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개척 이야기
이 무웅목사 (우이제일교회담임)
요즈음 진달래와 철쭉꽃이 온산을 물들이듯 신록이 깊어가는 5월에 교회 야외 휴게실 공사가 한창이다. 절과 교회사이에 조그만 동산을 매입해 놓고 지역사회와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뛰어놀수 있는 농구대와 야외에서 커피를 마실수 있는 휴식 공간을 만들고 있다. 재미 있는것은 송주사 절과 교회가 담장 벽 하나로 붙어 있고 교회들어오는 입구에 큰부처가 우뚝서 지키고 있기에 둘레길 등산객들이 신기해 하면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이제는 교회가 41년이되어 많은 부흥과 성장이 되었고 교인들도 많이 나와 1부, 2부 3부 4부로 모이여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처음 우이동에 정원교회를 꿈을 꾸고 들어와 개척을 시작할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제 가슴은 꿈만 같은 생각이 든다. 특별히 우이동 지역은 북한산이라는 명산을 끼고 있기에 절과 암자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문화제 명목으로 도당굿을 하고 있는 동네가 우이동 이라는 지역이다. 그래서 개척이 힘들지만 우이동 이라는 동네에서의 교회개척은 동네 이름 그대로 소귀에 경 읽기식 이였다 그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을 하여 너무도 힘이들고 지쳐서 몇 번을 주저앉고 개척을 포기하려고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엎드려 있으면 어린 주일학생들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율동을 하며 찬양하는 모습과 성경이야기를 할때마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는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음을 잊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교회를 그만두고 떠나면 이 동네에는 교회도 없는데 저 아이들은 어디로 가겠나하는 생각이 들어 이왕 개척을 했는데 더 열정을 가지고 집중하자 하고 인천집에서 사제를 가져다 우이동 53-6번지 대지 54평의 땅을 사서 천막을 치고 동네 가운데에서 십자가를 높이달고 본격적인 복음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네 주택 가운데 교회가 들어서자 주민들의 반대가 일어났고 늘 예배를 드릴때마다 시비가 벌어졌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드릴때마다 앞집에 살고있는 불교신자 할머니의 폭언과 횡패로 견딜수가 없었으며 전세를 내놓았는데 방이 나가지 않으니 교회에서 배상을 하라는 것이였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가 교회 주택에 들어와 자결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그래서 매일 밤 잠을 자지 않고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 밤늦도록 이슬을 맞아가며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다. ʻʻ우리에게도 넓은 대지 위에서 마음껏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하루 속히 허락해 주십시오ʼʼ하고 기도했던 우리의 부르짖음이 꿈같이 이루어지는 듯한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서울 장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산새들이 지저귀고, 귀여운 다람쥐와 꿩들이 왔다갔다 하는 조용한 숲 속에 높은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마련케 하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이곳 대지를 매입해 놓곤 가끔 나무 밑에 엎드리어 감사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처음에는 일부 몇몇 교인들이 ‘그 산 속 깊숙이 교회를 지어 놓으면, 깜깜하고 무서워서 새벽예배와 저녁예배를 어떻게 드리러 가느냐?’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교회 위치 문제로 조금 신중히 생각도 해보았으나, 나의 장기적인 목회 계획도 있고 앞으로의 복잡한 사회 구조와 공해 문제로 시달리는 서울 시민의 유일한 교회로 발돋음하기 위해 그대로 추진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 볕이 강하게 내려 쪼이는 6월, 북한산 끝자락에 신록이 우거진 숲에 임시 막사를 짓고 공사가 시작이 되었다.
밤꽃 내음이 코를 찌르는 78년도 6월, 그러니까 우이제일 교회가 창립된 지 6년 째 되던 날이다. 포근한 태양 빛 아래 전 교인들은 부푼 꿈을 안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공 예배를 드렸다. 신록이 짙은 빽빽한 나무 그늘 밑에서 산새들의 찬미소리와 더불어 우리의 찬송소리는 우뢰와 같이 힘이 있었다.
그동안 교회가 주택 가운데 위치한 관계로 항상 주민들과 숨가쁜 대립 속에서 갈등을 하며 찬송과 기도를 마음껏 드릴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너무나도 이 기공예배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전 교인들은 교회를 짓는다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너도 나도 앞장을 서서 삽과 괭이를 가지고 택지정리를 하였고, 밤에는 전등을 켜놓고 직장을 퇴근한 청년들과 학생들이 교대를 하면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워낙 산 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유로 자재를 운반하는 차가 닿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뚝 우뚝 솟아 있는 아름드리 소 나무들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자재를 싣고 현장까지 도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교우들은 자재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리어카를 끌고 지게를 지고 머리에 이고 하여 자재를 운반하기 시작하였다. 포크레인 차가 들어갈수가 없어 지하를 팔때에도 삽으로 파서 구르마로 흙을 실어 날랐고 철근을 나르고 벽돌을 나르며 자재를 구르마로 실어나르면서 손에는 물집이 생기고 어깨는 멍이 들고 부르트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재가 몇 트럭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골재 운반만 하여도 8t 트럭으로 60여차나 되고 보니, 무더운 여름날 도저히 여인들이 연약한 몸으로는 감당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결국 그 많은 자갈과 모래를 실어 나르기 위해 조그마한 용달차를 값싸게 구입하였다. 신기하게도 다 낡은 차였지만 모래, 시멘트, 자갈 등을 힘있게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 고장이 났고 이를 고치고 수리하는 노력은 많은 시간과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요란한 망치소리와 더불어 기초 공사와 지하실 공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날씨가 너무나 가물어 시멘트 반죽할 물이 없어 동네 우물이란 물은 다 동원하게 되었다.
교인들은 물 저장 탱크를 크게 만들어 놓고 물지게를 동원하여 물을 길어 부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난공사는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물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장마가 닥쳐 온 것이었다. 그 해에는 왜 그렇게도 오랫동안 비가 많이 쏟아지는지 지하실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산에서 억수같이 물이 흘러내렸다. 밤에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비를 흠뻑 맞아가며 삽을 가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둑을 쌓고, 도랑을 비닐로 막기도 하였으나 폭포수와 같이 흐르는 거센 물결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사장을 휩쓸어 버렸다. 결국 둑이 터지는 등 지하실 벽이 무너지며 공사장은 흙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게다가 지하실을 채웠던 흙물은 동네 가운데로 흘러 내려가 하수구를 메우고, 이로 인하여 동네 아낙네들은 교회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고 항의를 했다. 또한 교회를 짓는 공사장 주변 산의 지주들은 교회가 들어서면 산이 훼손되며 땅값이 하락한다고 교회를 짓지 못하도록 진정서를 올리는 등, 자재 운반하는 통로의 길을 막고 갖은 방해공작을 벌이였다. 그러나 온 교우들의 단합된 힘과 기도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교회를 짓는다’는 일념으로 공사는 계속 되었다. 왜 그렇게도 비가 계속 쏟아지는지 물이 너무나 많이 지하실에 쏟아져 양수기 2대를 설치해 놓고 물을 퍼내면서 무너진 지하실 벽의 흙을 다시 퍼내기 시작하였다. 하늘을 태울 듯한 무더운 날씨였지만,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교회가 자꾸자꾸 높이 올라가고 일이 끝나감에 따라,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가 큰 걱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해는 건축 붐이 일어 건축 자재 파동까지 있었던 해로, 현금을 갖고도 시멘트를 살수가 없어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자마자, 쌍용 시멘트 배급소에 쫓아가 3시간 동안 식사도 못하고 줄을 서서 아웅다웅 싸움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몇 포 얻어오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동서사방의 건축 붐으로 인하여 자재난은 물론이고, 일꾼들도 일을 하다가도 다른 현장에서 대우를 조금 더 낫게 해 준다면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말도 없이 다른 곳으로 가는, 일꾼의 손이 모자라는 아주 어려운 때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돈을 갖고 공사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라고는 260여 만 원 손에 쥐고 시작하였으니 금전으로 인한 시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원래 우리교회 형편으로는 몇 년 동안 1차, 2차, 3차의 단계로 장기 건축을 해 나가야 옳겠지만, 해마다 물가 상승과 원자재 난으로 인한 자원 파동과 인건비 상승 요인을 따지고 볼 때, 조금 힘겨운 부채를 진다하여도, 한꺼번에 공사를 마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아서 그대로 계속 공사를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사를 하다가도 돈을 구하러 이곳저곳 뛰어다니게 되었고, 약속한 날짜를 지키기 위하여 안타깝게 다니기도 하였다. 어느 무더운 날에는, 너무나 목이 말라 시원한 사이다 생각이 마음속에 굴뚝같이 났지만 ʻʻ이 한 병을 마시면 벽돌을 3장 살 수가 있을 텐데...ʼʼ하고 교회 건축 현장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어느덧 외부 공사는 모두 끝이 나고 내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으나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짝도 제대로 달지 못하고 유리도 제대로 끼우지 못한 어수선한 가운데 추운 겨울을 떨면서 지내게 되었다.
이듬해, 봄과 더불어 나머지 마무리 공사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만 1년 만에 건평 235평의 3층 예배당이 숲 속에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본당에 입당을 하는 어느 해 여름 주일 낮 나는 감격한 목소리로 교인들에게 외쳤다. ʻʻ다윗도 짓지 못한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가 아름답게 우리의 힘으로 지었습니다. 이 벽돌 한 장 한 장 속에는 여러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참으로 여러분들은 복이 있는 성도들입니다.ʼʼ 라고 말했다.
참으로 우리 교회는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숲 속의 정원교회이다. 때를 따라 벚꽃, 밤꽃, 연산홍, 진달래가 만발하는 공해를 떠난 숲 속의 교회이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선풍기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은 시원한 교회이다. 매미 소리와 함께 다람쥐와 꿩들이 날아다니는 자연 속의 교회이다. 교통도 매우 편리하여 우이동 버스 종점이 우리 교회를 중심하여 여러 회사가 자리 잡고 있고 2014년도 부터는 신설동으로 이어지는 지하 경전철이 개통될 예정이어서 앞으로 서울장안에서 공기좋고 물좋고 친환경적인 주거지역이 될것이다.
이제 우이제일교회는 사회 구조가 다양해지고 공해로 시달리는 서울 시민들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넓은 주차장시설과 체육시설 야외 커피솝, 그늘밑에 쉼터, 휴게소, 후생 시설 등을 갖추어 복잡한 사회 속에 시달린 서울의 시민들을 위하여, 하루를 온 가족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하고 기도하며 쉴수 있는 정원교회를 꿈꾸고 있고 북한산 둘레길이 교회마당으로 연결되어 있어 산악인을 위한 카페와 등산인 복음전도에 대한 플랜을 설계하고 있다.
이제 개척을 해서 41년 동안을 한교회를 섬기면서 옛날 직접 교인들과 함께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며 건축을 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바울같이 선한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길을 다 달리며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의에 재판장 되시는 주님앞에 칭찬을 받을수 있는 종으로 최선을 다하여서 자랑스러운 면류관을 머리에 쓸수 있는 종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 무 웅 목사 약력
□ 학력 : 안양대학교 및 신학대학원 졸업
고려신학교 신학부 졸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 대학원 졸업(C.P.E)
美 Internatinal College (D. Min)
美 Sanfrancisco Saminary (M.A) 졸업 및 D. Min 과정이수
□ 약력 :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36회기 총회장 역임
대한신학교 학장 및 연구원 원장 역임
북부지역 교경협의회 회장 및 경목실장 역임
북부지역 기독교 연합회 회장 역임
교회신보 논설위원 역임
안양대학 신학대학원 초빙교수(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초대동문회 회장 역임
대신목회대학원 운영이사장 역임
대신목회대학원 원장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장 및 교육국장 역임
대신 목회 대학원 교수(현)
서울 경찰청 경목회 부회장(현)
한국 미래포럼 공동의장(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학위원장(현)
우이제일교회 당회장(현)
□ 목회철학 :
1. 하나님앞에 충성
2. 타인에게 겸손
3. 자신에게 진실
4. 생활에 검소
5. 모든일에 최선
․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 목회비젼 : 새 시대를 이끌어가는 교회로써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살아있는
예배회복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교육과 지역사회와
세계를 향해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로 성장
□ 저서 : 『내안에 있는 요나를 잡아라』
『건강한 교회의 교회행정』『창조적 소수』
『생산을 일으키는 역동적인 목회행정』『현대목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