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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지역화의 물결과 법령의 한글표기
Waves of Globalization and Regionalization and
the Hangul-Lettering of Korean Law
심희기(연세대/법학)
Ⅰ. 문제의 제기
2004년 12월 29일 '국어기본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 되었다. 국어기본법 제14조(공문서의 작성)는 공공기관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도록 의무화시켰고 '한자 또는 다른 외국문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만 쓸 수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한글을 표기한 후에 '괄호 안에 표기'(협서, 脇書)하는 방식으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제1항)하였다. 국가기관에서 제정하는 법령의 원문이 담긴 문서는 '공공기관의 공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의 하나이다. 2004년 12월 현재 한국의 각종 법령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면 국어기본법 제14조의 의의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2004년 12월 현재 '국민의 권리 의무를 정한 국회제정 법률들'의 원문은 대부분 '국한문 혼용(國漢文混用)'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행 헌법(1987.10.29. 공포)의 원문도 국한문혼용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예를 들어보자. A는 현행형법(1953.09.18. 공포) 제1조의 표기방식이다. B는 같은 부분을 국어기본법 제14조가 기대하는 표기방식(2005년 7월 이후에 제정되는 법령)으로 표기만 바꾼 것이다. B 중 밑줄 친 부분이 '한글을 표기한 후에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하는 협서(脇書)' 방식이다.
A: 第1條 (犯罪의 成立과 處罰) ① 犯罪의 成立과 處罰은 行爲時의 法律에 依한다. ② 犯罪後 法律의 變更에 依하여 그 行爲가 犯罪를 構成하지 아니하거나 刑이 舊法보다 輕한 때에는 新法에 依한다. ③ 裁判確定後 法律의 變更에 依하여 그 行爲가 犯罪를 構成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刑의 執行을 免除한다.
B: 제1조(범죄의 성립과 처벌) ①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한다. ② 범죄 후 법률의 변경에 의하여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거나 형이 구법보다 '경(輕)한' 때에는 신법에 의한다. ③ 재판확정 후 법률의 변경에 의하여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형의 집행을 면제한다.
'B 방식'(이하 '한글전용'으로 약칭함)'으로 표기하면 초등학교 학생들도 잘 읽을 수 있지만 'A 방식'(이하 '국한문혼용'으로 약칭함)으로 표기하면 한국의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읽지 못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 '법령의 한글표기'가 문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법령을 국한문혼용 방식으로 표기(lettering)하면 법령의 '가독성(可讀性, readability)'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국어기본법 제14조는 법령의 '가독성'을 높이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독성을 높이려고 '공문서나 법령표기를 한글전용으로 하자'는 국어기본법 제14조의 발상은 한국에서 2004년에 처음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발상의 기원은 '근대한국의 민족주의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한에서 이 문제가 처음 거론된 시기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인 1948년의 일이다. 1948년 남한에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가 제헌국회이다. 제헌 국회에서 국어기본법 제14조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 법률안이 제출되었는데 그 법률안이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안'이다. 이 법률안의 발의자는 법률안의 제안취지를 한 나라의 國語에는 그 나라의 國民精神이 흐르고 있고 民族正氣가 內包되어 있으므로 新生獨立國家인 우리나라에서도 한글을 專用함으로써 自主獨立의 精神을 內外에 誇示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법률안의 발의자들이 마련한 '원안'은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협서(脇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회 심의과정에서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협서(脇書)할 수 있다.는 단서를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倂用)할 수 있다.로 변경하자는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원안이 아니라 이 수정안이 가결되었고 이 법률이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1948.10.09 법률 제6호)로 공포․시행되었다. 1948년에 부결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이 50여 년 만에 국어기본법 제14조의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50여 년이 경과한 2004년에는 어떤 연유로 모든 공문서, 특히 법률 원문의 한글표기를 강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국어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는가, 반대의견은 없었는가, 국어기본법의 추진론자와 반대론자의 논거는 무엇이었는가?
필자는 이하에서 1948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50여 년 간 '공공기관에서 작성되는 공문서'의 표기방식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전개된 논쟁의 추이를 추적하여 2005년 7월부터 시행된 '국어기본법'의 역사적 의미를 검토하고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법령의 한글표기운동과 한국어화 운동'의 장래를 전망해 보려고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2004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국어기본법'을 '세계화, 지역화의 물결과 한국인의 대응'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바라볼 예정이다.
Ⅱ. 1948년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안'의 귀결: 수정안의 승리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이하 '원안'으로 약칭함)을 발의한 의원들은 이 법안의 필요성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거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첫째 논거로 '민족정체성의 회복'을 거론하였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 공용어는 일본어였고 일제말기에는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한글사용이 금지되었는데 민족해방 후에 한국어와 한글사용을 법제화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라는 주장이 첫째 논거였다. 두 번째 논거로 그들은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인구의 약 20%만이 한자를 읽을 수 있는데 비하여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는 거의 100%라는 점을 들었다. 이 두 가지 논거를 반박하는 토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본회의에서 는 원안이 아니라 수정안이 가결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반론은 현실론이었다. 신생 독립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인데 당시 한국인이 참고하여야 할 '과학과 기술' 관련 서적은 대부분이 한자를 사용한 일본어로 기술되어 있었으므로 한자를 교육하지 아니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의 반론은 '문자생활의 법제화'에 대한 반대였다. '한글사용은 국민운동과 문화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추진할 일이지 한글사용을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정안은 원안발의자의 입장과 반대론의 입장을 절충한 안으로 보인다. 원안은 '정당한 안'이지만 지금 당장 법제화 시키면 실시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있으므로 '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법제화의 시기를 보류하자'는 것이 수정안의 발상이었다. 다만 '여건이 성숙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으므로 그 시기를 명시하지 아니하기로 하였다.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倂用)할 수 있다.는 수정안의 취지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수정안을 제안한 조헌영(趙憲泳) 의원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정안은 별 의미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나 (중략) 이것이 30년 후에 완성될 지 몇 십 년 후에 완성될 지 모르나 여하간 우리가 시작만은 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 수정안의 정신이올시다. (중략) 당분간 한자는 얼마든지 써도 좋아요. 그러나 국책으로 방법은 정해야 됩니다. 적어도 지금부터 실행하지 않으면 100년 후에 가서도 마찬가지예요. (중략) 국민이 문화적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한글만으로 하자는 것이 이 법안을 만드는 근본정신일 것입니다. 이 법안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겁니다.
이리하여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은 그 명칭과는 달리 공문서의 표기를 '국한문혼용'으로 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는 법률이 되었다. 한글 전용론자의 입장에서는 이 법률이 오히려 한글전용을 방해하는 법률로 인식될 소지도 없지 않았다. 2004년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국어기본법이 1948년 10월 9일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법률 제6호)을 명시적으로 폐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Ⅲ. 1968년-1970년 군사정권의 법령한글화 정책
1. 국한문혼용의 의의
이미 15세기의 왕조국가 조선에서는 조선어를 음성에 맞게 표기하는 고유한 알파벳이 창안되었지만 19세기 후반까지 조선의 공문서에 표기되는 공식적인 문자는 '한자'이었고 그 한자의 구성과 배열을 규율 하는 문법은 '한문'이었다. 공문서의 '한자-한문'표기 체제는 1894년의 갑오경장 시대부터 '국한문 혼용'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국문'이란 한글(언문)을 의미한다. '국한문 혼용'으로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첫째, 어순이 한국어의 어순으로 바뀌어 한자는 알지만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이 공문서를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둘째, 공문서에 표기되는 문자 중에는 여전히 한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한글은 조사와 약간의 접속사 정도에서만 표기되는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국한문혼용정책의 시행은 한자를 모르는 한국인이 공문서를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였을 것이다. 남한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1948.10.09 법률 제6호)의 시행은 1894년의 갑오경장 시대의 정책에 혁명적인 변화를 준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1945년의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의 공용어는 일본어였으므로 한국인의 어려움은 한층 가중되었다. 당시의 일본어 표기에도 한자가 대단히 많이 섞여 있었으므로 일본어 알파벳(가나, ○名)은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공문서는 '일본식 한자/한문표기', '일본어 가나'로 구성되었고 공식 언어가 일본어였으므로 '공문서를 해독하는데 한국인이 겪었을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민족해방 후에 북한과 남한에서 한글전용운동이 일어나는 현상은 굳이 민족주의 운동을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하려는 극히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파악된다.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남한의 국회에서 한글전용정책의 채택이 발의된 것은 전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민족해방과 동시에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한글전용정책의 시행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북한에 비하여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이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초래하였으며 그 공과(功過)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비교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그 질문에 대한 탐구를 생략할 수 밖에 없다.
남한에서 혁명적인 한글전용정책이 추진된 시기는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2. 5.16 군사정권의 법령한글화 정책
1961년 5월에 남한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정부공문서규정'(1961.09.13, 각령 제137호)을 제정하여 1961. 10.1. 부터 시행하였다.
모든 공문서는 표준말인 한글국어체로 간명하게 기술하고 정자로써 가로 쓰되 띄어 쓸 것이며 수자 표시는 아라비아 수자를 사용한다.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것은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 쓸 수 있다.
'정부공문서규정'은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며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의 정신을 한층 구체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부공문서규정'의 '정부'는 행정기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1년의 '정부공문서규정'으로 '행정기관 내부에서 작성되는 공문서의 한글화'는 상당 정도 진척되었지만 철저하게 진척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1968년부터 '행정기관 내부에서 작성되는 공문서의 한글화'는 보다 철저하게 진척된다. 1968.12.24.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무총리훈령 제68호(한글전용)가 제정되었다.
정부는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을 1948년 10월 9일에 제정하고 그의 실천을 위하여 정부공문서규정(대통령령 제2,056호 1965년 2월24일)으로 공용문서는 한글로 쓰도록 하고 있으나 이의 실천이 잘 되지 않고 있으므로 다음 사항을 지시하니 한글 사용에 철저를 기하도록 할 것.
1. 한글의 전용
가. 공문서 작성에 있어서 이미 한글만으로 표기하던 것을 더욱 철저히 지키고 공문서의 별지나 부록, 자료등 부속서류도 한글로 쓰도록 한다.
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단서에 불구하고 정부가 발행하는 모든 공문서 기타 표현물(표어, 포스타, 현수막, 아취 및 간판, 정부간행물, 신문 및 잡지 등에 게재하는 공고등 광고문 등)을 전부 한글로 쓴다. 다만, 한자가 아니면 뜻의 전달이 어려운 것은 괄호 안에 상용한자의 범위 안에서 한자를 표기해도 무방하며 1970년 1월 1일부터는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한다.
다. 법규문서도 전항에 따른다.(정부공문서 규정 제7조 1항 단서는 폐지)
2. 어휘 및 표기방법
가. 문장의 어휘도 우리말로 바르게 쓴다.
나. 각급 기관장은 한자로 쓴 기술 및 행정용어를 우선 자체 내에서 통일 사용하도록 한다.
다.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분기마다 통일 사용토록 한 술어를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며 문교부장관은 법률술어, 과학술어, 학술술어, 및 행정술어등 기능별로 분류 관계 각 부처와 협의하여 전 기관이 같은 어휘와 표기방법을 쓰도록 한다.
3. 서식정비
가. 총무처장관은 1968년 12월 중으로 서식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에서 제정하는 모든 서식을 한글로 표기 할 수 있게 고친다.
나. 성명은 한글로 표기하되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 할 수 있도록 한다.
다. 서식 각 난에는 난번호를 부여하여 전자처리기계나, 테레 타이프, 테렉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한다.
4. 민원서류
가. 각급 행정안내실에서는 민원서류를 대필 작성하여 줄 때 한글로 써 주도록 하고 직접 써서 가져오는 경우에는 한글로 쓰도록 지도 계몽하여 1970년 1월 1일부터는 완전 한글로 쓰도록 한다.
5. 감독확인
가. 각급 기관장은 소속직원이 사무처리과정에서 한글을 전용하도록 지도 감독하고 여러 가지 감사 때는 이의 실천상태를 확인하도록 감사 검검표 착안점에 추가한다.
국무총리훈령 제68호를 실천하기 위하여 행정부 내부에서 다음과 같은 계획이 수립되었다. 1969년 5월 1일부터 정부가 마련하는 모든 법령의 제정안, 개정안은 한글로 표기하고 이미 국한문혼용으로 표기된 부령(部令)과 대통령령은 1970년 12월 31일까지 한글화작업을 완료하며 법률의 한글화도 시도한다. 이 계획은 어느 정도 실천되었을까?
정부는 계획대로 1969년 8월 31일까지 총리령, 부령의 한글화, 1970년 12월 31일까지 대통령령의 한글화작업을 완료하였다. 이 기간에 한글화작업이 완료된 법령의 수는 총리령, 부령 748건, 대통령령 1024건이었다. 정부가 마련하는 법률의 제정안, 개정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부는 계획대로 정부가 마련하는 법률의 제정안, 개정안을 한글로 표기하여 국회에 제안하였으나 그 중 극히 일부만이 그대로 한글로 통과되어 공포되고 대부분은 국회에서 이를 한자로 바꾸어 통과시켰으며 국회제안 법률안은 처음부터 국한문혼용의 방식으로 제안되어 통과되었다.
3. 5.16 군사정권기 사법부의 공문서와 판결문
'정부공문서규정'은 행정기관에 대하여만 구속력이 있는 행정명령이었으므로 이론상 '정부공문서규정'은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를 구속할 수 없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기에 국회는 군사정권에 협조하는 공화당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었고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대통령에 의하여 행사되었으므로 사법부가 행정부의 한글전용시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법원이 행정부의 한글전용시책에 부합하는 규칙을 제정할 것이라는 방침이 알려지자 대한변호사협회는 1961년 12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법원장에게 한글전용조치 철회를 건의하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일체의 법령이 국한문 혼용이고 법률술어는 한자로만 되어 있어 이를 한글로 풀어 쓸 수 없으며, 또한 음역(音譯)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필요할 때 괄호 안에 한자를 삽입한다면 거의 한자를 삽입하는 결과가 되어 국문과 한자를 이중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생겨 문서가 장황해지며, 법원과 검찰의 문서는 일반 행정관청의 문서와는 달라 복잡다기하고 내용이 방대하여 한글을 전용하면 글자 한 자를 오해 함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한글전용을 단행하면 시간과 정력의 소모를 배가하여 능률을 저해시켜 막대한 사무적체를 초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1961. 12. 29. 다음과 같은 법원공문서규칙(1961.12.29. 대법원규칙 제90호)을 제정하여 행정부의 한글전용시책에 부응하였다.
제2조 (공문서의 정의) 법원공문서(이하 문서라 한다)라 함은 법원에서 재판사무에 관하여 사용되는 문서와 행정사무에 관하여 사용되는 문서를 말한다.
제3조 (문서형식) 모든 문서의 표준말인 한글 국어체로 간명하게 기술하고 정자로서 가로 쓰되 띄어 쓸 것이며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것은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 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내용의 법원공문서규칙이 1961. 12. 29. 이후 즉시 철저히 시행된 것 같지는 않다. 법원의 공문서와 판결문의 한글전용원칙이 철저히 시행된 것은 1963년 이후의 일이다.
4. 1990년대의 '법률문장의 구어체(한국어)화' 운동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법률문장의 구어체(한국어)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쉽게 말하자면 '법령 한글화 운동의 심화운동'이다. 법령의 한글표기는 가독성을 높였지만 '정확한 의미의 전달'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직도 해결하여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기본방향은 (1) 민주화, (2) 평이화, (3) 명확화, (4) 표준화의 4가지였다. (1) 민주화란 권위주의적인 술어나 국민감정, 시대에 맞지 않는 술어를 바꾸는 작업(예; 出頭→출석)이고, (2) 평이화란 중등교육(의무교육)을 받은 정도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술어로 바꾸는 작업[예; 溝渠→도랑(순한국어)]이다. (3) 명확화란 너무 간단하여 알기 어려운 술어는 글자수가 늘어나더라도 명확하게 풀어 쓰는 작업[예; 公利→공공의 이익]이고, (4) 표준화란 술어나 문장표현을 '한글 맞춤법 표준화 규정'에 따라 표기하는 작업이다.
5. '법률 한글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안'
1980년대 부터 한글로 표기된 법률이 조금씩 늘어나다가 2000년 부터는 연평균 약 30건 씩 한글로 표기된 법률이 신규제정, 혹은 전문개정의 형식으로 추가되고 있다. '법률 한글표기 사업'은 '조국근대화'를 표어로 내세운 1960-1970년대의 군사정부 시절부터 추진된 숙원사업이었고, '참여 민주주의'의 확산을 구호로 내세우며 2002년에 출범한 '참여정부' 시기의 여당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 시에 정부의 '법률 한글표기 사업'을 강력히 종용하고 있어 '법률 한글화 사업'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2000년까지 정부는 신규제정하거나 전문개정하는 법률이 있을 때만 한글화를 추진하였지만 2001년에는 일부개정하는 법률도 한글화를 추진하기로 확대하였으며 2002년에는 모든 법률을 전면적으로 한글화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마련된 것이 '법률 한글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안'(이하 '특조법안'으로 약칭함)이다.
'특조법안'은 2003. 8. 29.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제대로 심사되지 못하고 제16대 국회 임기만료에 따라 자동폐기 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의 '특조법안'은 제17대 국회에 다시 정부제출법안으로 제출되어 2005년 12월 현재 국회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특조법안'은 이미 한글화되어 있는 법률(230여개)과 '민법 등 중장기적 연구를 거쳐 점진적으로 한글화를 추진할 일부 법률'을 제외한 모든 법률(2004년 현재 759개 법률)을 전면적으로 한글화하되, 한글화로 인하여 뜻의 전달에 어려움이 있거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혼란의 우려가 있는 술어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 하는 조치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Ⅳ. '동아 지역공동체'의 현존에 대한 한국의 인식
2004년 6월 한국정부는 국어정책의 수립시행,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 국어의 국외 보급 및 국어정보화를 추진하고 공공기관의 공문서의 한글작성을 의무화시키는 내용의 '국어기본법안'과 '특조법안'을 정부제출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자 2004년 7월 15일 전국한자교육추진연합회(이하 '연합회'로 약칭함)는 '국어기본법안과 특조법안 국회통과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연합회는 '국어기본법은 한글전용을 획책하는 음모', '법률한글화는 우민화의 조장', '국어기본법안과 특조법안이 통과되면 삼류국으로 전락', '한국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환경으로 보아 숙명적으로 주변의 한자문화권과 왕래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 '법률술어는 95% 이상이 한자로 되어 있는 한국어', '한자는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라고 주장하였다. 이 대회에는 조순(민족문화추진회 회장, 전 부총리), 박춘호(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 이영수(변호사, 전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 박원홍(전국회의원), 진태하(연합회 상임위원장) 등이 특별연사로 참석하였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2004년 11월 26일 제12차 상임위원회를 열어 '국어기본법안에 관한 공청회'를 진행하였다. 공청회에서는 5명의 진술인이 진술하였는데 3인은 찬성진술, 2인은 반대진술을 하였다. '국어기본법안'은 약간 수정된 채 2004. 12. 29.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특조법안은 2005년 정기국회의 심의로 연기되었다.
국어기본법이 2005년 7월부터 시행되었으므로 향후에 신규제정되거나 개정되는 한국의 모든 법률조항은 한글로 표기되어야 한다. 국어기본법이 사적 생활관계에서 한자사용을 금지하거나 억제하려는 법률은 아니지만 법률의 원문이 한글로 표기되면 그 반사적 효과로서 사적 생활관계에서의 한자사용도 점차 위축될 것이 예상되므로 연합회가 '국어기본법은 한글전용을 획책하는 음모', '법률한글화는 우민화(愚民化)의 조장'이라고 개탄하는 것이 전혀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연합회'의 주장이 단순한 '수사적(修辭的)'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물적인 기반'이 있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2003년 12월 30일 한국의 경제 5단체는 '국가경쟁력 제고'와 '한․중․일 경제권 결속의 근본적인 대책'으로 77%의 대기업이 '입사 시 한자시험'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한자능력검정시험에 해마다 80만 명 이상이 응시하고 있고 향후 그 수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비록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연합회'와 그 취지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은 수시로 '한자교육진흥법안' 을 국회에 제출 하고 있다. 또 법률 한글화 사업을 추진하는 측도 한자교육 강화 취지에 굳이 반대하지는 아니한다.
필자는 한국의 법무부, 대법원에서 개최되는 법률자문회의에 자주 참여하는데 그럴 때마다 '동아사국(東亞四國,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법제는 어떠한가' 하는 점에 관한 관심이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사법개혁과 법학전문대학원 설립문제'가 중요한 현안문제인데 '동아사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한 관심대상이다.
Ⅴ. '세계화'의 심화와 '한글․한국어의 위기'
한국의 '국어기본법의 제정'과 '법률한글표기원칙의 법제화' 운동은 '한국민족주의'(Modern Korean Nationalism)의 심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국민족주의의 심화 현상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불어 닥치고 있는 세계화․지역화 현상이다. 1997년 말에 한국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와 뒤 이은 IMF 관리체제에의 편입 이후에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영어공영화론'은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수시로 제기되는 화두가 되었다. 한국인들이 영어교육에 쏟아 붇는 자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한다. 영어와 영어 캐릭터는 점점 더 한국인의 언어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부르는 노래 말에 영어가 포함되지 아니하면 이상할 정도이다.
따라서 한국의 '국어기본법의 제정'과 '법률한글표기원칙의 법제화' 운동은 '한국민족주의의 심화'현상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기 보다는 '세계화․지역화'의 진척에 따라 황폐화되고 있는 '한국어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기방어 현상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런 관찰이다. 21세기 한국에서 '한글과 한자'는 모두 '세계화'의 심화와 '영어의 강세' 때문에 함께 '쇠퇴의 위기'에 놓인 '공동운명체 관계'에 있다.
Ⅵ. 지역화의 진전과 한자교육강화론: 달려오는 동아시아 공동체
지난 50년 동안 한국의 정계에서 일관되게 진행된 '법령 한글화 사업'에 밀려 한국정부의 한자교육 강화정책은 현재 수면 아래에 잠재해 있다. '동아시아 지역공동체'(East Asian Community)의 현존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동아사국'의 교역과 교류가 늘어날수록 한자교육강화론은 수면 위로 부상하여 현실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한국에서 '한글과 한자'가 활성화될 것인가 여부문제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의 활성화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는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다. 20세기에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미국→일본→중국의 순이었다. 21세기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중국→미국→일본의 순으로 바뀌었다. 머지 않아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중국→일본→미국의 순으로 바뀔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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