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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10章 長 南 面
연천군 2읍 8면의 하나이다.
이 면은 본래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의 장현내면(長縣內面) 지역으로, 판부리(板浮里)·자작리(自作里)·고읍리(古邑里) 등 3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남면(古南面)의 원당리(元堂里)와 장서면(長西面)의 관송리(貫松里)·반정리(伴程里)를 병합하여 장현내면의 "長"자와 고남면의 "南"자를 따서 장남면이라 하여 원당리·자작리·판부리·고랑포리·반정리의 5개 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여오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자작리·판부리의 일부는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장남면 전역이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장단군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65년 4월 30일 "연천군 조례 제111호"에 의하여 원당출장소(元堂出張所)가 설치되어 행정업무를 관할하여오다가,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26호"에 의거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장남면은 원당리·자작리 지역에만 민간인 입주가 되어 있고 그 외 반정리· 고랑포리·판부리 지역은 출입영농이 가능한 지역과 군사분계선을 포함하고 있는 완충지대에 놓여 있다.
면의 동쪽은 백학면, 남쪽은 파주군 적성면, 서쪽은 파주군 진동면, 북쪽은 휴전선과 접해 있다.
□ 일반현황
·면사무소 소재지 : 장남면 원당2리 681
·6·25 전 면사무소 소재지 : 장단군 장남면 고랑포리.
(1994년 통계연보 기준)
+---------+--------+------------------+-------------+--------------------------+
| | | 인 구 수(명) | 인 구 밀 도 | 리 수 |
| 면 적 | 가구수 +-----+------+-----+ +-----+-----+---------+----+
| (km ) | | 계 | 남 | 여 | (인/1km ) |법정 |행정 |자연마을 | 반 |
+---------+--------+-----+------+-----+-------------+-----+-----+---------+----+
| | | | | | | | | | |
| 56,07 | 258 | 911 | 456 | 455 | 16,2 | 5 | 4 | 4 | 12 |
| | | | | | | | | | |
+---------+--------+-----+------+-----+-------------+-----+-----+---------+----+
1. 원당리(元堂里)
본래 장단도호부의 고남면(古南面) 지역으로, 조선 초에 옛 장단현을 다스리던 고을 원의 관저(官邸 : 지위가 높은 관리들이 들어가 살도록 만든 관사)인 원당(元堂)이 있었다 하여 원당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일부 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뒤에도 원당리 전지역이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다가 1962년 6월 1일에 민간인 입주가 되었고,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장단군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65년 4월 30일 "연천군 조례 제111호"에 의하여 원당리에 원당출장소(元堂出張所)가 설치되어 행정 업무를 관할하여오다,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26호"에 의거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장남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원당리는 3개의 행정리, 11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 장남면의 중심 지역이다.
1 배골벌 : 나이롱다리 동쪽에 있는 넓은 벌판. 배골 골짜기의 옆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뒷벌'로도 불리워진다.
2 홍가바위 : 매봉산 동쪽, 사미천이 임진강에 합류하는 곳에 있는 바위. 예전에 홍가라는 사람이 이 바위에서 임진강에 빠져죽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 누에머리 : 홍가바위 아래에 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
4 불당골 : 홍가바위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며, 그 터에는 와편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5 매봉산(87m) : 말뚝봉 북쪽에 있는 산. 예전에 이 산 정상에서 매사냥을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전해 오고 있으나, 원래의 뜻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와는 거리가 먼, 산(山)의 다른 말 '뫼'가 음이 변한 '매'와 뒤에 같은 뜻의 '봉(峰)' 에 '산(山)'이 합쳐지며 불리워지게 된 복합지명이다. 6·25 전에는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달맞이도 했던 곳이다.
6 돌고지고개 : 배골에서 불당골로 넘어가는 고개.
7 창암봉 : 매봉산 서쪽에 있는 봉우리.
8 배골(舟谷洞) : 말뚝봉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최씨들이 살았던 집성마을이다.
이 곳에 대한 또 다른 자료에는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梨谷"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원래 배골이 담고 있는 뜻은 한자의 '舟' 또는 '梨'와는 무관한 '골짜기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전국의 산지 지명에서는 '박', '백', '배'자가 첫음절로 들어간 것이 무척 많이 나타나는데 '백'과 '배'는 '머리','산(山)'의 뜻을 나타내는 옛말이었던 '받'이 아래와 같이 음의 변화를 거치며 '박'으로 나타나는데
받 > 발 > 밝 > 박
이 '박'은 다시 '백' 또는 '배'로 쉽게 변하여 옮겨지는 예로 보아 벌판에 자리 잡았던 원당리의 여러 마을과는 달리 이 곳 배골은 매봉산과 창암봉 사이의 산 골짜기에 있던 마을이 되어 '박골'로 불리워 오던 것이 음이 변하여 지금의 '배골'로 굳어지면서 산(山)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한자의 '舟', '梨'로 음차하여 옮겨진 땅이름이다.
9 강정나루(降亭渡) : 말뚝봉 동쪽, 임진강에 있던 나루. 파주군 적성면 주월리의 강선정(降仙亭)으로 건너다니던 곳이었으나, 6·25 이후에 나루는 폐쇄되었다.
10 말뚝봉 : 장남면사무소 북쪽, 들판에 있는 둥근 봉우리.(주마산 참고)
11 새터(新垈) : 말뚝봉 아래에 있었던 작은 마을. 6·25 전에는 청송 심씨가 7가구 살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있다.
12 벙텃골 : 새터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골짜기.
13 무네미(水踰) : 장남면사무소 동쪽에 있는 우묵한 길. 예전 여름 장마철에 임진강이 범람하면 지형이 낮은 이 곳으로 강물이 넘어 한들벌 중앙에 있는 연뫄깔과 학다리를 거쳐 다시 임진강에 합류하는 큰 물길이 지나던 곳이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넘는다'는 뜻의 우리 고어(古語)인 '네미'에 연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물 + 넘이 = 물넘이 > 물너미 > 무너미 > 무네미
현재 이 곳은 6·25가 끝나고 원당리 일대가 경지정리가 되면서 임진강 옆에 수해방지용 제방을 막아 예전 같이 큰 물 피해는 없어졌으며, 지금은 무네미로 자동차길이 나 있다.
14 망근도리밭 : 무네미 옆에 있는 밭. 모양이 머리에 쓰는 망건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원당리 고려고분군(元堂里 高麗古墳群) :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16 남생이등 : 현 원당2리 마을, 동쪽에 있는 산 등. 남생이의 등과 같은 모양이라 한다.
17 너믄구래 : 남생이등 너머에 있는 들.
18 한사위 : 너믄구래 북쪽, 임진강변에 있는 큰 바위.
19 통사위 : 한사위 아래에 있는 바위. 발로 세게 디디면 속이 빈 것처럼 '퉁퉁'소 리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20 어신여울 : 마당바위 동쪽, 임진강에 있는 물살이 아주 센 여울.
21 마당바위 : 통사위 아래에 있는 마당 같이 넓은 바위.
22 구석말 : 돌다리 북쪽, 구석진 곳에 있던 마을.
23 원말 : 구석말 아래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함안 조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돌다리가 있던 곳이다.
24 돌다리(石橋洞) : 원말 옆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돌다리가 있었다 한다.
25 두지나루(斗只渡, 長湍渡, 頭耆津) : 원당리와 파주군 적성면 두지리(斗只里) 사이에 있던 임진강 나루. 옛 여러 문헌에는 이 곳을 장단나루로 지칭하고 있다.
≪高麗樂府≫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재위에 있을 때, 임진강과 어우러져 병풍같이 펼쳐진 장단석벽과 주위에 빼어난 경관에 매료되어 여러 차례 이 곳을 찾아 배를 타고 유람하며 이 마을 백성들과 허물 없는 유희(遊戱)를 즐겼는데, 뒤에 이마을 주민들이 태조 왕건의 성덕(聖德)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이 계속 전해 내려와 이 노래를 "장단도곡(長湍渡曲)"이라 불리운다 라는 기록과
≪高麗史≫에는 공민왕이 이 곳에 와서 기악(伎樂)을 베풀며 노닐던 사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말 신우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장단나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려 할 때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술가가 '이 것은 싸움에 이길 징조이다 !.라고 했다는 장단나루와 관련된 여러 사적을 소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 장단나루를 배경으로 하여 여러 편의 명시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 임 춘(林椿)의 시
長湍風急浪如山 장단나루 센 강바람에 물결은 산 같이 일어
欲借孤舟上瀨難 배 한척 빌려 타려하나, 여울 오르기가 힘들 것 같구나.
十二時回朝復暮 12시간 차이로 아침 저녁은 돌아 오는데
人間何日少波瀾 인간세 어느날인들 파란이 적겠는가......
□ 정도전(鄭道傳)의 시
秋水澄澄碧似天 가을 물은 맑고 맑아 하늘빛 같이 푸르른데
君王暇日御樓船 왕이 틈을 내어 누선에 올랐도다.
師莫唱長湍曲 사공들아 장단곡 부르지 말아
此是朝鮮第二年 지금은 조선이 개국한지 2년째 해로다.
* 사공들아 장단곡...... : 고려 태조 왕건의 덕을 칭송한 노래인 장단도곡(長湍渡曲)을 새 왕조 조선이 건국되었으므로 금(禁)하라는 강한 암시의 내용이다.
□ 이 색(李穡)의 시
長湍石壁翠屛橫 장단석벽은 푸른 병풍처럼 비꼈는데
花開錦繡明 활짝 핀 철쭉꽃 물결은 비단 수 놓은 듯이 보이네.
借商船順流下 잠시 상선에 올라 강물 따라 내려오니
一時情景 難名 한 때의 정경을 이름하기 어렵구나.
□ 권 근(權近)의 시
牙鐵壁越江回 깍아 지른 장단절벽 강을 따라 돌았는데
兩岸春風花正開 양안(兩岸)은 봄바람 속에 꽃이 한창이네.
野外湍山隨地盡 들 밖 장단의 산은 지평선 따라 아득하고
沙中小逕出村來 모래벌 가운데 생긴 호젓한 길은 강촌(江村)에서 나왔네.
舟人截浪牽漁網 사공은 물결을 가르며 그믈을 치는데
田父提壺勤酒盃 농부는 술병을 들고 잔을 권하네.
往事悠悠無處間 지난 일 걱정되어도 물을 곳 없고
碑文剝落盡 苔 비문은 닿아 없어져 이끼만이 남았구나.
현재 이 곳에는 최근에 완공된 콘크리트 다리가 세워져 있다.
26 섬안 : 돌다리 남쪽에 있는 밭. 임진강과 그 옆에 흐르는 작은 개울들이 섬처럼 이 곳을 감싸고 흐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7 마산 : 뒤지나루 서쪽에 있는 산.
28 구야(九野 = 구레) : 재쟁이나루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넓은 한들벌 중앙을 흐르는 연못깔 개울의 움푹 들어간 골짜기와 같은 지형에 위치한 마을이 되어 이러한 '골짜기'의 뜻인 '골'이 지방에 따라 '굴'로 발음이 변하는 현상에 이어 '굴'이 다시 '구레'로 연철되면서 굳어진 '골짜기 마을'이라는 땅이름으로 보여지며, 한자이름인 '구야(九野)' 역시 숫자와 관련된 '아홉'이 아닌 원당리 여러 마을 가운데 들판의 앞에 위치한다 하여 '앞(前)'과 '들(野)'이 합하면서 '앞들'이 되었던 것이 다시 '아홉들'로 음이 변하면서 한자의 '九野'로 음차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29 한들벌 : 원당리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 이름. '크다','넓다'라는 말인 '한'과 '들(野)'이 합하여 '넓은 들'이라는 뜻의 '한들'로 불리웠던 것이 뒤에 또 같은 뜻의 '벌'이 합쳐져 이루어진 복합지명이다.
30 뒷들 : 무네미 남쪽에 있는 들로, 구야 마을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1 도구머리 : 뒷뜰 서쪽에 있던 마을. 말머리산에서 남쪽 한들벌로 뻗어 내려와 불룩하게 돋은 산자락 끝머리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불룩한'의 뜻인 '독(돋)'이 '도구'로 연철되면서 '머리'와 합쳐 이루어진 마을 이름이다. 6·25 전에는 공주 이씨들이 10여 호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 일대 모두가 농경지로 변해 있다.
32 연못깔 : 구야 북쪽의 우묵한 곳으로, 예전에 큰 연못이 있었다 한다.
33 왕대밭들 : 구야 서쪽에 있는 들판.
34 건너밭들 : 왕대밭들 옆에 있는 들판. 효곡동 마을에서 보면 연못깔 개울의 건
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여진다.
35 오박재 : 건너밭들 옆에 있는 들판.
36 재쟁이나루(紫長渡) :구야에서 파주군 적성면 자장리(紫長里)로 건너 다니던 임진강 나루.
37 삭녕바위(朔寧岩) : 재쟁이나루 옆에 있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큰 바위.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삭녕에 있던 이 바위가 임진강의 큰 홍수로 인하여 이 곳까지 떠내려 왔는데, 이 사실을 안 삭녕군수는 장단군수에게 삭녕의 재산이었던 바위니 세금을 내라하자, 장단군수는 이 바위의 보관료를 달라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高麗史 五行志≫에 의하면 충목왕 원년(1345)에 '큰 돌이 장단나루를 스스로 건넜다'. - 大石自涉長湍渡 -라는 이적이 실려 있어 그 바위가 삭녕바위로 명칭과 전설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남기고 있다.
6·25 이후에는 이 바위를 '고청바위'라고도 부른다.
38 장승거리 : 원댕이 남쪽, 한들벌에 있는 삼거리. 현재 콘크리트로 된 농로가 나 있으며, 예전에 장승이 서 있던 곳이라 한다.
39 구내기 : 장승거리 남쪽, 임진강 옆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나주 임씨가 10 여호 살았던 곳이다.
40 거머두둑 : 장승거리 서쪽에 있는 언덕. 검은색깔의 현무암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1 호로고루성지(瓠蘆古壘城址. 紫嵋城. 財尾山) : 장승거리 서쪽, 임진강 옆의 현무암 천연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강안성(江岸城). 지금까지 이 성의 어원에 대하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임진강에 있는 여울인 '호로탄(瓠蘆灘)'의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 오고 있으나, 실제 그 말의 뿌리는 북방계 언어에 두고 있다.
이 성은 비옥한 임진강 유역에서도 군사 요새로서의 가장 중요한 지리적 입지조건과 천혜의 지형을 갖춘 이유로 인하여 삼국시대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 말갈, 거란 등이 이 곳을 세력확장의 거점으로 삼기 위하여 진출하는 과정에서 성의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었던 크고 작은 전투 기록들이 여러 문헌상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위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 볼 때 현재 이 성의 내부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계의 유물에 연관지어 호로고루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아래와 같은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삼국시대 고구려 땅이름 중에는 지금의 '골' 또는 '고을'을 뜻하는 말인 '홀' (忽)이 있는데, 이 '홀'은 '호로' 또는 '호루'로 쉽게 연철될 수 있고, 뒤 음절 '고루'는 고구려어에 성(城)을 뜻하는 말인 '구루(溝婁)'가 이 곳 호로고루의 '고루'와 비슷한 발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어의 기준으로라면 호로고루의 뜻은 '성(城)의 고을'이라는 넓은 의미로 풀이가 가능해 진다.
그러나, 고구려어와 상통되어 왔던 만주어(말갈·거란족어)의 최근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성(城)을 뜻하는 말은 만주어에서 '홀'로 발음되었으며, '성(省)','강 유역'을 칭하는 말은 '고로'로 씌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어, 실제 이 곳까지 진출했던 말갈·거란족의 역사적 사실과 입지조건으로 보아 이 성과 여러가지로 부합되는 것은 '강(江) 유역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만주어의 '홀 고루'가 연철된 '호로고루' 에 뿌리를 두었을 것이 확실해 진다.
그러므로, 이 성은 임진강의 '호로여울'과는 무관한 '강 유역의 성' 또는 '강 옆의 성'이라는 뜻의 만주어 '호로고루'에 뿌리를 둔 땅이름일 뿐이지, 소리 그대로를 음차한 한자식 지명인 '瓠蘆古壘'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전해 오고 있는 이 성의 다른 한자이름인 '자미성'과 '재미산'은 다름아닌 성(城)의 우리 고어(古語)인 '잣'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남북으로 성벽이 산의 형태처럼 남아 있어 오래 전부터 우리 고유어로 '성산(城山)'이라는 뜻인 '잣뫼'로 불리워오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겨쓰는 과정에서 '잣뫼성(城山 城)'과 같은 뜻으로 음이 변한 '재미산(城山)'을 호사가들로 인하여 지금의 '紫嵋城' 또는 '財尾山'으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호로고루 성지에 대한 자세한 것은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42 학다리 : 호로고루성지 북쪽, 자작리에서 내려오는 개울에 있었던 학의 다리처럼 높은 돌다리.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43 자가터모퉁이 : 원댕이 서쪽, 자작리로 가는 곳에 있는 모퉁이.(자작리편 참고)
44 원당리 지석묘(元堂里 支石墓)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45 원댕이뒷고개 : 원댕이 마을 뒤에서 자작리의 신복골로 넘어 가는 고개.
46 원댕이(元堂洞) : 원당리 서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옛 장단현이 자작리 고읍동에 위치하였을 때 이 골짜기 안에 장단현감의 관저(官邸)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도 이 곳에는 건물지의 흔적인 긴 장대석, 와편, 초석 등이 쉽게 눈에 띤다.
47 중한들 : 원댕이 앞에 있는 들판.
48 주마산(走馬山. 주람산, 저드락산) : 원당리에서 가장 높은 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산의 형국이 등에 짐을 잔뜩 얹은 말이 동쪽으로 달려가는 형상이라 하여 주마산으로 이름지었다 하며, 원당3리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마을의 재운(財運)이 이 산의 형국 때문에 외부로 흘러나간다 하여 재물을 싣고 달아나려는 말의 기운을 막기 위하여 이 산 동쪽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를 '말뚝봉'이라 명명하여 지기(地氣)를 보호했다 한다.
또한 이 산의 다른 이름인 '저드락산'은 나즈막히 경사진 주마산의 외형에 의하여 '나즈막한 산기슭의 경사진 땅'을 가리키는 우리말 '자드락'에서 따온 이름이다.
49 절텃골 : 주마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에 절이 있던 곳으로, "未"자 명문의 와편이 수습된 곳이며 지표에는 고려 후기의 많은 와편들이 널려 있으나, 사명(寺名)은 미상(未詳)이다.
50 방아골 : 주마산 남쪽에 딸린 골짜기.
51 상포도개골 : 방아골 옆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상여막이 있던 곳이라 한다.
52 소낭골 : 상포도개골 옆에 있는 골짜기. 승지골로 넘어 가는 고갯마루에 돌 서낭당이 있다 하여 '서낭골'로 불리워지던 것이 현재 '소낭골'로 불리워지고 있다.
53 서낭당고개 : 주마산과 말머리산 사이에 있는 고개. 지금도 돌 서낭당이 남아 있으며 작은고개, 큰고개로 나뉜다.
54 청룡뿌리 : 소낭골과 상포도개골 사이로 뻗어나온 산부리. 원당3리 마을에서 묘를 쓸적에 이 곳이 좌청룡에 해당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5 이랭기들 : 청룡뿌리 앞에 있는 들. 이랑이 긴 밭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6 속샘모루들 : 이랭기들 아래에 있는 들판 이름.
57 강신고개 : 효곡동에서 장남면사무소 쪽으로 질러 넘어 가는 고개.
58 효곡동(孝谷洞) : 말머리산 남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의령 남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농경지가 되었다.
59 평풍바위 : 말머리산 정상에 있는 평풍처럼 펼쳐져 있는 긴 바위.
60 말머리산(마머리산) : 주마산 동쪽에 있는 산. 달리는 말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라 한다.
61 승지골(承旨谷) : 말머리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시대 승지벼슬을 역임했던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62 쑥기식 : 승지골 옆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쑥이 많이 자생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3 구두고개 : 원당1리에서 판부리의 마리개로 넘어 가는 고개.
64 판돈녕부사 김시혁 묘(判敦寧府事 金始爀 墓)·영의정 김상철 묘(領議政 金尙 喆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65 중성골 : 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마을이 있던 곳이다.
66 벼락바위(雷岩) : 중성골 서쪽에 있던 작은 마을. 예전에 벼락을 맞은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7 나이롱다리(범소다리) : 원당리에서 백학면 전동리로 건너 가는 다리. 현재 장남면의 관문 역활을 한다.(전동리편 참고)
68 딴비냥 : 나이롱다리 북쪽, 사미내 옆에 있는 벼랑.
69 안산(案山) : 딴비냥 옆에 있는 조그만 산. 부근에서 묘자리를 잡을 때 이 산을 안(案)으로 삼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0 범바위산(= 달성능산. 112m) : 나이롱다리 서북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 정상에 범같이 생긴 큰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1 당너머고개 : 안산 서쪽에 있는 고개. 판부리의 고릉동과 통한다.
72 감산나드리 : 안산 북쪽, 사미내에 있던 나루터. 백학면 전동리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73 무당소 : 감산나드리 북쪽, 사미내에 있는 깊은 소.
74 안뜰벌판 : 무당소 서쪽, 사미내 옆에 펼쳐져 있는 벌판.
75 굴등골짜기 : 안뜰비냥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판부리 굴등의 뒤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제 보 자 : 권 태 응(79) 장남면 원당3리 3반
남 정 철(75)
이 용 상(68) 백학면 두일1리
정 운 복(68) 장남면 원당3리 1반
유 흥 계(63) 원당1리
2. 자작리(自作里)
본래 장단도호부 장현내면(長縣內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읍리(古邑里)를 병합하여 장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일부 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장단군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26호"에 의거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장남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자작리는 6·25 이후에 새로 형성된 새말에 마을을 이루고 있는 1개의 행정리, 1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自作里 어원에 대하여 ......
자작리의 원뜻은 산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잣'과 산골짜기의 안(內)이 된다는 뜻의 '안(內)'과 합하여 '잣안(山內)'되었던 것이 뒤에 단순한 지명의 접미사인 '이'가 덧 붙어 '잣안이'가 되었고, 다시 '잣안이 > 자잔이 > 자작리'로 연철되어 굳어 지면서 본래의 '산 안에 있는 마을'의 뜻인 '자작리'와는 전혀 무관한 한자 이름인 '自作里'가 된 곳이다.
1 부군나무자리 : 새말 서쪽, 322번 지방도 옆에 있었던 부군(府君)나무. 일제 강점 초기에 이미 고사(枯死)하여 등걸만 조금 남아 있었다 하며,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2 늠나드리 : 새말 서쪽, 방죽이 있는 논. 예전에 임진강물이 크게 범람했을 때 이 논까지 강물이 넘나들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 염창고개 : 골안에서 고랑포리의 자지포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름. 예전에 장단현에서 소금을 보관하던 염창(鹽倉)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옻우물펀데기 : 염창고개 입구에 있는 넓은 언덕. 예전에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옻 우물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 방아다리논 : 골안 서쪽에 있는 논 이름.
6 고네미고개(古南峴) : 골안에서 오리골로 넘어 가는 고개.
7 오리골 : 고네미고개 서쪽에 있었던 마을. 지형이 오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6·25 전에는 해평 윤씨와 전의 이씨들이 20여호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8 고랑포고개 : 자작리에서 윗고랑포로 넘어 가는 고개.
9 꽃밭모루 : 오리골 서쪽에 있는 모퉁이. 이 곳으로 길게 뻗어나온 산의 모양이 새의 주둥이 같이 생겼다 하여 '곶(串)'이라 하였고, 그 곶의 밖에 있는 모퉁이가 되어 '곶밖모루(串外隅)'라 했던 것이 음이 변하여 지금의 '꽃밭모루'가 되어 엉뚱하게 꽃(花)과 관련된 지명 풀이를 낳게 된 곳이다. ("곶(串)"은 중면 삼곶리편 참고)
10 봉내천(鳳川) : 항동리에서 발원하여 자작리를 경유, 판부리로 내려가는 개울.
11 소바위(牛岩洞) : 꽃밭모루 서쪽에 있었던 마을. 소 형상의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경주 김씨와 단양 우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12 벼락바위(雷岩洞) : 소바위 서쪽에 있었던 마을. 뒤편 산록에 예전에 벼락을 맞았다는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방대동 : 벼락바위 서쪽, 항동리와 경계에 있던 마을.
14 동막골(東幕谷) : 방대동 북쪽에 있었던 마을.
15 가시능 : 동막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16 장승백이 : 소바위 북쪽에 있는 고개.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한다.
17 살울이 : 꽃밭모루 북쪽에 있었던 큰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 화의군파 후손들이 4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으로, 샛말(間村)이라는 뜻의 '삳울'이 '살울' 로 음이 옮겨진 이름이다. (백학면 전동리 "살울" 참고)
18 평안도조도사 홍세공 묘(平安道調度使 洪世恭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9 긴발이 : 살울이 동쪽에 있었던 마을. '봉곡동(鳳谷洞)'이라고도 불리워지던 곳이다.
20 가재울(嘉齋谷) : 오리동과 긴발이 사이에 있는 골짜기.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 전주 최씨 문중에 참봉벼슬을 지낸 최거완(崔擧完. 호는 嘉齋)이란 사람이 살던 곳이라 하여 그의 호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1 오봉산(五峰山) : 고읍동 뒤편에 있는 산. 봉우리 5개가 열을지어 솟아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2 능골 : 염창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릉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23 고읍동(古邑洞, 골안, 안말) : 청룡뿌리 서쪽에 있었던 마을. 고려시대와 조선초에 장단현(長湍縣)의 관아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장단의 옛 지리지를 참고하면 조선조 광해군 때까지 이 곳에 있던 장단현의 관아 건물이 현재 파주군(옛 장단군) 군내면 읍내리로 옮겨지면서 이 곳의 지명이 '古長湍' 또는 '古邑'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현재 옛 장단현의 관아터가 있던 곳은 모두 농경지로 변해 버렸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기와조각들이 지표에 널려 있고, 그 외 많은 생활유물들이 수습되기도 한다. 6·25 전에는 창녕 성씨들이 약 12호 거주했던 곳이라 한다.
24 잣나무고개 : 고읍동에서 판부리의 잣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5 바깥말 : 고읍동 동쪽에 있었던 마을. 고읍동의 바깥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12가구가 있던 곳이다.
26 진따모탱이 : 청룡뿌리 끝에 있는 모퉁이. 땅이 몹시 진 곳이라 하여 '진땅이모탱이'로 불리어지던 곳이 '진따'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 모퉁이에 큰 소나무가 있어 마을 주민들이 서낭나무로 받들며 신성시하였다 한다.
27 청룡뿌리(靑龍峙): 골안에서 새말쪽으로 뻗어나온 산부리. 고읍동에 있는 성씨묘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현재 물탱크가 있는 곳이다.
28 돌고개 : 신복골에서 판부리의 잣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9 신복골(新福洞) : 청룡뿌리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6·25 전에는 전주 최씨가 7 가구 살았던 곳이다.
30 안터 : 신복골 안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안씨(安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31 구지개고개 : 신복골에서 판부리의 마리개로 넘어 가는 고개. 현재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새로 개통되었다.
32 성주골(승절골) : 신복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으로 전해 오며 지금도 이 절터에는 와편과 우물이 남아 있다.
33 자가터모퉁이 : 원당리에서 자작리의 새말로 오기 전에 있는 모퉁이.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요양 자씨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4 새말(新村) : 현재 자작리 마을의 이름. 6·25 이후에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5 되번지기논 : 새말 서쪽, 322번 지방도 아래에 있는 논. 예전에 1되의 종자로 1섬의 수확을 거두었던 일등답이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이 종 만(75) 장남면 원당3리
최 병 모(65) 자작리 88
3. 판부리(板浮里)
본래 장단도호부 장현내면(長縣內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읍리(古邑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대부분의 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을 포함하고 있는 완충 지대에 속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장단군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26호"에 의거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장남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판부리는 일부 지역에만 출입영농이 가능한 적접 지역으로,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은 하나의 법정리이다.
1 구두고개 : 마리개에서 원당리로 넘어 가는 고개.
2 구지개고개 : 구두고개 서쪽에 있는 고개. 자작리의 신복골과 통한다.
3 배나무골 : 마리개 남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청송 심씨가 살았던 곳이다.
4 잣나무골 : 배나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잣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불당골 : 마리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으로 전해 오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 절터에는 주초석들이 남아 있다.
6 여우고개 : 마리개에서 나부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예전에 여우가 많았다 한다.
7 창골(倉洞) : 널뚜니 서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곡성 임씨 11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8 삼복골 : 판부리 가장 서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무당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9 장나물고개 : 삼복골에서 백학면 항동리(옛 장단군 장도면)로 넘어 가는 고개.
10 막애울(莫涯洞) : 삼복골 동쪽, 산너머에 있던 마을. 조선조 태종의 부마(駙馬)이며 좌익공신(左翼功臣)이었던 파평군(坡平君) 윤 암(尹巖)의 묘가 있는 곳으로, 6 ·25 전에는 20여호가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11 당아래(堂下村) : 창골 북쪽에 있었던 마을. 김해 김씨가 7가구 살았던 곳이다.
12 고릉(古陵) : 널뚜니 서쪽, 산 등에 있는 묘.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큰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3 널뚜니(板浮洞) : 판부리 중심에 있던 가장 큰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큰 홍수로 인하여 사미천이 범람하면서 상류에서 많은 널판이 떠내려와 이 마을에 떠다녔다 하여 널뚜니가 되었다고 한다. 6·25 전에는 70여호가 번성했던 마을이다.
14 널뚜니벌 : 널뚜니 앞에 펼쳐진 벌판 이름.
15 풀무골 : 널뚜니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6 다래우물골 : 풀무골 북쪽, 두루봉에 딸린 골짜기.
17 두루봉(146m) : 널뚜니 북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두루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응달말 : 사잠 서쪽, 음지에 있었던 작은 마을. 전주 이씨가 4집 살았던 곳이다.
19 사잠(沙岑) : 판부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파평 윤씨가 10 여호 살았던 곳이다.
20 굴앞벌판 : 굴앞 마을 동북쪽, 사미천 옆에 있는 넓은 벌판.
21 배반소 : 굴앞 벌판 동쪽, 사미천에 있는 깊은 소(沼).
22 굴등 : 굴판 동쪽에 있는 산 등.(굴앞 참고)
23 산소골 : 굴앞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4 굴앞(窟前洞) : 굴등 서쪽에 있던 마을. 굴등에 있는 장사굴의 앞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곳 장사굴은 아주 옛날 어떤 장사가 뚫었다고 전해 오는 곳으로, 천연석벽으로 된 굴 입구에는 장사가 남겼다는 손자국, 발자국 등이 완연히 남아 있었고, 이 굴에서 불을 때면 고랑포석벽으로 연기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6·25 전에는 전주 이씨 덕천군파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5 헐떡릉(許陵) : 굴앞 서쪽, 산 너머에 있는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 허 기(許 )의 묘로, 음택풍수(陰宅風水)의 전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허 기가 세상을 떠나자 양천 허씨 문중에서는 당대 최고의 지관과 함께 이 부근에서 묘자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지관이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니 천하의 명당자리가 되어 산 정상부터 혈(穴)을 찾아 내려왔으나, 하루 종일 이 산을 헤멨어도 그 명혈을 찾지 못하고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 할 수 없이 궁지에 빠진 이 지관은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한다. 그러나, 그 뒤로는 영문도 모르는 허씨 상제들이 계속 따라오며 지관을 잡으려 하자, 지관은 걸음을 멈추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며 궁여지책으로 말하기를, '이 자리가 명당이니 이 곳에 묘를 쓰시요 !'라고 자기가 앉은 곳을 일러주었다 한다.
그 후 아무런 사연도 모르고 이 곳에 묘를 쓴 허 기 직계의 양천 허씨 문중은 대대로 현달한 지위와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후 이 묘를 지관의 당혹했던 일화에 따라 '헐떡릉'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현재 남방한계선에서 약 50m 안에 있는 이 묘역에는 미수 허 목이 지은 비문이 새겨진 묘비와 상석·장명등·4기의 문무관석 등의 석물이 있다.
26 고릉뒷산 : 고릉동 북쪽에 있는 산.
27 판돈녕부사 홍원용 묘(判敦寧府事 洪元用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8 조선개국공신 남양군 홍길민 묘(朝鮮開國功臣 南陽君 洪吉旼 墓)·이조판서 홍여방 묘(吏曹判書 洪汝方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9 고릉동(古陵洞) : 판부동 동쪽에 있었던 마을. 남양 홍씨 큰 묘역의 아래에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남양 홍씨가 몇 집 살았으며, 개국공신 홍길민 이하 그 직계에 대대로 현달한 지위에 올랐던 명신들의 위패를 봉안했던 재실(齋室)이 있던 곳이다.
30 나부골(羅浮洞) : 고릉동 남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31 달성릉골짜기 : 고릉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달성 서씨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2 양할미고개 : 마리개에서 고릉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33 달성릉산(112m) : 양할미고개 동쪽에 있는 둥근 산. 달성 서씨 묘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4 마리개(馬里浦) : 달성릉산 아래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12집이 살았던 곳이다.
35 말무덤 : 마리개 옆에 있던 고분.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말을 묻은 곳으로 전해오나, 최근에 이 일대가 경지정리 되면서 큰 봉토형식의 고분이 멸실되어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제 보 자 : 이 신 환(85) 군남면 진상1리 5반
이 용 상(68) 백학면 두일1리
최 병 모(65) 장남면 자작리 88
4. 고랑포리(高浪浦里)
본래 장단도호부 장서면(長西面)의 관송리(貫松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송리를 고랑포리로 개칭하여 장남면에 편입되었으나, 6·25 이후에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장단군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26호"에 의거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면서 다시 장남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고랑포리 전지역은 휴전선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일부 지역에만 출입영농이 가능한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돌다리 : 아랫고랑포에서 반정리로 가는 곳에 있던 돌다리.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져 있다.
2 지지묵골 : 둔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3 안산말(案山村) : 지지묵골 서쪽에 있었던 마을. 북쪽 넘말에 있는 큰 묘의 안(案)이 되는 안산 밑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10가구가 있던 곳이다.
4 황아터 : 안산말 서쪽, 8집이 살았던 마을 이름.
5 쉬는골짜기 : 황아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랑포리에서 진동면 초리로 넘어 가는 고개의 밑이 되어 행인들이 한 번씩 쉬고 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 구린길골짜기 : 고랑포리 가장 서쪽에 있는 골짜기. 파주군 진동면 초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목이 되며, 고갯마루에는 서낭당이 있던 곳이다.
7 도깨비봉(130,2m) : 고랑포리 서쪽에 있는 봉우리. 백학면과 파주군 진동면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8 가래골 : 도깨비봉 동쪽에 딸린 골짜기 이름.
9 도래골고개 : 도깨비봉 동쪽에 있는 고개. 백학면 항동리(옛 장단군 장도면 지역)와 통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남방한계선이 이 곳을 지나간다.
10 이렁골 : 가래골 동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6·25 전에는 5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11 세골(細谷洞 = 시골) : 황아터 북쪽, 가느다란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15호 살았던 곳이다.
12 중골 : 세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가구가 있던 곳이다.
13 배나무골 : 안산말 북쪽, 15호가 살았던 마을. 넘말과 함께 연일 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며, 예전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 능골(陵洞) : 중골과 둔전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15 넘말 : 배나무골 옆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7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16 대궐터(大闕垈) ; 넘말과 둔전골 사이에 뻗어 내려온 산부리 끝에 있는 터.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재위에 있을 때 잠시 머물기 위하여 지었던 행궁(行宮)이 있던 곳이라 한다.
17 둔전골(屯田洞) : 넘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고려∼조선시대에 군사적 중요지대이거나, 군사가 오래 머무르는 곳에 주둔하여 평상시에는 토지를 경작해 식량을 자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병사들이 경작했던 밭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문화 류씨들이 15호 살았던 곳이다.
18 차돌고개 : 둔전골에서 백학면 항동리(옛 장단군 장도면)의 계당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름. 차돌이 많다 한다.
19 공처마루 : 둔전골 북쪽, 항동리와 경계가 되는 산 이름.
20 갈매울(渴馬洞) : 둔전골 동쪽에 있던 큰 마을. 공처마루에서 뻗어나온 산의 형상이 풍수지리설로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이 장서면의 관송리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고, 6·25 전에는 안동 김씨 20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1 장승고개 : 갈매울에서 자작리의 소바위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한다.
22 봉잠산(鳳岑山) : 서원말 북쪽에 있는 산.
23 서원말(書院洞) : 아랫고랑포와 갈매울 사이에 있었던 마을. 조선 효종 1년(1650)에 건립된 임강서원(臨江書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임강서원은 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24 할머니서낭당(굿당, 암서낭) : 서원말 안에 향나무, 참나무, 가닥나무의 노거수(老巨樹)로 이루어진 서낭당. 예전에 고랑포 도당굿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랑포 도당굿은 윗고랑포의 "굿당" 참고)
25 아랫고랑포(下高浪浦) : 서원말 동쪽, 고랑포의 3개 마을 중 가장 아래에 있었던 마을.
26 공굴다리 : 아랫고랑포와 가운데고랑포 사이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27 가운데고랑포(中高浪浦) : 아랫고랑포 위에 있던 큰 마을. 이 곳은 고랑포 3개 마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고 6·25 전까지 2·7일 장이 형성되었던 상권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 마을 동쪽의 임진강 장단석벽 위에는 6·25 전까지 장남면사무소와 기타 여러 기관의 건물이 있었으며, 고랑포나루 선창가에는 항상 많은 상선들이 정박하며 성황을 이루었던 명소이다.
또한 이 곳을 중심으로 하여 임진강을 따라 펼쳐지는 주변의 절경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하여 고랑포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왔는데 8경은 아래와 같다.
1.釣臺暮月(조대모월) : 임진강가 낚시터 바위 위에 비치는 깊은 밤의 고운 달빛.
2.芝灘漁火(지탄어화) : 자지포(紫芝浦) 여울에서 밤고기를 잡는 어선의 거물거리는 등불.
3.嵋城初月(미성초월) : 자미성(紫嵋城. 호로고루성) 위로 떠오르는 초생달.
4.掛岩晩霞(괘암만하) : 고랑포 동쪽, 고야위(掛岩 : 파주군 적성면 장좌리의 임진강가에 있는 큰 바위)에 비친 저녁 노을.
5.平沙落雁(평사낙안) : 고랑포의 대안(對岸)인 장좌리의 넓은 모래벌에 열을 지어 내려 앉는 기러기 떼.
6.石浦歸帆(석포귀범) : 저물녁 반정리의 돌거리에서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
7.赤壁丹楓(적벽단풍) : 장단석벽 좌우로 비단처럼 펼쳐지는 가을단풍의 절경.
8. 羅陵落照(나릉낙조) :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 위에 비치는 저녁 햇빛.
28 서원고개(書院峴) : 가운데고랑포에서 판부리의 소바위로 넘어 다니던 고개.
29 성거산(聖居山. 98m) : 경순왕릉 위에 있는 산.
30 경순왕릉(敬順王陵) : 지정문화재편 참고.
31 능말골짜기 : 경순왕릉이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에는 왕릉을 수호하던 능참봉(陵參奉)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32 고랑포나루(高浪渡, 皐浪渡, 선창) : 가운데고랑포리와 윗고랑포 사이에 있었던 임진강 나루터로, 파주군 적성면 장좌리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옛 문헌에 "皐浪渡"로도 기록되어 있는 이 곳은 6·25 전까지 임진강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의 하나이며, 고랑포 상권 형성에 큰 역활을 했던 곳이다. 또한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조류를 이용해 이곳까지 올라와 장단의 대표적 특산물이었던 콩(長湍白太), 땔감, 곡물 등을 교역하였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경기 북부지역 농·특산물의 집하장 역활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랑포나루터에는 6·25의 참화로 인하여 예전의 번성했던 자취는 역사 속에 묻쳐버리고 무성하게 우거진 갈대숲 만이 옛 나루의 명성을 대신하고 있다.
33 윗고랑포(上高浪浦) : 고랑포나루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까지 고랑포국민학교가 있던 곳이다.
34 부군당터(府君堂 -, 都堂, 할아버지당) : 윗고랑포 임진강 석벽 위에 있던 당집. 예부터 고랑포 주민들의 수호신을 모셨던 곳이며, 고랑포 도당굿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6·25 전의 당집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목조 와가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고랑포 도당굿
도당굿이란, 일정한 지역의 수호신인 도당신을 위한 무속의례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이 마을 굿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의 길복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할머니부군과 할아버지부군을 모셨던 고랑포 도당굿(일명 鎭坐굿, 高昌굿으로도 불림)은 6·25 전까지 전국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루어진 무속행사로 널리 알려져 왔던 귀중한 무형문화재이다.
이 굿의 기본 구조를 보면 청신 - 신탁 - 오신 - 송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3년을 주기로 아랫고랑포와 윗고랑포로 나뉘어서 심한경쟁을 하며 행해지는 고랑포 도당굿 놀이는 음력 2월 초순 중에 길일을 택하지만 실제 행사준비는 정월 10일부터 3m가 넘는 적색·황색·녹색·백색의 농기를 수십 개 만들고 농악대, 무동(舞童) 등을 미리 정해 놓는 등 철저하고 빈틈 없이 준비해 나간다.
정해진 제일(祭日)이 되면 할아버지부군당이 있는 윗고랑포에서 먼저 행사를 시작한다. 세습무인 두 명의 큰무당(= 상좌무녀)의 주재아래 제사가 모셔지고 이어 아랫고랑포에 있는 할머니부군을 모셔오는 청신의 절차인 '도당모셔오기'를 시작한다. 큰무당 2명이 말을 타고 선두에 서고 그 뒤로는 장고·징·피리·해금· 북·꽹과리로 이루어진 취군(농악대)이 '경서토리 무속음악'을 연주하고 8선녀, 5
동자의 무동들이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며 뒤 따르며, 또 그 뒤로는 수십기의 농기와 마을주민, 각 처에서 모여든 군중들이 고랑포거리 전체를 꽉 메우는 긴 행렬을 이루면서 약 2km 거리를 이동하여 아랫고랑포에 있는 할머니부군을 모신 다음, 다시 윗고랑포의 할아버지부군당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어 두 도당신을 한 곳에 모신 후에는 두 신이 기뻐하는가 하는 의식절차인 시루모듬과 같은 점복을 거쳐 부군당에서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12거리 굿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벌어 지게되며, 마을에서는 농악대와 무동들이 가가호호마다 방문하여 복을 빌어주고 각종 놀이로 마당놀이를 벌리면 주인은 좋은 음식과 술로 접대한다.
연일 이러한 행사가 계속되다가 도당굿의 마지막 날인 6일 째 되는 날에는 무당들이 당집 아래에 있는 고랑포나루터에서 이 곳을 지나는 뱃사공들의 무사고와 풍어를 비는 수신제(水神祭)를 올리는데, 큰 무당은 몇 번씩 강물에 뛰어 들어 수신을 달래는 굿을 벌린다. 이 수신제가 끝나면 당집에 모셔져 있었던 할머니부군을 원래의 위치로 되 모시는 송신의 절차를 끝으로 하여 윗고랑포 도당굿은 끝을 맺게 된다.
윗고랑포의 도당굿이 끝난 뒤 바로 이어서 아랫고랑포에서는 윗고랑포에서 준비한 것보다 더 성대하게 같은 기간을 같은 절차에 의해 도당굿을 벌였는데, 두 마을 사이에 서로 경쟁이 치열했다 하며 도당굿이 벌어지는 보름 동안에는 고랑포 전체가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치안유지마져 어려울 정도였다 한다.
그러나, 지역 수호신인 도당신을 통하여 신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노는 가운데 인간끼리의 치밀한 만남과 지역적 유대감을 공고히 하고 결속을 다져 나갔던 이 행사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와서는 많은 예산과 인력이 동원되는 낭비성 미신행사라는 명목아래 금기하게 되었으며, 6·25 이후에는 할아버지당집 터마져 농경지로 변해 버렸고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명맥마져 끊어져 버린 상태에 놓여 있다.
35 자지포(紫芝浦) : 윗고랑포 동쪽에 있었던 임진강 포구마을.
36 옥터거리 : 자지포 동쪽, 322번 지방도 옆에 있는 밭 이름. 옛 장단현이 자작리 고읍동에 있을 때 죄인들을 감금했던 옥(獄)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7 탑두둑 : 자지포 동쪽에 있는 언덕 이름.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었으나, 절(寺名未詳)이 폐사가 되고 석탑만이 오랜 세월을 서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지역 제보자들의 증언으로는 탑이 원형으로 서 있는 것은 목격하지는 못하였지만 절터라고 전해 오는 이 곳에 지대석과 기단석이 원위치에 있었고 탑신부의 일부는 주변에 나 뒹굴고 있었으나, 6·25가 끝나고 1977년 이 지역의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하여 그 때 남아 있던 유물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이 곳에서는 1963년 청동범종과 반자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출토유물은 "중요발견 매장문화재편" 참고)
* 제 보 자 : 권 태 응(79) 장남면 원당3리 3반
정 태 선(78) 파주군 파평면 장파1리 5반
서 상 덕(77) 7반
정 운 복(70) 장남면 원당3리 1반
최 병 모(65) 자작리 88
5. 반정리(伴程里)
본래 장단도호부의 장서면(長西面)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남면에 편입되었으며, 6·25 이후에는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놓여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장단군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26호"에 의거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면서 장남면에 편입된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현재 반정리 전지역은 휴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어 출입영농만 가능한 지역이다.
1 두루봉(烽火峰. 毛女峰. 99,8m) : 반정리 남쪽, 파주군 진동면 용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임진강 옆에 솟아 있는 이 봉우리에 올라서면 사방이 두루보인다 하여 두루봉으로 이름지어 졌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군사들이 주둔하며 봉화를 올렸던 곳으로, 정상에는 약 50m 둘레의 석축이 남아 있고 그 지표에서는 고구려 계통의 적갈색 기와가 수습되어 유적의 성격을 규명해 주고 있다.
1993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실시한 파주군 군사보호구역에 대한 지표조사 중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덮개가 있는 청자항아리(태항아리로 추정)를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2 냉자골 : 두루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찬우물이 있다.
3 검은바위(玄岩洞) : 두루봉 북쪽에 있었던 마을. 검은빛이 나는 큰 바위가 있어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이천 서씨가 5가구 살았던 곳이다.
4 다래낭골 : 검은바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다래넝쿨이 많이 우거져 '다래나무골'로 불리웠던 것이 차츰 어휘가 변하여 '다래낭골'로 된 곳이다.
5 홀내미(胡南洞) : 검은바위와 운개미 사이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이천 서씨가 10여호 살던 곳이다.
6 안골(內洞) : 운개미 남쪽, 골짜기 안에 2집이 살았던 작은 마을.
7 운성부원군 박종우 묘(雲城府院君 朴從愚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8 운개미(雲琴洞. 운금이) : 운성부원군 묘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단양 우씨가 많이 살았고 총 15호가 있던 곳이다.
9 매자골 : 운개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10 방축골 : 매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방죽이 있었다 한다.
11 방축골고개 : 방축골에서 파주군 진동면 초리로 넘어 가는 고개. 현재 322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6·25 전에는 이 길이 개성으로 통하는 대로였다.
12 큰골 : 방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13 능골 : 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좌승지 윤치영(尹致英)의 묘를 비롯하여 윤씨의 큰 묘가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으로, '작은능골', '큰능골'로 나뉜다.
14 시락골 : 운개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15 왼고개 : 백석동에서 오른가리로 넘어다니는 고개.
16 백석동(白石洞, 흰돌이, 구진다리) : 운개미 동쪽에 있었던 마을. 흰차돌이 많은 곳이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천 서씨가 20여호 집성부락을 이루었던 곳이다.
17 백상골 : 백석동 아래에 있는 골짜기. 이천 서씨가 4집 살았던 곳이다.
18 새말(新村) : 백석동 아래에 있었던 마을.
19 뒷골(後洞) : 새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백석동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18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20 기와골(瓦谷) : 두루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기와집으로 된 해평 윤씨의 사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1 돌거리(石浦) : 홀내미 동쪽, 임진강변에 있던 포구 마을. 6·25 전에는 여섯가구가 살았으며 주막이 있던 곳으로, 현무암절벽 위 일명 '정자터'라 불리워지는 주위에는 참나무와 전나무 고목이 우거져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했던 강촌이었으며, 고호8경의 하나로도 손꼽히는 곳이다.
22 두둑벌 : 돌거리 북쪽, 고랑포 지역까지 펼쳐져 있는 두둑같은 넓은 벌판.
23 반쟁이(伴程洞) : 돌거리 북쪽, 한 집이 살았던 마을.
24 쇠내개울 : 고랑포리에서 발원하여 반정리를 경유, 임진강에 합류하는 개울. '사이를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의 '새내(間川)'가 '쇠'로 발음이 옮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25 찬우물(冷井洞) : 돌거리 북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매우 찬 박아지우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6 돌다리 : 찬우물 북쪽, 고랑포리와 경계가 되는 쇠내개울에 있던 다리. 지금은 이 곳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져 있다.
27 고대고개 : 돌다리 서쪽, 삼거리에 있는 고개.
28 오른가리 : 고대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제 보 자 : 서 상 덕(77) 파주군 파평면 장파1리 7반
서 원 하(76)
첫댓글 이렇게 글을올려 주셨으나 읽는데만도 몇시간이 걸리는데 지명과 사연을 만들어 올려 주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고쌩 하셨읍니까 감사 한 다는 말 밖에 할수 없 는 제 자신이 좀 부끄럽군요 수고 하쎴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