(許由)의 피관(皮冠)은 모두 세속의 복장이다. 갈(褐)은 몸의 길이가 3장 6척으로서 3백60촌(寸)이니, 1년이 36순(旬)임을 상징한 것이다. 혹은 1년이 3백60일임을 상징한 것이다. 갈(褐)의 앞에 2대(帶)가 있으니, 음(陰)과 양(陽)을 본받은 것이다. 양(兩)은 건(巾)의 양각(兩角)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양의를 본받은 것이다.
그런데 여씨(余氏)는 또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두 왕조는 하(夏)나라의 10월로 연초(年初)를 삼았다. 그런데 분도(分度)의 영축(盈縮)과 역운(曆運)의 절제(折除)에 대하여는 어찌해서 3백60이라는 수가 나왔는가?
그리고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周公)과 공자는 이러한 복장을 입지 않았다.
찾아보니, 황제(黃帝)가 황인(皇人) 9진(眞)의 영(靈)을 만나고, 또한 제곡(帝嚳)으로부터 하나라 우(禹)임금에 이르기까지 도산(塗山)과 종산(鍾山) 두 산에 숨겨진 책을 다 찾아봐도 이러한 복장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근거가 없었다’ 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주나라에 적작(赤雀)의 징조가 있었고 또 단서(丹書)의 상서를 감득(感得)하였기에 이미 화덕(火德)에 부합하여 대대로 붉은 옷을 입었다.
그런데 노자는 주나라 사람이고 또 말단 관리에 있었으니 갓 쓰고 신발을 신고 절하고 복종하며 스스로 내려오는 제도를 받들어서 곧 치두(治頭)라고 하였으니, 본 이름이 귀졸(鬼卒)이었다.
그러니 누런 수건과 붉은 부록(符錄)은 노자를 본받은 것이 아니고 물에 주문을 읽고 부적을 행하는 것은 장씨(張氏)를 직접 스승으로 삼은 것이어서 도교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다. 그러니 누구의 기풍을 본받아서 익힌 것인가?”
10) 외적인 열 번째 다른 점
[주] 노자의 교는 효도와 사랑을 회복시키는 것을 덕의 근본으로 삼는다.
석가모니의 법은 친척(親戚)을 버리는 것을 행의 우선으로 삼는다.
내적인 열 번째 깨우침
[주] 노자는 난폭하고 방자함을 가르쳐서 두 부모를 죽이는 것으로 행의 근본을 삼는다.
석가모니는 어질고 자비한 것을 가르쳐서 4생(生)을 제도하는 것으로써 덕의 근본을 삼는다.
보살이 말하였다.
“그대의 『화호경(化胡經)』에서는
‘윤희가 노담을 따르고자 하니,
노담이
≺만일 지극한 마음이 있어서 나를 따라 떠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대의 부모와 처자 일곱 사람의 머리를 베어 와야 나를 따라 떠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희가 곧 지극한 마음이었기에 문득 스스로 부모 등의 일곱 명의 머리를 베어서 그 머리를 가지고 노담의 앞에 이르자 문득 일곱 마리의 돼지 머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의 도를 따르는 것은 행(行)이요, 온화한 기운을 상하지 않는 것은 효도이다.
그러기에 정란(丁蘭)이란 자는 썩은 나무에 감통(感通)하였으며 동영(董永)의 효는 천녀에게까지 이르렀다.
금수(禽獸)도 오히려 어머니와 자식이 있어서 어버이를 아는데, 하물며 노담과 윤희는 도를 천하에 행한다면서 그의 부모의 목을 베었으니 어찌 효도라 하겠으며, 그의 아내와 자식을 죽였으니 어찌 사랑[慈]이라 이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