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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월 20일 금요일 맑음
새벽부터 일어나 식사 준비를 했다. 외국인들은 어딜 가나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된장국도 냄새를 조심스럽게 끓여서 숙소에서 즐겁게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8시 숙소를 나섰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로 갈들이 있었다. 우리는 분문을 향해 나갔다. 실로암을 찾아 시온 산을 내려간다.
시온 산은 성서에서는 시온(지우온), 또는 시온 산(하르 지우온)이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한때는 다윗 도시와 성전이 위치한 모리아 산을 중심으로 한 솔로몬 도시를 가리켰으며, 시편과 예언서들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여기서는 야훼의 집(성전)이 자리한 예루살렘을 총칭적으로 가리키는데, 이와 같은 총칭은 마카베오 시대에도 통용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는 예루살렘 시내의 어느 특정지역, 곧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동산(힌놈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 사이의 하단부 고원지대)을 가리켰다. 오늘날 시온 산이라고 통용되고 있는 곳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성지이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발상지로서 최후 만찬과 성령강림이 이루어진 곳이요, 그리고 제자들이 마리아와 함께 머물렀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다윗의 무덤도 이곳의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온산은 해발 765m의 작은 산이었다. 옛날에는 성내에 있었단다.
우리는 분문을 통해 나갔다. 원래 목적지는 시온 문을 통해 시온 산으로 향하려 했다. 분문이 나와 분문 주변부터 살펴 보기로 했다. 실로암을 찾았다. 실로암은 요한복음 9장에 소경을 이 못에 보내 치유해 주신 주님의 역사가 기록된 연못이다. 기혼샘의 물을 받아서 저장하기 위해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단다.(열왕기하 20장) 5세기에 이 못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AD614년에 페르시아인에 의해 붕괴된 후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연못으로 '실로아'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곳이기도 하지만, 소경이 눈을 치유 받은 곳으로 더욱 유명한 연못이다. 아랍 청년 몇 명이 없는 입장료를 내라고 졸라댄다. 연못은 관리가 소홀해 지저분했다. 아랍인 지구 인 것 같다. 이곳에서 혼자 여행하고 있다는 신학대학원생을 만났다. 반가웠다.
이 못을 다시 내려가 왼쪽으로 틀어 150m 정도를 가니 기혼 샘이 나왔다. 성경 영왕기하 20장에 보면 ~못과 수도를 만들어~ 라는 기록이 있다. B.C700년 경 예루살렘의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침입 때 예루살렘 성 안에 물이 공급되도록 견고한 바위를 뚫어 지하 터널을 만들었다. 이 터널은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에 있는 실로암 못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기혼 샘은 다윗 성이 지탱할 수 있는 수자원의 근거지였다. 이 샘은 사이펀식 카르스트 샘(siphonic, karstic spring)이다. 기혼이라는 말은 “분출”을 의미한다. 물길이 힘차게 쏟아져 나오면서 물소리도 강하다. 기혼샘은 약 2500명의 식수를 공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루살렘의 유일무이한 샘터 기혼 샘은 기드론 계곡의 서편에 위치해 있다. 이 샘을 중심으로 당시 여부스라는 도시가 세워졌고 다윗의 도시도 건설되었다.
다윗 왕의 아들 아도니야는 은밀하게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기혼 샘 옆에서 솔로몬의 대관식을 공개적으로 치르게 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공식적인 행사는 기혼 샘에서 치러졌고 이곳이 상징적인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낫세 왕은 기혼 샘과 산꼭대기에 있는 성벽 사이에 외성을 쌓아서 기혼 샘을 보호하였다. 히스기야 터널은 530m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터널인데 전쟁을 앞두고 시급하게 팠기 때문에 양쪽에서 파고 들어가서 만나게 하였는데 미적분이 발달되지 않은 시절에 양쪽에서 파고 들어간 터널이 서로 만났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터널의 폭은 60cm 높이는 1.45m~5m이다. 터널의 직선거리는 335m로 약40% 짧다. 전문가들은 바위 사이에 있는 자연적인 균열을 찾아서 터널을 팠던 것으로 추정한다. 히스기야 터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이스의 유팔리오스(Euphalios)의 터널과 함께 가장 위대한 수도 터널기술로 평가되고 있다. 물은 지금도 깨끗하게 흐르고 있는데 관리가 허술해 폐 타이어가 물 위에 걸쳐있다. 의미 있는 곳에 관리가 안 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파른 언덕 길을 오르니 다비드의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쌓은 흔적이 남고 벽돌들만 있었다. 이곳을 오펠 언덕이라고 한다. 이곳에 보면 와렌 샤프트라는 표지가 있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공경했을 때 ‘물을 퍼 올리는 굴’에서 올라오는 에비스인을 타도했다고 되어있는 굴이 바로 이곳이란다. 와렌이라는 사람이 찾아내서 이렇게 이름이 붙었단다. 원래 이 지역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는데 지금이 밖이 되었다. 1500년대 오스만 터키 왕조가 점령시 술래이만 황제가 예루살렘 성을 다시 건축하기 위해 설계사에게 맡겼다. 설계에 따라 건축하고 보니 이곳이 성 밖에 있게 되는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 그래서 건축 설계사는 참수 형을 당했단다.
우리는 성벽을 따라 분문을 지나 시온문으로 약간 거슬러 올라갔다. . 시온 문은 시온산과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영어로는"시온 게이트", 히브리어로는"시아르 시온"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바브 엔 네 비다우드"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문을 통해 시온 산에 위치한 다윗 왕의 무덤으로 간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차량이 통행하는 곳이다. 전쟁 당시 탱크가 지나다가 벽 모서리가 깎인 흔적이 그대로 있다.
마가의 다락방을 찾았다. 지금은 최후 만찬 기념 교회라고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 만찬을 나누셨던 장소로 여기고서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것이 최후 만찬 기념 성전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과연 어디서 최후 만찬을 드셨는 지에 대해 오늘날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복음서에 보도되는 내용만으로는 그 장소와 위치를 꼭 집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전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비잔틴 시대의 기념 성전이 위치했던 곳을 예수의 행적이 담긴 곳으로 여기는 것이 상례이다. 오늘의 기념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비잔틴 시대부터 이미 성역화 되었던 곳이다. 폐허가 된 이 성역을 1333년 나폴리 왕 로베르또와 왕비 산치아가 이집트 술탄 말렉 알 나시르 마호멧으로부터 매입하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넘겨 주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이 부지에 수도원과 고딕식 건축양식의 기념 성전을 짓게 되었다. 2층으로 된 이 기념 성전을 "예수의 최후만찬 기념성전"이라고 불렀다. 지상 층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홀, 다윗 무덤 홀, 그리고 사도 도마 홀이 있었고, 위 층에는 최후만찬 기념 홀과 성령강림 기념 홀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념 성전은 1517년 터키 계 회교도들에 의해 사원으로 변모되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
근 4백 여 년 동안이나 회교사원으로 사용되다가 1948년에는 이스라엘 정부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그 운명은 달라졌다. 지상 층에는 다윗 무덤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유다 인들은 자기네들의 시나고그와 탈무드 학교를 만들고 위 층에 있는 성령강림 기념 홀을 폐쇄시켜 버렸고, 최후만찬 기념 홀은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도록 개방시켜 놓았다. 하지만 이 건물 안에는 어떠한 것이든 종교적 행사는 법적으로 금해져 있다. 단지 성 목요일과 성령강림 대 축일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의 전례만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강제로 빼앗긴 기념성전과 수도원 건물을 되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해 봤으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리하여 1936년에는 기념 성전 터 바로 옆에 조그마한 부지를 매입하여 기념성전과 수도원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이 오늘날 라틴 계통 그리스도인들의 최후만찬 기념성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후만찬 기념성전과 마리아 영면 기념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성역은 핵심부분에 속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주 귀중한 성지라고 하겠다. 복음 사가들이 보도하는 내용들이 다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발상지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 한국인 신자들이 신부님의 안내에 따라 주기도도 외우고 찬송도 부르고 있어 조용히 있다가 물러나왔다.
산 정상에 있는 돌미시안 교회에 갔다. 동정녀 마리아가 죽었다는 장소에 세워진 교회다. 마리아 영면 기념 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마리아가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십자군이 세우고 모슬렘이 파괴한 후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기념 성전은 1906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910년에 완성된 것으로서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관할하고 있다. 사진에 마리아가 영면하는 모습이 있는데 교회 내에는 없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곳에 사진과 같이 마리아가 누워있는 모습이 있다. 이 교회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단다. 바닥 모자이크는 예술의 극치라고 하는데 우리 문외한들은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그 다음 방문한 곳이 다윗 무덤이다.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거룩한 장소 중에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자를 써야만 들어갈 수 있다. 1172년 듀데라의 벤자민 이라는 랍비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다윗의 기념 묘를 만들어서 이 자리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이 무덤은 돌로 만든 석관이다. 수를 놓은 천으로 덮어두고 율법을 세긴 은 관으로 장식해 두었다. 실제 무덤은 예루살렘 동편 다윗 성에 있단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이스라엘도 왕이 많은데 무덤이 없다. 인간을 영웅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 섬기는 그들의 신앙에서 유래 된 듯 하다.
그 옆에 있는 기념관이 홀로 코스트이다. 유대인들이 독일 나치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 당한 모습들과 감옥에서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사람을 죽여 비누를 만들어 사용했던 비누 조각이 보인다. 겁에 질려있는 소년의 모습도 있다. 시체가 산더미 같이 모여진 사진도 있다. 흐르는 눈물을 형상화한 조각품도 전시되어있다. 무겁고 어둡고 슬픈 과거의 역사다. 지구상에 다시는 존재해서는 안 될 역사의 모습들이다.
산 중턱에 있는 교회를 향했다. 보수 공사 중이다. 보수비 충당 입장료를 받는다. 이 곳이 베드로 울음교회다. 베드로 회개 기념성전은 1925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프랑스 계통 성모승천 남자 수도회(아숨시옹)에서 관할하고 있다. 베드로 회개를 기념하는 성전인데, 시온 산 남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계명 교회라고도 한다.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더라’ 라는 장소다. 이 교회는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터 위에 세워졌단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맷돌, 지하 감옥, 집 앞의 뜰, 하인들의 숙소들과 비잔틴 교회의 유적들이 진열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 이 장소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다.
조금 벗어나 한국 젊은 가이드를 만났다. 주변의 경관을 보고 설명해 주었다. 히브리 대학이 있는 전망산, 그 밑이 기혼 골짜기, 그 위 산이 올리브 산, 오른 쪽 2시 방향이 기드론 시내, 마주 보이는 낡은 집이 있는 산이 솔로몬이 우상을 만들어 섬기던 장소 멸망 산이다. 시온 산 서쪽 산이 서쪽 산, 기드론 골짜기와 시온 산 사이 언덕이 피 밭으로 아겔다마라고 한다. 가롯 유다가 목 메달아 죽은 곳이다. 여행에서 귀 동냥이 중요하다.
히브리 박물관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탔으나 금요일이라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해서 방향을 돌려 베들레헴 지구를 구경하기로 했다. 대절 비는 약 4만원 정도로 흥정을 했다.약간 비싸다고 생각된다. 남쪽으로 택시는 달린다. 국제 다이아몬드 가공 공장을 지나 낡은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검문하는 이스라엘 군인이 많이 보인다. 아직도 전쟁 중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기원전 1010-970년경 재위)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라난 곳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는 이야기 말고는 온 구약 시대에 걸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촌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군주로 추대하였기 때문에 다윗이 고향이라는 사실만은 큰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장차 태평성대를 이룩한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아는 당연히 다윗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메시아 탄생지에 대한 기대는 미가 5장 1절에 분명히 드러난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타야, 너는 유다의 영지들 가운데서 아주 작지만,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나오리라”
제일 먼저 예수 탄생 교회를 방문했다. 로마 제국 내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324년 베들레헴에 순례 와서 예수 탄생지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아들에게 청해서 바로 그 동굴 위에 성당을 짓게 했다. 공사는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오래 걸렸다. 339년 5월 31일에 성당을 축성했는데 첫 번째 성탄 성당을 콘스탄티누스 성당이라 한다. 이 성당은 언젠가 불타 버렸는데 그 시기와 화재 원인에 관해서는 설이 구구하나 짐작 건 데 510년 대지진 때 화재가 난 것 같다. 아니면 529년 사마리아인들 폭동 때 타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콘스탄티누스 성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 일부가 지금의 성당 중앙 통 중간 지점에 보존되어 있다. 나무판자를 들추면 아름다운 십자가 모자이크가 보이는데 곡선이 여러 겹 교차해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매듭 기법을 연상케 한다. 지금의 성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531년에 완공한 것인데, 그 후 지붕과 바닥과 내부 장식 정도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성당이 1450여 년간이나 보존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기원후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모든 성당을 허물어 버렸지만 베들레헴의 유스티니아누스 성당만은 그대로 두었다. 왜 그랬을까? 화가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이 예수를 경배하러 찾아온 동방 점성가들을 그 성당에다 그려 놓았었는데 용케도 페르시아 점성가들로 분장시켜 놓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자기네 조상들을 대하고 나서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유스티니아누스 성당을 허물 생각은 고사하고 오히려 참배를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638년 이스라엘을 점령한 회교 군주 오마르 역시 이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
왜? 회교 경전 코란에 보면 동정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를 종려나무 아래서 낳았다고 하는데, 이 종려나무는 바로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회교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도 예루살렘회교 사원들과 헤브론 성조사원을 순례하는 회교도들이 베들레헴 유스티니아누스 성당도 참배하는 것이다. 창문과 큰 문이 있는 교회라기 보다는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성 같았다. 창문도 적고 들어가는 입구도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작고 견고했다. 어느 권력자라도 예수 탄생 교회를 들어갈 때에는 말을 타고는 들어갈 수 없고 내려서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다.
히브리어로 ‘벧’은 집이고 ‘레헴’은 떡이란다. 베들레헴은 떡 집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떡인 예수님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구약 성경에 보면 라헬이 에브랏(베들레헴)에 가는 길에 죽었다. 모압땅에 갔던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왔던 곳이기도 하다. 성탄 교회 문을 작게 만든 것은 말을 타고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란다. 십자군 시대, 터키 시대 두 번이나 문을 낮추었단다. 이 교회는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길이 51.8m, 높이 24.3m이며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 위에 세워졌다. 이 교회 지하로 내려가면 탄생 동굴이 있다. 가로 10.6m, 세로 3m의 동굴로 흔한 동굴인데 가축 외양간으로 사용되었단다. 동굴 안에는 동굴을 밝히는 48개의 등이 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자리에 은으로 된 별을 놓고 라틴어로 ‘여기가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곳이다’ 는 말을 새겨 놓았다. 구유가 오른쪽에 있으며 옛날 돌들이 촛불과 등불에 그을려서 검게 되어있었다. 신부들과 순례 객이 어울려 성탄 찬송을 부른다. ‘고요한 밤’ ‘엎드려 절하세’ 동방 박사를 이끌던 별이 내린 자리의 은색 별에 손을 대고 감격해 했다.
이 베들레헴 별 때문에 1853년 크리미아 전쟁이 시작 되었단다. 카토릭 교에서 별을 만들었는데, 러시아 정교회에서 제거해 버렸다. 오스만 터키가 원상 회복을 요구로 전쟁이 발발했단다. 처음 들어간 예배당은 ㄱ리스 정교회이고, 이 곳 지하실을 통해 동굴을 들어가 출구를 나오면 도 하나의 교회가 있는데 이곳이 아르메니아 교회가 관리하는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을 나오면 바로 다른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데 이곳이 로마 카톨릭 교회당이다. 이곳 크리스마스 미사는 TV 로 생중계된다. 지하에는 카타콤베로 사용된 동굴이 있다. 히에로니무스 가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머물렀던 움막이 있다. 교회 뜰의 동상은 히에로니무스 다.
택시를 타고 다시 2km 를 가니 옛 모습이 남아있는 양치기 언덕이 나왔다. 별 모양의 채플이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 동굴에 들어가니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옛날 양치기들이 양을 어떤 곳에 모아두었는지 잘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성경 누가복음에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주의 사자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하던 곳이란다. 메시아 소식을 들은 곳, 이 부근이 또 보아스의 밭이고 룻과 결혼하고 다윗 왕의 조상 오벳을 낳은 곳이다.
택시를 다시 타고 8km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렌트 회사를 소개해 주는 호텔 안내소에 인도되어 차를 빌렸다. 금요일 오후 2시부터 화요일 오후 6시까지 사용하기로 했다. 총 렌트비 186달러다. 차종은 일본산 스즈키 하얀색 소형이다. 차 시 운전 겸 모두 타고 뚫린 대로 예루살렘을 달렸다. 구 예루살렘을 발견 후 다마스커스 문을 지나간다. 헤롯문도 지난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궁전이 이 성문 근처에 있었다고 하여 이렇게 불린다. 유다인들은 "사아르 헤페라힘(꽃들로 장식된 성문)", 회교도들은 "바브에즈 사히라(초소의 문)"라고 부르고 있다. 라이온 게이트도 지난다. 여리고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었다.
도시 베다니를 지나간다.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향하는 길목에,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올리브 산 동쪽 하단부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다. 요한복음 11장 18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부터 대략 15 스타디온(2.7km, 공동번역:5리) 떨어진 곳에 베다니아가 위치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 보면 3km가 훨씬 넘는 거리란다. 예루살렘에서 베다니아로 가자면, 우선 올리브 산에 올라온 다음에 벳바게 기념 성전까지 와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거리에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계속 포장도로를 따라 둘러서 갈 수 있겠고, 다른 하나는 좁은 산책길을 따라 베다니아로 내려갈 수 있다. 벳바게 기념 성전에서 도보로 대략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베다니아는 나자로 무덤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나자로 무덤에서 북서쪽, 즉 예루살렘 방향으로 5백m 정도 걸어 올라가면, 옛 무덤들의 흔적을 볼 수가 있는데, 기원 후 1세기경 이 곳에는 공동묘지가 자리했었다고 한다.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다니아는 아랍사람들에게 "엘 아자리애"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곧 "나자로의 고장"이라는 뜻을 지닌 희랍어 "라자리온"이나 라틴어 "라자리움"에 흡사한 칭호라고 하겠다. 베다니아 근처, 즉 동남쪽으로 5백m 정도 내려가면, "(베트)아나니야"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베냐민 지파들이 살았다고 하던 곳이다. 그 후예들이 이 곳 베다니아에서도 살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리하여 베다니아라는 명칭은 "아나니아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트) 아나니야"에서 연유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지명 베다니아는 복음서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예수님과 절친하게 지냈던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던 곳이 베다니아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행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방문하시어 정담을 나누곤 하셨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다.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국진한 사랑과 정성은 요한복음 12장 1절에서 8절까지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을 정찬에 초대한 나병환자 시몬의 집 역시 베다니아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찬을 나누는데 어떤 여인이 와서 예수의 머리에 향료를 발라 주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기 전에 베다니아에 오셔서 입성 준비를 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을 두루 살펴 보신 다음에 저녁이 되자 베다니아로 오셔서 묵으셨으며 그 이튿날 다시 성전으로 가셨다. 이렇게 볼 때 베다니아는 예수께서 자주 왕래하셨던 곳이요, 예수께서는 아주 정든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베다니(현재 이름은 아자리아)를 벗어나니 황량한 거칠어 보이는 광야가 계속 된다. 도중 한가하네 차를 세우고 우리 김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곳곳에 베두인의 검은 텐트가 보이고 양들을 치는 목동들이 보인다. 차를 다시 타고 가는데 계속 내려가는 길이다. 차들은 급하게 추월해 가고 도로의 중앙선도 없고 상태도 엉망이다. 가끔 나타나는 중앙선은 흰색이고 양쪽에 노란 선이 있다. 40분 정도를 달려가니 왼쪽으로 여리고 표지판이 있다. 이스라엘 군 주준지를 지나 경찰 로터리를 왼쪽으로 돌았다. 이곳이 여리고다.
예루살렘(해발 평균 760m)에서 동쪽으로 유다 사막을 계속 내려가다가 요르단 강 못 미쳐 조금만 북상하면 오아시스 도시 예리고(해발 -258m)가 나온다. 예루살렘에서 자동차로 39킬로미터, 예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지금의 시가지 중심에서 2킬로미터쯤 북쪽으로 가면 1분당 4500 리터의 물을 토해내는 술탄 샘(엔에 술탄)이 있다. 일명 예언자 엘리사 샘이라 한다. 처음에는 먹지 못하는 물이었단다. 여리고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엘리사가 소금을 던져 물의 근원을 고쳐 먹기 좋은 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 샘 덕분으로 유다 사막 한가운데 직경 5 km 정도의 푸른 초원이 생겨났다. 요즘에는 대추야자나무, 감귤나무, 바나나가 무성하다. 술탄 샘 주변에는 옛 고적부터 이제까지 여러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그 위치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바디메오 라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 이야기, 삭게오 라는 세관장 집에 하루 머무르신 이야기 등이 있다. 삭게오는 너무 키가 작아서 돌 무화과나무를 뽕나무라고 번역한 예가 더러 있으나 절대로 뽕나무가 아니고 무화가 나무의 잡종이다. 그러니 돌 무화과나무라 번역해야 마땅하다. 요즘 여리고 에는 중심부에서 술탄 언덕으로 가는 국도 오른편에 큰 돌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보일 뿐이고 오히려 이집트에 이 나무가 무성하다. 아랍지역이라 지저분하고 낡았다. 황야만 달리다가 이곳을 보니 푸른색으로 꽉 차있다.
오아시스의 도시, 풍부한 물이 있는 도시, 예쁜 꽃들이 있고 과일과 채소 재배가 적당한 도시, 종려나무 마을이라 불리던 도시, 구약 시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공격한 도시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던 거리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도시다. 엘리사 샘물에 아랍인이 꽃을 꺾어주며 안내를 해 주었다. 꽃향기가 독특했다. 엘리사 샘물은 분당 4000리터가 솟아나온단다. 요단강에서 6km 떨어진 곳이다. 아랍인의 안내해준 비용을 내라는 말을 듣기 싫어 살그머니 빠져 나왔다. 아랍인 가족들이 그늘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입장료 두당 8세겔을 내고 텔 에 술탄 이라는 1만 년 전의 주거 유적지를 방문했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터전이다. 영국 여류 고고학자 캐들린 캐년에 의해 발굴되었다. 4000년 전의 성벽 일부도 볼 수 있었다. 파 내려간 흙벽을 자세히 보니 갈색의 가로 무늬가 몇 개 보인다. 이 무늬는 도시가 불에 탄, 층을 나타내고 있단다. 무늬의 숫자만큼 도시가 멸망하고 또 그 자리에 재건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단다. 별 흥미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라본 유혹의 산은 인상적이었다.
누가 복음 4장에 기록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 받던 곳이란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여리고 뒤편의 산에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운 수도원이 절벽에 요새 같이 세워져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이 성장한 곳도 이곳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부모를 일찍 여윈 세례 요한이 당시 에세네파라는 경건 파 수도사들에 의해 교육 받은 곳이란다.
오는 길에 와디 게르트라는 건천 앞에 섰다. 우기 때 일시적으로 물이 흐르는 냇가다. 이곳이 신약시대 예수님의 비유로 나오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강도 만난 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스라엘에는 건천이 많다. 이 건천이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창수가 날 때, 무너진다는 의미의 장소가 된다. 저녁 해가 기울어 숙소로 차를 몰았다. 여리고 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계속 올라간다. 우리 숙소인 다마스커스 문 옆에 주차를 하면 좋으련만, 이곳은 아랍지역이라 차량이 분실되거나 파손 될 수 있다는 애기를 들어서 우리는 시온 문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숙소로 갔다. 저녁 시장을 둘러보러 수크에 나갔다. 동태, 감자, 비누 등을 샀다. 특별 메뉴로 동태 찜을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빨갛게 해서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스에서는 낙지볶음, 이스라엘 에서는 동태 찜이 우리의 별식이다. 시온 문 밖에 차를 주차해 놓은 것이 불안해서 시온문 안으로 다시 주차해 놓고 돌아왔다. 정신없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