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사실주의화풍의 화가 일리야 레핀 1880-1891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린 역작.
레핀이 1878년 모스크바근교의 미술애호가집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시는데 손님들 중 한사람이 자포로쥐에 카자크들이 터키 술탄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 1675년 터키의 술탄 무하메드 4세가 자포로쥐에 카자크(지금의 터키의 동북부 아르메니아지역)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술탄은 '해와달의 형제,신의 대리인,모든 왕국의 주인,왕중왕,무적의 기사,이슬람교도들의 희망,기독교의 수호자'로 칭하면서 터키에 귀화할 것을 제안한다.
카자크들은'당신이 기독교의 자식들을 갖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우리는 당신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땅과 바다를 동원해서 당신을 칠 것이다.우리는 달력이 없으므로 날짜를 모른다.몇 월인지는 위에 있고 몇 년인지는 아래에 있다.몇 일인지는 당신이 아는 것과 똑 같다.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것이 있으니 당신은 썩 물러가라.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쳐부술 것이다1'
카자크들의 외교적 수사없이 거리낌없고 확고하고 인상적인 유머는 레핀의 취향에 맞는 것이였다.화가의 눈에는 이들의 모습이 삶에 대한 기쁨과 굴하지 않는 민중성으로 다가 왔다.한때 자유로웠던 카자크들을 추앙하며 다혈질적인 주인공들의 생생한 형상을 캔버스에 포착하고픈 열망이 가슴 속에서 솟구쳤다.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의 레핀 나이는 36세.인생의 최고 전성기를 누릴 때였다.레핀은 이때부터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고 자료들을 모았으며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그 지역의 풍경화와 역사유적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에 대한 모델들을 찾아 나섰고 두 캔버스를 준비하여 하나는 연습으로 하나는 진품으로 그려 나갔다. 진품의 그림도 끊임없는 수정과 수정을 통해 화가의 맘에 들 때가지 노력하고 인내해 나갔다.
레핀이 이 그림에 얼마나 공을 들였냐하면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한다.레핀은 아들의 머리를 깍아 변발을 시키고 카자크들의 옷을 입어보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레핀의 사상적 멘토인 톨스토이에게도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자 그림을 보자!! 저 멀리 전투의 흔적이 보이고 칼을 든 무리들이 훈련을 받고 한 쪽에서는 밥을 짓느라 연기가 피워오르는 는 야전의 병영 한 가운데에서 카자크인들이 서기를 중심으로 모여 누군가 조롱섞인 말을 내뱉자 미쳐죽겠다는 듯이 웃고 있다.책에서는 이 장면을 '이들의 격정적인 호탕한 웃음 속에는 무한한 용기와 민중의 힘,적에 대한 경멸이 명쾌하게 표현되어 있다'라고 적혀 있다.
만약 내가 저 곳에 있었다면 어떤 웃음을 지고 있었을까? 상상만해도 즐겁다.왜냐면 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웃음이기에 그렇다. 이 그림에는 애매모호함이 없다. 각자 웃음의 심리학이 관람객의 가슴에 명확히 심어지기 때문이다.그 무서운 술탄앞에 카자크인들은 저렇게 호탕할 수 있을까? 굴종과 노예의 삶대신 당당한 죽음과 자유인으로 살겠노라하는 결기가 느껴 진다.
마을 분들도 이 그림을 잠시 감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참...역사적 배경에 대한 제 상상 하나 이야기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레핀도 당시 로나노프 왕조의 짜르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민중들의 삶에 지식인이 동정을 하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대외적으로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였습니다. 그 때 당시 러시아와 터키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1877-1878년 에 터키와의 전쟁이 있었던 것이지요.러시아인은 터키에 대한 반감이 클수록 역사적으로 터키에 대해 저항했던 카자크인들에게 호감을 더욱 더 갖을 수 밖에 없었던 거고요.1978년에 카자크인들의 편지글을 읽었던 레핀도 같은 맘이였을 겁니다.당시 레핀에게 있어 비겁하게 행동하고 주저하는 러시아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의 모범으로 카자크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구현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레핀은 예술을 예술로서 사랑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관심대상이였고 그 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면 즉각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구 그리지는 않았고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예술적 영혼이 살아 숨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뼈를 깍는 인내력을 발휘하면서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고 하는군요...
그 분의 그림과 사상,생애를 기록한 천개의 얼굴,천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내 생애와 겹쳐보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습니다.
레핀의 생애를 연대순으로 올려봅니다.
1844 우크라이나의 추구예프시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 남
1864 20세 황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드디어 기상의 나래를 펴다.
1871 27세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따다. 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다.자고로 사람이 클려면 명망있는 상을 받고 부터다.
1872 28세 볼가 강의 뱃사람들,레핀의 첫 역작. 러시아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민중의 삶을 총체적으로 창조적으로 표현하였다.
1873 29세 장학금을 가지고 이탈리아,프랑스 여행.세게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다.
1876 32세 추구예프에서 1년 지냄,모스크바이주,러시아적 가치에 몰두
1882 38세 이동파 활동,이동파 전시회에 참여.세상에 나아가다.
83- 11회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84- 12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85- 13회 이반뇌제,자신의 아들을 죽이다.
1888 44세 이동파와 의견을 달리 하면서 자기 깃발을 세우다.
# 이동파의 현실 참여에 대해 예술을 위한 예술론을 핌.순수하게 예술적인 측면으로 예술 자체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의 형상을 완성하는 것이 본인의 관심이라고 주장
1891 47세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쥐에 카자크들(1880- )을 완성하다.
1893 49세 자기 생각을 글로 쓰다.
이후 장년과 노년레는 여행과 학생지도로 세월을 보내고 화가의 전반기의 역작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917 64세 10월혁명을 불만을 품고 핀란드로 넘어 가다 .민중적 지향을 보인화가가 소비에트와 결별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못했다.아마도 예술에 대한 자유로움이라는 화가의 가치관과 소비에트가 맞지 않은 것은 아니지.아니면 황제의 덕
을 본 본인이 새로운 국가를 인정하기 어려웠었는지는 모르겠다.
1930 77세 영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