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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귀李世龜의 1692년작「유사군록遊四郡錄」
한국문인협회 태백지부 윤순석
나는 옛선비들의 여행기등을 번역하고 그 내용의 논리적 이해를 통해 지역의 지리와 생활상을 이해하는, 한마디로 말하면, 문헌고증이라는 과학적 방법으로 지역역사를 탐구하자는 취지로, 그간 지역 매체에 약간의 글들을 발표해왔다.
4만도 안되는 태백인구중에 독서인구..., 그 중에서도 고장의 내력을 다룬 글을 읽고 소비하려는 독자는 극히 일부분이라서 상업적, 영리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들 즉, 나보다 실력있고 유능한 사람들은 태백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고, 한창 생업에 종사해야 할 나보다 젊은 사람들은 돈도 안되는 이런 글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을 것이기에 이 일은 내 담당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번역한 글은 이세귀의 문집인 양와집養窩集에 있는 유사군록遊四郡錄으로 4개고장을 돌아보고 쓴 1692년의 여행기인데, 강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권혁진 선생과 공저로 금년 2025.6월에 발간한 <민족의 명산, 태백산의 인문학 – 산책출판사>의 부록으로 이미 발표된 글이지만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어 이번 기회에 고친다.
이세귀(인조24년 서기1646년~숙종26년 1700년)는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다. 처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경주 이씨로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부친은 성주목사를 지낸 이시현李時顯이다.
현종14년인 서기167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11년인 1685년에 음보蔭補로 지금의 전라도 광주광역시 지역의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 뒤 저자 나이 43세인 1689년에 현종의 능인 숭릉참봉에, 1694년에 종부주부宗簿主簿에 제수되었지만 다 나가지 않았다. 1695년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에 임명되고, 1697년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글은 숭릉참봉에 제수된 1689년과 예산현감에 임명된 1695년 사이인 저자 나이 46세에 쓴 글이 된다.
이세귀는 경학經學, 예설禮說, 역사 등에 걸쳐 박통하였다. <대학>의 물격설物格說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하고,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에 비판을 가하였다. 기해예설에 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저자는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 <가례>를 독자적으로 주석하였고, 역사에도 밝아 한사군과 삼한의 위치를 고증하는 글을 남겼다.
박세채朴世采, 소론의 영수인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에 속하였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홍주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와집養窩集>13책이 있다.
이세귀의 유사군록은 저자 이세귀가 직접 태백황지지역을 답사하고 쓴 글이 아니라, 춘양 각화사 인근마을까지 방문하여, 그곳에서 마을 사람인 손태일의 경험과 태백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의 전문傳聞을 토대로 손태일이 진술한 내용을 옮긴 글이지만 1692년 당시 태백산권역의 지리와 주민들의 삶에 대한 의미있는 정보가 담겨있고, 고증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기에 원문과 함께 소개한다.
(한문 번역은 어디서 끊어 읽느냐가 관건이다. 끊어진 단락段落의 위치가 다르면 뜻도 달라진다. 바르게 번역했는지는 어디서 끊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번역과 원문을 병기하는 이유다. 번역본을 먼저하고 원문을 나중에 배치했다)
<유사군록遊四郡錄>
15일 병자일. 태백산 각화사를 찾아가려고 동쪽으로 십리를 갔다. 지나다가 안동 가마현駕馬峴 홍이원洪爾遠 집에서 잠시 말에게 꼴을 먹였다. 홍씨는 경성사족京城士族으로 일찍이 여주驪州에서 살았고 우생원과 동향친구였다. 그 서모庶母 장씨는 나의 외가쪽이라서 들른 것이다.
홍공은 금년 나이 70줄인데 나와서 나를 맞아주는 것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그의 조카 홍만제洪萬齊 역시 같이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十五日甲子。將尋太白山覺華寺 東行十里。歷入安東駕馬峴洪生爾遠家 秣馬。洪是京城士族 曾居驪州 與禹生爲同鄕故舊。其庶母張姓人 乃余外族 因此相過。洪公年今七十餘 出接甚欵 其姪萬齊亦來見矣。
또 동쪽으로 20리를 가서 하나의 고개를 넘어 춘양현春陽縣에 이르렀다. 산봉우리 가운데에서 낮고 평평하게 벌어진 들판을 이루어 큰 내가 마을 둘러싸고 흘러간다. 안동의 외창外倉이 있고(세미稅米 보관창고를 둘 정도로 농토가 넓어 풍요로운 동네이고) 민가가 즐비하여 마치 별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 하여 문득, 이사와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시내를 따라 북으로 십 리를 올라가서 큰 시내를 넘어 석현石峴에 이르니 이곳은 태백산太白山 기슭이다. 산길은 가면 갈수록 동굴속에 깁숙히 들어온 듯 첩첩산중이고, 흐르는 물은 돌에 부딪혀 맑은 날씨에도 천둥소리가 되어 귀에 쟁쟁하여 나도 모르게 정신이 맑고 뜻은 원대해진다.
“물소리는 완연히 홍류동紅流洞과 비슷하고, 산의 형세는 멀리 지달산枳怛山에서 갈라졌네[泉聲宛似紅流洞, 岳勢遙分枳怛山]”라는 글귀를 얻었다.
고개 밑에 사는 산촌의 평범한 백성인 손몽청孫夢淸의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친척들이 모여 조그만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그 아우 태일太一과 종제從弟 득청得淸이 모두 와서 인사하는데 성의가 지극하니 산촌의 풍속이 자못 두터웠다.
又東行二十里 越一峴到春陽縣。峽山中拆 原野低平 大川繞村而流。有安東外倉 閭閻櫛比 如入別世界 令人便有卜居之意矣。緣川北上十里 踰大川到石峴 是太白山麓也。山路去去幽邃 川流蹙石 晴雷滿耳 不覺神淸意遠。有泉聲宛似紅流洞, 岳勢遙分枳怛山之句。留宿峴底山氓孫夢淸家, 其族黨成小村。其弟太一從弟得淸皆來見欵欵 氓俗頗厚矣。
밤은 고요하고 산은 텅 비었는데 손태산(孫太山 ※손태일孫太一의 오기인 듯)과 더불어 태백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기를, 산맥은 대관령에서 남쪽으로 치달아 대박산大朴山에 이르러 높게 솟아 최고봉이 되었다가 급격히 뚝 끊기 듯 떨어져 나와 하방현下方峴이 되었다가 다시 불쑥 일어나서 태백산이 된다.
어쩌다 태백산 높은 곳에 올라가서 대박산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대박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볼 수는 없었다. 대개 대박산의 산세는 태백산과 비교하여 더욱 높고 크지만 사람의 인적이 들어간 적은 여태껏 없었다고들 한다.
하방현下方峴의 동쪽은 소외所外 즉, 바깥이라는 뜻인데, 소외는 곧 외황지동外黃池洞을 지칭하는 것이고 외황지의 물은 동에서부터 와서 쏟아진다. (외황지에 비해) 내황지內黃池는 두 개의 수원이 있다. 그중 하나의 근원은 골짜기 가운데의 평평한 못에서 솟는데, 속칭 누리수婁里藪라고 한다. 또 다른 근원은 대박산大朴山의 화전禾田에서 솟아서 (두 근원이) 합류하여 남으로 흐르다가 외황지의 물과 합쳐져서 유점鍮店(동점지역을 말함)으로 흘러내려가서 석문石門을 뚫고 나간다. 석문은 큰 바위가 벽처럼 섰는데 위에 가로지른 바위가 있으니 쳐다보면 다리처럼 보이는데 이름하여 병항甁項이라 한다. 관광 온 사람들은 종종 그 위로 올라가곤 한다.
물이 병항을 지나 내려가서 성포(成浦 : 석포의 오기)와 율동(栗同 -영남쪽에 율동이라는 지명이 없다면 ‘소천’을 표기하려고 “속粟”자를 쓴다는 게 “율栗”자로 오기한 듯)을 지나서 예안禮安과 안동 사이로 나가는데 낙동강의 상류가 된다.
하방현 즉, 하방재의 서쪽은 어평동魚萍洞이다. 어평동의 물이 북쪽으로 쏠려가다가 들판을 흐른다. 덕원德原, 사전蛇田, 녹번祿番, 직실直悉을 통과하여 흘러 내려가다가 영월寧越의 큰 들판에 이르면 영월의 큰 강과 합쳐진다. 영춘永春으로 흘러내려가 여강驪江의 상류가 된다. 이것이 태백산 산수의 대략이다.
석현石峴의 북쪽은 각화사覺華寺골이고, 각화사 골의 북쪽은 도심동道深洞이다. 도심동부터 북쪽으로 고적현高寂峴을 넘고, 고적현으로부터 또 하방현을 넘으면 삼척 가는 길이다.
夜靜山空 與太山論太白山。其言曰 山脉自大關嶺南馳至大朴山, 高聳爲最高頂 大斷脫卸爲下方峴 又突起爲太白山。渠上太白山高處 望見大朴山而未得登覽 盖山勢比太白尤爲高大 而人跡未甞到云。下方峴之東爲所外 所外卽外黃池洞 外黃池水自東來注焉。內黃池有兩源 其一源湧出谷中平池 俗號爲婁里藪。其一源出大朴山禾田 合而南流 與外黃池水相合 流下鍮店 穿石門而出。石門者大巖壁立 上有橫石 望之如橋 名爲甁項。遊賞者往往登其上。水過甁項而下過成浦曁栗同 出禮安安東之間 爲洛東江上流焉。下方峴之西爲魚萍洞 洞水北注乃野。流過德原 蛇田 祿番 直悉 至寧越大野 合寧越大江 流下永春爲驪江上流焉。此太白山山水之大致也。石峴之北爲覺華寺洞 覺華洞之北爲道深洞。自道深洞北逾高寂峴 自高寂又逾下方峴 走三陟路也。
도심동부터 서북쪽으로 도력현道力峴을 넘으면 영월 길로 간다. 서쪽으로 주슬현奏瑟峴을 넘으면 순흥順興가는 길이다. 예부치禮扶峙를 넘으면 안동安東, 내성奈城 가는 길이다.
순흥부터 북쪽으로 완항현緩項峴을 넘으면 영춘 땅으로 나간다. 완항현緩項峴의 서쪽은 마아현馬兒峴이다. 마아현의 서쪽은 고치현高致峴이다. 모두 순흥으로부터 영춘으로 통하는 길이다. 고치현의 서쪽은 죽령竹嶺이다. 풍기豊基에서 단양으로 가는 고개이니 곧 경상좌도의 큰길이다. 완항현緩項峴 이하로부터 바야흐로 소백산小白山이 된다고 한다.
自道深西北逾道力峴走寧越路也。西逾奏瑟峴走順興路也。逾禮扶峙走安東奈城路也。自順興北逾緩項峴出永春地 緩項之西爲馬兒峴 馬兒之西爲高致峴 皆自順興通永春路也。高致之西卽竹嶺也 由豊基走丹陽 乃慶尙左道之大路。自緩項以下 方爲小白山云。
16일 을축乙丑. 손몽청孫夢淸을 데리고 석현石峴을 넘는데 절벽 길이 매우 험준하다. 어떤 곳은 바위, 어떤 곳은 소나무가 있고 앞에 큰 시내가 있어 쉴 만하다. 절벽을 내려가 큰 시내를 건넜다. 구불구불 산길을 십 리 가서 각화사 동구에 이르렀다. 나무 그늘을 뚫고 절로 올라갔다. 전염병이 조금 그쳤다고는 하나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큰 절(本寺)에는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 연대암蓮㙜庵을 찾았다. 길은 절벽이어서 무척 험하다.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암자 중에게 조반을 짓게 했다.
중 명혜明慧와 더불어 암자 왼쪽 봉우리의 허리쯤을 올라갔다. 사고史庫을 쳐다보니 절벽에 아득하게 있어서 겨우 가리킬 수 있다. 곧 국가의 역사책을 보관하는 곳이다. 각화사를 내려다보니 선방禪房과 불우佛宇가 계곡의 굽이지고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러 암자가 바위 벼랑에 펼쳐져 있어 드러나기도 하고 숨어 있기도 하다. 대개 이 절은 태백산의 발치 매우 궁벽한 곳에 있다.
골짜기의 형세는 큰 동이를 쪼개서 곁에 세워둔 것 같다. 절부터 봉우리 밑 골짜기 모든 곳이 십 리쯤 되는 것 같다. 높고 험한 절벽이 섰고 계곡 또한 넓게 펼쳐져서 벼랑과 골짜기가 보였다 사라진다. 모두 기울어진 항아리 가운데 있다. 큰 산은 바라볼 수 없다.
十六日乙丑。率夢淸越石峴。崖路甚峻 有巖有松 前臨大川可憇而休。下崖涉大川 宛轉山路 行十里至覺華洞口 穿樹陰而上寺。有染疾新歇未凈云 不入大寺 右尋蓮㙜庵。路崖甚峻 捨馬杖策而上。令庵僧炊朝飯。與僧明慧登庵左峯腰 仰望史庫 懸崖縹緲 僅可指點 卽國家之藏史處也。俯視覺華 禪房佛宇 盤據一洞隈隩處 無眼界 諸庵子布列巖崖 或露或隱。盖此寺在太白山脚甚偪側 而是洞之形若剖大甕 而側竪之。自寺至峯底洞盡處 似可十里許 而高峻壁立。洞壑亦濶展而崖谷出沒皆在側甕之中。大山則不可以望也。
암자로 되돌아와 밥을 먹었다.
암자의 중이 갓김치를 권했다. 매운 기운이 코를 찔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속 힘줄이 펴지는 듯했다. 갓김치 담그는 법을 물었다. “손에 화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끓인 물을 놋쇠 그릇 안에 산갓을 푹 담가 넣은 후 끓이되 소금과 된장을 넣지 않습니다. (끓일 때) 그릇 입구를 막아서 수증기로 새는 기운을 막고, (조리후에는) 그것을 따뜻한 방에 둡니다. 손님을 맞으면 갓김치를 바로 내오지 말고 저장기간을 오래되도록 하여 식사하고 가실려고 할 때 쯤에 밥과 함께 드릴 수 있게 하고, 먹을 때 묽은 간장과 같이 먹으면 맛은 더욱 맵습니다.”
이렇게 대화하던 시간조차도 조금 이른 아침이고 지대가 높은 곳이라 얼음과 눈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청옥나물과 자줏빛 옥나물을 캘 수 없었다. 자줏빛 옥 나물이라는 것은 즉, 자줏빛 영지버섯이다. 태백을 유람할 때 이 자지紫芝를 맛보지 못하였으니 또한 아쉬운 일이다. 나중을 기다린다.
절 앞으로 걸어 내려가 말을 타고 계곡을 나왔다. 명혜明慧가 전송하려 계곡 입구까지 이르렀다. 큰 시냇가 도심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민 이오십李五十이 산까지 쫓아와 인사를 한다. 배나무 아래서 말을 쉬게 했는데, 술 한 잔을 권한다. 석현石峴을 넘어 청몽夢淸과 작별했다. 춘양현春陽縣으로 돌아오니 모두 20리를 걸었다.
還到庵攤飯。庵僧饋山芥葅 辛烈之氣觸鼻 不覺輕筋焉。問沉葅之法 作沸湯廑不爛手 納山芥於鍮器中 浸以湯 勿和塩豉 封閉其口 以防泄氣 置諸溫房。見客而淹之 可及進飯 臨食和淸醬則味益辛烈云。仍言時少早 高處氷雪未開 靑玉紫玉之菜不可以採 紫玉卽所謂紫芝者也。遊太白而未及甞紫芝亦一欠事 留待他年矣。步下寺前 騎馬出洞 明慧送至洞口。還到大川邊道深洞。居人李五十山追來見之 歇馬梨樹下 饋酒一盃。越石峴別夢淸 歸至春陽縣。凡行二十里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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