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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5권
3.2. 행의 마음을 성취함(5)
[도둑질]
도둑질을 멀리 여읜다 함은 도둑질에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 다른 이가 보호함이며,
둘째 그의 것이라는 생각이며,
셋째 의심함이며,
넷째 따르지 않을 줄로 앎이며,
다섯째 빼앗으려 함이며,
여섯째 다른 이의 물건인 줄 알면서 내 것이라는 마음을 일으킴이며,
일곱째 작위이며,
여덟째 부작위의 모습이며,
아홉째 무작위의 모습이다.
이들을 도둑질하는 몸의 업이라고 한다.
다른 이가 보호함이라 함은 다른 이가 보호하는 물건을 가진다 함을 밝히는 것이다.
그의 것이라는 생각이라 함은 만약 제 것이라는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이는 나의 물건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니, 그의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한다.
의심함이라 함은 마음으로 의심을 두되
‘이는 나의 물건인가, 이는 다른 이의 물건인가?’라고 하는 것이니,
그 물건은 다른 이의 물건이다.
따르지 않을 줄을 안다 함은 다른 이의 물건인 줄 알면서 마음을 내되
‘나를 따르리라’고 생각한다.
빼앗으려 한다 함은 손해를 일으키려는 마음이다.
다른 이의 물건인 줄 알면서 내 것이라는 마음을 일으킨다 함은 다르지 않게 보거나 캄캄한 땅에서 가지거나 빠르고 빠르게 가지거나 딴 물건을 가지거나 간에 다른 이의 물건을 가지면서
‘자기 물건을 가진다’라고 하는 생각이다.
작위와 부작위의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은 앞의 살생 중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업의 길을 이루고 업의 길을 이루지 않는 것은 이치를 따르며 서로 맞도록 해석할 줄 알아야 하리라.
[삿된 음행]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읜다 함은 삿된 음행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보호하는 여인이며,
둘째 저 이라는 생각이며,
셋째 의심함이며,
넷째 도와 그릇된 도이며,
다섯째 보호하지 않음이며,
여섯째 때가 아님이며,
일곱째 작위이며,
여덟째 무작위의 모습이다.
이들을 삿된 음행을 하는 몸의 업이라 한다.
보호하는 여인이라 함은, 이른바 아버지가 보호하고 어머니가 보호하는 이와 같은 것 등이다.
저이라는 생각이라 함은 아는 그 여인이 바로 부모 등의 보호를 받는 여인이라는 생각이며, 보호하지 않는 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의심한다 함은 만약 의심을 내어
‘자기의 여인인가, 다른 이의 여인인가? 부모가 보호하는가, 보호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여인인가, 다른 이의 여인인가?’ 하면서
그 여인은 부모가 보호하고 그의 부모의 보호를 받는 등의 여인이라면 낱낱이 다 삿된 음행이다.
도와 그릇된 도라 함의 도는 모든 도리이며, 그릇된 도는 도리 아닌 것을 말한다.
그가 보호되는 여인이라면 그릇된 도리이다.
때가 아니라 함도 역시 삿된 음행이다.
또 보호하지 않는다 함은 스스로가 여인을 보호하다가 여인을 보호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므로 삿된 음행이며,
또 보호하지 않는 여인이라 함은 온갖 보호하지 않는 여인 등이니 삿된 음행이다.
작위와 무작위의 모습은, 앞의 살생 중에서의 설명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부작위의 모습이라 함은 삿된 음행 중에서는 이와 같은 부작위의 법이 없나니, 반드시 스스로가 지어서 이루기 때문이다.
마치 병든 사람이 약을 먹으면 약을 먹었기 때문에 병을 멀리 여의고 병이 없어지며 병든 이는 낫게 되나니, 약을 줄 의원의 병이 낫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거짓말]
거짓말을 멀리 여읜다 함은 거짓말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 보는 따위의 일이며,
둘째 뒤바뀜과 뒤바뀜이 아닌 일이며,
셋째 의심함이며,
넷째 숨기려는 생각을 일으킴이며,
다섯째 작위이며,
여섯째 부작위의 모습이며,
일곱째 무작위의 모습이다.
이들을 거짓말하는 입의 업이라 한다.
보는 따위의 일이라 함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뒤바뀜과 뒤바뀜이 아닌 일 가운데서 또 뒤바뀜의 일이라 함은 듣는 것과 같고 그의 일과 같은 것이며, 뒤바뀌지 않는다 함은 그의 일과 같음을 말한다.
의심한다 함은 의심을 내되
‘이와 같이 할까, 이와 같지 않게 할까?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할까, 한결같이 그렇게 하지 말까?’라고 하는 것이다.
숨기려는 생각을 일으킨다 함은 진실한 일을 숨기고서 형상이 다른 일 중에서 형상이 다른 데에 머무르며 말하는 것이다.
작위와 부작위의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은, 앞의 살생 중에서의 말과 같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의 모습이 포살(布薩)하는 동안에 잠자코 서 있음은 모두가 거짓말로서의 부작위 모습이며, 몸과 뜻의 업이 이루어지므로 거짓말이 된다’고 한다.
비록 이런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업의 다른 형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형상이라 함은 몸과 입과 뜻의 업이 다른 형상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입의 업은 몸과 뜻의 업의 바탕이 아니다.
그러나 본래 입의 업에 의하여 세간에 이용되는 일이면서 입의 업의 일은 몸의 업으로 나타내 보이므로 입의 업을 짓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입의 업이라 이름할 수 있다.
만약 포살 중에 비구가 말하지 않으나 입의 업이 이루어진다.
왜 그러한가?
입의 업에 의하여 법제를 세우기[立制] 때문이다.
먼저 이 말을 받아
“나는 부처님 법 중에서 이와 같은 법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법을 지었습니다”라고 하여야 하는데도,
그 사람은 먼저 마음에서 약속을 두고서 뒤에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서 있다면, 그 사람은 본래의 약속된 마음에서 물러나며 받는 것이므로 거짓말인 입의 업이 이루어진다.
[이간질 하는 말]
이간질을 멀리 여읜다 함은 이간질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 착하지 못한 뜻을 일으킴이며,
둘째 진실함과 허망함이며,
셋째 파괴하는 마음이며,
넷째 먼저 깨뜨려서 뜻을 화합시키지 않음이며,
다섯째 작위이며,
여섯째 부작위의 모습이며,
일곱째 무작위의 모습이다.
이들을 이간질하는 입의 업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착하지 못한 뜻을 일으킨다 함은 착하지 못한 번뇌의 마음과 서로 응한다.
진실함과 허망함이라 함은 다른 이와 또 다른 이의 마음이 무너질 것을 알고서 진실한 것이거나 거짓말로써 다른 이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의 마음을 깨뜨린다.
먼저 깨뜨린다 함은 화합이 없는 마음으로 나쁜 뜻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몸에 착하지 못한 법을 일으키나니, 이를 이간질이라 한다.
작위와 부작위의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은, 앞의 살생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느 한 사람은 말하기를
“파괴는 무작위업의 이간질로서 그 중에서 승가를 파괴하기 위한 이간질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여래의 곁에서는 파괴 할 수 없다”고 말하나니,
이는 곧 승가를 파괴하는 나쁜 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은 파괴가 아니며 이간질의 업이 아니다.
[나쁜 말]
나쁜 말을 멀리 여읜다 함은 나쁜 말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 착하지 못한 뜻에 의함이며,
둘째 괴롭고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킴이며,
셋째 어지러운 마음에 의함이며,
넷째 나쁜 말을 남에게 말함이며,
다섯째 작위이며,
여섯째 부작위의 모습이며,
일곱째 무작위의 모습이다.
이들을 나쁜 말 하는 입의 업이라 한다.
착하지 못한 뜻에 의한다 함은 입으로 나쁜 말을 남에게 말하여 듣는 이가 괴로움이 날 수 있게 한다.
괴롭고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킨다 함은 괴롭고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켰을 뿐이며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만약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이 되면 비록 나쁜 말이 말하여졌더라도 괴롭고 어지럽히는 죄가 없다.
어지러운 마음에 의지한다 함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되
‘그가 들음에 따라 그때 어지러워지리라’ 하고 어지럽히지는 않고 나쁜 마음을 지어서 말을 한다.
작위와 부작위의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은, 앞의 살생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꾸밈말]
꾸밈말을 멀리 여읜다 함은 꾸밈말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 착하지 못한 뜻에 의함이며,
둘째 옳음이 없음[無義]이며,
셋째 때가 아님이며,
넷째 나쁜 법과 서로 응함이며,
다섯째 작위이며,
여섯째 부작위의 모습이며,
일곱째 무작위의 모습으로서 두루 모두가 나쁜 말이니
이들을 꾸밈말을 하는 입의 업이라 한다.
착하지 못한 뜻에 의한다 함은 욕심 세계의 수도위(修道位)의 번뇌에 의한 마음과 서로 응하는 것이니, 꾸밈말이라 말한다.
옳음이 없다 함은 진실한 이치를 떠났기 때문이다.
때가 아니라 함은 말이 비록 뜻은 있다손 치더라도 때 아닐 적에 말하면 역시 꾸밈말이 된다.
또 어떠한 때에 말하더라도 대중 가운데서 멋대로 하는 사람[自在人]을 위하여 말하면 역시 꾸밈말이 된다.
나쁜 법과 서로 응한다 함은 온갖 쓸모없는 말과 그릇된 법인 노래와 춤 따위를 말한다. 온갖 선법과 서로 응하지 아니하면 모두가 이는 꾸밈말이다.
작위와 부작위의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은, 앞의 살생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냄]
탐냄이라 함은 사랑하는 마음[愛心]에 얽매임을 당하여 다른 사람의 돈과 재물을 얻으려 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탐내는 마음에 굳게 얽매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제멋대로 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를 탐냄의 모습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성냄]
성냄이라 함은 다른 중생에게 나쁜 마음을 일으켜 때리고 해치려 하는 것 따위이니,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서로 어긋나면 이를 성냄이라 한다.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닌 일을 떠났기 때문이며, 다른 이라 함은 자신의 하는 일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른 중생에게 성을 낸다 함은 다른 중생에게 나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해친다 함은 인자한 마음이 없는 것이며, 때린다 함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목숨을 끊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 때린다 함은 매와 몽둥이ㆍ흙ㆍ돌 따위로 괴로움을 낼 수 있는 것이면 모두가 때리는 것이라 한다.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과 서로 어긋난다 함은 다른 이의 목숨을 끊으려 하므로 사랑하는 마음과 어긋남이며, 때리는 것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을 바로 성내는 모습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삿된 소견]
삿된 소견이라 함은 보시하는 것 따위 가운데서 보시가 없다고 보는 것 따위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베푸는 것[施] 중에서 베풂이 없다고 보고 주는 것[與] 중에서 줌이 없다고 보고 버리는 것[捨] 중에서 버림이 없다고 보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의 소견을 삿된 소견이라고 한다.
[문] 어떻게 그와 같은 것을 삿된 소견이라 하는가?
또 베풂과 줌과 버림의 세 글귀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베풂이라 함은 바른 마음으로 복밭과 복밭 아닌 데에 베풀어 주는 것이며,
줌이라 함은 역시 바른 마음으로 복밭과 복밭 아닌 데에 베풀어 주는 것이다.
버림이라 함은 바른 마음으로 복밭에만 베풀어 주는 것이다.
또, 베풂이 없다고 본다 함은 베푸는 것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며,
또 줌이 없다고 본다 함은 베푸는 이의 공덕이 없다 하고 비방하기 때문이며,
또 버림이 없다고 본다 함은 받는 이의 공덕이 없다고 비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바르지 못한 소견은 모두가 인색한 사람의 형상이다.
부자는 인색하고 가난한 이는 버릴 수 있다고 보면서 이 사람은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나니
‘만약 실로 베풂이 있는 이면 인색한 사람이니 부자가 아니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그는 전 세상에서 인색함을 익혀온 지가 오래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 의심을 내어
‘이 베풀 수 있는 이는 가난하여야 한다.
왜 그러한가?
그는 전생에 베풂을 익혀온 지가 오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나니,
그 사람은 비록 이러한 삿된 소견을 낸다 하더라도 이치는 그와 같지 않다.
[문] 만약 그렇다면 그 이치는 어떠한 것인가?
[답] 그 사람이 과거에 비록 오랫동안 인색함을 익혔다 하더라도 깨끗한 복밭을 문득 만났으므로 그 밭 가운데서 조그마한 보시를 행하였다.
그러므로 금생의 몸에서 부자의 과보를 얻었으며, 습기가 성품을 이룩하였으므로 인색하여 오히려 버리지 않는다.
가난하면서 베풀 수 있는 이는 또 어떠한 것인가?
그 사람은 과거에 복밭이 아니면 신심이 없었기 때문이며,
지극한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이름을 위하였기 때문이며,
일을 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며,
존중을 구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은 베풀 수 있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부자의 과보를 얻지 못하였지만 베풂을 익혀 왔기 때문에 지금에는 오히려 버릴 수 있다.
선한 행과 악한 행이 없다 함은 이는 제 몸이 항상하고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데에 의하여 허물의 모습을 일으킨다.
선하고 악한 행의 업에 과보가 없다 함은, 그 사람은 선을 행하는 이가 고통을 받고 악을 행하는 이가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은 이러한 마음을 내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는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며, 인연으로부터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없다 함은, 그 사람은 마음으로 곧 이 세상에서 없어짐을 보고서 다시 태어남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사람은 마음을 내어
‘뒤의 세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또 이러한 마음을 내나니
‘참으로 나[我]라는 것이 없다. 만약 나가 있다면, 세간은 곧 화하여 나는[化生] 중생이 없으리라’고 하나니,
열두 가지 인연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의심 내기를 온갖 남자 여자들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여 음욕을 행하는 것이며, 우리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자기의 업에 의하여 이 가운데서 사는 것이니, 마치 습기로 나는[濕生] 중생은 습한 땅을 의지하여 나지만 습한 땅은 그의 부모가 아닌 것처럼, 나도 그와 같으리라’고 한다.
또, 아라한이 찬 것을 구하고 더운 것을 구하고 음식 등을 구하는 것을 보고서, 곧
‘세간에는 아라한이 없다.
왜 그러한가?
아라한이 애욕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은 스스로가 수행 등의 힘이 없나니, 그러므로 번뇌를 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세간에는 아라한이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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