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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
‘위대한 자아(self)’를 향한 의식과 무의식의 만다라(mandala)적 통합
-이성렬 론
김윤정(문학평론가)
부과된 질서를 따르는 우리의 정신은 합당해야 하고 이치에 맞아야 하며 언제나 이성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항상 단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의식으로 점유된 정신은 체제 내에서 세계에 대해 명백히 정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은 그러한 의식의 가장 빛나는 정점에 놓여 있거니와 문명 내에서 우리의 의식이 과학을 위해 헌신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학이 눈부실 수 있었던 것은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인간 의식의 치열성에 기인한다.
이성렬의 시에 입문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의 시에 가로놓인 ‘겹눈’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의 시에 가득한 명징하면서도 신비롭고, 선명하면서도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바로 그러한 ‘눈부신’ 의식의 지대와 그 너머를 누비면서 형성된 그의 ‘겹눈’이 탄생시킨 것들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비,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환상 사이의 지대에서 시인은 때로는 가장 냉철한 과학자로서, 때로는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몽상가로서 두 겹의 시선을 세상에 드리운다. 시인은, 말하자면 철저한 상징계와 꿈으로 점철된 상상계의 점이 지대에서 이성의 축조와 파괴를 반복하거니와, ‘겹눈’은 곧 현실의 확고함과 비현실의 불확실성의 두 지대에 걸쳐져 있는 그의 자리를 가늠케 하는 것이다.
상징계의 권력은 자아를 한편으로 대타자에 근접시키지만 다른 한편 그로부터의 탈주 또한 감행케 하는 것이리라. 대타자의 이름에 응답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자아의 숙명인 것처럼 그것의 허위성으로 인해 갈등에 찬 삶을 살아내는 것 또한 현실적 자아의 조건이 된다. 대타자의 힘이 오늘날의 문명을 세운 장본인이라면 그것의 강력함이 찢기고 분열되는 자아를 양산하는 것 또한 사실에 속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과학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탓이다. 인간의 정신은 문명의 면면과 달리 어둠과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며 비합리성과 무의식을, 불확실한 미지의 지대를, 감춰진 신비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때로 단일하지 않고 비논리적이며, 상당 부분 명료하지 않거나 통제 불능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성렬 시인이 가장 민감하게 응시하는 인간의 조건이 된다. 과학의 위대한 업적과 그 이면이 드러내는 불완전함은 그의 생을 둘러싼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해당한다. 그것은 필경 그가 자연과학자인 동시에 시인이어야 했던 실존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성적인 것의 극한과 비이성의 광범위함 사이에서 그 어느 것도 도외시하지 않은 채 ‘겹눈’을 지니게 된 그는 이 두 지대를 잇는 기묘한 무늬의 시세계를 짜고 있다. 그에게 정신의 이성적 태도는 시의 영역에서 환상과 몽상의 비이성적 태도로 변환되거니와 그러나 이것은 그의 시세계에서 대극의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과 융합을 이루며 초월과 완성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실제로 시인의 삶의 평면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를 거듭하며 펼쳐짐과 수렴의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이성과 비이성의 종횡무진한 교차는 단지 확산도 단지 집중도 아닌 무질서 속의 질서이자 질서 속의 무질서의 형태를 지닐 것인바, 그것은 융(Jung)이 말한 바 있듯 가장 구극의 중심에 놓인 위대한 자아(self)를 향한 통합의 과정에 비견할 만하다. 자신의 실존에서 비롯된 ‘겹눈’을 통해 시인은 분열된 두 세계를 공존, 융합시킴으로써 더욱 완전한 자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과학자와 시인이라는 두 측면의 정체성을 지닌 그에게 그것은 갈등이자 번민의 근거였을 것이나 나아가 그가 구축해야 했던 이상의 정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 이음새도 없이 정방형으로 혹은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그의 의식과 무의식의 전개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실질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이점에서 그의 시는 마치 화려하게 핀 연꽃 형상의 만다라와 같다 할 것이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동네를 오르며 L은 그림자가 무거운지 자주 발을 털었다.
중절모자 아래 머리칼을 간질이는 바람의 손길에 그는 진저리를 쳤다 – 부드러움은 맞지 않는다는 듯.
삶이 스산했는지 묻는 나에게, 꿈속에서만 모든 증오를 소비하려는 노력이 몹시 힘겨웠다고 술회했다.
따가운 햇볕에 얼굴을 보자기로 싸맨 채로 긴 비탈을 오르는 어린 여학생을 보며, 그는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달동네의 삶을 회상했다. 중학생의 어깨에 내려앉는 물지게의 중압을.
치명적인 희망, L은 양반 주인에 항거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간에야 주인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노예 신분의 사내를 기억해냈다.
왜 그리도 자신의 소속을 끊임없이 멸시하였는지 묻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고립되었다고 L은 답했다. 점점 불어나는 몸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껍질을 벗어 태우려 했다고.
그는 오래전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의 대성당에서 품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리고 편견과 시기에 젖은 달빛이 얼마나 집요하게 밤의 냉기 속으로 밀어 넣었는지를.
「L과 함께 걷다」 부분
‘하드코어 인생’이라는 부제에서 짐작되는 바 위의 시는 어떤 힘겨운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산비탈 동네를 오르듯’ 무겁고 숨이 찬 것이기도 하고 스산하고 외로운 것이기도 한 것일 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중한 것을 걸어야 할 정도의 ‘격함’을 담고 있는 것이어야 ‘하드코어 인생’이라 할 만하다. 가령 ‘주인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노예’의 인생처럼 말이다. 그 중한 것이란 목숨 정도의 것일 테며 그것을 던져 얻는 것이란 기껏해야 자존심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의 목숨이 ‘양반 주인’에 의한 수모와 멸시를 응징하기 위해 쓰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가 처한 삶은 극한에 내몰린 하드코어(hardcore)한 인생이다. 그러한 이에게 삶은 목숨을 다해야 겨우 유지되는 것일 뿐 이상이나 꿈 등의 잉여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목숨을 바친 한순간에 비로소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노예의 운명은 평생토록 척박한 하층민의 것이었기에 슬프다.
그러나 주인 앞의 노예의 운명은, 이 순간에 그것을 ‘기억’해낸 ‘L’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소속을 멸시하는’ 이유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L’의 삶 역시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고 버티는 축에 들기 때문이다. 그가 소속된 세계를 부정함은, 또한 그러할 때에 비로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함은 그의 노예 다운 삶을 암시한다. 그의 소속된 세계는 그에게 극한의 인내를 요구하는 중이다. 그에게 자신의 ‘소속’은 ‘점점 더 불어나’는 두꺼운 ‘껍질’이 되어 결국 자신을 압살하고 벌레처럼 변신시킬 것이다. 자유와 자율이 억압되는 그 속에서 소속에 대한 ‘멸시’는 ‘L’이 취할 수 있는 항거이자 ‘감당할 수 없는 껍질을 벗어 태우’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점에서 ‘L’이 죽음으로써 자신을 지킨 노비를 가리켜 ‘치명적인 희망’이라 한 데엔 어떤 과장이나 수사가 섞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L’이 겪는 극도의 압박감과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원망(願望)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화자 ‘나’는 ‘L’과 다른 처지인가? ‘꿈속에서만 모든 증오를 소비하려’ 했으므로 ‘몹시 힘겨웠다고’ 고백하는 ‘나’에게 인생은 역시 ‘L’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나’ 역시 모든 순간 인내를 위해 ‘노력’을 다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용납되지 못하는 ‘나’에게 인생은 여전히 억압적이다. 즉 ‘나’ 또한 ‘L’과 다르지 않은 하드코어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나’와 ‘L’뿐만 아니라 그때의 ‘노비’도, 우연히 바라본 ‘햇빛에 얼굴을 싸맨 채 긴 비탈길을 오르는 여학생’도 모두가 마찬가지의 하드코어 인생이다. 삶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걷는 것처럼 한없이 무거운 이들에게 현실은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바, 이들이 삶을 가리켜 ‘의지에 선행하는 운명’이라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들의 운명은 출구가 없는 갇힌 회로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에 선행하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상징계에의 귀속은 기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머리칼을 간질이는 바람의 손길’이 ‘부드러운’ 까닭에 ‘진저리를 쳤던’ ‘그’에게 자신을 옥죄는 ‘껍질’의 단단함과 엄격함은 오히려 익숙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상징계의 견고함은 흐트러짐이나 부드러움보다 우선시된다. ‘그’가 상징계에 의한 억압을 호소하면서도 그대로 탈주를 감행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징계는 그것이 비록 억압적이고 닫혀 있는 회로라 할지라도 쉽사리 부정되지 않는다. ‘그’에게 상징계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실히 보존될 것이다. 여기에서 ‘그’를 압도하는 극심한 긴장이 발생할 것임에도 그러하다. 이는 ‘그’의, 혹은 시인의 가치의식을 말해주는 것이거니와, 위 시의 인물들이 더욱 ‘하드코어 인생’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밤은 낡은 화음을 거리에 펼치고
붉은 고백은 선로에서 몸을 뒤챈다
그곳에 다가가려는 건 오랜 결심 후
잠든 사이에 언제든 뛰쳐나오는
내 안의 들끓는 증오들을 식혀가며
낯선 표정으로 목적지를 이탈하는
노선버스의 머나먼 시선 끝에
그들은 서 있었다 비껴가는 유성을
노려보는 붙박이별들의 예리한 적대
그들이 거느린 행성들의 궤도에 관한
강고한 규약과 그들의 계보가 하사하는
도살자의 미소를 칼집 속에 감추며
나의 소외를 입속의 고깃점처럼
음미하던 그들의 열락과 입속의 뺨을
씹어뱉던 나의 괴로움 그리고 그대여
그런 나와 화해할 수 없었던 자화상을
버리지 않은 건 밤하늘을 홀로 거닐던
떠돌이별의 좁은 이마에 돋아난
자잘한 욕망의 두터운 미각이었으니
그러나 오늘 밤 나는 취기를 내려놓고
누구를 축하하기 위한 꽃다발을 구하려
어두운 뒷골목의 침묵을 지난다
닫힌 꽃집 앞에서 오래 서성이며
보도에 누군가 흘리고 간 국화 한 송이를
집어 든 채로 모멸하는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짧은 노래의 구토를 달래며
「늦은 밤에 꽃집을 찾아가며」 전문
상징계가 억압적인 것은 그것이 타자들의 욕망으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타자들의 공통적이고도 선별된 욕망이 이룩한 지대로, 대개 그것은 자아를 웃도는 힘들의 결정체가 된다. 자아가 상징계에서 느끼는 억압과 소외는 상징계를 축조한 과도한 이성의 작용에 기인한다. 상징계가 때론 지옥으로 때론 대타자로 인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은 자아로 하여금 자기 욕망에의 투항을 유도한다. 라캉이 말하였듯 해소되지 않는 상상계의 욕망은 자아의 본래적 욕망으로서 타자인 상징계를 교란시키고 붕괴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상징계를 파괴하는 자아의 본래적 욕망은 자아의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위 시는 상징계의 타자성에 대해 매우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자아를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절대 권력으로 현상한다. 상징계의 타자성 앞에서 자아는 오들오들 떠는 희미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노려보는 붙박이별들의 예리한 적대’가 ‘서 있다가 비껴가는 유성’을 향해 있음은 절대 권력자와 자아 사이에 놓인 대립적이고도 불균등한 관계를 암시한다. 권력자의 ‘행성들의 궤도에 관한 강고한 규약’은 ‘칼집 속에 감춘 도살자의 미소’만큼이나 음험하고 광포하다. 위 시의 화자에게 ‘그’가 ‘나의 소외를 입속의 고깃점처럼 음미하던’ 자로 묘사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에게 ‘그’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자 절대적 권력으로 다가오는 타자이며 ‘그’에 비해 ‘나’는 ‘밤하늘에 홀로 거닐던 떠돌이별’과 같은 존재다. ‘나’를 씹어 먹고자 ‘칼’을 겨누는 대타자는 ‘나’에게 ‘괴로움’의 근원일 뿐이다. 이때 ‘나’는 대타자와 ‘화해’함으로써 그에 걸맞은 큰 자아가 되는 대신 자신의 ‘좁은 이마에 돋아난 자잘한 욕망’에서 즐거움을 찾는 작은 자아의 길을 걷고자 한다.
늘상 ‘나’를 삼키려 드는 대타자의 광포함을 견뎌야 하는 화자 ‘나’는 지치고 힘겹다. 대타자의 레이더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죽음이라도 불사할 것이다. 비로소 죽음이 그것을 이룬다면 그에게 죽음은 정당하고도 기꺼운 것일 테다. 그런 점에서 그가 찾아드는 곳이 ‘어두운 뒷골목의 침묵’의 지대인 것은 당연하다. 그곳은 밤의 지대이며 ‘취기’와 ‘구토’, 그리고 ‘내 안의 증오들’이 들끓는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의 그림자이자 의식 이면의 무의식의 세계이다. 그것은 ‘잠든 사이에 언제든 뛰쳐나오는’ 꿈과 몽상의 지대이며, 의식 속 어딘가에 어둡게 잠재된 마음의 영역이다. 음험한 타자들에 의해 소외되고 상처 입은 마음이 응집하는 그곳은 마그마처럼 격하고 혼돈스러운 영역이기도 할 것이다. 자아에게 상징계가 절대적일수록 ‘내 안’에서 이러한 지대는 더욱더 격렬하게 끓어오를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에게 ‘증오’가 그러하듯이 분노와 원망과 공포와 ‘모멸’ 등속의 상징계의 타자성에 의해 발생했던 감정들이 괴물처럼 증식할 것이다. 상징계와의 긴장된 갈등 속에 놓인 그러한 어둠의 지대는 언제고 은근한 들끓음으로 혹은 광폭한 폭발로 현상될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러나 위 시의 화자가 보이는 궤적은 순화된 상징을 구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꽃다발을 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것은 ‘누구를 축하하기 위한’ 의로운 것이며 또한 미적인 것이다. 또는 그것은 ‘한 송이의 국화’이기도 하다. 이를 얻기 위해 ‘나’는 ‘내 안의 들끓는 증오들을 식히’거나 ‘취기를 내려놓’거나 ‘구토를 달래는’ 등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때의 상징은 어둠의 지대에서 자라난 심리적 형상물로서 자아의 그림자를 품은 채 정신적 형상으로 승화된 채 구현된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그것은 ‘그림자 도시에서’ 찾아 나선 ‘늦은 밤의 꽃집’인바, 위 시의 시적 자아에게 이는 스스로의 마음의 혼돈을 용해시킨 후 구해낸 미적 완성체에 해당한다.
길 건너 이층집의 美용실은 밝은 불빛 속의 명상에 잠겨 있다. 임박한 어둠의 발소리를 주시하는 듯, 주름 가득한 이마 아래 눈썹을 내리깔며. 나는 태생적인 불행을 머그잔에 적신 채로, 주머니 안쪽 생의 쿠폰들을 만지작거리며 그 집 간판을 바라만 볼뿐
그곳에서 어떤 미적 실험이 수행되는지 알 수가 없다. 가령, 시간을 급속 가열 포트에 펄펄 끓인 후 무지갯빛 찌꺼기의 성분을 분석해보는 것인가? 기억의 심장들을 냉동시킬 때 눈물과 함께 부서져 내리는 서리꽃 송이 사이의 미세한 인력을 감지하는 것인가?
카라뷰티랩의 장방형 간판 오른 편에는 아름다운 모델의 얼굴이 드리워져 있다. 여자의 뺨에는 거리의 소리들을 모두 빨아들이듯 커다란 검은 점 한 개, 그리고 좌 하부의 붉은 네온으로 번쩍이는 아름다울 美는 몸통이 온통 퇴화된 벌레를 닮았다.
그것은 더듬이 두 개, 앙상한 등뼈와 가느다란 다리들을 부산히 움직이며 여자의 얼굴을 향해 기어간다. 여자의 미모를 가늠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접근하는 美의 홑눈에는 잔털투성이 뺨과 컴컴한 동굴 두 개, 축축한 두 연못 위 초승달 구도의 마른 숲들뿐.
우연히 내 눈을 찌르는 아름다움은 한 줌의 욕정, 사소한 희망들과 함께 길 건너편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발생하여 잠시 두려움과 증오를 토닥인다. 그것은 몇 세기의 공중을 떠돌다 내 손끝에 내려앉은 고독의 열매인가?
「카라뷰티랩」 부분
위의 시는 시인이 앞서 ‘상징’을 구하던 과정을 하나의 형상으로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시인의 경우 마음의 어두운 지대로부터 피어오른 상징이 미적 완성체로서의 성질을 띤다 했을 때 ‘카라뷰티랩’의 여러 이미지들은 시인이 구하던 상징의 결정(結晶) 과정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시인은 어둠 속에서 환히 불 밝히고 있는 ‘카라뷰티랩’의 ‘간판’에서 의미 있는 상징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카라뷰티랩의 장방형 간판 오른 편’에 드리워진 ‘아름다운 모델의 얼굴’이 그것이다. 그 ‘얼굴’은, 특히 그 가운데 도드라진 ‘한 개 점’은 장방형으로 길게 펼쳐진 의미들을 한 곳으로 수렴시키는 듯한 모습이다. ‘한 개 점’은 ‘거리의 소리들을 모두 빨아들이듯’한 것이다. 더욱이 그녀의 얼굴 아래 그려져 있는 ‘아름다울 美’의 도상(圖像)은 ‘美’의 시각디자인이 유도하는 대로 그녀의 ‘얼굴’에로 의미를 집중시키고 있다. ‘美’의 도상이미지는 ‘더듬이 두 개, 앙상한 등뼈와 가느다란 다리들을 부산히 움직이며 여자의 얼굴을 향해 기어가’기 때문이다. ‘얼굴’을 향해 있는 ‘美’의 형상은 ‘몸통이 온통 퇴화된 벌레를 닮아’ 있다. 대신 그것이 향해 있는 ‘얼굴’은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한 아름다움 자체로 현상하고 있다.
‘얼굴’과 ‘美’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관계 맺고 상호 환기시키면서 통합적인 의미망을 짜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중심에 놓인 ‘얼굴’과 주변에 펼쳐진 여러 사태들은 밝음과 어두움, 빛과 그림자의 대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들은 수렴과 확산의 관계 속에서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나타낸다. 주변은 중심을 향해 초월과 승화의 지향성을 드러내며 중심은 주변에 산개된 무질서를 원형(圓形)적 질서 속에 용해시키고자 한다. 중심과 주변은 제각각의 영역 속에서 산발적으로 있는 대신 무질서와 질서로 공존하는 안정된 관계망을 짜고 있는 것이다. 확산과 수렴이 공존하는 그것들은 상호 소통과 융합을 이루어냄에 따라 보다 초월적인 상승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과 도상이미지 ‘美’를 둘러싼 이 같은 중심-주변의 관계는 위 시의 화자가 ‘카라뷰티랩’이라는 ‘美’의 공간에 이르러 그것을 빛 삼아 어두운 자신의 내면을 돌이키고 있는 장면에 대응된다. 어두운 밤길을 거닐며 도달한 ‘길 건너 이층집’의 ‘밝은 불빛 속의 美용실’ 앞에서 ‘주름 가득한 이마 아래 눈썹을 내리깔며’, ‘태생적인 불행’을 상기해내고 있는 ‘나’의 의식의 흐름은 ‘나’의 그림자가 빛에 의해 소환된 후 어떻게 빛 속으로 용해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내’ 안의 ‘한 줌의 욕정’이라든가 ‘두려움과 증오’와 같은 어두운 무의식적 감정들이 ‘우연히 내 눈을 찌르는 아름다움’ 앞에서 잔잔히 ‘토닥여’지고 다스려지는 일과 같다. 위 시의 화자가 그것을 가리켜 ‘몇 세기의 공중을 떠돌다’ ‘내려앉은 고독의 열매’라 말하고 있듯, ‘나’의 어두운 그림자들은 광기에 들린 채 어지럽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조명에 의해 기억되고 환기되면서 의식과의 고른 질서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의 중심에는 ‘아름다움’의 완성체가 자리하고 있거니와, ‘美용실’의 아름다운 빛은 불행했던 과거에 의한 ‘나’의 상처와 어두움들을 어루만지듯 ‘나’의 정신을 고즈넉한 평온의 상태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카라뷰티랩’ 간판의 ‘얼굴’이 퇴화된 벌레 이미지로 펼쳐져 있는 ‘美’의 기호를 수렴시키는 형국과도 같다. 요컨대 시인에게 미의 완성체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 속 혼돈들을 펼쳐내고 다시 수렴시키는, 그리함으로써 의식의 무질서들을 보다 완성된 질서의 상태로 승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리라.
시인이 무의식의 흔적들을 펼쳐내면서 의식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우울과 몽상 4」에서 원형(圓形)처럼 전개되는 그의 이야기 서술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운명을 드러내려는 것들의 비의는 바람의 허벅지에 새겨진 연비聯臂로 가득하다
그 가을날 나는 비원에서 개미마을까지 시간의 궤도를 따라 순례할 수 있었다
(중략)
A路 입구에서 숨을 고른 뒤, 오래된 편지를 손바닥에서 벗겨내어 우체통에 넣었다
옛 주소가 박힌 노란 봉투는 늙은 지문을 접은 채 노숙할 채비를 하였다
B街의 식당가 초입에서 로봇춤을 추는 명랑한 청년들의 허리춤에서 양철 담낭이 빠져나와 빗물 구멍으로 굴러 내렸다
C번지의 관청 옥상, 모략과 배신에 뒤진 패거리의 고환 무더기가 서류 분쇄기에 갈린 후 흩뿌려졌다, 청소차의 굉음을 향하여
D洞의 방송국 앞, 유명 연예인에 영혼을 청탁하러 온 군중이 환성을 지르며, 자욱한 배기가스로부터 솜사탕을 자아내었다
E대학 구역의 건널목에서 내 곁에 유령처럼 불쑥 솟아난 검은 치마의 여자, 거리에 흩어져 있던 농염한 연애의 파장들이 겹친 순간에 태어난 듯
그렇게 근거 없이 생겨나도 괜찮겠냐고, 옛 애인을 닮은 그녀에게 말했다
지난밤 그녀의 탐스런 가슴이 완성된 시각을 묻자, 달뜬 얼굴을 숙인 그녀의 심장이 홍관조로 우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F區와 G區가 갈라지는 H洞 교차로에 문득, 철거된 고가도로가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공사장의 붉은 벽돌들을 한 개씩 집어삼키며, 지하묘지에 이르는 계단으로
얼마나 순한 목숨들이 두 눈에 사슬을 감은 채로 그 길을 까마득하게 내려갔을까?
형상을 이룬 것들의 윤곽은 언제나 폐곡선을 그린다: 눈을 부릅뜬 J상점의 박제 부엉이가 중얼거렸다
(중략)
개미마을의 대형 커피샾에는 짙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시간의 낱알과 잎사귀를 분주히 실어 나르는 남녀 개미들
카페 <매혹>의 문 앞 땅 위로 솟은 플라스틱 지하 묘비 곁에, 눈가의 다크서클을 붉은 연지로 감춘 여왕개미가 날개를 펼친 당당한 포즈로 앉아 있었다
「우울과 몽상 4」 부분
위 시의 제목이 말하는 바 ‘우울과 몽상’은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성의 힘이 약화될 때 수면으로 떠오르는 정신의 작용이다. 대부분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우울과 몽상’은 단일한 의식을 교란시키는 이성의 대척자에 해당한다. 그것은 자아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의식의 어두운 그림자이자 의식 속에 내재된 혼돈의 근원이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불행의 파편들은 의식의 이면에 잠복되어 있다가 우울과 몽상으로 되살아난다. 그 순간의 자아는 상징계로부터 이반 되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상징계와의 관련 하에 바라본 이와 같은 ‘우울과 몽상’은 그러나 시인의 관점에 서면 그와는 다른 의미로 전복된다.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상징계를 공격하고 그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의식의 외연을 확장 시켜 통합된 정신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세계에서 ‘우울과 몽상’은 무의식과의 상호 소통을 통해 의식을 확대하고 정신을 승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는 ‘우울과 몽상’으로 시도하는 의식의 펼쳐냄과 수렴의 과정에 의해 가능해지거니와, 이러한 과정은 앞서 시인이 어두운 무의식들 사이에서 미적 완성체로서의 상징을 구현하는 궤적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실제로 위 시에서 화자는 어떠한 이성적 의지를 제거한 채, ‘1802년의 휠덜린이 보르도와 슈투트가르트 사이의 먼 길을 터벅터벅 걸었던 것처럼’ 도시의 한복판을 산책하게 되는데, 이때 의식 위에 기록된 ‘우울과 몽상’들은 의식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대신 무한한 확산과 집중을 이루어내면서 오히려 정연한 만다라와 같은 형상을 띠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사방과 팔방으로 펼쳐진 우울과 몽상의 흔적들은 막연히 펼쳐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미의 중심에로 귀결됨으로써 결국 정방형과 원형이 하나로 결합된 형상을 이룬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 가을날 비원에서 개미마을까지 시간의 궤도를 따른 그의 순례’는 A路에서 B街로, 그리고 C번지에서 D洞으로, 또한 E구역에서 F區와 G區로, 나아가 H洞 등 목적된 의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충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데, 이처럼 방향을 두지 않은 채 부드러운 출렁거림에 의거한 의식의 궤적은 시인의 경우 의식의 해체에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에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위 시에서 말하는 바 ‘운명을 드러내려는 것들의 비의’와 관련될 터이다. ‘바람의 허벅지에 새겨진 연비聯臂’는 서로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비의’를 ‘가득’ 채우고 있거니와 이들의 숨겨진 의미들은 필경 ‘운명을 드러내려는’ 자아의식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울과 몽상을 통해 의식의 이면에서 솟아오른 종횡무진의 무의식들은 무차별적인 해체와 파괴의 국면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이처럼 미지에의 앎과 그 이상의 목적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관점은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부정하면서 의식의 해방을 지향하는 탈근대의 기획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것은 주변의 확산을 옹호하되 그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중심의 상호 관련을 통해 보다 초월적인 중심에로 나아가는 형국을 나타낸다. 이때의 더욱 상승된 중심은 인간에 관한 본질적인 인식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무의식에 따른 주변의 확산이 사방팔방의 정방형으로 나아가는 형상이자 중심으로의 귀속이 집중된 원형을 띤다는 점은 곧 무의식과 의식의 소통을 통해 위대한 자아로의 통합을 꾀하였던 융의 만다라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 의해 구축된 통합적 자아는 위 시에서 ‘짙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시간의 낱알과 잎사귀를 분주히 실어 나르는 남녀 개미들’ 사이에서 ‘눈가의 다크써클을 붉은 연지로 감춘’ 채 ‘당당한 포즈로 날개를 펼친 여왕개미’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외로운 시인의 무덤처럼 풀꽃을 흔들며 날은 저물어
이윽고 두려운 별들의 침묵이 창가에 내린다
아무도 모르게 지갑 속에 쌓이는 먼지에게 말을 걸며
무작위로 배치된 옷본들 앞의 침통한 재봉사처럼 묻는다
이 낮은 저녁에 너는 적멸을 생각하고 있는가?
굶주린 문장들이 사생결단으로 부딪는 세간을 떠나
얼음과 물과 수증기 사이의 머나먼 통로들을 가늠하려는
그 열망을 참으로 너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잠시 너의 방으로 날아들었다가 홀연히 가버린
날개를 다친 새의 가까운 비명을 들으며 짐짓
영원을 떠올리는 것은 아득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시간표를 뜯어보며 시시각각 만나고 헤어지는 열차들의
이마를 떠올리는 고독한 결핵환자의 몽유와 같은 것
매번 주인이 바뀐 술집과 다시 화친하려는 술꾼이나
밤의 카페에서 소녀가장 시절을 회상하는 여자처럼
사건들의 표리가 만나는 지평을 서성이다가 너의 지도는
그 잔혹한 거리로 말없이 돌아오는 것이겠지, 누군가
드나들 때마다 파안대소하는 주렴의 부서지는 손길에
죽은 새의 날개가 품은 무거운 수증기가 반짝, 너의
눈가에 내리는 이슬방울의 설렘으로 빛나는 그날에는
「6월의 응혈」 전문
한편 위의 시에서의 ‘너’에게 죽음은, 그것이 ‘굶주린 문장들이 사생결단으로 부딪는 세간’ 틈새에서 환기되는 것임을 볼 때, 역시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상징계가 지배하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을 증명하듯 감행되는, 앞서 ‘하드코어 인생’(「L과 함께 걷다」)에게 불사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자비하고 냉혹한 상징계에서 내가 그와 동등함을 밝히는 길이 필경 죽음이라고 한다면 ‘너’에게 ‘적멸’이란 ‘열망’이 될 수 있다. 그때의 ‘너’의 죽음은 격한 ‘세간을 떠나’ ‘머나먼 통로’를 내다보는 구원의 방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은 또한 ‘고독한 결핵환자의 몽유’처럼 ‘아득’하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라 일컫기에 불확실한, ‘날개를 다친 새의 가까운 비명’과 마찬가지의 단발마적인 외침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때의 죽음은 상징계의 가혹함을 증명하는 것일지언정, 혹은 ‘너’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것일지언정 쉽게 구원의 길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점이야말로 ‘너’도 ‘나’도 그것에 대한 ‘열망’을 지닐지라도 그것을 단행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위 시에서의 ‘적멸’을 꿈꾸는 ‘너’를 향한 ‘나’의 나지막한 말들은 ‘너’에게 이점을 설득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너’ 역시 다시 이곳 ‘그 잔혹한 거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에게 죽음은 그저 ‘낮은 저녁’ 우울한 몽상으로 읊조려지는 조용한 노래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나’의 말들은 ‘너’와 ‘내’가 처한 하드코어한 인생을 재차 환기시킨다. 즉 그것은 냉엄한 상징계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들의 처지를 확인케 한다. 상징계의 악(惡)은 어떤 대부분의 행위도 악(惡)이 되게 만든다. 상징계의 악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옭아매는 음험한 힘을 나타낸다. 이 세계에 처한 것이 ‘의지에 선행하는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L’이 ‘머리칼을 간질이는 바람의 손길에 진저리를 쳤’(「L과 함께 걷다」)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도하게 냉혹한 세계에서는 ‘부드러움’조차 죄악시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너’와 ‘나’에게 상징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수용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번 주인이 바뀐 술집과 다시 화친하려는 술꾼이나 밤의 카페에서 소녀가장 시절을 회상하는 여자처럼’ 흐릿한 의식으로 호기를 부린다거나 불행했던 옛일들을 회억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하는 일 정도가 될 것이다. 또는 ‘사건들의 표리가 만나는 지평’에서 제한된 자유를 호령하다가 어느덧 ‘말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 될 것이다. 혹은 ‘시간표를 뜯어보며 만나고 헤어지는 열차들’을 몽상하는 일도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들은 모두 ‘돌아옴’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인식은 다분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이는 탈근대주의자들에 의한 상징계에 대한 도전이나 그로부터의 탈주를 주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위의 시는 상징계의 억압 속에서 ‘죽음’ 및 ‘우울과 몽상’이 지니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거니와, 결국 ‘우울과 몽상’은 ‘죽음’으로부터 혹은 상징계의 압박으로부터 자아를 이탈케 하는 마지막 비상구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이성렬의 시세계가 상징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 그것을 대전제로 하여 구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아버지의 법으로서의 상징계는 회피할 수 없이 절대적인 대타자의 성격 그대로이다. 그런 만큼 그로 인한 긴장 역시 필연적인 것이어서 이에 따른 압력은 의식 이면의 무한한 지대를 펼쳐내는 계기가 된다. 그의 시에서 질서와 혼돈,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몽상 사이에 역동적인 혼융이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조건에서이다. 현실과 환상의 양 축을 넘나드는 그의 시에는 두 개의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시인은 이 두 개의 시선을 단순 나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용해를 통해 더욱 승화된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의식을 한껏 펼치다가 미적 상징체를 통해 의식의 중심에로 수렴시키는 이성렬 시인의 시적 태도는 그의 시가 해체 이후의 자리에서 통합된 정신으로서의 위대한 자아(self)를 향해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김윤정 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로 등단. 저서로 「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 「문학비평과 시대정신」, 「불확정성의 시학」, 「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등이 있다.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