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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안양의 원로인 변원신 어른이 기억하는 안양의 옛 이야기입니다. 주간지 형태로 발행되는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에 실렸던 기사인데 제가 보관하던 글과 이 글을 슨 배경미 시민기자(리포터)의 협조로 제공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일부 글은 아직 찾지를 못했습니다. 추후 찾을 경우 수정 보완하겠습니다. 글의 양이 많아서 페북 노트에도 한꺼번에 올라가질 않아 1,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최병렬-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①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3호 게재
“인분을 거름으로 준 포도가 달다”
안양은 1949년 8월 15일 안양면에서 ‘안양읍’으로 승격됐다. 당시 인구가 3만도 채 못됐다. 1973년 시로 승격할 당시 10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현재는 64만명에 달하고 있다. 안양의 근현대는 크게 ‘안양면’이었던 일제시대와 안양읍 시절, 그리고 현재까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내 이야기는 읍으로 승격되기 이전,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고자 한다. 1902년부터 일본은 국내에서 철도부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안양도 철도가 들어서면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안양역세권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농장과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안양3동 자리에 ‘조선직물(주)’가 들어섰고, 조선견직(주)가 현 석수1동 자리에 설립됐다. 이 공장들은 광목을 짜서 군복을 만들던 공장이었다. 내화목재(주)는 지금의 안양3동 성원아파트 자리에 설립돼 건축자재를 생산했다. 안양세무서 자리는 당시 일본인들이 사택을 짓고 많이 살았던 곳이다.
1920년대에 안양유원지가 위치한 곳에 만들어진 풀장(수영장)이 유명했다. 당시 일본은 안양 풀행(수영장행) 철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성인과 어린이용 풀 2개가 있던 안양수영장은 일본인들의 많이 찾았던 명소였다.
시민공원(현 안양9동) 자리는 당시 채석장이었다. 일제는 노량진에서 천안까지 철도공사에 필요한 돌과 자갈을 이곳에서 조달했다. 박달동은 수원 지지대고개와 삼성산, 관악산 등에서 흘려내려온 물이 모이는 암반지대였다. 물이 많아야 광목을 짤 수 있기 때문에 방직을 하기에 안양은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박달시장에 펌프장을 만들어 물을 조달했다.
또 이때부터 안양에서 포도를 많이 재배하기 시작했다. 직물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소변을 처리하기 위해 웅덩이를 팠고, 이를 거름으로 활용해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분을 거름으로 주면 열매가 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안양포도가 유명해진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 안양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상은 이랬다. 일제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거나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농사는 주로 뽕나무 재배나 아카시아 심는 일 등 일본인 밑에서 일하며 배급을 탔다. 일제의 강점 하에 놓여있긴 했지만 어쨌든 철도와 공장, 농장이 들어서면서 경제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안양은 일제에게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다.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 제작도 안양에서 이뤄졌다. 당시 조선직물 공장에서 비행기를 조립 중이었으나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돌아가고 대한민국이 해방되면서 무산됐다.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안양은 일제의 전투력을 뒷받침하는 전투기지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②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4호 게재
“안양1동은 시대동, 안양2동은 북부동으로 불렸다”
안양시의 명칭에 대해서는 그 유래가 다양하다. 가장 유력한 주장은 통일신라 말기, 고려 태조 왕건이 18세 때 아버지 왕융을 따라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정벌길에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때마침 삼성산을 지나다가 산에 구름이 다섯 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루는 것을 보고, 능정이란 스님에게 물어본 후 석수동 산27번지 일대에 ‘안양사’란 사찰을 건립하면서 안양(安養)이란 지명이 처음 생겼다.
안양이 시로써 변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95년 과천군에서 1949년 안양읍으로, 1973년 안양시로 승격하면서 부터다. 지금의 안양1동은 시대동(市垈洞) 즉 시장터로 불리워졌고, 1902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안양역을 중심으로 발전이 시작되었다. 현재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완공된 주공아파트는 그 당시 1926년부터 시장터로 자리 잡았던 곳이다.
안양역 앞에 있던 용화사라는 사찰은 현재 본웨딩홀 건물이 위치한 자리로 6·25사변이후 옮겼다가 호계동 럭키아파트 쪽으로 이전 후 다시 의왕시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망해암에 모셔진 두 분의 부처 중 한 분이 용화사에 모셔졌다는 것.
일제 때 현 삼성생명 건물에 삼창정미소가 있었고 지금의 외환은행 자리엔 안양읍민관이 자리했다. 또 그 당시 들어선 복생여관은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기억되고 1929년 이 일대에 전기가 처음 송전되었다. 1924년에는 안양지방 최초의 금융기관인 안양금융조합과 안양우체국, 안양연초조합을 비롯해 안양경찰서, 안양읍사무소 등 관가의 건물도 시대동에 속속 들어섰다. 1960년대에는 태평방직공장이 안양발전에 기여하였고 한국제지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1·4후퇴 시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탄 객차가 안양역에서 폭발로 인해 수 백 명의 난민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안양역은 이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로 그 당시에도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한 역사이기도 했다.
서울이나 용산역에서는 여름이 되면 휴가를 위해 안양을 찾는 피서객들을 위해 여름 한 철에만 안양행 임시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안양유원지(비산공원)는 수도권의 위락지로 각광을 받았던 공간이었다.
북부동으로 알려진 안양2동은 일제 때 ‘오끼’라는 일본인이 안양 최초로 이곳에 포도를 재배했다. 기독보육원은 안양의 첫 사회복지시설로 오긍선 씨에 의해 설립되었다. 기독보육원은 후에 해관보육원으로 바뀌었고 현재 좋은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당시 교육시설로는 안양여중·고를 비롯해 양명고, 양명여고, 만안초교 등이 있었다. 수복 후 만안교 맞은편에 대륙석면회사가 자리했는데 이규철 대표가 상당기간 운영하였고, 1957년에는 삼양펄프가 들어섰으며 후에 국제제지로 개명했다.
안양2동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와 출전해 3위에 입상한 남승용 선수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③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5호 게재
“햇살 따뜻한 안양3동, 밤나무 무성했던 안양4동”
양지(陽地)마을. 남향으로 부락이 형성되어 있어 따뜻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안양3동의 지명이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의 80%가 아파트 및 단독주택으로 형성된 주거지역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학교와 공장이 무척 많았다.
현 안양과학대학 위치에는 절이 있었으나 빈대를 잡으려고 붙인 불이 원인이 되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28년에는 엄기승이 안양3동사무소 부근에 안양 최초의 회사인 안양산업사를 설립했다. 1932년에는 조선직물이 들어섰고 광복이 되자 그 자리에 금성방직이 설립되어 오늘날 안양이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직물은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던 곳으로 해방직전 군수공장으로 운영되어 프로펠러 전투기 조립과정에서 일본이 폐망했다.
일제 때 일본인이 내하목제회사를 운영하다가 해방 후 삼영하드보드회사로 바뀌었고 건축자재 생산에 몰두했고 이 자리는 현재 성원아파트가 있다. 안양3동은 또 교육기관이 많기로 이름난 동네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아사히 학교가 설립되었고 해방 후 안양중학교와 안양공고가 개교해 전국에 산업역군을 배출하는 양성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안양여상, 안양예고, 안양전문대학, 안양서초등학교 등의 학교가 속속 설립되어 안양 교육의 요람지가 되었다. 지금의 예고 위치가 노적봉이었고, 1932년 조선일보신문에 전국 부녀자 밤줍기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밤나무가 무성했던 안양4동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다. 지금의 벽산쇼핑 일대는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삼왕제지였던 삼덕제지 앞에 안양변전소가 설치된 후 삼길양상 등의 공장과 천주교 장내동 성당 등이 건립되면서부터 개화하기 시작했다.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에 밤나무밭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목조 함석지붕을 건축하고 1956년 성당에 최초 유치원을 개설해 유아교육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성당 맞은편에는 근로자회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독일여성이 관장으로 임명되었고 근로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형편이 어려운 근로자에게는 숙박이나 식사를 제공했고 노숙자나 걸인, 홀로사시는 어르신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다.
1961년 안양1동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중앙동으로 이전하여 중앙시장이라는 명칭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중앙시장은 중앙로의 개통과 벽산쇼핑이 문을 열면서 한때는 안양시민이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의 약 60%가 유통될 만큼 안양의 시장, 상가지역으로 자리를 굳혔다. 안양의 유일한 삼원극장은 얼마 후 폐쇄되었고 현 부림상호저축은행 이건선 회장이 CGV로 건축, 분양하여 상가가 형성되었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④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6호 게재
“안양 최초의 학교는 ‘안양공립보통학교’”
일제시대 때만해도 안양에는 학교가 없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먼거리에 위치한 군포보통학교나 과천, 안산까지 등교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안양산업사 엄기승 사장과 당시 초대 서이면장인 조한구 씨가 학교 건립 성금모금 활동을 벌였다. 학교 건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안양유지들과 주민들이 기성회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에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러나 건립에 필요한 자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자 동아일보에서 이런 사정을 알고 전국에 대대적인 홍보를 해주었다. 전국에 있는 많은 국민들이 성금 모금에 동참했고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금운동은 성공리에 이루어졌다. 이런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1927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가 개교했다.
지금의 안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이 학교는 처음엔 4년제로 유지되다가 후에 6년제로 바뀌면서 안양교육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 정문이 당초에는 만안로 변에 있었으나 현재에는 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때 안양5동을 교하동으로도 불린 배경도 이 때문이다.
해방 전부터 현재까지 옛 어른들은 안양5동을 찬우물, 냉천동이라고 칭했다. 어느 농부의 지성에 샘물이 솟았다는 찬우물은 현재 아파트와 현대식 주택들이 들어차 있다. 충혼탑이 안양5동 좌측에 있고 근명여자정보고등학교가 1962년에 안양5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1980년 12월에 안양대학교가 개교했다.
공공기관으로는 안양전화국, 안양우체국, 안양소방서, 안양동기소 등이 있으며 50년대부터 60년대 사이에 도살장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택지로는 동덕, 동명, 장미, 한남아파트가 들어섰고 주요기관과 각종 편의 시설이 소재한 안양5동은 주요 도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안양6동의 옛날 이름은 주접동이었다. 유래는 정조대왕이 부왕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천장하고 능행을 위해 지금의 안양경찰서 뒤에 정각을 짓고 잠시 쉬었다는 연유로 주접동이란 마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일제 때만해도 부산에 있던 수의과학본부가 국립수의과학연구소로 바뀌면서 안양6동에 들어섰다. 현재 안양세무서 자리는 그 당시 수의과학연구소 사택이었다. 1973년 7월 1일 안양시 승격으로 현 만안구청부지에 시청이 있었으나 평촌으로 이전했다. 교육기관으로는 신성중고등학교가 인덕원에서 이전해 이곳 소골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골안은 한국전쟁 직후 안양1동 진흥아파트 자리의 난민들을 수리산 골짜기에 집단 이주시키면서 소골안이란 취락지구가 생겼다. 1938년 밤나무밭이었던 자리에 안양식림묘포(경기도임업시험장)을 설치한 후 수의과학연구소, 국립식물검사소, 시흥군 임업협동조합, 농수산물검사소, 한국담배인삼공사 안양지점, 국립종자공급소, 안양세관, 안양시의료보험조합과 안양상공회의소가 들어서면서 안양6동은 관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⑤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7호 게재
“학이 슬프게 울었다는 전설 내려오는 명학동”
안양7동은 일제강점기 초에 시흥시 정왕동에 살던 원정상이라는 사람이 분가를 하면서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자 허허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벌터’라고 칭했다.
덕천마을이라는 지명은 1978년 마을의 유지들에 의해 개칭되었고, 안양시에 의해 토지구획정리사업 전에는 논답으로 있다가 구획정리사업으로 공업지역과 준공업지역으로 형성되었다. 안양천을 끼고 있고 경부철도가 관통되어 60년대부터 공업지역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들어서기 시작해 면적의 70%에 500여개 기업체가 운영되고 있었다.
준공업지역에는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공동주택의 밀집으로 인구가 과밀하여 원주민보다 외부에서 유입된 주민들이 더 많았다. 교육시설로는 덕천초등학교와 풍명실업고가 있었으며 노동부 안양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안양7동은 주택이 노후되면서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안양8동은 안양6동에서 분동해 명학동, 곡내동, 상록마을을 통틀어 안양8동으로 칭했다. 명학동은 인조조의 명신 심기원이 부친 심간의 묘를 비산1동 소재 대림대학 뒤에 쓰기 위해 광중을 파던 중 바위 위에 앉아 있던 학이 이곳 명학초등학교 아래에 있는 바위에 앉아 슬피 울었다는 전설로 인해 명학동이라 불리어졌다. 명학부락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열차로 상경하면서 이곳이 너무 노후되었다고 하여 국비와 시비로 청기와를 제공했고 현재 잔존하는 곳이 있다. 명학초등학교, 성문고등학교, 성결대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안양문예회관이 위치해 있어 교육과 문화권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안양9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라 칭했다. 그 이유는 서쪽으로 산세가 험해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붙인 지명이었다. 병목안은 병의 목처럼 좁은 길이란 이유에서 붙여졌고, 창박골과 창안골은 현 삼영운수 종점에서 남쪽 산에 사각형으로 된 돌창이 있어 그 창 남쪽은 창안골 북쪽은 창박골이라 불렀다. 담배촌은 수리산 북쪽 밑의 마을로 1837년 10월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로 알려진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이곳에 은둔하며 담배재배로 생활하던 곳이었다.
1·4후퇴 당시 철원이나 평강지역에서 피난민들이 남하해 안양3동 금성방직 안에서 피난처로 거주하다가 안양4동 성원2차 부지에 이전 거주했다. 이곳은 77년 7월 8일 수해 시 산사태로 3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피난민촌이라는 지명을 본인이 안양3동 동장으로 재임 시 율목동으로 개칭했다. 그 당시 율목동은 안양시가 발전하면서 안양시 제1호 주건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었다.
능이 있었다는 능골안에는 서여자중학교, 신안초등학교, 신안중학교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는 삼진알미늄이 있었지만 지방으로 이전하고 현재 이 자리에 프라자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수리산은 1951년 1월 25일 수리산 전투가 있었고 미25사단, 터키군, 한국군이 수리산에 주둔하던 중공군 연대 병력을 격퇴한 장소이기도 하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⑥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8호 게재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수푸루지 비산1동”
비산1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비산리로 되었다. 이어 안양면에서 안양읍을 거쳐 1973년 안양시 비산동으로 개편되었다. 동쪽으로는 비산3동, 서쪽로는 비산1동, 남쪽으로는 비산2동이 위치한 비산동은 ‘수푸루지’라고 이름 붙여진 부락이 비산1동으로 되었다. 수푸루지란 이름처럼 산림이 우거진 산간지대였다가 조선 중기에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심기원이 부친의 묘를 지금의 대림대학 뒤에 쓴 후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유적으로는 안양유일의 향교지와 영의정 류정현, 청풍군수 심간 등의 선현 묘가 있다.
1977년 이재준 이사장이 대림대학을 설립했고 원래 이 학교 부지는 무허가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 낙후되고 위험한 무허가촌을 철거 이주토록 지시해 당시 아파트를 건립해주었다. 안양최초의 아파트인 임곡아파트는 그렇게 완공되었으며 후에 대림대학이 매수해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비산동 안양종합운동장 윗쪽에 날미라는 긴 등성이가 있는데 이 등성이가 이룬 골짜기의 안쪽에 있는 것이 안날미이고 바깥쪽에 있는 것이 박날미였다. 날미는 비산동과 석수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새가 나는 모양이라고 하여 산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예로부터 비산동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에는 비산동 일대가 허허벌판이었는데 하루 밤을 자고나니 어디에서인가 산이 날아와 현재의 모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산을 비산(飛山)이라고 했다.
비산2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14년 시흥군 서이면 비산리에서 안양면 비산리로 개칭되었고 1973년 비산동으로 되었다. 1982년 안양시 조례에 따라 비산동을 중 달안동, 샘모루, 희성촌 등의 제 지역을 비산2동으로 칭하였다. 희성촌은 당시 호계동에 위치한 럭키화학 공장이 한창 번성할 즈음 회사에서 직원복지후생차원에서 비산2동에 희성촌이라는 부락을 만들어, 단독주택단지로 직원들이 거주하다가 럭키화학이 지방이전 등으로 거주자가 줄어들자 노후되어 현재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다.
비산2동은 안동 권씨가 정착한 이래 문화 류씨, 진주 강씨 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의 수도군단 초입 학의천에 큰 덕보를 막아 농사를 지을 정도로 수답보다는 대부분의 지역이 천수답이었다. 농사짓기에는 보잘 것 없는 땅이었지만 예로부터 안양의 금소반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실업가 박흥식에 의해 비행장 건설이 계획된 바 있었고 교육기관으로는 안양중앙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삼성래미안아파트와 롯데낙천대아파트 부지는 1977년 7월 8일 수해 때 수재민을 위한 주공아파트가 지어졌던 곳이었다. 이후 미륭아파트와 삼호아파트가 건립되었고 샘모루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⑦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59호 게재
“평촌신도시 개발지역 가운데 가장 큰 들이었던 달안동”
비산3동은 관악산 남쪽에 자리했지만 군사보호시설과 개발제한구역이 동 전체면적의 80%에 이를 만큼 개발의 편차가 심한 곳이다. 비산2동에서 90년 5월 비산3동으로 분리가 된 이곳은 자연취락이 발전되어 제7지구 안양시구획정리 후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일명 내비산, 마장골, 매곡동, 운곡동으로 불린 비산3동에는 한 때 청자 가마터와 백자 가마터가 있었다고 한다. 마장골과 103번 시내버스 종점 부근에 관아와 구류장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 비산초등학교 부근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심수경이 관직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낸 퇴로정이 있었지만 이것 또한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통사찰 불성사가 현존해 있고 선현 묘로는 익평부원군 이석근, 양천현령 이종용, 감찰사 이정용, 이기, 한성부관윤 장언방 등의 묘가 있다. 관악산 산림욕장을 비롯해 매천약수, 불당약수, 상불당약수, 설천약수, 장수약수, 충의약수 등 많은 약수터와 안양종합운동장, 실내수영장이 소재해 있고 교육기관으로는 비산초등학교가 있다.
부흥동은 비산2동에서 신설된 동이다. 동으로는 달안동, 서로 호계2동, 남으로 범계동, 북으로 비산2동이 각각 위치해 있는 곳이다. 원래 서쪽 경수산업도로변에 부흥사란 공장이 있었는데 1984년 그 자리에 부흥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관내에 있는 학교명을 부흥초등학교, 부흥중학교, 부흥고등학교로 지정하고, 입주주민의 혼란을 방지하고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부흥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달안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93년 5월 20일 시 조례에 따라 부흥동을 분동해 달안동이 되었다. 신도시 개발이전 이곳은 삿갓들, 달안이들, 만마지기들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평촌신도시 개발지역내에서는 가장 큰 들이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다녀야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해 삿갓들이라고 불렸으며 빨리 달아나야 한다고 하여 다라니 또는 달안이라고도 했다.
한국땅 이름학회 배우리회장은 “달안(다라니)의 한자식 지명은 월내이다. 이것은 달안의 달과 안을 각각 월자와 내자로 뜻 옮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달은 산이 아니고 들이다. 따라서 달안은 들 가운데를 뜻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조선직물주식회사 박흥식이 이 일대에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활주로 공사를 실시하다가 이듬해에 광복이 되자 중단되었던 곳이다. 1989년에 마을이 폐동되자 신도시개발계획에 의해 주거용 아파트 41개동이 조성되었다. 지금은 동안구청을 비롯해 동안구보건소, 평촌우체국, 평촌전화국 등과 달안초, 희성초, 관악정보산업고 등의 교육기관이 있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⑧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60호 게재
“‘높은 산’이라는 뜻의 박달동“
박달1동은 조선시대에는 금천현 현내면 박달리였다가 정조 때 만안교가 가설된 후 시흥현 현내면 박달리로 개칭되었다. 후에 1973년 7월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 박달동이 되었다. 박달1동사무소 동남쪽 대농단지 초입에 어수정이란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은 200년 전 정조대왕이 수원화산능행을 하기위해 안양에서 잠시 쉬다가 갈증이 나자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질만큼 안양일대에서는 수질이 가장 우수하여 금성방직 등의 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현 박달동과 안양2동 경계지에는 일제 때 일본인이 안양전지역의 수질을 조사한 결과 물이 제일 많이 고이는 지점으로 조사한 후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안양3동에 건립, 이곳에 펌프시설을 설치하고 직물을 제조, 광목과 군복 등 2차대전시 군수물자로 공급했다.
박달1동사무소 일대는 먹해이들이라고 불렀는데 박토여서 농사짓기에는 적합치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권공선이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 건설로 마을이 폐동되자 농사를 짓기 위해 지금의 동사무소 부근에 사람들이 정착한 후 민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달2동은 자연취락지역으로 수리산 서쪽 끝 산에서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산으로 이루어졌으며 햇골, 선녀골, 햇골, 곤두레미고개와 남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밖에도 능골, 동수암, 막상골, 미름물, 범고개, 붓골, 삼봉마을 등의 부락이 있었다. 안산, 시흥, 광명, 인천의 서부관문인 박달동은 지금의 박달삼거리에서 곤두레미고개에 이르는 지역이 산세와 땅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해 농업을 하는데 최적지여서 일찍부터 취락이 발달되었다. 그러나 1930년 일제가 이곳 농가를 전부 이주시키고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건설하면서 2차 대전을 위한 탄약저장고와 군수물자를 비축한 창고가 생겼다. 이 물자들은 일제가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을 침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탄약을 인천방향으로 운반했다.
일본이 폐망 후 1949년 6월 21일 조봉암 농림부장관 때 농지개혁법 분배농지 시행중 민사분쟁으로 1990년까지 소송이 진행된바 있다. 군수물자 비축 창고는 해방 후 미군이 탄약고로 사용하다가 한국군탄약고 및 2개 군부대가 서울일부지역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 중이다. 탄약저장고지역은 현재 그린벨트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이 많은 관계로 안양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어 단계적으로 풀려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리적으로 안양천과 박달천을 끼고 박달로 등 교통의 발달로 6, 70년대부터 만도기계, 삼아알미늄, 노루표폐인트, 동서유리 등의 기업이 들어섰다. 이 일대는 공업, 준공업지역으로 90여개의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장지대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후에 우성아파트, 극동아파트, 금호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농촌지대에서 시가지로 점차 바뀌었고 교육시설로는 안양고등학교가 있고 만도기계는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한라비발디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박달동의 박달은 밝다, 밝은 산 또는 밝은 땅의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 배우리의 우리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를 보면 높은 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고 쓰여져 있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⑨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61호 게재
“이등박문, 원태우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받았던 안양육교”
석수1, 2, 3동은 원래 시흥군 동면 안양리였다가 1973년 시 승격으로 안양시 석수동 1, 2, 3동으로 분동되었다. 서울의 관문인 안양 북쪽에 위치한 석수1동은 안양의 시원지이자 불교문화의 발상지로 많은 문화재와 보물이 있는 곳으로 신촌, 삼막골, 구룡마을 등의 지역이 있었다. 동으로 비산3동, 서로 석수2동, 남으로 안양2동, 북으로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박미마을과 각각 위치하고 있다.
안양의 대표적 문화재인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제4호)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원년 서기 826년 채석, 827년 2월 30일 완공된 것이 당간지에 새겨져 있다. 1959년 유유산업이 이곳에 기업을 건설할 당시 수십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현재 이 유물들은 유유산업 서울 본사에 전시하고 있으며 안양시는 아직 고증을 하지 못하고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중추사지 내에 7층 석탑이 지하에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당간지 내에 있는 삼층석탑은 1963년 보물 5호로 지정되었다가 가치기준 평가에 의해 경기도 유형문화재 112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사찰로는 안양의 대표 사찰인 삼막사를 비롯해 망월암, 상불암, 염불암, 안양사, 수도사 등이 있다. 특히 옛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4년에 왕건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안양의 시명, 동명의 기원이 된다. 1950년에 창건된 안양사가 세워진 자리는 왕건이 18세 때 아버지 왕융을 따라 궁예휘하에 있던 지역으로, 900년대에 금주금천으로 정벌하는 과정에서 삼성산을 지나다 능정이란 늙은 스님의 뜻을 받들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고증은 하지 못한 상태이다.
석수1동은 삼성산을 비롯해 학무봉, 호암산 등의 수려한 산세와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안양시민의 휴식처이자 서울근교의 위락시설이었다. 일제시대 때는 여름이면 임시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안양유원지를 찾는 행락객들이 많았고 수영장을 건설하면서 더 많은 인파가 이곳으로 몰렸다.
석수2동은 동으로 석수1동, 서로 광명시 일직동, 남으로 석수3동이 자리하고 있으며 북으로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자연취락으로 꼬챙이, 벌터, 신촌, 연현 마을 등이 있었으며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험해 산적이나 강도가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은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 11월 22일 이등박문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양출신 원태우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다.
광명시 일직동과 인접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에 경기도 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다. 또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메카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안양시 승격 후 초창기에는 안양공설운동장이 현재 럭키아파트 자리에 건립되어 있었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⑩
안양군포의왕과천 내일신문 제762호 게재
“귀인동은 안양지방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
부림동은 동으로 관양2동, 서로 달안동, 남으로 평안동, 북으로 관양1동이 각각 위치해 있다. 이곳은 관양2동에서 분리한 지역으로 농경지가 대부분이었으나 1993년 평촌신도시 건설과 함께 시청을 비롯해 관공서가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부림동은 관양동의 관(冠)자와 관악산의 악(岳)자를 더해 관악동으로 정했다가 여론에 따라 개칭하게 되었다. 산림이 울창하고 부자가 많았다는 관약1동의 자연취락명인 부림말에서 취한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평촌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일동 및 이동 지역이었다. 1914년 시흥군 서이면 이동리로 개칭되었고 이후 안양면 이동리, 안양읍 이동리로 되었다가 1973년 안양시 승격과 함께 평촌동이 되었다. 자연 취락으로 민배기, 벌말 등이 있었고 해방 후 동일방직과 삼화왕관, 오뚜기 식품 등 크고 작은 기업이 운영되다가 일부 기업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아파트가 신축되었다.
이곳은 신도시 개발계획 이전에는 대부분 농촌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양의 여타 지역보다 주민들이 단합되어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금주운동을 전개하고 소비절약을 통해 교육 및 자선 공익사업의 기금을 마련해 애국운동을 했다. 평촌동 주민들은 1924년 금주동맹회를 100여명의 회원으로 조직한바 있다. 일본 폐망직전까지 일본은 이곳에 비행장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1994년 명지대학교박물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서 유물이 발굴되었다.
평안동은 1993년 시 조례에 의해 평촌동에서 분동되었다. 이곳은 평촌신도시의 교육, 교통, 공원의 중심지역으로 중앙공원 등이 입지한 쾌적한 환경지역이며 병원, 백화점, 전철역 등 생활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주거지역이다. 동명은 평촌지구의 평(坪)자와 안양의 안(安)자를 취해 평안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귀인동은 평안동에서 1994년 분리되었다. 동으로 갈산동, 서로 평안동, 남으로 신촌동, 북으로 의왕시 내손동이 각각 위치해 있고 평촌지구 내에서는 평촌동의 벌말동과 함께 옛마을이 그대로 남아있다. 학계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곳은 역사적으로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이라는 결과가 밝혀졌다. 즉 1990년 명지대박물관이 평촌지구 지표조사에서 찌르개, 긁개 등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귀인마을에서 출토했다. 마을 안쪽 구릉 정상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와 백제 초기의 주거지도 함께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귀인동의 유래는 옛 평촌동의 자연취락인 귀인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이 마을에 들러 머물다 갔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마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정리 배경미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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