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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추억 ................................. 1
어머니의 택배 ................................. 3
시조 강이식 .................................... 4
문량공 강희맹 ................................. 7
박사공 26세 .................................... 8
장성군 남면 ................................... 10
서석동 카도집 ................................ 16
무등산 종소리 ................................ 19
인연 .............................................. 22
옥수수 빵 ....................................... 24
아버지의 추억
아버지는 누우신 채로 빛고을 광주를 한바퀴 돌고 계신다.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조선대학교 아래 서석동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가셔서 눕기 전까지 열성으로 다니시던 두암동 강씨 종친회를 거쳐 무등산 아래 뚫린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따라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아야, 운전기사님 더러 저기 각화 저수지 밑에 잠시 세워달라고 하렴."
"이 겨울에 날씨도 추운디 저수지 밑에서 노제를 또 지내시게요?"
"아니다. 잠깐만 쉬었다 가자."
아버지는 해방 될 무렵 전남도청 농정과에 근무하고 계셨고 각화 저수지를 만들면서 현장 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시공을 맏았던 건설회사 사장이 어머니의 아버지요 아버지의 장인이요
나의 외할아버지시다. 그러니까 장성 남면 분향리의 아버지가 대전공업전문대를 졸업하고 도청에서 공무원을 하실 때 이 저수지로 인하여 이웃한 담양 수북면 대치리의 외할아버지와 인연이 돼서 두 분이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감. 각화저수지 막는다고 기운이 펄펄하던 때가 엊그젠데 이제 먼 길 가시는 구랴.“
어머니는 저수지 봇물 터지듯 울음을 터뜨리며 한없이 눈물을 보이신다. 반년을 병상에서 투병하시던 아버지는 겨울의 한가운데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4형제는 말없이 눈시울만 적시고 있다. 다시 못 올 아버님이 먼 길 떠나시던 우리 인생에 가장 슬픈 날.
"아야, 여기 활터도 잠시 쉬었다 가자."
아버지가 은퇴 후 화살을 쏘셨던 운암 나들목의 중외공원 동쪽 국궁장에 이르자 어머니는 눈물을 훔쳐내며 아버지를 부르신다.
"영감, 화살이 어쩐지 잘 맞아 화두의 체면이 섰다고 자랑할 때가 언젠디....."
1929년 음력 5월 11일 일제시대 때 태어나신 아버지는 1999년 12월 10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 무등산을 바라보면 누워 계시는 유택은 호남고속도로 광주 톨게이트 오른쪽 마을 앞산으로 태어나신 곳이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며 평생 그곳의 논과 밭이 우리 가족의 터전이 되었을 터다.
아버지는 전남도청에서 토목 전문가로 입사한 이래 전라남도 곳곳의 저수지를 기초하고 닦다가 국가에서 만든 조합이나 공사로 자리를 옮기셨으니 뚝 막는 나랏일에 일생을 보내셨다. 이 일이 당시로는 막중해 정부는 농지개량조합 수리조합연합회 농업진흥공사 농업기반공사 농어촌공사로 기구를 독립시켜 불려 나갔다.
한마디로 저수지와 농지정리 사업 간척 개간 등 농민들이 물 걱정 없이 농사짓는 기반 사업을 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셨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전라남도내 저수지를 막는 곳이라면 섬이든 산골이든 어디든 갔다. 때론 공사 기한에 쫒기거나 해서 한달의 절반이 출장을 가실 때도 있었고, 아예 현장 주재 공사감독소장으로 집을 비우시기도 했다.
때문인지 어머니는 동네에서 사납기로 유명했다. 사형제를 거의 혼자 기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보다 훨씬 더 엄하게 우리를 대하셨다. 그래도 네 명의 아들들은 늘 사고뭉치였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밤새도록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거나 밤새 손들고 무릎 꿇고 반성하기 곳간에 갇혀 참회하기 등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강진군 작천면 저수지로 따라 나섰다. 차가 그렇게 타 보고 싶었고 친구들에게 자랑 하고 싶어서였다. 길은 멀었고, 울퉁불퉁했다. 지프차가 비포장도로에서 널 뛸 때마다 엉덩이도 아프고 숨도 끊어질 것 같았다.
"아부지 아직 멀었어요?"
"궁둥이가 아프냐? 조금만 참아라.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후론 아버지 따라 나선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같이 포장이 잘 돼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공직에서 물러나신 아버지는 그 때부터는 손자 손주 9명을 데리고 영광부터 경상도 진주까지 가시기도 했다. 후손들의 조상 사란하는 마음을 익혀주도록...
"뿌리를 알아야하는 거라. 뿌리를..."
"너희 선조는 이곳 진주에서 태어나신 '이'자 '식'자 할아버지니라. 그래서 여기 진주에 사당을 짓고 그 위업을 기린단다."
"중시조는 강감찬 장군 박사공파 강희안 강항 할아버지 영광에서 너희 6대조 할아버지가 우리 고향으로 옮겨오셨다."
이렇게 귀에 뿌리가 박히도록 뿌리 찾기에 열렬하셨던 할아버지가 곁을 떠난 지 9년. 우리는 커버린 신세대 손자 손녀 9명의 요구에 따라 유세차 모년모일로 시작되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알기 쉽게 우리말 제사를 지낸다.
"15년 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우리 곁을 떠나신 할아버지. 손자 중 종손은 전경으로 나주에서 근무하다 요새는 만날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반대나 새만금 간척지 반대 시위 막으러 가고 전방에서 근무하던 진짜 군인 손자는 얼마 전 제대해 복학하고 그 밑에 가짜군인 공익도 엊그제 해제되고... 모두들 할아버지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술과 음식을 정성껏 마련했사오니 많이 드십시오."
어머니의 택배
"택배요. 광주에서 온건데 엄청 무겁네요."
끙끙 꿀배박스 하나를 내려놓는 젊은이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친다. 광주에서 온 물건은 보나마나 김치하고 생선 몇마리, 그리고 참게... 어머니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시며 잊을만하면 이렇게 아들에게 다가온다. 손자들은 내가 시킨데로 전화해서
"할머니 택배 잘 받았어요. 인자 그만 보내시지요."
"내가 인자 늙어서 니그들한테 김치를 언제 못보내게 될 줄 모르니..."
"할머니, 우리가 되려 할머니께 김치를 담궈 보내드려야하는데..."
"그나저나 건강이 제일이니 아범 어멈 그리고 니들 밥 잘먹고 공부 잘해라."
이제 지들도 군대 제대하고 남은 학년 공부 마치면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 어느덧 광주에서 올라오는 김치와 반찬이 많은 부담이 되는가 싶다. 나도 저녁에 퇴근해서 광주로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만난다.
"또 보내셨어요? 어머니나 맛있게 드시지 그라요."
"건강은 어떠냐? 고게 제일이다. 술 좀 작작 마시고 담배는 끊었냐?"
"불황이라 하는 일도 시원찮코 그랴요. 돈 많이 벌어 엄니에게 팡팡 송금해줘야 내맘이 좀 편할텐데..."
"내 걱정일랑 말아라. 나사 노인대학이고 노래대학이고 남동성당이고 열심히 잘 나다니니까..."
어머니는 무등산 아래서 인생의 대부분을 지냈다. 그래서 서석동 유지요 남동 성당의 발빠른 정보망과 노인대학의 노래팀 등산팀. 나보다 훨씬 바쁘시다. 그게 자랑이고 안심이고 며칠 연락이 없다 싶으시면 그때는 멀리 태백산을 가셨든지 아니면 제주도 멀리 일본 중국으로 여행을 가셨던지.. 그리고는 김치 떨어질때가 되면 어김없이 택배가 날라드는 것이다.
효도란 부모님의 뜻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들었다. 한편 생각하면 엄청난 불효요, 그래도 어머니가 좋다하시면 나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어머님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는 중년의 어리광이가 되야하는 나와 식구들이다.
아들 넷을 낳아 그중 하나를 서울로 보내고 못네 곁에 두지 못한 아쉬움이 있나보다.
"늬그 형이나 동생네들은 맨날 와서 먹고가는데 그럴때마다 니가 눈에 밟혀야..."
그래서 이제는 어머님의 고집을 꺽으려 하지도 않는다.
"아무튼 겁나게 미안하고 고마워분져라. 맛있게 잘 먹을께요. 참게 그거 내년에도 또 보내주쇼."
예로부터 고집하면 안강최라고 했던가 민강최라고 했던가? 나는 강씨고 어머니가 최씨니 강한 고집 유전자가 그대로 나에게 전수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고집은 꺽을 수가 없고 그냥 그런 척 오늘도 남쪽 하늘만 바라본다.
"최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난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최씨 앉은 자리엔 김치나고 굴비나고 참게난다."
시조 강이식
우리나라 모든 강씨의 시조는 고구려 때 용장 강이식이다. 고구려 영양왕 8년(서기 597년) 중국 수나라는 고구려에 국서를 보낸다.
“상국인 수나라에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방자한 내용이었다.
이 때 강이식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 들였고 강이식은 정예병력 5만 명으로 수나라 군사 30만 명을 요동 땅에서 격퇴한다. 그는 또 살수대첩 때 을지문덕과 함께 수양제의 1백만 대군을 무찌른다.
강이식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 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진주강씨는 후대에서도 숱한 장군을 배출했다.
‘해동의 명장’이라 일컫는 구주대첩의 강감찬 장군과 자주대첩의 강민첨 장군이 대표적 인물이다.
강희안은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그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 불운한 무장 강홍립도 진주강씨의 후손이다. 강세황은 정조 때 시서화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강항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공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진주강씨는 해방 이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강영훈(전 국무총리), 강인택(전 체신부장관), 강성태(전 상공부장관), 강서룡(전 교통부장관), 강경식(전 재무부장관) 등은 관계의 인물이다.
강신호(동아제약회장), 강정준(백화양조회장), 강성진(삼보증권사장), 강구진(오리엔트시계사장), 강계중(광일상사사장, 재일거류민단 상임고문), 강진구(삼성전자사장), 강원명(태평양화학고문), 강남형(해태제과사장), 강석진(전 동명목재 회장) 등은 재계의 인물이다.
법조계에는 강우영(전 대법원판사, 변호사), 강안희(전 대법원판사, 변호사), 강용구(변호사), 강달수(변호사) 등이 있다.
국회의원은 전 현직을 포함하여 40여 명에 이른다. 강신명 목사(숭전대 총장), 강원룡(경동교회 명예목사), 강석주 스님(전 조계종총무원장, 승가대학원장)은 종교계에 우뚝 서 인물들이다.
군에는 강기천(전 해병대사령관), 강문봉(전 육군중장) 등이 있다. 한국고전무용의 독보적인 존재 강선영, 탤런트 강부자, 영화감독 강대진, 아동문학가 강소천 등도 후손이다.
학계에는 강구식(서울대법대 교수), 강문주(경제학박사, 중앙대부총장), 강병근(정치학박사, 연세대 법정대학원장), 강주진(전 국회도서관장), 강병규(정치학박사, 한성대학장), 강두식(서울대교수, 독문학) 등이 있다.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강재구 소령도 후손이다.
집성촌은 경남 진주시 일원, 경남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경남 남해군 이동면 화계리, 경북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경북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 전북 순창군 팔덕면 용산리, 전남 영광군 불갑저수지 일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일원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907명. 문과 223명, 무과 144명, 사마시 512명, 역과 16명, 의과 8명, 음양과 3명, 주학 1명 등이다.
서울 189,210명, 부산 98,420명, 대구 39,152명, 인천 44,335명, 광주 29,029명, 대전 29,172명, 울산 20,480명, 경기 163,495명, 강원 19,989명, 충북 23,170명, 충남 35,872명, 전북 45,552명, 전남 48,970명, 경북 48,172명, 경남 104,789명, 제주 26,903명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966,710명.
문량공 강희맹
산을 찾아 인천을 자주 다니다 시흥 안산도 시나브로 눈뜨게 되었을 무렵.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그린웨이, 즉 자전거 도로를 따라 보통천을 거슬러 물왕저수지까지 가던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인 강희맹 선생이 명나라에서 연꽃씨를 가져와 심은 뒤 널리 퍼트렸다는 관곡지 인근 연성동 억방죽들 연꽃테마파크를 둘러볼 수 있었다.
해가 서쪽 바다로 넘어가기 시작해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워, 다다음 주말 다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다. 강태공들로 북적이는 물왕저수지를 휙 돌아 물왕 교차로에서 하천변을 따라 내려가다, 하직골방죽들을 가로질러 관곡지로 향하던 길에 아파트 숲에 가려진 강희맹 선생의 묘와 신도비를 찾아볼 수 있다. 관곡지 주변에 자리한 연꽃재배단지에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많다.
진주강씨 문량공 강희맹 선생(1424-1483)은 조선 초기의 뛰어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세종 29년(1477) 별시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 중추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성종 13년(1483)에는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하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선생은 문장이 당대 으뜸이고 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박학다식하며 공정한 정치를 편다는 평을 받았다. 유교경전과 역사, 중요한 의례에 밝아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조실록>,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의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또한 그가 그린 그림이라 알려진 독조도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52세 때 관직에서 물러난 선생은 장인 안승효가 준 약 1만㎡의 땅을 근거로 시흥의 옛지명 금양에 와서 살면서 <금양잡록>이란 농서와 <사숙재집>, <존담해이> 등을 썼다.
묘는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이 있다. 가파른 묘역 왼쪽 아래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이 글씨를 썼다. 시흥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강희맹선생묘와 신도비 묘역에는 가족, 후손들의 묘와 한글창제 도움비, 문량공 사우, 연성제가 자리하고 있다.
비탈진 강희맹 선생 묘역을 둘러보고 택지개발로 잘려나간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목을 축인 뒤, 비를 머금고 쿵쿵거리며 몰려오는 먹구름을 올려다보니 참 못난 정치판을 보는 듯 했다. 강희맹 선생처럼 땅과 농업의 가치를 알고, 공명정대하게 일하며 공부하는 그런 괜찮은 정치인이나 공직사회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되묻게 된다. 무식하고 상식도 없는 뻔뻔한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즉시 자진 퇴출해야 한다.
박사공 26세
아무튼 운명은 재천이라서 팔자가 그래서 용감한 진주 강씨로 태어나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었이었을까? 뭐니뭐니해도 계파를 따지는 일이었다. 엄청 쉬운 일인데 그게 그렇게 쉽사리 입에서 우물우물 하고 밖으로 뛰처 나오질 못했다. 하기사 맨날 써먹는게 아니라서 그렇긴하지.
1 박사공(계용)
2 내급사공(인문)
3 어사공(사첨)
4 진원군(창귀)
5 문경공(군보)
6 공목공(시) 7 통정공(회백)
8 대민공(석덕) 9 문량공(희맹) 10 사평공(학손)
11 별제공(형수)
12 부호군(오복)
13 극효
14 사
15 시면
16 석주
17 문저
18 왈용
19 주상
20 봉환
21 강재현
22 강천회(1804~67)
23 강영주(1829~86)
24 정수(1858~1942)
여기서 1세 박사공하고 7세 통정공 9세 문량공 10세 사평공 3분 정도만 알면 된다. 물어보는 사람도 헷갈리는게 족보다. 첫 번째 의문은 강이식 장군이 시조인데 왜 1세가 박사공이냐? 하는 문제다. 족보가 박사공부터 시작된것을 보니 그때야 비문이 보이고 무덤이 발견되고 정리가 되었나보다
7세에 오면 크게 두 집안이 갈라진다. 통계공 통정공. 전라도 사는 이들이여 대부분 통정공의 후예들이니라. 그리고 9세 문량공, 10세 사평공 정도 알고 14세에 우리의 강항 선생님을 올려놓으면 된다.
우리대에 오면 원자돌림이 25세, 성자 26세, 구자 27세, 병자 28세.
재미있는 일화 두가지를 소개한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강시구였다. 나는 성자 돌림. 나중에 우리 애들 이름에 구자 들어가고 보니 친구라도 기분이 묘하다.
또 한 친구는 두헌이인데 애써 두를 구로 할라고 하다 큰코 다친다. 대자 돌림이란다. 이 친구는 영광에 큰 선산이 있다. 아마 종손 집안인 듯. 시구네는 영광에서 송정리로 진출했고, 우리는 더 동진하여 장성군 남면 분향리까지 왔던 것이다.
내가 검찰 출입하는 kbs 기자할 때 검사장이 강용구 검사장이었다. 나보다 30세는 더 연로한데 항렬이 문제였다. 강검사장 나를 좀 보자고 고라더니 차 한 잔 대접하면서 말한다.
“항렬로는 높으시고 기자 고시 하셨으니 조카 좀 많이 도와주시죠. 공석에서는 이해 하십쇼”
장성군 남면 호남고속도로 광주 톨게이트. 서울에서 오자면 톨게이트 바로 오른쪽이 우리를 기른 기름진 쌀들과 선산이 있는 장성군 남면 분향리 선산이요 논밭이요 아버지의 고향이다 다만 우리는 광주시 서석동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장성에 친구가 없고 지역 기반이 없어 탈이라면 탈이었다. 서울에 와서 선배가 장성햐우회에 좀 나오라고 술 마실때마다 외쳤지만 나가지 않았다. 장성군 남면 면적 28.7㎢ (군전체의 5.9%) 경지 : 18.1㎢ (63%) - 답 11.5(40%), 전 6.6 (23%) ※ 호당 경지면적 : 1.2㏊ 임야 : 27.512㎢(61%) 기타 : 10.6㎢(37%) - 임야 7.5(26%), 기타 3.1 (11%)
가구 및 인구 1,779가구 3,792명(남 1,948 , 여 1,844) 마을별 인구현황 마 을 명 자 연 마 을 세 대 수 세 대 원 수 계
44개반
1,779
3,792 분향1
분향, 매향
137
317 분향2
죽분
123
275 분향3
시목, 마흥
110
237 분향4
중앙동
100
153 녹진1
마산, 신흥
83
171 녹진2
녹진
61
132 덕성1
회룡, 신안
47
93 덕성2
자은, 풍산
64
148 덕성3
덕성, 연산
64
139 마령1
서촌, 내마
50
105 마령2
외마, 선창, 선평
52
123 마령3
백운, 시정
44
102 평산1
장평
46
96 평산2
신평, 장산, 평산
88
204 행정1
승가, 행정
80
192 행정2
검정
40
70 월정1
불정, 세터
66
126 월정2
월계, 우치, 신아산
53
165 월정3
월산
53
124 삼태1
서태
77
129 삼태2
중태
81
155
마 을 명 자 연 마 을 세 대 수 세 대 원 수 삼태3
동태
54
126 월곡1
월곡, 금리
74
151 월곡2
덕촌, 안평
78
155 월곡3
신촌, 금월
54
104 행정구역 법정9개리, 운영25개리, 44개자연부락(44개반) 공무원 13명 (일반직) 산업구조 1차 95.3%, 2차 0.1%, 3차 4.6 학 교 2개교 170명 (초 100, 중 70) 의료시설 2개소(보건지소1개소, 진료소1개소, 약국1개소) 종교시설 8개소 (기독교6, 사찰2) 특산품 황토단감, 청양고추,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도로 및 하천 도 로 : 16.5㎞(고속도 4.2, 국도 3.8, 군도 8.5) 하 천 : 9.3㎞(준용 9.3) 농특산물
방울 토마토 토마토는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열매의 성분은 95%가 수분이며 단백질 0.7%, 지방 0.1%, 탄수화물 3.3%셀룰로오스 0.4%, 회분 0.5%를 함유한다. 단맛의 성분은 과당과 포도당이고 신맛의 주성분은 시트르산과 말산이다. 토마토는 요리의 곁들임 및 샐러드, 수프, 스튜, 미트소스 등에 사용된다. 토마토 특유의 풋내는 푸른잎 알코올이라는 성분인데, 이것은 비린내를 없애는 작용을 한다. 작목반 대표 - 남록영농조합법인 백호 (010-4617-3791) 단감 남면 지역단감은 일교차가 심하고 타지역에 비해 씨알이 굵고 당도와 육질이 뛰어나다. 97년 전국우수과실품평회에서 단감부분 대상을 수상 작목반 대표 - 자풍단감작목반 백종만(011-637-3473) 매운고추 밤과 낮의 온도차이가 커서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 성분과 미네랄을 비롯한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밝은 태양과 맑은 공기 아래에서 재배하여 고추의 매운맛이 강하며 빛깔이 고와서 소비자가 선호하고 있다. 작목반 대표 - 평산시설 원예작목반 김명식(017-601-2912) - 황토남면고추작목반 임익철(011-634-4177) 파프리카 파프리카(paprik), 혹은 단고추(sweet pepper), 종고추(bell pepper)라고도 불리우는 얼핏 피망과 비슷한 모양의 유럽산 고추로서 피망보다 크기가 크고 과육이 두터우며, 독특하고 싱그러운 향과
단맛(당도7~11)이 특징이다. 빨강, 노랑, 오렌지, 보라색, 녹색등의 다양한 색깔이 있으며, 특히 오렌지의 4배에 가까운 비타민 C를 함유하고 있다. 샐러드용으로 조리하기에 편하고 한입에 먹을 수 있게 잘라서 마요네즈 등을 찍어 먹으면 맛과 향을 느끼는데 아주 좋다.작용을 한다. 문의처 - 남면 분향리 74-3 김경희(392-3102) 유기농 야채 "깨끗하고 정직한" 세상을 꿈꾸며 독성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환경친화적인 농업으로 20~30대 젊은 농군 10명과 전국 10여개 유기농업 작목반, 그리고 약 1만 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모든 먹을거리를 반화학ㆍ친환경적으로 생산하고 있음. 현재 주말농장, 청소년 봉사활동 체험장과 유기농업 교육장으로 연중 개방되어 있다. 홈페이지 : http://www.62farm.co.kr 문의처 - 학사유기영농조합법인 : 남면 분향리 1113-2 강용(392-7698) 마을유래 분향리(芬香里) 분향리는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분리와 궁산리, 병계리, 내동면의 영동, 시목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분향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기존마을인 궁산리와 병계리ㆍ영동은 없어지고 새로 분향에서 매향ㆍ시목에서 마흥ㆍ죽분에서 중앙이 각각 분리하였다. 현 행정이동으로 분향 1리는 분향ㆍ매향, 분향 2리는 죽분, 분향 3리는 시목ㆍ마흥 분향4리는 중앙으로 하고 있다. 녹진리(鹿津里) 녹진리는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 녹진동(ㆍ眞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산리 도림리와내동면의 영동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녹진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기존마을인 도림리는 녹진 서북쪽에있었는데 없어지고, 신흥마을은 본래 마산이었는데 1958년
분리되면서 신흥이라 하였다. 현 행정이동으로 녹진 1리는 마산ㆍ신흥, 녹진 2리는 녹진으로 하고 있다. 덕성리(德星里)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 둔덕에 있으므로 덕성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회룡리, 신안리, 영산리, 자은리, 풍산리 지역을 병합하여 덕성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된《호구총수》에는 덕성 리, 자은곡리, 회룡동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안리와 영산리는 새로 생기고 풍산리는 자은곡리에서 분리되었 다. 영산리는 일제 말에 연산리로 바뀌고, 자은과 풍산은 합하여 자풍이라 한다. 현 행정이동은 덕성1리는 회룡ㆍ신안이고, 덕성 2리는 자은ㆍ풍산, 덕성 3리는 덕성ㆍ연산이다. 마령리(馬嶺里) 본래 남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촌리ㆍ내마리ㆍ외마리ㆍ선창리ㆍ선평리ㆍ백운리ㆍ반계리ㆍ시정리 지역을 병합하여 마령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흑암리, 고마산리, 내마량리, 외마량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14년 이전에 흑암리(검바우 또는 봉하촌)는 시정 앞 잔등넘어 있었던 마을로 없어 졌고, 고마산리도 선창 앞 안산에 있었던 마을로 없어졌다. 내마량리는 내마리가 되고, 외마량리는 외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서촌리ㆍ선창리ㆍ선평리ㆍ백운리ㆍ반계리ㆍ시정리가 새로 생겼다. 그중 반계리는 1960년경에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마령 1리는 서촌ㆍ내마이고, 마령 2리는 선창ㆍ선평ㆍ외마, 마령 3리는 백운ㆍ시정이다. 평산리(平山里)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옹점리, 신평리, 장산리, 평산리를 병합하여 평산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평산촌(平山村), 신동리(新洞里), 입자점(笠子店)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입자점은 옹점리, 신동리는 신평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장산리가 새로 생겼다. 1990년대에 옹점리는 장평리로 이름을 변경하였다.1910년 면제 실시에 따라 면소재지로 1914년에 분향리로 옮겨갈 때까지남이면과 남면의 소재지가 지금의 장평마을에 있었다. 현 행정이동은 평산 1리는 장평이고, 평산 2리는 장산, 평산, 신평이다. 행정리(杏亭里)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정리, 행정리, 승가리, 송정리를 병합하여 행정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검정리(檢亭里)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행정리와승가리ㆍ송정리가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그러나 송정리는 일제말기에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행정 1리는 행정, 승가이고, 행정 2리는 검정이다. 월정리(月汀里)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정리, 월계리, 월산리, 우치리, 신아산리를 병합하여 월 정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안청리, 비아리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월정(불정)리와 우치리ㆍ궁산(월산)리ㆍ만동리ㆍ월계(구례)리가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그러나《호구총수》의 비 아리는 비아면으로 안청리는 하남면으로 편입되었다. 비아리의 일부가 신아산리로 새로 생겼다. 현 행정이동은 월정 1리는 불정, 새터이고, 월정 2리는 월계, 우치, 신아산이며, 월정 3리는 월산이다. 삼태리(三台里)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태리, 서태리, 중태리, 지촌리를 병합하여 삼태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동태리, 중태리 서태리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지촌리는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1983년에 지촌마을은 광주시 오룡동에 편입되었다. 현 행정이동은 삼태 1리는 서태이고, 삼태 2리는 중태이며, 삼태 3리는 동태이다. 월곡리(月谷里)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리, 신촌리, 덕촌리, 금리와 평촌리 일부를 병합하여월곡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신촌리, 득양산리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월곡리와 금리는 1900년대에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그리고 안평마을은 1980년대에 덕촌에서 분리되었다가2000년대에 다시 합병되었다. 현 행정이동은 월곡 1리는 월곡, 금리이고, 월곡 2리는 덕촌, 안평이며, 월곡 3리는 신촌, 금월이다.
서석동 카도집
갈라지는 모퉁이에 있는 집을 흔히 ‘카도집’이라 한다. 일본어 발음대로라면 ‘가도’가 옳은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부분 ‘카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엔 커브를 돈다는 미국 말을 생각해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 일본말 가도가 한국에 와서 카도가 된게다. 우리집은 가도집 커브집 아닌 카도집이라고 불렸다.
“누가 또 사고 쳤냐?”
동네 아낙네들이 갑자기 삼삼오오 몰려들어 물어오면 으레 정답은
“저기 아래 맨 첫 집 카도집 머시메들이요.”
그렇다. 가지 많은 나무 밞 잘 날 없었다. 그 집 앞 하수구 도랑은 비가 온지 오래되면 늘 칙칙했다. 그 하수구를 막아 녹깡을 묻고 대문을 들락거린다. 울타리는 카도 돌기전은 적색 벽돌. 그리고 카도 돈 다음에는 아직 판자 그대로였다. 거기집의 아들들만 넷은 겁나게 부잡했다.
삐그덕 대문을 들어서면 노란 부고장이 그 위에 덩그마니 혼자 앉아 있었다. 예전에는 부고가 오면 방안으로 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노란 편지는 언제나 대문위에 얹쳐있다가 어느 날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판자 밑으로 텃밭아닌 우리의 옹색한 정원에 철따라 고운 꽃들이 피고 지고를 거듭했다.
마루치고는 엄청 높고 그 결이 크지만 우아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날은 마루에 얼마나 먼지가 쌓이던지 어머니는 그 먼지를 닦아내는걸 무척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나도 가끔 할 일이 없을때 마루를 쓸고 닦아내는 범생이 되기도 했다.
“오늘따라 누가 이렇게 고운 짓을 해부렀다냐? 성진이 니가 했냐?”
“예, 나 이쁘지?”
그러나 그 시대의 불문율은 부엌일은 절대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렸다. 여자들은 밑에 동생 업고 다니기. 설거지 하기, 걸레 빨기 등 어린 시절부터 손에 일이 끊이지 않았다. 마루를 올라가기 힘들어 댓돌이 놓여있었다. 그 댓돌에 올라가 신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정돈이 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는 항상 방안의 아이들을 모두다 나오라고 해서 신발 가지런히 벗는 법을 항상 교육시키시곤 했다.
“자 봐라. 먼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오른다. 그리고 나서 신발코가 앞을 보도록 돌려놓는다. 셋째 니는 항상 보면 왼발은 여기, 오른발은 심이 센께로 저기 저쪽에 있서야.”
그리고 먼저 우리들의 방에 들어가면 책상이 멋진게 있다. 형, 장남의 책상은 지금 책상 못지 않게 크고 화려했다. 그리고 나부터는 앉은뱅이 책상이었다.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으나 책가방 내려놓고 앉은뱅이 책상에서 숙제부터 하던 그때가 그립고 다시 돌릴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욕쟁이 남자 선생님이 말 안듣는 아이들을 향하여
“야. 말썽쟁이. 도무지 말릴수가 없구나. 왜 그리 말을 안들어쳐먹는다냐. 참기름 서말만 있으면 다시 나온 구녁으로 확 쳐 넣어불놈아.”
아하 참기름 서말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원점으로 가고도 싶은 날들이다.
숙제를 마치고 안방으로 가면 아룻목에는 언제나 이불이 덮여져있고 그 안에는 때로 식지 말아라고 밥이 한 두 그릇씩 숨어있곤 했다. 지금이사 보온 밥통이 있지만서두... 그리고 윗목으로 차츰 차츰 전축이며 티비며 전화기며가 오랜 세월을 두고 하나하나 자리잡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정제, 부엌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광과 대청마루로 통하는 문이 나있었는데 대청마루에는 옷장과 단스라고 불리우는 긴 서랍 모음과 철따라 음식들이 숨겨져 있었다. 식혜며 홍시감이며 아니면 미싯가루, 올벼쌀이며가 항상 어디에 어머니가 숨겨놓는가를 잘 알아야 형제간들 모래 나 혼자 독식할 수 있었다.
부엌으로 내려서면 항상 매케한 연탄가스가 은근히 우리에게 다가 왔는데 추운날 아침이면 동네 소란이 다 연탄에서 나온다.
“저기 골목 두 번째 집 며눌아가 연탄가스로 자살을 하려다 전대병원에 실려갔다.”
“저 아래 초가집 남매가 연탄 가스에 중독됐는데 금세 싱건지 국물을 먹고 그만저만 해서 병원 신세는 면했다.”
아무튼 어머니는 그 연탄불에 밥짓고 반찬해서 우리 여섯식구가 먹고 사는데 하루 세끼 몇십년을 밥상 들어 올리느라고 고생하셨을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지금의 여자들이사 월매나 편한가. 그래서 흔히 호강에 초쳐서 그런다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부엌을 나오면 벽돌로 지은 건물 아래 한쪽이 창고, 이곳에는 항상 시골에서 올라온 쌀가마와 고구마 자루같은게 어둠속에 숨어있었다. 전기가 부족한지라 창고에는 조명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집만의 아담한 목욕탕이 있었다. 그 아래 장작을 때서 일요일에 목욕을 할라치면 온 동네에 연기에 묻혀 날아가는 검뎅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수돗물을 받아두는 큰 물통과 빨래터. 우리는 겨울이면 아침마다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씩 배급받고 얼굴을 씻었으며 치약이 없어 소금으로 양치질 하곤 했다.
간장이며 고추장이며 된장 같은 것을 담궈두는 항아리는 올망졸망 예술이었다. 어머니는 이 장독 단지를 신주 모시듯 하였다. 하기사 장 맛 좋고 어머니 솜씨좋은 내력은 모두가 여기 장독에서 나왔으리라.
무등산 종소리
그때는 얼마나 운동장이 넓었는지 학생수가 만명에 육박하다 드디어 만명을 넘었다고 소문이 난 학교였다. 전쟁이 끝나고 너도 나도 앞 다투어 태어난 아이들은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대도시의 제일 큰 학교, 전통있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매일 낮 12시면 아침반 오후반 교대를 할 겸 운동장에 모여 조회를 한다. 4학년까지는 교실 한 칸을 한 반에서 차지 할 수 없어 오전 오후로 나눴는데 교실 이어받기 혼란을 줄이기 위해 매일 낮 운동장에 모였다.
그날은 월요일인지라 체조 잠깐하고 학생 대표가 나서 이번 주 ‘우리의 목표’를 낭독하고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 이어 어린이 신문에서 주최한 그리기 대회에서 입상한 형과 누나들이 앞으로 나와 시상식을 치렀다. 그리고 지루한 운동장 모임은 막판으로 치달았다. 마지막 교가 제창에는 모든 아이들이 힘차게 씩씩하게 입맞춰 노래 했다. 반주라고는 없이 그냥 돼지 멱딴듯한 우렁찬 군대식 합창이었다.
‘
아침 해 돋아오는 무등산 아래 터전도 아름답다 우리 학교 무등산 종소리 들린적없이 역사도 아름답다 우리학교 노래하자 서석 즐거운 서석 우리들 자라나는 은혜의 집.’
그리고 나서 으레 그랬듯이 행진곡이 울려퍼지면 모두들 제자리 걸음을 하다가 절반은 교문으로 가서 파하고 절반은 교실로 가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앞이 시끄러웠다.
“김선생, 행진곡 끄고 마이크 올려요.”
대머리 교장 선생님이 이제 퇴장할 시간에 뜬금없이 다시 높은 연단에 올라와서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마이크 앞에 섰다.
“교가를 제대로 불러야지. 왜 이렇게 부르는 거지? 내가 듣기에는 무등산 종소리 ‘들린적없이’
이렇게 부르는 아이들이 많아. 무등산 종소리가 끊이지 않는 학교, ‘끊인적없이’ 이렇게 부르는 거야.”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들을 향해 또 무섭게 호통친다. “오늘부터 각 반은 교실에서 교가 제대로 부르기 연습을 해요. 무등산 종소리 끊인적없이...”
그러나 아이들은 술렁거렸다. 분명 각반에서 선생님이 가르켜 준것도 아니고 선배들이 부르면 따라 불렀는데 무등산 종소리 들린적 없이가 맞지 않아? 좀 조숙한 6학년 형과 누나들은 수군댄다.
“맞아 무등산에서 어떻게 종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냐? 무등산 종소리 한번도 들린적 없다.”
무등산을 바라보며 개구쟁이 하다가 그 품안에서 자라며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은 옷에 손수건을 걸고 다녔다. 코가 흘러내리면 얼른 손수건으로 훔쳐내라는 어머님의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무등산 종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은 교가 전문 작사 선생님의 작사를 이해 할 리 가 없었다. 당시 이 선생님은 우리나라 초 중 고 대학 교가의 80% 넘는 작사를 했다고 한다. 물론 서울에서 산 이름 강 이름만 알으켜달라고 해서...
“무등산에 눈이 세 번 오면 우리 동네도 눈이 온단다.”
오로지 이 말만 듣고 자랐다. 거기에 서석대가 있고 입석대가 있고 서석국민학교가 있고 동사무소가 있고 서석동 17-3번지가 왜 있는지? 서석교회가 있고 서석목욕탕이 있고 서석문구점이 있고 서석자전거포가 있고 아이스케키 만드는 서석옥이 있고...
그리고 형들 누나들이 다니던 이웃 광주공고와 광주여고에서도 교가를 부를라치면 무등산 어쩌고 하는 구절이 어김없이 있었다. 대머리 교장 선생님은 엄격하셨다. 6년 졸업할때까지 여러 교장 선생님을 모셨지만 이렇게 교가 똑똑이 부르라고 호령하시는 교장 선생님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그때 교가 가사를 우기며 고게 맞다고 고집하던 누나는 지금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날 국민학교 동창회가 있었는데 모처럼 모여 식사를 하고 나서 그녀는 "얘들아 우리 모였으니 교가나 부르자"고 통큰 제안을 했다. 그러자 모두 놀라 주목했다.
"아니 여지껏 교가를 안 잊고 있었단 말야? 우린 모두 잊어 아는 사람 없는데. 그럼 네가 한번 불러봐." 그러자 주인공은 의기양양하게 일어나 손뼉에 맞춰 열창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러자 모두들 하나같이 박수를 쳤다. "얘는 학교 다닐 때에 공부도 잘하더니 기억력도 참 놀랍네.“ 칭찬을 받은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내가 혼자 독창했다고..." 이 소리에 남편도 깜짝 놀랐다.
"아니 여지껏 교가를 안 잊었단말야? 어찌 불렀는지 다시 한 번 해봐요." 그러자 신난 그녀는 또 벌떡 일어나 아까와 같이 용감하게 불렀다. 그러자 할아버지 "어, 이상하네!! 우리학교 교가와 똑같네."
인연
인연
국민학교 다닐 때 사랑을 느꼈다면 그건 좀 되바라진 놈, 까진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꼬맹이도 사람이고 남자인데 왜 사랑하는 감정이 전혀 없다고, 전혀 안생긴다고 우기면 뭘하나? 중간 놀이 시간에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 가운데 그때의 여학생들이 유독 고무줄 넘기를 많이 했다. 경제적이고 자유 분방하고 운동하고 허리 날씬해지고...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이 깡총깡총 뛰며 고무줄을 넘으면 살금살금 다가가 면도날로 한쪽을 끊어 도망가고 나중에 그것도 기술이라고 두명이 한조가 되어 양옆을 동시에 끊어 버리고 도망가서 지 누나나 동생에게, 아니면 같은 반 여학생에게 장물을 넘기기도 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건 백두산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 길 짠하다 짠해 나아가자 나아가 한 발 밟기 한 발 밟기 두 발 밟기 두 발 밟기
아마도 남자애들이 별로 맘에 안들어서 대한 남아 전체를 격하시키는 가사로 바꿨음이 분명하다. 고무줄 놀이하던 여자애들의 몸 동작은 지금 김연아 같은 피겨 선수나 체조 선수 못지 않는 유연하고 가볍고 날렵했다. 어쩜 그렇게 높이 멀리 깡총깡충 잘도 뛰어 오르는지? 고무줄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어느때든 놀이가 가능했고 그들을 괴롭히는 남자 아이들을 따라가며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던 정겨운 우리들의 운동장은 비만 안오면 매일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되었다.
고무줄에 의지해 자라던 여학생들에겐 정말 즐거운 놀이였다. 친구가 없어도 혼자서 양쪽 나무에 고무줄을 걸어놓고 놀 수가 있었고 둘이어도 좋고 셋이어도 좋고 넷이어도 좋고 시간만 나면 할 수 있는 엄청난 좋은 놀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고무줄 하던 여자애들 사이로 안보이던 예쁘장한 아이가 치마를 펄럭이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녀는 눈 부셨고 다리 아래로 희끗희끗 보이는 속살이 복사꽃처럼, 벚꽃처럼 하얀 것이 이내 꼬마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옷도 지금까지 본것과도 다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세일러복. 해군들의 외출복이란다.
순간 면도날로 오려내어 고무줄을 끊고 재빨리 토끼는 계획은 취소하고 친구들에게 내 마음 들킬까봐 벤소에 오줌 쏴러 간다고 핑계대고 슬며시 그애를 빙빙 돌며 지켜본다. 친구들에게 그네들에게 안들키고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철봉에 매달려 노는 척 주위를 빙글거리며 오직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철봉에 거구로 매달려 보는 그녀는 신비로운 나라의 공주님 같고 언젠가 읽었던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던가 말던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았다.
그런데 사고는 몇일 후 오후에 나고 말았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엄청나게도 부잡한데 고놈 눈에도 그애가 띄었던 모양이다. 피는 못속인다고 보는 눈은 비슷한 모양이다. 그날은 마침 지금과 같이 온갖 꽃이 다투어 피는 봄날 이었다. 어머니는 집안 화단에서 새로 피어난 꽃들을 살피고 계셨는데 동네가 시끄럽게 좀 떨어진 이웃 여자가 한달음에 달려와 항의하는 겄이었다.
“아줌마, 댁의 아들 거 3학년 다니는 놈 있죠. 그놈이 우리 딸들을 엄청 괴롭히네요?‘
“뭘 어떻게 괴롭히는데.?”
“졸졸 딸아다니기를 하지 않나. 띄기 국자 사내라고 조르지 않나.”
“그래서요.”
“지 맘에 안든다고 아무도 안보는 줄 알고 우리집에 돌던지고 달아났어요”
“그래 사람은 안다쳤수?”
“사람이사 괜찮치만 유리가 한 장 깨졌으니 물어 내셔야 하겠네요.”
아. 다 틀렸구나. 나의 사랑은 한마디로 동생의 어이없는 훼방에 의해 바로 파토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어디 은행 높은 양반집인데 딸만 여럿인 딸 부잣집이고 교대부속이던가 어디던가 다니다가 모두 우리 학교로 전학해온 것이었다. 그래서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던 겄이고 그 집 딸들이 우리 집 아들들하고 거의 터울이 같았는데, 잘못하면 합동 결혼식 올릴뻔 했다. 고놈의 돌맹이 하나로 모든게 끝장 나버린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삼삼하게 떠오르는 세일러복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서 가슴앓이를 몇날 며칠 했다. 해군 수병들의 제복을 본떠 만든 등에 네모진 깃을 드리우고 삼각으로 접은 천을 가슴에서 묶게 만든 브라우스 하얀 웃옷. 거기에 봉긋이 솟아오른 수줍은 가슴. 흰 칼라의 세일러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항상 내 마음에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감아도 삼삼하게 그녀가 보이고 다만 헛것일 망정 그녀는 귀엽고 신선했다.
몇 년전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 경영하는 꽃가게에 놀러간 적이 있다. 동창생 녀석은 자기 마눌을 소개했다. 그건데 어디서 많이 보던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광주는 좁아서 족보를 따지면 모두가 사돈의 팔촌이다. 중얼거리며... 그날 밤 나는 비엔나 소년합창단을 티비에서 보고 그 봄날의 그녀를 상상해 냈다. 그녀의 앳된 모습과 맑은 목소리, 그리고 세일러복.
옥수수 빵
옥수수 빵
방과 후 아이들이 모두 집에 가고 없는 텅빈 교실. 우등생 다섯 남아 팔십명 받아쓰기 시험지 채점 한다.
―애들아, 허기지지? 빵 들 먹고 하려무나
―아뇨, 배 안고파요 집에 가서 먹을래요.
애들은 애오라지 한사코 그 빵을 아꼈다.
집에 가져가면 몇배 몇첩배 맛있는 걸...
―누나, 옥수수빵 가져왔어? 얼릉 줘.
가난한 시절 누나도 동생도 그 재미로 살았다. 각다분한 엄마 아빠보다도 맛 좋은 빵 가져오는 누나가 더 기다려졌다.
채점을 마치고 학교 정문을 나서려는데
―야 니네들 빵 받아왔지? 이리줘!
고아원 애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험상궂게 쬐린다. 그 가운데 반장이 체면 차리려 나서는데
―오늘만이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빵 한개를 내어주고 벌레 씹어 먹은 얼굴로 잔달음치며 집에 온다. 동생은 누나가 왠지 시무룩하여 찝질하지만 그래도 빵이 좋아 시치미 떼며 조른다. 누나는 동그마니 리쿠샤쿠 맨아래 숨겨진 쉰내나는 방을 꺼낸다.
며칠 후 험상궂은 걸태질 고아 애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그날 누나는 배터지게 먹으라며 으쓱으쓱 어깨를 올렸다.
―웬 두개씩이나 주는겨?
누나가 우윳가루 더운물에 개어주며 말했다
―아 고소하다. 얌생이 고놈 들 낼은 학교 못오겠쥐. 고아 애들 쓰레기통에 박힌 썩은 개차반 소태빵 주었지.
누나와 나는 우윳가루 개어 목 적셔가며 무등산 바라보며 흥겨운 합창을 내지른다.
―노래하자 서석 즐거운 서석 우리들 자라나는 은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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