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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가 가나안으로 간 이유(창 11:26~3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 쓰면서 먼저 데라를 다루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아브람의 아비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라는 신앙의 출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인물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데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사람으로 70세에 세 아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다른 여인에게서 사래를 낳았습니다. 아브람은 이복누이 사래와 혼인하지만 자식이 없었고, 동생 나홀은 조카 밀가와 혼인하였으며, 하란은 아들 롯과 두 딸 밀가와 이스가를 낳고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롯 등 온 가족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본토인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11장에는 데라가 아브람 부부와 롯만을 데리고 떠나는 것으로 돼 있지만, 나홀의 가족도 함께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홀이 하란에 정착한 것은 데라와 온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같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창22:20-24; 28:1,10) 데라는 하란까지 와서는 가나안으로 가기를 포기한 채 거기 거하였으며, 205세에 죽어 그 생을 마감합니다. 목적지 가나안과 정착지 하란 그렇다면 데라는 왜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으며, 왜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하란이란 곳까지 와서 거기에 거(居)하였을까요? 성경은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하면서도 그 동기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아브람을 부르셔서 데라가 가려고 했던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을 볼 때,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한 이유도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데라는 하란까지 왔으면서 가나안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지도를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상당히 먼 길인 반면, 가나안은 온 길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인데 말입니다. 학자들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발달한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올 수 있었지만, 가나안은 타문화권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하란에 정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이유가 가나안 사람들이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것임을 보면서, 데라도 비록 먼 길을 오긴 하였지만 가나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나안 행을 포기하고 하란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데라의 향년 205세 성경은 창세기 11장을 데라가 205세를 향수(享壽)하고 죽었다고 마감하면서 이어 12장에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니까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을 부르신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 '아브람이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을 부르신 것으로 확신하게 됩니다.(행 7:4) 그러나 데라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후에도 60년이나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까, 데라는 145세가 되었고, 205세에 죽었으니 60년을 더 산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것은 데라가 죽은 후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행전에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이 떠났다며 신약성경을 근거로 보아야 한다면서 창세기의 기록을 무시하는데, 이는 바른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데라의 죽음 그렇다면 성경은 왜 아직 살아있는 데라의 죽음을 먼저 기록하면서 아브람을 부르셨을까요? 일반적으로 심장 박동이 정지되거나 호흡이 끊어지면 죽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를 죽었다고 하는 것처럼 성경은 영혼을 기준으로 죽음을 판정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하지만 이는 잠이 들면 반드시 깨어나는 것처럼 주님이 오시는 날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에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의 생명이 있을지라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에 죽어있는 것이고, 우리 본향인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짐승처럼 땅의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왔기에,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에 영생을 얻고 참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요 5:25) 또 성경은 비록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었을지라도 죽은 자들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고(계 3:1) 사도 바울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하였고(딤전 6:5) 히브리 기자는 죽은 행실이 있다고도 하였습니다.(히 6:1) 하란에 거하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유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함이었는데 하란에 이르러서는 거기 거(居)하였습니다. 성경은 '우거(寓居)하다'와 '유(留)하다'와 '거(居)하다'의 세 가지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유의하여 보아야 하는 용어들입니다.(룻 1:1,2,4) 우거하다는 임시로 머무는 것, 즉 나그네로 지내면서 언젠가는 떠날 준비가 돼 있는, 몸은 머물러 있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하다는 아주 정착하는 것으로 그곳을 떠날 이유가 없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착한 상태를 말합니다. 유하다는 말은 거하다와 같이 쓰이기도 하지만 거하다와 우거하다의 중간쯤으로도 쓰입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본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그 길목인 하란까지 와서는 가나안으로 가기를 포기하고 정착하였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떠나기도 하고, 목적지까지 갈 수도 있고, 중간에 머물 수도 있고 목적지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려했던 이유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도 되고 머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나안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지의 땅 가나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주저앉았던 것이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성경이 아브람을 부르기 전에 데라의 죽음을 강조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데라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지만(수 24:3) 먼저 데라를 부르신 것이 맞습니다. 우선, 아브람을 부르셨는데 아버지와 형제들 가족이 다 따라왔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데라를 통한 교훈으로 우리를 깨우친 후에 아브람으로 넘어가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라는 온 가족을 이끌고 본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강줄기를 따라 하란에 이르지만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모험을 포기하고 하란에 눌러 앉습니다. 산 자 즉,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데라를 '죽은 자'로 서둘러 마감하고 아들 아브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에게 저희 죽은 자를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죽은 자(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일을 죽은 자(세상에 속한 자)에게 맡기고 산 자인 제자에게는 산 자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8:21-22)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시작을 이렇게 데라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이유는, 바로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에 대한 경계(警戒)요(눅 9:62),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구분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눅14:28~30)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창11:27-32)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이다. 이곳은 수메르인의 난나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우상의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났다. 나므롯이 주도해서 세운 바벨탑의 원형인 지구라트가 있는 곳이다. 지구라트의 맨 꼭대기에는 난나신에게 봉헌하는 신전이 위치하고 있다, 갈대아 우르는 초승달모양의 지형을 가지고 있고 비옥한 땅이다. 그들은 씬(Sin)이라고 하는 초승달의 여신을 숭배하는데 전쟁과 성애의 신이라고 한다. 씬은 아카드어이며 수메르어로 난나(Nanna)라고 부른다. 훗날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스람교도 초승달문양을 숭배한다. 초승달은 이슬람에서 성스러운 상징이다. 마호메트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히라동굴에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은 밤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이슬람 사원의 첨탑에는 초승달이 걸려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으나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기 전에 살았던 갈대아 우르의 난나신을 부활시킨 종교이다. (* 난나신, 초승달 신, 오이디프스 이난나 샤마쉬)
유네스코에서는 1979년 이 지구라트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문화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세상은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한다는 영적 유산을 배워야 할 것이다. 수 24:2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쪽(갈대아 우르)에 거주하며 다른 신즉 우상을 섬겼다고 했다. 데라는 셈의 후손으로 여호와 신앙을 유산으로 이어받은 족속이다. 그러나 바벨탑이후 점점 흐려져가는 신앙으로 급기야는 믿음을 이어가야 할 후손이 우상숭배도 모자라서 우상장사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우상장사로 돈을 많이 벌고 먹고사는 일에 빠져 여호와 신앙을 거의 잃어버려 믿음의 끈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데라( תּרח 테라흐)는 그 어원이 분명히 않지만 delay 또는 station이라는 뜻이 있다. 광야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거쳐가는 장소라고 할 수있다. 이것은 데라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데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지만 그의 마음깊이 숨어있는 여호와 신앙의 희미한 잔상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여호와 신앙을 계승해 온 셈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우상장사를 빨리 청산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돼!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아냐! 좀더 돈을 벌고 먹고살 걱정이 없으면 그 때 이 지긋지긋한 우상의 땅을 떠날거야"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부르는 믿음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차일 피일 미루며 갈대아 우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 데라는 우상의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의 아들 하란이 죽은 것이었다. 롯이라는 손자를 하나 남겨두고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 데라에게 큰 환란이었다. 그 때서야 데라는 깨닫는다. "내가 벌써 갈대아 우르를 떠났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이야!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아서 이런 변을 당한거야 !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가야지 " 하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창11:31 "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데라는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과 그의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가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데라는 전부터 하나님이 우상의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 아니면 영음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지 데라는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세속에 매여 욕심과 육체의 안일함에 매여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죄가운데 살다보면 분명히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 세상이 부귀영화를 좇다 보면 누구나 영혼의 공허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정말 참되고 진실한 삶이 없을까하고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왜냐면 육신의 욕망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마약을 하는 사람이 지금 마약으로 자신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환란과 불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육체적으로는 불행이지만 영적으로는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이다. 데라의 불행은 두가지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기를 delay(지체)하고 차일 피일 미루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 그를 죄악의 자리에서 이끌어내시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데라는 환란을 당하자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앞에 나오게 되는 경우이다. 어쨋든 환란은 인간에게 불행이 아니라 다행인 것이다. 왜냐면 파멸의 자리 영영 복구되어질 수 없는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 복된 자리로 올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데라는 충격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만 가나안까지 가지 않고 중간 지역인 하란에 머물게 된다. 데라의 또 하나의 뜻은 station이다. 간이역이라고 할까? 거쳐지나가지만 반드시 떠나야 하는 곳 결코 계속 머물러서는 안되는 곳이 간이역이다. 어느 누가 간이역에서 정착할 수 있는가? 데라에게 하란은 간이역이어야 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들을 잃고 그 상처를 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중간지점인 하란에 머무르고 만 것이었다. 하란도 역시 달신의 숭배지였고 가장 오래된 고대도시라고 한다. 아마도 데라는 하란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란에서 인생을 마치고 만다. 데라에게 신앙의 목적지가 가나안이라면 신앙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떼어야 할 것을 떼어내지 못하면 결국 종착역까지 가지 못하고 간이역에서 끝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세상과 하나님의 중간지역인 간이역에서 머무르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빨리 벗어나라! 그것이 데라가 우리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일 것이다. 지체하는 자에게 환란이 올 것이며 간이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집에 다다르지 못할찌니!
바벨론의 지구라트(현재의 이라크) -----------------------------------------------------------------------------------------------------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창세기 11:24-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가정에 흐르는 영적인 문제와 육적인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를 끊어 버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곳은 갈대아 우르이다. 그곳은 달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큰 사원을 지닌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데라는 달신을 믿고 있었고 데라라는 이름 역시 달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레아흐’와 연결이 되어 있으며 데라의 며느리 밀가는 달신의 딸이자 여신인 밀카투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사라는 달신인 신(Sin)의 아내인 사라투(Sarratu), 이름을 보더라도 우상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런 곳에서 데라는 살고 있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다. 악한자리는 가지를 말아야 한다. 악한 곳에 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어 이런 교만한 마음 갖지 말라. 유혹을 받는 곳에 노출이 되지 말라. 사사기 13장 1절과 2절을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이방 땅인 딤나에 왜 내려 갔는가? 삼손이 갈 자리가 아니다. 그곳에서 삼손이 본것이 무엇인가? ‘내가 여자를 보았다’ 삼손의 말이다. ‘내가 여자를 보았다’ "I have seen a Philistine woman in Timnah; now get her for me as my wife.”(NIV Judges 14:2) 가지 말아야 될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자꾸 가다보면 넘어간다. 이 여자를 자꾸 보니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이야기 한다. 나 이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자 삿 13장 3절에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 자꾸 졸라댄다. 결국 부모가 진다. 결국 부모도 그곳에 함께 가서 며느릿감을 보고 온다. 결국 그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결혼이 성공을 했는가? 실패했다.
예수를 믿으면 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술친구들과 분리해야 한다. 동네에서 화투나 고스톱으로 시간을 보내던 사람과 분리가 된다. 우리는 전도를 하러 나오고 봉사를 하러 나오기 때문에 심심하니까 점 10점짜리 고스톱이나 치자 칼국수 내기 고스톱하자고 하지 않는다. 분리만 된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밤낮 우리끼리, 우리끼리, 우리끼리…… 성도끼리만 모여 있고 성도끼리만 찬양하고 성도끼리만 밥 먹고 성도끼리만 곗돈 모아 가지고 계하고 모든 것을 예수 믿는 사람끼리 한다. 그러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런데 데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위기가 찾아 온다. 데라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노아의 후손이었으면 그중 에서도 셈의 후예였다. 믿음의 조상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었다. 영적인 문제이다. 그는 우상숭배 했다. 이렇게 영적인 문제가 데라의 가정에 있을 때 데라의 가정에 문제가 일어난다. 데라가 셈의 후예이면 믿음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던 자손이다. 그런데 악한 세상에 물들여서 사니까 세상 풍조를 따라서 사니까 가정에 위기가 왔다.
----------------------------------------------------------------------------------------- 데라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창31:50-55)
라반은 젊은 장정들을 시켜서 세운 큰 돌기둥과 돌기둥주위에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아버지 데라(창11: 27)의 하나님이름으로 너와 나의 맹세언약이 성립됐다’고 야곱에게 선언한다(창31:53)
창 11: 26을 보면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세쌍둥이 아들이다(Terah lived seventy years, and became the father of Abram, Nahor and Haran) 그런데 셋째 아들 하란은 외아들 롯을 낳은 후,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두 형들보다 먼저 죽는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달 신을 섬기면서(수 24: 2)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데라는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우상제조업을 포기하고 가산을 정리해 가족들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출발해 오다가 도중에 살기 좋은 하란 땅을 보자 그곳에 정착해 살다가 205세를 향수하고 운명한다.
창세기 12: 1-3과 사도행전 7: 2-4의 기록을 종합하여 Visualize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부모형제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창 11: 31절과 ‘데라의 하나님’이란 본문기록 과 연결하여 재조명해보면,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 와서 그곳에 정착한 것은 데라가 했던 그의 믿음의 행동이었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한 것은 아브라함이 했던 믿음의 행동이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세쌍둥이아들을 낳고, 어느 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했다가 살기 좋은 하란에 정착해 살다가 205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떠난 나이가 75세였으니, 그때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출발한 후에도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살다가 205세에 그곳에서 죽어 뼈를 묻은 것이다.
그리고 그 60년 동안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창 13장에서 25장까지의 기록이다. 제일먼저 아브라함과 셋째 동생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이 사업상의 문제로 서로 헤어져 분가한다. 그다음, 최초 세계전쟁인 북부 메소포타미아 동맹군과 남부 사해 연합군의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을 아브라함이 318명 군사로 북부동맹군을 격퇴하고 조카 롯을 구출한다. 그다음 가나안 이민생활 25년 만에 외아들 이삭을 낳고 다시 25년 후엔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믿음의 시험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다음, 145세에 아브라함과 헤어진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20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2년 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향년 127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사라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브라함은 38년을 더 살면서 젊은 여인 그두라를 두 번째 부인으로 얻어 여섯 아들을 낳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행복과 천수를 누리다가 175세에 죽는다.
이제 데라의 하나님을 알아본다. 데라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즉시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후 아들의 영향을 받아 야훼하나님 신앙을 갖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데라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볼 때, 데라가 야훼신앙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성경을 유추(類推)해 볼 때, 데라가 아브라함의 영향을 받은 것보단 데라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솔들을 거느리고 수천리 길 가나안으로 가다가 풍경이 화려하고 자녀들 교육하기에 문화 환경이 좋으며 사람들의 인심도 좋고 정붙여 살기 좋은 하란을 만나자 그곳에 이삿짐을 풀고 정착한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어쩌면 나이 많은 데라가 하란에 도착했을 때, 먼저 죽은 셋째아들 하란과 이름이 같은 도시에 향수와 애정을 느끼고 매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란에 정착했고 거기서 205세까지 살다가 죽는다. 그래서 Haran (하란)은 데라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이 될 뻔했던 기회를 놓친 장소가 된다.
그렇다. 데라의 하나님은 100% 순종하지 않고 일부만 순종한 사람에게 순종한 것만큼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데라의 하나님에 멈춰있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들이 순종한 것만큼만 복을 떼어 주시고 나머지 축복을 덩어리 채 들고 안타깝게 서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 큰 질병치료의 기적, 각종난치병과 불치병 치료와 건강의 축복, 사업과 자녀가 잘되는 형통의 축복, 부부가 행복해지는 축복, 기도가 응답되고 신령한 은혜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영적인 축복, 깊고 오묘한 말씀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 각종 소원들이 이뤄지는 축복들을 가져오셨다가 그 중에 부스러기 조금만 떼어 주시고 나머지는 손에 들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금만 더 순종하면, 조금만 더 인내하면, 조금만 더 충성하고 기도하면 넘치도록 받을 기도의 응답들과 축복을 받지 못하는 교인자신들도 안타깝겠지만 하나님은 더 안타까워하신다.
1961년 1월 19일 새벽에 성령세례를 받은 10대 소년 세 사람의 처음 출발은 정말 멋이 있었다. 세 소년은 3년 동안 불신 부모형제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잘 이겨냈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세 소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성경을 읽어 내가 신약성경을 97번 읽는 동안 두 친구도 4-50번은 넘게 읽었다(셋은 매일 저녁마다 서로 성경을 얼마나 읽었나를 확인했는데, 당시 나는 친구들을 이기고 싶어서 50페이지를 읽고는 30페이지를 읽었다며 상대편을 안심시키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었다) 그리고 새벽과 저녁마다 산에 올라가 설교를 연습하고 산 기도를 했으며 거의 매일 저녁마다 교회에 나가 철야를 했다. 당시 우리는 철야기도가 무언지도 몰랐다. 밤마다 세 소년은 마루에 방석을 깔고 담요 한 장을 덮고 몸의 열기로 추위를 잊으려고 꼭 끌어안고 잠을 자면서 교회를 지키면서 목사 되는 꿈을 키웠다. 어느 때는 아무도 없는 교회 강단에 올라가 돌아가면서 설교를 연습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추위를 잘 타는 나를 친구들은 하나는 앞에서 하나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따뜻하게 해주며 혈육처럼 사랑했다. 그래서 당시 시골 우리교회 성도들은 우리를 ‘새끼 목사 삼총사’라고 부르며 사랑해 주었고, 장차 멋있는 목사들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지난 한 주간 나는 오늘설교를 준비하면서, 시골교회 소년시절에서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세 사람 중에 나 혼자 목사가 돼, 아득하게 먼 옛날을 회고하면서 ‘데라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22살에 전도사로 고향을 떠난 후, 두 친구의 소식은 두절됐는데, 70 고희가 된 지금,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까 아니면 데라의 하나님으로 남아 있을까...생각하니 마음이 아련할 뿐이다.
지금 당신의 하나님은 100% 하나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 축복의 근원으로 축복해주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40% 50%만 순종해 그만큼의 축복으로 끝난 데라의 하나님인가? 데라의 하나님이라면, 다시 일어나 순종의 길을 걸어가 볼 마음은 없는가? 나의 하나님이 데라의 하나님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는 믿음의 혁명, 순종의 역사, 축복의 기적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그다음 나홀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데라가 첫째아들 아브라함 부부와 손자 롯과 종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했다가 하란에서 정착해 사는 동안, 둘째아들 나홀도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메소포타미아의 고원지대 밧단 아람(다른 이름은 아람 나하라임: “두 강들의 아람”이란 뜻으로 나하라임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의미하고 아람은 “고지”, “산지”란 뜻으로 아람 나하라임은 두 강 사이에 있는 고원지대를 가리키며 밧단 아람으로 부르고 훗날 세계 3대 문명발상지 중 한 곳이 된다)으로 옮겨 간다(창 28: 2, 24: 10) 그리고 거기서 밀가와 르우마 두 여자를 아내로 얻어 밀가를 통해 8명, 르우마를 통해 4명 도합 12명의 아들을 낳는데, 밀가를 통해 낳은 여덟째아들 브두엘이 딸 리브가를 낳고,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며느리, 이삭의 아내가 되며, 나홀의 손자 라반은 훗날 야곱의 장인이 된다(창 29: 5)
나홀의 혈통에서 ‘천만인의 어미’(The mother of thousands of ten thousands; 창 24: 60) 리브가가 나왔고, 야곱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인 12아들이 나왔으니 나홀의 하나님은 믿음의 혈통을 잘 지킨 자에게 그 믿음을 보상해 축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야훼하나님 신앙을 갖게 된 후, 비록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으로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밧단 아람에 정착해서 홀로 자기 믿음을 지키며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웠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홀, 그 사람 나홀을 통해서 우리는 그를 축복하신 나홀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장.감.성.순.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주류교단 정통교회에서 화려하게 신앙생활 못하고, 비록 군소교단의 이름 없는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리고 미국 한국 영국 독일의 큰 교회, 유명한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비록 작고 가난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중국과 이북의 지하교회와 작고 가난한 나라와 열악한 선교지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어도, 오늘도 나홀의 하나님은 리브가를 통해서 그리고 라헬과 레아를 통해서 12지파를 만드시고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듯, 묵묵히 자기 믿음을 지키는 주의 종과 성도들을 들어 세워 평지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산 같이 역사 위에 위대한 일을 만들어 내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큰 교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가난하고 작은 교회에도 계시는 하나님이다.
역사의 변두리 밧단 아람에서 리브가와 라헬 레아가 나오게 하셨고, 변두리 베들레헴과 나사렛에서 역사의 주인공 예수님이 나오게 하셨으며, 산헤드린 교권의 변두리 갈릴리에서 12사도가 나오게 하셨고, 12사도 외에 변두리 사도 바울을 들어 지구역사를 바꾸셨던 나홀의 하나님께서 ‘나 홀로 바른 믿음을 지키는 당신을 통해’ 위대한 역사들을 만드시는 기적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1. 축복의 근원, 아브라함(창 12: 1-3)
납득하기 어렵고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하나님도 사람을 편애(偏愛)하신다. 자녀들 중에 첫째 아들은 사랑하고 둘째는 미워하며, 첫째 딸보다 둘째 딸을 더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사원 중에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는 직장상사가 있듯, 하나님도 편애하셔서 남보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성도가 있다.
성경에 하나님이 편애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 외에도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등 시대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사랑한 사람들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처럼 많다. 이렇게 시기질투가 날 정도로 하나님이 편애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오늘도 목사와 성도들 중에도 편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라고 다 똑같은 목사가 아니고, 장로라고 다 똑같은 장로가 아니며, 집사라고 모두 동급의 집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Go forth to the land which I will show you!; 창 12: 1)는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순종해 멀고 험한 가나안,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허허벌판 가나안까지 갔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아브라함을 저주하고 대적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저주하시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창 12: 2에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You shall be a blessi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 자신이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명령으로 떨어질 때, 어떤 이유나 핑계나 조건을 대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믿고 100% 순종하는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복’,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축복과 나를 인하여 나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주기도문교회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 되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고, 축복의 근원 아브라함 같은 거룩한 성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한다.
2. 불순종이 가져온 어려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Go forth from your country, And from your relatives, And from your father's house, To the land which I will show you!; 창 12: 1)고 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떠날 때, “그 아내 사라와 그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다(창 12: 5)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300마일(480km, 1200리)의 먼 거리였다. 당시 여행경로로 보면 아브라함은 많은 가솔을 거느리고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아에 도착한 후 시리아 광야를 횡단해서 다메섹에 이른 후 다메섹에서 가나안으로 직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거닐고 수많은 위험을 무릎 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광야를 횡단하는 대장정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삶의 터전을 옮겨 가므로 “너의 본토를 떠나라”는 지리적인 순종은 100% 했다. 그러나 죽은 동생 하란의 아들, 조카 롯을 데려가는 일로 “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사람까지 떠나야 하는 순종은 실패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먼저 죽은 동생의 핏줄을 생각하는 일은 훌륭하고 잘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거역한 대실수다. 인간의 생각과 인정으로 실패한 불순종의 결과를 보자.
⑴ 배반의 쓴잔을 맛보았다(창 13: 1-18)
짐승들과 종들이 많아지면서 서로 다투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다.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않느냐. 나를 떠나라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을 택하리라” 제안했다. 그러자 조카 롯은 짐승도 많고 종들도 자기보다 많은 아브라함, 자기를 거두어준 생명의 은인이며 아버지 같은 아브라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욕심 따라 방목하기에 비옥하고 좋은 땅, 푸른 초장이 융단처럼 펼쳐 있고 물줄기가 정맥처럼 퍼져 있는 동쪽의 요단 평야 땅을 선택한 후 자기 종들과 짐승들을 거느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브라함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배반의 쓴잔을 마셨다. ⑵ 전쟁에 휘말리다(창 14; 14-16)
84세 때의 어느 날, 아브라함은 가나안 남북전쟁 소식을 듣는다. 북부 메소포타미아 네 나라 연합군이 질풍노도처럼 침공해 중립국인 가나안 부족국가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남부 사해연합 다섯 나라까지 정복한 후, 소돔 땅에 살고 있던 조카 롯과 그의 가족과 재산까지 모두 탈취해 갔다는 소식이다. 아브라함과는 관련이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조카 롯의 가족과 재산이 포로로 잡혀가고 탈취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밤낮을 쉬지 않고 80km를 달려가 목숨을 걸고 북부 연합군을 격파하고 롯을 구출한다.
⑶ 롯 가족의 비극을 본다(창 19장)
아브라함이 목숨을 걸고 롯을 구출한 후에 롯은 소돔에서 크게 성공해 잘 살았지만 롯이 아브라함에게 사례했거나 봉대(奉戴)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가 동성애와 극심한 도덕적 타락으로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God remembered Abraham; 창 19: 29)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해 주신다. 그러나 ‘절대로 뒤를 보면 안 된다’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한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기둥이 돼 죽었고, 두 딸은 아버지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 돌아가며 근친윤간을 해 모압과 벤암미란 아버지의 아들 사생아를 낳는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조카 롯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롯에게 배반의 쓴잔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롯 때문에 겪은 목숨을 건 전쟁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며 그리고 비참하게 깨져버린 롯 가정의 비극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불순종의 결과는 이런 것이다. 그래서 순종은 100%해야 한다. 하나님께 온전한 100% 순종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유럽교회들의 문 닫는 소리가 미국과 한국교회에 경종으로 울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에 유럽교회는 지구촌의 기후변화로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빙벽들이 무너져 내리듯 교회 문 닫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다.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4년 내에 700교회 이상이 문을 닫았고, 덴마크에서는 200개, 독일은 515개 교회가 지난 10년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문을 닫은 교회건물이 서커스 훈련학교나 술집, 스케이트보트 연습장, 수퍼 마켓, 서점, 체육관, 꽃가게 등 상업용 건물로 바뀌었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많은 건물이 이슬람사원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10년간(2100-2010년) 새로 세워진 개척교회가 5000개나 되는데 출석교인은 3%나 감소됐고, 한국도 10개 교회를 개척하면 7-8개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추세여서 문제가 되고 있고 한국에서는 이슬람의 선교공세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대표적 강해설교가인 존 맥아더 목사(캘리포니아 썬-벨리 지역 Grace Community 교회목사로 한 교회에서 45년간 목회)는 중앙일보기자와 인터뷰에서 “미국은 기독교의 가치를 잃는데 200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몇 년도 걸리지 않았다”면서 “한국은 짧은 기독교역사 가운데 갑자기 교회가 커지면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 결과 기독교가치가 내부적으로,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려 제대로 정착되기 전에 교회는 막강한 힘과 권위만 갖게 됐다.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한국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급격한 물결에 휩쓸리며 본질을 잃어갔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맥아더목사는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 목사의 박사논문 표절과 3억 달러(약 3000억 원)짜리 교회 건물을 비롯해 교회세습과 목사들의 청빙문제, 이성문제와 금전문제 등 많은 비리를 지적하면서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는데, 물론 이것은 관록 있고 명성 있는 한 노목사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지적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미국교회와 한국교회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맥아더목사의 충고대로 “목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넓이보다 깊이”이다. 미국교회와 한국교회, 세계에 흩어진 6천여 한인교회와 3만 여명의 선교사들이 사는 길은 대형교회로 교회가 넓어지고 선교사역이 커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갖는 영적 깊이를 추구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오늘 미국과 캐나다의 40만 교회들이 섬기는 하나님, 한국의 7만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 그리고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인가? 데라의 하나님인가? 나홀의 하나님인가? 오늘 당신마음에 모시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리고 당신은 자손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유산으로 넘기기를 원하는가? 우리 믿음들이 데라의 하나님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삶의 역사도 아브라함의 축복과 나홀의 축복으로 바뀌는 오늘 예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아브라함의 전(前)역사, 데라(창11:26-32)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현대에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온 인류의 조상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신약에 이르기까지 가장 모범적인 신앙을 소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도 삭개오 사건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거론할 때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로마 4장) 이 아브라함 이야기가 오늘 본문 창 12:1-9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그에 앞서 창 11:26절이다. 창 7,8장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창 11:1-9절의 바벨탑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창세기 기자는 노아의 첫 아들인 셈의 후손을 열거한다.(창 11:10-26) 이런 족보의 끝자락에 ‘데라’가 등장하는데, 그 데라의 세 아들은 아브람, 나홀, 하란이었다. 이들의 고향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다. 데라는 아브람과 아브람의 아내, 즉 데라의 며누리인 사래, 그리고 일찍 죽은 아들인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원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하란’에 자리 잡고 살았다. 데라는 하란에서 천수를 다하고 이백오세에 죽었다. 이 데라의 삶에도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한 사람의 운명은 인류 전체의 운명에 맞설 정도로 무겁고 깊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아브라함에 관한 서사(敍事)가 본격적으로 서술되기 이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필자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데라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주제가 앞뒤 콘텍스트 없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다.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맥락을 가능한대로 폭넓게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성서에 전승된 이야기들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삶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에 성서가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리얼리티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 역사에 관해서 조금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데라는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고 했다. 그의 계획에 차질이 벌어진 것 같다. 당시 모든 식구들이 다 따라 나서지 않았다. 아브람과 롯과 사래만 따라나섰다. 나머지 식구들은 왜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일까? 하란은 일찍 죽었으니까 접어두자.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데라의 아내가 아예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데라가 아들 세 명을 낳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아내가 있었을 텐데, 성서는 아무 말이 없다. 이유가 무엇인가? 데라의 아내와 아들 하란이 전염병으로, 아니면 큰 사고로 죽은 것은 아닐는지. 나홀 부부도 아버지 데라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들 중에는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데라를 따랐다. 사래와 조카 롯까지 아브라함이 설득했을지 모른다. 식구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할 이유에 대해 데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결국 각자 생각에 따라서 머물 사람은 머물고 떠날 사람은 떠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만 한다. 나홀 부부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혹시 이런 문제로 식구들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 내외와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리를 떠났다. 아브라함과 사래와 롯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는 긴 여행 중에서도 아버지 데라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하란에 거주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새겨들을 준비를 갖추었고,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하란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는 하란을 떠난 것이다. ---------------------------------------------------------------------------------------- 구속사 데라와 세 아들 출생순서(창11:26)
창세기 11:26을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①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견해 ② 데라가 70세가 되었고, 아브라함과 나홀, 하란을 낳기 시작했다는 견해(현대인의 성경 등)
1) 세 아들들의 출생순서
창세기 11:26에서 데라의 세 아들 ‘아브람, 나홀, 하란’ 은 출생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하란의 아들이었으며(창 11:29), 나홀이 하란의 딸과 결혼했다는 점을 볼 때 하란이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홀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창 22:23, 24:15)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데라의 세 아들의 출생 순서는 ‘하란 - 아브라함 - 나홀’의 순서이다.
글라슨 아쳐는 유대 학자 필로의 견해를 따라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를 근거로 데라가 70세에 하란을, 135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아브라함이 70세가 되던 해에 데라가 죽자 가나안 땅으로 옮긴 것으로 설명한다(창 11:32, 행 7:4). 이 설명만 볼 때는 2번의 해석이 옳은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설명에 대해서 헨리 M. 모리스는 데라가 135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은 것이 기적이 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한다. 무엇보다 이 설명은 왜 출생순서대로 기록하지 않고 아브라함, 나홀, 하란의 순서로 기록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2) 출생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은 의미
신구약을 통틀어 단어의 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구약에서 예를 하나씩 들어보자면, 에서와 야곱을 함께 이삭의 자손의 의미로 언급하는 경우 출생 순이 아닌 영적인 의미로 순서를 바꾸어 기록했으며, 신약의 경우에도 ‘바나바와 바울’에서 바울의 사역이 발전됨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라고 지칭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1:26의 히브리어 원문은 이러한 모습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1:26의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낳았다’는 뜻을 가진 ‘얄라드’(יָלַד)에 “에트 아브람 에트 나홀 베에트 하란(אֶת־אַבְרָם אֶת־נָחוֹר וְאֶת־הָרָן)”이라고 연결하여 아브람, 나홀과 하란 사이를 ‘베’(וְ)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1:26을 직역하자면 “그리고 데라 칠십년을 살았고, 아브람과 나홀 그리고 하란을 낳기 시작했다(참고 – KJV: And Terah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Abram, Nahor, and Haran”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을 ‘낳기 시작했고’, 그리고 하란을 낳았다는 것으로서 출생 순서를 고려할 때 하란을 낳은 것은 70세 이전이며, 데라가 70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을 낳고 그 이후에 나홀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든 웬함이나 카일, 델리취, 헨리 M. 모리스와 같은 신학자들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3) 창세기의 구조적 측면
고든 웬함은 창세기는 10개의 족보(톨레돗)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족보(톨레돗)는 이전까지의 내용과 다음에 이어질 내용의 연결고리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1:10-32의 족보는 노아의 홍수 기사와 아브라함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를 연결하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등장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1:26의 ‘70세’는 아브라함과 연결해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4) 족보의 기능적 측면
성경의 족보는 언약의 계승과 구속사의 전진을 보여주며, 언약과 상관없는 자손들의 수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는 창세기 4장의 가인 계열의 족보에는 수명이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5장의 셋 계열의 족보에는 자식을 낳은 나이와 향수한 나이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창세기 11:26에서 ‘70세’를 특기한 것 역시 아브라함의 나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5) 스데반의 설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혹자는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은 것이라면, 스데반의 설교와 65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단어를 조금만 연구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 11:32에서 데라가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다는 구절에서 ‘죽었다’의 원어인 ‘무트’(מָוֹת)는 육적인 죽음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서 데라가 ‘죽으매’의 원어인 ‘ἀποθνῄσκω’(아포드네스코)는 육적인 죽음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고전 8:11, 15:31 등). 특히 스데반의 설교가 구약의 기록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행 7:15-16 / 창 33:18-20, 50:13 – 세겜 땅의 구입자는 실제로 야곱이나 스데반은 아브라함이라고 말했으며, 세겜에 묻힌 것은 요셉인데 야곱이라고 표현했다), 스데반이 말하는 데라의 죽음 역시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독일의 보수 신학자 류폴드나 헨리 모리스 역시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가나안 땅을 향하던 도중 하란에서 지체했다. 데라 145세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완전히 부정을 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며, 하란에 남겨진 데라는 205세에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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