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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행
하안거를 해제한 뒤에도 불볕이 산과 들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어찌나 뜨겁던지 삭발한 맨살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경봉은 논물에 적신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만행을 계속했다. 이번에 가는 목적지는 함경도 안변 석왕사였다. 짚신을 대여섯 켤레 바랑에 맨 경봉은 탁발을 하면서 동해안 산길을 따라 터벅터벅 올라갔다. 마하연사를 나올 때 미처 짚신을 넉넉하게 구하지 못하고 길을 나섰는데, 다행히 산촌의 한 민가에서 대여섯 켤레나 보시해 주었던 것이다.
탁발이 가는 곳마다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도 큰 마을의 부호나 유지들은 경봉을 중이라 부르며 하대했다. 그러나 경봉은 만행도 산문 밖의 수행이라고 여기어 하심을 키웠다. 무어라 부르든지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시비를 초월하니 마음은 무논의 물처럼 맑고 잔잔하기만 했다. 만행할 때는 무엇이 되었건 깊이 들여다보곤 하였다. 깨달음은 코흘리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나 놀이 속에도 있었다. 경봉은 다리도 아프고 하여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서 나무등걸에 등을 대고 아이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중아 중아 니 칼 내라 뱀 잡아 회치고
개고리 잡아 탕하고 찔레 꺾어 밥하고
니 한 그릇 내 한 그릇 평등하게 나눠먹고
알랑달랑 놀아 보세 알랑달랑 놀아보세
당산나무 그루터기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마을 촌로들이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아 경봉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스님 면전에서 ‘중아, 중아’ 하고 놀려대니 기가 찰 일이었다. 스님 중에는 땡초라고 하여 성질 사납고 고약한 사람도 더러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대사님. 아이들이 무얼 모르고 그러니 이해하시구려.”
“하하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님에게 중이라고 놀리는 것도 모자라 칼 든 강도라고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날 놀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엣끼! 여보시오. 진리란 선비들의 책상 위에 있는 고상한 것이 아닙니까?”
“코흘리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도 있으니 잘 들어보시오.”
부근 논밭에서 일하던 촌로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느 새 십여 명의 촌로들이 당산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와 엉거주춤 앉았고, 아이들은 모둠발을 하여 경봉의 입을 주시했다.
“진리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숨 쉬고 일하고 노는 데 있습니다. ‘중아 니 칼 내라’ 한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지혜의 칼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도하는 사람의 칼이니 무엇이든지 잘 드는 보검이지요.”
그러자 유식한 촌로 한 사람이 나섰다.
“그렇다면 살생을 말라는 것이 불가의 법도인데 ‘뱀 잡아 회친다’는 뚱딴지같은 말은 무엇이오?”
“뱀을 우리들은 사사(四蛇)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이 네 가지 기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마치 모진 뱀과 같으니 이것이 몸 가운데 부족하든지 많든지 하면 병이 나서 사람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조복 받아 회를 쳐서 먹자는 것이고, ‘개고리 잡아 탕한다’는 것은 개구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오리(開悟理) 즉 깨닫는 이치로 탕을 한다는 것이고 ‘찔레 꺾어 밥한다’는 것은 진리로 밥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진리의 탕과 밥을 어른이나 아이나 평등하게 한 그릇씩 나눠먹자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대사님. 알랑달랑은 무엇이오? 마치 조무래기 붕알이 달랑거리는 것 같소만. 하하하.”
“알랑달랑, 얼마나 천진무구합니까? 무구한 이것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인 것입니다.”
당산나무 아래 모여든 촌로나 아이들은 무슨 얘기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하하하 웃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봉이 당산나무 그늘 아래서 한숨 하고 일어났을 때는 시원한 바람이 선들선들 일었고, 그 사이에 촌로들과 아이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고 없었다. 경봉은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고 바랑 끈을 잡아당겼다. 한여름 탁발은 음식이 곧 쉬어버리기 때문에 한 끼 이상은 공양 받을 수 없었다. 탁발하자마자 외진 길가에서 합장한 뒤 오관게(五觀偈)를 외우고 곧 먹어야 했다.
이 음식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計功多少量彼來處
忖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枯
그러나 경봉은 석왕사에 막 도착하기 전에 한 마을의 노파에게 탁발을 하고는 한 동안 가슴이 절절하여 잡곡밥을 넘기지 못하고 발우공양을 격식대로 다 치르고서야 겨우 마음을 진정했다. 그날은 오관게 뿐 아니라 큰절에서 발우공양을 하는 식대로 모든 순서를 지키고 나서야 탁발한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석왕사를 시오리 남겨두고 한 마을에 들어가 탁발하였는데, 한 노파가 경봉의 염불 소리를 듣더니 쏜살같이 바가지에 음식과 반찬을 들고 나오더니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경봉은 멋쩍기도 하여 다시 반야심경을 외웠지만 노파는 방문을 닫고는 나오지 않았다.
이웃집은 염불을 하기도 전에 경봉 스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기를 출산한 집이어서 사립문 위에 금줄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집은 일을 나갔는지 대낮인데도 사립문이 닫혀 있었다. 세 번을 다 허탕 치고 보니 이 마을은 탁발과 인연이 없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봉은 미련 없이 마을 떠나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막 넘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스님, 스님.”
경봉은 뒤돌아선 채 기다렸다. 노파는 빈손으로 쫓아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바가지를 들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제야 경봉은 노파가 오는 쪽을 향해서 걸어갔다. 노파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 늙은 것이 그만 스님께 문전박대를 하고 말았습니다.”
“보살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잡곡밥을 가지고 토방을 내려오다 그만 방귀를 꾸고 말았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스님께 거친 밥을 드리는 것도 죄송한 일인데, 정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제게 허물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지요.”
“보살님, 저는 그것도 모르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경봉은 발우를 꺼내 노파가 내미는 공양을 받았다.
“부정한 몸을 씻고 다시 퍼온 밥입니다. 부디 맛있게 드십시오.”
경봉은 돌아가는 노파를 향해서 한동안 합장을 했다. 지금까지 만행 길에서는 간략하게 오관게만 외고 공양을 했는데, 노파의 눈물겨운 정성을 받고 보니 가슴이 먹먹하여 발우공양의 순서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발우공양은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성불의 의지를 다지고 중생제도의 서원을 다지는 의식인 것이었다.
경봉은 석왕사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내려가 반석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비록 작은 바위였지만 큰절의 공양 방으로 생각했다. 경봉은 먼저 부처님의 일생을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를 외웠다.
부처님은 가비라에 탄생하시고
마갈타 나라에서 성불하시어
바라나시에서 설법하시고
구시라 쌍림에서 열반 드셨네.
佛生迦毘羅
成道摩竭陀
說法婆羅奈
入滅拘尸羅
발우 놓을 자리를 찾은 뒤 전발게(展鉢偈)도 외웠다.
부처님의 거룩한 발우
내 이제 받들어 펴오니
원컨대 모든 중생이
삼륜이 공한 뜻 얻어지이다.
如來應量器
我今得敷展
願共一切衆
等三輪空寂
이어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불보살의 명호를 외는 심념(十念)에 염송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구품도사 일체제불
당래하생 미륵존불 시방삼세 일체제불
시방삼세 일체존법 대성 문수사리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제존보살 마하살
큰절에서는 십념을 염송한 뒤에는 스님들이 방안으로 들고 온 음식을 나누는데, 여기에도 질서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즉 가장 큰 발우인 어시발우에는 밥, 보시발우에는 국, 연각발우에는 찬이 담겨졌다. 물을 받을 때도 발우의 큰 순서대로 어시발우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성문발우에 담았다. 발우를 내밀 때는 아무렇게나 내밀지 않고 손등을 보여 내미는데, 이는 탐심으로 받지 않음을 뜻했다. 이러한 배식 과정을 절에서는 진지(進旨) 또는 행익(行益)이라고 부르는 바, 속가에서는 밥의 높임말로 ‘진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경봉은 십념을 끝내고 봉발게(奉鉢偈)를 외웠다.
음식 받을 때는
마땅히 바라노라
모든 중생이 음식으로 인하여
법희선열로 가득 차기를.
若受食時
當願衆生
禪悅爲食
法喜充滿
경봉은 천천히 발우에 든 잡곡밥과 찬을 먹었다. 보리와 수수와 쌀이 섞인 밥에다 허연 무김치와 오이반찬이었다. 노파의 인정을 생각하니 수저를 들기도 부끄러웠다. 목이 잠겨와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경봉은 계곡 물을 떠와 마시고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부처님께 건성으로 올렸던 마지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경봉은 부처님께 지심귀명례하지 못한 자신을 참회했다.
‘만행 길의 부처님은 저 보살님이다. 저 보살님이야말로 나의 선지식이다. 부처님께 따뜻한 밥을 올리듯 중생을 대해야 한다. 중생이 부처님이고 선지식이니까 말이다.’
경봉은 발우를 씻은 물을 입이 바늘구멍만큼 작아 먹어도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에게 주며 절수게(絶水偈)를 외웠다.
내가 발우를 닦은 이 천수물은
하늘의 감로수 맛과 같은 것으로
이를 아귀들에게 보시하니
모두 다 마시고 만복할지어다.
我此洗鉢水
如天甘露水
施與餓鬼衆
皆令得飽滿
이어 경봉은 밥 먹은 힘으로 중생제도에 나서겠다는 식필게(食畢偈)를 외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공양 들어 몸의 힘이 가득히 차니
그 위엄 시방삼세 영웅이로다
인과가 생각 중에 있지 않으니
중생 모두 신통을 얻어지이다
飯食已訖色力充
威振十方三世雄
回因轉果不在念
一切衆生獲神通
노파로부터 한 끼 공양을 받아 절절한 진리를 체험한 경봉은 바로 그 힘으로 성왕사 일주문에 당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단순히 눈요기나 하려고 석왕사 일주문을 들어간다면 지옥에 드는 것이고 중생제도를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다면 노파에게 밥값을 갚는 일인 셈이었다.
설봉산(雪峰山) 석왕사(釋王寺).
한반도 북쪽에서 가장 큰 사찰로 장엄한 일주문의 이름이 조계문(曹溪門)인 것을 보면 선풍(禪風)의 도량임이 분명했다. 경봉은 바로 법당으로 들어가 삼배를 하고 선방인 내원암으로 갔다. 선방이 내원암에 있다 하여 선객들에게는 내원선원으로 불렸다.
일주문 안의 가람들이 설봉산 아래 계곡을 따라서 일직선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통도사 가람배치와 비슷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무학대사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석왕사. 그러나 그 이전에 정몽주가 북청(北淸)에 갔을 때 병화로 큰 피해를 입은 광적사(廣積寺)의 대장경 1부와 불상 및 법기를 김남운(金南運)을 시켜 석왕사로 옮겨놓고 고려왕조의 축수(祝壽)를 빌었던 절.
어쨌든 이성계로 인해 석왕사가 큰 절로 중창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서산대사의 <설봉산 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을 세워 오백나한재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天眞堂), 진헐당(眞歇堂), 인지료(人智寮), 용비루(龍飛樓) 등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성계의 귀의를 받은 무학대사는 조선불교의 달마 같은 분으로 법명은 자초(自超),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태어난 탄생지는 남쪽의 합천 삼가였지만 그의 활동 무대는 달마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 불법을 편 것처럼 중부 이북이었다.
소지(小止)의 제자로 출가하였으며 부도암으로 가 혜명국사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능엄경>을 보다가 득력했다. 이후 원나라 연도(燕都)로 가 인도승 지공을 친견했고,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에서 몇 해를 머물렀다. 그곳에 선승 나옹화상이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옹화상은 무학과 선문답을 나누다가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여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 집안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따로따로 귀국한 후에도 만났다. 나옹화상은 무학에게 천성산 원효암에서는 불자(拂子)를, 송광사에서는 의발(衣鉢)을 주었다.
무학은 고려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다가 조선 태조가 책봉하자 받아들였다. 그는 태조의 청에 다라 회암사(檜巖寺)에 머무르다 용문사에 주석한 뒤 1405년에 금강산 진불암으로 들어가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경봉은 마하연사에 이어 내원선원에서도 화두를 들었다. 내원선원은 원래 염불당이었으나 1913년부터 선방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경봉은 탁발 중에 만난 노파를 생각하며 선방에 앉아 동정일여의 경지로 바로 나아갔다.
훗날 용성에게 비구계를 받은 고암(古庵)도 석왕사 내원선원에서 참선 정진하다 심요(心要)를 얻어 게송을 남겼다.
선정삼매는 단지 속에 일월 같고
시원한 바람 부니 가슴 속에 일이 없네.
禪定三昧壺中日月
?風吹來胸中無事
제산 밑으로 출가하여 백양사 운문암, 직지사 천불선원, 수도암, 망월사, 통도사 내원암 등을 거쳐 석왕사에 이르러 비로소 득력한 것이었다. 이어 1938년 양산 내원사에서 용성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을 하여 용성으로부터 견성의 여실함을 인가받고 전법게를 받았다. 용성은 고암을 일컬어 만고풍월(萬古風月) 같은 수좌라고 칭찬한 후 전법게를 내렸던 것이다.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드는 도리를 나도 도한 알지 못하네
운문의 호떡은 둥글 뿐이며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다.
佛祖元不會
掉頭吾不知
雲門?餠團
鎭州蘿蔔長
고암의 가풍은 지계 청정이었는데, 스님은 크고 작은 법회를 가리지 않고 전국을 다녀 보살계를 가장 많이 설했고, 해인사 2대 방장과 조계종 2, 3, 4, 6대 종정을 역임했으며 남녀노소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애심을 심어 주어 자비 보살로 불려지기도 했다. 스님의 법문은 난해하지 않고 스님 자신이 하심과 인욕행을 몸소 실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스님이 설하는 상당법문에도 스님의 성정은 곧잘 드러나곤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본래 결제도 없거니 어찌 해제가 있을꼬!
알겠는가? 산간(山間)에 명월(明月)이요, 강상(江上)에 청풍(淸風)이로다. 이제 대중은 90일 동안 참선 학도하였으니 깨친 바가 무엇인지 일러 보아라.
참선 학도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은 귀천과 노소 남녀와 이둔(利鈍)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그 명상(名相)이 다를 뿐 근원은 똑같아서 평등하고 원융하다. 그러나 불조와 선지식과 납자들의 깨치고 증득함에 더디고 빠르고 어렵고 쉽고 깊고 옅음이 있는 것은 무량겁을 두고 닦고 익혀온 그 원력과 업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언하에 깨치고, 어떤 사람은 회광반조하여 하루 안에 눈을 뜨고, 또 어떤 이는 며칠 혹은 몇 년 만에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둔하고 게으른 자는 죽을 때까지도 못 깨친 채 금생을 하직하고 만다. 이 어찌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니랴. 금생에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면서 닦지 않고 게을리 허송세월하여 미끄러져버린다면 다시는 더 붙잡을 기약이 없으리라. 그러니 이번 동안거에도 소득이 없는 이는 해제를 못한 것이다. 발분하고 반분하라. 금생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어느 생을 기약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교단 안팎은 물론이고 눈밝은 지혜인을 갈구하고 있다.
용기 있는 선지식을 부르고 있다. 신념 있는 행동인을 아쉬워하고 있다.
어서 나서라. 무엇들 하고 이느냐. 무명 중생들의 저 구원의 절규가 들리지 않느냐.
묘도진리(妙道眞理)는 역력하고 분명하여 두두물물(頭頭物物)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옛 사람은 이같이 읊었느니라.
산하대지에 내린 한 조각 눈
햇빛이 비추니 자취 없이 스러졌네
이로부터는 불조를 의심치 않으니
남북과 동서가 어디 있으랴.
大地山河一片雪
太陽一照便無踪
自此不疑諸佛祖
更無南北與東西
여인등산(如人登山)에 각자 노력하라.”
스님은 1988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다음의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세수 90세, 법랍 71년이었다.
가야산색 단풍이 짙었으니
이로써 천하의 가을을 알겠네
서리 내려 낙엽이 떨어지면 모두 뿌리로 돌아가고
구월 보름 밝은 달은 미소하며 허공을 비추나니라.
伽倻山色方正濃
始知從此天下秋
霜降落葉歸同根
菊望月笑照虛空
경봉은 내원선원에서 한 철을 안거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선방 재정이 어려워지자 결제 때 십 여 명이던 대중이 보름도 안 되어 너댓 명으로 줄더니 어느 새 경봉을 포함하여 서너 명만 남았다. 남은 이도 사미승에 불과하여 경봉은 한겨울에 바랑을 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봉은 눈발이 흩날리는 날 통도사를 향해 서둘러 길을 나섰다. 눈은 기세 좋게 내려 퍼붓고 있지만 햇살 한 조각이면 자취 없이 스러지고 말 것이었다. 캄캄했던 무명의 마음이 깨달음의 빛이 단 한 순간에 들어 홀연히 밝아져버리듯.(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