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 사람 말고 누가 있겠는가’
- 서당지장(西堂智藏)
‘강서(江西)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 백장회해(百丈懷海)
교종 승려로 떠났다가
선종 승려가 되어 돌아온
당나라 유학승 도의
선불교를 향해
‘악마의 말’이라는 신라교종 비난에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시절인연을 기다리니
…
오직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풀어내는
선불교는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
교종 중심의 신라불교 주류들에게 도의가 전하는 중국 선불교는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비난에 직면할 만큼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 중국에 선불교를 전한 달마가 소림사로 들어가듯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를 찾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1992년의 일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해가 말이다. 그때 어느 TV 프로그램에 처음 나와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작곡가와 작사가, 가수, 문화평론가 앞에서 자신들이 만든 노래를 부르고 평가를 받았다.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를 듣고 전문가들은 혹평을 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부르고 받은 평가는 ‘C’였다.
당시 가요계의 주류들도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젊은 친구들이 프로그램에 나와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생소한 랩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존의 방식대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느니, 가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느니 하는 방식 말이다. 그들의 평가가 시대의 변화와 대중들의 기호를 읽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들의 음악에 열광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처음 선(禪)불교가 신라에 소개되었을 때도 이와 유사했던 것 같다. 당시 신라불교의 주류였던 화엄(華嚴)이나 유식(唯識)과 같은 교학불교는 선불교를 향해 ‘악마의 말(魔語)’이라고 비난했다. 경전을 읽고 체계적으로 수행을 하는 그들에게 기존의 교학체계를 부정하고 오직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풀어내는 선불교는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새로운 불교에 열광했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선불교는 신라불교계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던 셈이다.
신라불교계에 서태지 역할을 한 인물은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도의(道義, ?~825)이다. 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조당집>에 기록된 도의의 전기와 몇몇 선사들의 비문 등이 있다. <조당집>에 도의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나머지는 비문의 기록과 같다(餘如碑文)”고 한 것을 보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도의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비문이 남아있다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그의 탄생과 관련되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의 부친은 흰 무지개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모친은 어느 스님과 잠자리를 하는 꿈을 꾸고 나서 도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기가 있은 지 39개월만에 도의를 낳았다고 한다. 물론 의학적으로 39개월이 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도의의 전기를 쓴 작가가 39개월이라고 한 상징적 의미가 있을 텐데, 그 행간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의 성은 왕씨(王氏)이며 지금의 서울인 북한군(北漢郡) 사람이라 전해진다. 언제 출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명적(明寂)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한다. 신라 당시 선진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승려들이 많았는데, 도의도 성덕왕 5년(784) 당나라로 들어가는 신라의 사신들과 함께 기나긴 유학의 길, 아니 구법의 길을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37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다.
그가 당나라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오대산이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 화엄종 승려들이 중국에 가면 가장 먼저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등장하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곳을 제일 먼저 찾은 것은 그가 신라에서 화엄종 승려로 활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곳에서 도의는 간절히 기도한 끝에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는다. 그때 허공에서 성스러운 종소리가 울렸고 신비로운 새들이 날아들었다 한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유람하다가 광부(廣府)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그리고 조계산으로 가서 육조혜능의 조사당을 참배하게 된다. 이때의 일을 <조당집>에서는 “조사당에서 참배를 드리려 하는데, 갑자기 문이 저절로 열렸고 삼배를 올리고 나니 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전한다. 이는 도의가 혜능의 선(禪)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도의가 혜능의 남종선을 받아들였다면, 이제 할 일은 분명해진다. 바로 참 스승을 찾는 일이다. 당시 중국에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은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서당지장(西堂智藏)과 백장회해(百丈懷海)가 바로 그들이다. 도의는 먼저 서당을 찾아가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의문들을 풀어놓는다. 구법을 향한 제자의 간절함에 스승은 아낌없는 가르침을 베풀고 마침내 도의는 모든 의심을 풀고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 마치 막혔던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이를 본 스승도 얼마나 기뻤을까? 그 순간을 <조당집>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마치 돌 더미에서 아름다운 옥(玉)을 얻고, 조개껍질에서 진주를 찾은 것과 같구나.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 사람 말고 누가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공부 잘 하는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은 같은가보다. 이때 스승에게서 인가를 받고 얻은 이름이 바로 도의(道義)이다. 교종 승려 명적에서 선종 승려 도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조계종 종조 도의국사 진영. |
도의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백장회해가 머물고 있던 백장사였다. 그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어 승가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어 이른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전통을 세우기도 하였다. 도의는 이곳에 머물면서 백장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전기에 따르면 스승인 서당을 모시듯이 백장을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인상적인 것은 백장이 신라에서 건너온 승려들의 구도열을 몹시 부러워했다는 사실이다. 전기는 이렇게 전한다.
“강서(江西)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즉, 마조의 선맥이 도의를 비롯한 신라에서 온 구법승에게 넘어간다는 일종의 탄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실상산문을 연 홍척(洪陟)이나 동리산문을 연 혜철(慧徹) 등도 서당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왔으니, 백장의 탄식이 무리는 아닌 듯 싶다.
도의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것은 821년의 일이다. 교종 승려로 떠났다가 선종 승려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신라에 있을 때 그는 불교계의 주류에 속했는데, 이제는 그럴 처지가 아니다. 새로운 불교를 기존 불교계에 소개해야 할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비주류로서 말이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은 늘 외롭기 마련이다. 기존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 새로운 문화를 쉽게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쉽지 않은 그 길을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니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좋고 의미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언젠가는 사랑받기 마련이다. 역사가 그렇다.
중국에서 배운 선법을 신라에 소개했을 때 도의는 교종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주류들에게 도의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으로 들렸다. 그들은 새로운 불교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존의 방식에 젖어있는 그들에게 억지로 선불교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다. 이때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시절인연이라 하질 않았는가.
도의가 당시 교학불교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아무리 오랫동안 경전을 읽고 외울지라도 마음을 깨치는 데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흐르고 또한 그렇게 해서는 실제로 깨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유식에서도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인 구경위(究竟位)에 이르는 데 3아승지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 무한한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교종의 수많은 방편들에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한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서 우리의 시선을 돌려 직접 달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편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그것마저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메시지가 선(禪)에 의해 재해석되어 신라 땅에 울려 퍼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계는 도의의 말을 진정성 있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설악산 진전사(陣田寺)로 숨어버렸다. 문득 중국에 선불교를 전한 달마가 떠오른다. 그도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로 숨지 않았던가.
보석은 어디에 있더라도 빛나기 마련이다. 달마가 전한 선은 혜가를 비롯하여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져 중국 전체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도의가 전한 선(禪)도 우리나라를 환하게 밝혀줄 시절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연들이 모여서 마침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가지산문을 활짝 열었다.
[불교신문3020호/2014년6월25일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