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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한국인들은 경쟁하기를 좋아하고 승리를 즐긴다. 모두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성향은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대학입학시험을 거쳐 졸업 후 직장을 갖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승자가 모든 것을 취한다’는 정서는 당사자의 가족이 아닌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취급한다. 국제시장에서 경쟁상대를 이기는 것에서부터 지하철에서 남보다 먼저 자리 차지하기까지 이기기만 하면 된다.
또한 모든 운전자가 제 마음대로 교통규칙을 변용하기 때문에 한국의 도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상대방은 고려하지 않고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가기, 내 편의대로 주차·정차하기는 기본이다. 교통사고와 사망률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도로 표지판이나 교통 신호에 대해 항의하는 이가 별로 없는 까닭은 이런 것들이 결국은 무시될 터이고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인명을 잃기 전에는 법을 개선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시민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운전질서 계도 게시판이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탑승법을 안내하는 플래카드들은 이른바 유교적 가치관이 얼마나 피상적이 되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유교적 가치관은 권위주의와 철저한 이기주의를 가리는 커버 스토리나 동경의 대상 정도일 뿐이다. 한국인의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대구 지하철 폭파사건 등의 인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인명을 잃었는지 국민은 기억하고 있는가? 그 외에도 잊혀진 비극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최근 잦은 대한항공 사고들도 이런 예들 중의 하나이다. 사회비평가들은 현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배금주의’를 비판해왔다.
이들은 한국의 병폐를, 마치 과거 한국에는 탐욕과 이기주의가 존재하지 않기라고 했던 것처럼, 서구 물질주의와 이른바 개인주의의 도입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는 탐욕과 갈망의 현대적인 산물일 뿐이다. 한국은 일본과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급속한 물질 개발에 초점을 두고 있어 과거 소규모 농촌의 인간적이었던 템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회가치와 소외현상을 낳았다.
마을은 사라졌고 대가족은 복잡한 도시의 핵가족으로 분산되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돈을 가져다 주었다. 사회 속에서의 정체성이 거주지와 직장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반면 소유물에 대한 확신만큼은 뚜렷하다.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될수록 더 안전하고 ‘더 현실적’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조계종 사태도 이런 무분별한 탐욕의 증상이 아니었던가? 태국의 불교 사회비평가인 술락 시바락샤(Sulak Sivaraksa)에 따르면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구절이 세계의 소비주의심리를 잘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은 정체성을 잃게 되고 이웃과 친구들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물질적 획득, 시험지옥, 사회적 지위 획득 등에서 더 큰 업적을 세우도록 몰아부침으로써 이런 상대적 열등감을 과대 보상하려고 한다.
돈을 벌고, 승진하고, 부모와 가족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런 끝없는 압력은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든다. 이런 심리적 속박은 현대 한국인의 고(苦, dukkha)이자 유애(有愛, bhava-tanha)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성공은 물질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보상이나 결과로 사회적 명성이나 이득을 바라지 아니하고 더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다.
타인의 어려움을 관대히 고려할 줄 아는 미덕은 천연자원을 마구 사용하고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는 다국적 한국재벌이나 일본 또는 서구의 대기업들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불자들이 무조건적인 물질 위주의 과도한 흐름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할 때이다.
부처님은 2600여 년 전에 고(dukkha)에 대한 처방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처방은 오늘날 회의적인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포장이 되어야 한다. 불교는 폭력과 난해하고 고루한 언어, 복잡한 의식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해야 하는 불합리한 생각 등을 추가할 것이 아니라 삶의 불확실성과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문제해결을 위해 개인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고 실질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불자들에게 해결하지 못한 조직의 위기를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들더러 부처님과 법에 귀의하면서 승가에 대해서는 눈감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구의 불자들은 비록 오랜 전통은 없으나 종교의 껍데기에 연연하는 지혜롭지도 못하고 융통성도 없는 승가에 대한 강요도 없다.
1) 열린 불교 교육
내가 보는 한국불교의 비전은 다름 아닌 교육이다. 어느 것도 중요도에 있어서는 교육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불교는 단순한 믿음을 통해 복을 구하는 민간 신앙의 일종일 뿐이다. 교리나 수행의 목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는 반드시 변해야 한다. 조계종과 기타 종단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기본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교육과 사회전반에 걸친 적용에 배분하여야 한다.
불교는 보편적 신앙이지 어느 특정 지역이나 나라 또는 부족의 문화유물은 아니다. 불도는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지혜를 닦아 스스로를 깨치는 평생교육의 길이다. 타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적용하는 능력은 문화적 에너지이다.
한국의 불교는 조선시대에 타불교사회와 문화적으로 고립되었던 관계로 고래의 특징을 보존해왔다. 지금은 상대적인 부와 안정을 구가하고 있는 시대로 불교는 외부의 세력에 정체성을 잃지 아니하고도 새로운 사상이나 방법 등에 문호를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불교계 스승들은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다. 보수주의는 탄압기에는 미덕이었을 수도 있으나 이제는 결점일 뿐이다.
지혜와 내적 능력은 사회적 책임의 정도에 비례한다.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충실한 신도들로부터 불신이나 문제제기 등의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산 속이나 대학에서 평온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불교의 급격한 성장은 불교의 미래가 서구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불교에 있어서는 아주 흥미로운 시기이다. 티베트, 중국, 일본의 불경과 주석서들의 영역화 붐이 일고 있다. 이는 문학비평, 심리학, 언어학, 역사 및 사회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통한 학자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평을 받고 있다. 한국의 경전들도 제대로 번역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발간되는 영역된 불교학술서는 적을 뿐만 아니라 대개 질적인 면에서도 떨어진다.
이들은 비판적인 사고와 서구의 현대 불교학, 비교종교학 및 관련 분야에 대한 정통성의 부재를 보여준다. 작업을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서 하게 한 뒤 이를 짜 맞추거나 후에 약간의 편집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것도 많다. 서구의 도서관에서 이런 한국 자료들을 구입하는 것은 워낙 구할 수 있는 자료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불교교육 정책의 부재는 선견지명의 부재를 뜻한다.
이런 약점은 한국사회 전반을 특징짓는 즉각적인 만족과 새로운 부의 향유라는 두드러진 사회적 사조로 나타난다. 소박한 인간애, 시민의 책임의식, 민감한 민주정부, 지속적인 사회개혁과 종교간 화합 등의 가치관을 수립하기 위하여 불교적 사고가 한국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이런 관심사들은 소수의 한국시민들이 이끌어가고 있으나 불자들의 참여는 아주 미미하다. 한국의 불자들은 세계적 불교활동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나 지금까지 이 일에 헌신하고 투자한 이들은 많지 않다. 한국의 불교단체들은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력을 선발하여 이들이 외국의 진보적인 불교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는 장기적 프로그램의 개발을고려해야 한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소재한 나이로파 대학(Niropa Institute)의 사회참여불교(Socially Engaged Buddhism) 석사학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 각지 불교평화협회(Buddhist Peace Fellowship)의 각종 프로그램, 태국의 술락 시바락샤의 여러 가지 NGO 활동들, 널리 알려진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A. T. Ariyaratne)와 의사인 아들 빈야(Vinya)의 사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 등이 이런 프로그램들이다.
2) 가정에서의 교육과 수행
한국 불교문화의 취약점은 가정에서의 불교교육과 신행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절과 기도와 참선을 중심으로 집안에서 봉행하는 가족 중심의 신행활동은 한국불자의 가정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불교의 종교활동은 거의가 사찰이나 성지에서만 이루어진다.
개신교나 가톨릭 신도들은 십자가나 기독교의 성상을 집안에 두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나 불자의 가정에서는 간혹 서예나 달마대사 그림을 제외하고는 불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이들은 주로 장식용이지 신앙생활의 중심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불교행사는 언제나 사찰에서만 봉행되지 않는가?
결국 이것이 불교의 지식과 의식의 집전에 대한 전적인 통제를 승가의 손에 쥐어주고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불교국의 경우에는 가정과 사무실과 가게 안에 불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유대교가 긴 세월 동안의 압제를 딛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배우기 위해 유대교의 랍비와 학자들과 함께 망명 티베트인들의 생존이란 주제하에 장시간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모임의 중요한 결론은 유대교 가정에서의 경전공부와 의식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다. 유대교는 예배를 드릴 성전이나 성직자가 없었을 때에도 교리공부와 의식은 집안에서의 수행을 통해 보존되었다. 이 수행이 탄압의 고난을 겪는 동안 유대인들에게 힘과 결속력을 주었다. 한국의 불자들은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3) 세계의 정신을 이끌 불교 연구소
한국불교계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상호작용 방법을 필요로 한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와 같이 각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는 세계적 학자와 수행자들을 끌어들여 지속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싱크 탱크’나 ‘연구소’를 생각해 본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자성과 연기의 본질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견지에서 인간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인류의 상호이해와 평화의 진작을 도모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두뇌집단은 현대의 제문제에 대한 불교의 상관성을 살피는 데 철학자, 사회학자, 미래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공중보건 전문가, 정보 과학자 그리고 기타 학제간 연구원들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해법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춘 이들이어야 한다. 이들은 여러 학문간을 자유로이 자신을 가지고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의 성별간 균형도 고려되어야 하며, 다양한 국가와 기관으로부터 선발되어야 하고, 박사학위나 박사학위 후 연구과정을 마친 한국인은 정원의 3/1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실질적 언어는 영어가 될 것이며 모든 출판물은 영어와 한국어 또는 영어와 한국어 요약으로 이루어지며 인터넷으로 언제나 접속사용이 가능해야 한다. 보고서들은 국내 언론계에 발표하여 일반 국민이 접할 수 있게 한다. 연구원들은 주어진 연구과제에 따라 3개월에서 3년 동안 연구소에 주재한다. 이런 지침들이 신선한 아이디어와 안목을 한국에 주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학원과 박사학위 후 연구과정에 투자하여 미래의 지도자들이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세계 어디서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불교 연구소는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자산을 가진 법적으로 독립된 기구여야 한다. 개방된 연구 세미나와 발표회 외에도 연구소는 연구소나 법당, 강당 등에서 중요 문제나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대중 강의, 수업,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이들은 불교로부터 영감을 얻은 과학적, 윤리적인 면에 초점을 두되 틀에 박힌 불교의 종교적인 성향은 가능한 최소화한다. 참가자들의 종교적 배경이야 어떠하든 이런 의례들로 인해 이들이 소원함을 느끼거나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유토론과 참선은 장식, 상징물 등의 종교적 색채를 띠는 장비가 없는 편안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전통적인 선수행을 선호하는 이들은 사찰에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이외에 비파사나와 같은 여러 가지 참선법과 참선지도 등은 지정된 장소에서 하면 될 것이다.
목적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인도적이고도 실행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내적 평화와 열린 마음과 상호 의사소통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위에서 본인이 그려 본 성공적인 세계적 연구소는 틀림없이 한국을 세계불교계의 지도자로 부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6.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한국불교의 점검 리스트
1) 국제적인 불교 수용
한국의 불자들은 외국의 불자들과 불교단체들을 기꺼이 한국에 받아들인다면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연구와 수행을 위한 장기적 교환 프로그램이 시행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자들은 성공적인 가톨릭 선교 단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러 종파간의 ‘혼합된 활력’으로 더욱 활성화되고 풍부해졌다. 이들의 세계적인 특성 또한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을 잘 드러낸다.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사찰규범과 전통적인 강원교육을 모든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감수성이 부족한 것으로 피해야 한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과 선우들에게 ‘한국식’만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상호이해와 지혜와 자비의 공동 성장은 불교 교환 사업의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모든 한국인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언제 어디에서건 전통적인 선수행만이 아니라 비파사나(vipassana), 관법(visualization), 다양한 자세, 춤동작과 음악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여 참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인이나 장애가 있거나 병든 사람들, 바닥에 앉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가부좌가 수행의 진전이나 깨달음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2) 달라이 라마의 한국방문
한국의 불자들은 달라이 라마의 한국방문을 꼭 성취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시도들은 주한 중국대사관과 한국정부의 단호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국의 가장 유력한 개신교의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하여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인가?”라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한국에 초청해야 한다.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국민은 이 분과의 만남과 이 분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달라이 라마께서 한국에 몇 주 혹은 한달 이상 머물면서 종교 지도자들, 관료들, 그리고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 밖에도 널리 알려진 불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손실이자 수치였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천거되었던 베트남의 틱낱한(Thich Nhat Hanh) 스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스님, 태국의 술락 시바락샤, 그리고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가 이들이다. 이들은 불교계의 범위를 초월하는 메시지와 경험을 가진 분들이다.
3) 한국불교의 세계 홍보
외국의 저널리스트들 중에서 살아 있는 불교문화로서의 한국을 체험해 본 이는 극소수이다. 트라이서클(Tricycle), 샴발라 선(Shambhala Sun)과 터닝 휠(Turning Wheels) 같은 유명한 미국의 불교 잡지의 직원들을 한국에 초청해 심층적인 한국 답사여행을 하면 어떨까?
그 대신 한국의 불자들은 이들 잡지사들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미국불교에 대해 배우는 방식으로 교환하면 되지 않겠는가? ‘순회 세미나’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중인 외국의 불교 지도자와 기자들을 초청해 한국의 불자들처럼 생활하며 한국의 불교생활 전반에 대해 경험할 수 있게 해보면 어떨까?
지금까지 본인이 참석했거나 참가했던 한국에서 개최된 거의 모든 국제 불교행사에서는 초청한 외국 손님이나 학자들을 서구식 호텔에 묵게 했는데 이런 류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외국 참가자들이 한국을 체험할 수 없었다는 불만을 나중에 토로했다면 큰 비용을 부담하면서 국제적인 불교행사의 준비를 비싼 호텔에서 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불자인 외국 참가자들을 불교수행의 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호텔 등에 묵게 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불법 수행에 대해 배울 기회를 없앤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대부분 사찰에서 며칠 묵거나 사찰에서의 생활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이런 경험이 외국 손님들에게는 의미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상호교류의 기틀로서 친밀감과 따뜻함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4)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불자들의 정치의식 및 정치세력화
일부 불교계 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2천만에 이르는 불자 인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불자들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하다고 한다.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불자들의 존재가 중요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불자들의 정치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 불자들의 반전, 반군부 운동은 과연 존재하는가? 한국의 불자들은 군승의 역할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군승과 경승은 기독교의 공격적인 개종활동을 상쇄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폭력과 전쟁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있는가? 한국 불자들은 다른 불교국가의 평화운동 주창자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가?
5) 종교 편향
학교, 군부대, 직장 등에서 많은 종교편향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 년간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불교와 민속종교 시설에 대한 파괴와 방화 행위들은 상세히조사된 바 있다. 왜 이런 문제들은 일반 언론이 중점적으로 보도하지 않았을까?1)
6) 성별 평등
타종교나 서구의 승가와는 달리 한국의 교단내 성별 불평등은 시정되어야 한다. 한국의 여성불자들 중 지도자급이나 이에 준하는 권한을 지닌 여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승가의 대부분이 재가의 여성 신도들의 금전적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여성에게 권한이 부여되는 시대가 온 것 같으나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불자들간에 이런 변화의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7) 환경운동
그린벨트 규제, 문화보존 그리고 환경운동 등은 고 이기영 박사가 크게 활약했던 역사적인 도시 경주를 통과하는 고속철도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야산의 생태계와 팔만대장경의 보존은 승가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발시킨 중요한 문제였다. 불교환경교육원의 선구자적인 활동은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환경퇴보로 인한 심각한 영향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불자들을 후원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8) 공중보건 교육
인간의 신체는 깨달음의 도구이다. 불교의 금연교육 및 캠페인은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왜 깨달음의 도구인 우리 몸을 상하게 하는가? 과도한 술 소비는 내적 스트레스와 갈등의 징후로 알콜 중독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과도한 음주라는 사회적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참선, 그룹 상담과 지원을 통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채식주의의 권장은 정신적 수행과 맥락을 같이한다. 건강에도 유익하지 못한 잔인한 육식을 금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와 오대양과 열대 우림들이 모두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곡식과 콩 위주의 음식이 건강에도 유익하고 생태학적으로도 더 완전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9) 불교의 생명교육:성교육과 생사 교육
한국의 높은 낙태율을 줄이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성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불자들은 수태와 자궁 내 생명의 인위적인 단절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아는가? 전 세계에 걸친 불교의 성에 대한 이해와 태도 및 성교육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불교 성교육 정책의 시행이 필요한 때이다.
성병과 에이즈의 확산을 막고, 미성년 매춘을 통제하고, 성학대에 대한 대중의식을 높이고, 고압적인 가부장적 검열에 대한 이의제기를 위해 성문제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2) 불교의 죽음에 대한 교육은 학교나 대중매체에 더 널리 보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불자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수행을 내면화해야 한다. 승려들의 간호, 카운셀링, 시회복지 행정 등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말기환자 간호, 호스피스 간호 그리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어야 한다. 불교자원봉사회는 이 방면에 있어 두드러진 선구단체 역할을 해왔다. 화장과 납골당의 사용은 두말할 나위 없는 불교적인 관습이다.
10) 국내외에서의 응급구조활동
최근 타이완의 지진 사태는 자제(慈濟) 불교회의 승려들과 재가신자들이 펼친 훌륭한 구조노력과 활동을 크게 부각시켰다. 한국정부도 응급 구조대를 보내긴 했으나 불교계는 참여하지 않았다. JTS는 북한 난민을 대상으로 중국에서, 그리고 인도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계 주요 종단들이 남들을 돕기 위해 구조대를 조직할 수는 없을까? 골수, 혈액 그리고 장기기증 운동의 범위를 확장하면 어떨까?
11) 교도소 개혁
한국의 불자들은 사형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는가? 전 세계적으로 사형제도는 야만스러운 제도라 하여 반대의 소리가 높다. 한국의 불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12) 동물보호
개인의 건강과 주변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은 우리와 상호작용 관계에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다. 한국 불교계에 동물 보호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집 없는 개와 고양이들을 위한 안전한 보호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채식 운동과 모피와 피혁 산업 뿐 아니라 농장에서의 동물학대 종식을 위한 캠페인 등은 전국적으로 불자들이 이끌어가야 한다. 임상 심리학자들은 가정에서의 애완동물에 대한 보살핌이 환자, 장애인 그리고 노인들의 정서적, 심리적인 치유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아동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일깨워주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활동임을 밝혀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산재해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의 일부만을 열거했을 뿐이다. 내가 보는 한국불교의 미래상은 정적인 꿈이 아니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불교가 “새 천년”으로 가지고 온 수 많은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행동들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 내게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현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끝>
프랭크 테데스코
미국의 U.C. Berkeley 졸업. 영국의 Lancaster 대학과 동국대에서 각각 석사 및 박사 학위 취득(불교학). 현재 University Maryland Asian Division의 Asian studies 강사. 1998년 개최된 아시아 성학회의 부회장 및 "아시아의 종교 ,문화,그리고 성" 심포지엄 의장을 역임했으며 불교, 생명윤리, 종교간의 대화 등에 관한 많은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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