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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학 비평] 세르반테스 소설의 존재론적 측면 ―『돈키호테』, 언어의 가설적 구조물
김태중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I. 서론: 유희로서 글쓰기 문학적 글쓰기는 현실의 모방이나 반영이라기 보다는 유희의 산물이다. 오늘날, 소설의 허구적 특성을 말하는 픽션(fiction)의 본래적 의미는 ‘만들어 내다’ 또는 ‘꾸며내다’이다. 소설의 세계는 검증 받는 실증적 세계가 아니라 언어적 가설구조이다. 즉 상상력으로 산출된 허구적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시간은 현실적 인과율이 아니라 마술적인 인과율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소설은 언어의 유희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돈키호테』이다. 물론 유희적 언어와 비현실적 이야기의 전개는 『돈키호테』이전의 고대소설과 기사소설의 주된 테마였다. 소설이 ‘현실적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의 리얼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19세기에 들어서서 근대소설, 즉 동시대인의 삶을 다루는 소설이 확립되었지만, 이전의 소설들은 시공간에 구속받지 않는 인간 상상력의 실험무대이며 가능성의 장이었던 것이다. 기사소설들이 절대적 과거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환상적이며 가상적인 이야기였다면, 이에 반해 『돈키호테』는 동시대인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과 공간(cronotopia)을 현재화(contemporaneidad)하면서 근대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18, 19세기의 결정주의는 소설의 오랜 전통이 아니며, 그럴듯함(verosimiltud, trompe l’oeil)을 추구하고 현실의 인과율을 따르는 리얼리즘소설(소설의 현실반영) 역시 근대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소설의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을 뿐이다. 바흐찐은 소설의 기원을 ‘소크라테스 대화’와 ‘메니푸스 풍자’로 보고 있다.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식의 대화법의 전통을 이어받은 메니푸스 풍자는 절대공간의 해체와 시간의 현재화로 고정된 세계를 상대화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이러한 상대적 관점은 바흐찐이 말하는 ‘카니발화된 소설’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미완의 장르인 소설은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의미창출이며 탈중심적인 사고의 장인 것이다. 이러한 탈중심적인 소설은 이른바 ‘근대소설’이 확립되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획일화되며 중심 지향적인 예술형식으로 굳어지고 만다. 이제 소설은 현실에 대한 즐거운 대안 ―즐거운 놀이로서의 글쓰기―이 아닌 현실의 검증이며 표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소설적 글쓰기가 현실에 대한 검증이기보다는 자족적인 즉 현실과는 독립적인 허구적 세계의 창조로서의 글쓰기는 18, 19세기의 과학적이며 이성 중심적인 세계관에 위축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소설적 글쓰기는 일종의 세상에 대한 놀이로 역사적 사실과 사건의 검증이 필요 없는 가설적 언어구조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소설은 기존의 가치와 현실코드를 전복시킬 수 있는 카니발적 세계관의 표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돈키호테』가 당대 현실과 기사소설에 대한 비판이며, 문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 그리고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엄격한 사상 통제와 검열이 횡행했던 그 당시 17세기 스페인에서 많은 작가들에게 이 통제와 검열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광기와 꿈으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광기와 꿈을 통해, 기존 현실의 법칙을 무시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들의 세계는 언어로 만들어진 비현실적인 가상세계였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 가상세계의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이중적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즉 외부적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이며 동시에 언어 자신의 내적 규칙에 따르는 기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모든 글쓰기는 언어의 이러한 이중적 속성으로 인해 현실에 대한 참여이며 비판인 것이다. 소설적 글쓰기는 현실의 법칙에 제약받지 않는 자유로운 민주광장인 것이다. 1.1. 자의식적 글쓰기 『돈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와 10년 후 1615년에 출판된 『재치있는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El Ingenioso Caballero Don Quijote de la Mancha)로 구성되어 있다. 1614년에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Alonso Fernández de Avellaneda)라는 필명으로 위작(僞作)인 『돈키호테』제2부가 출현하였다. 이 위작은 세르반테스로 하여금 제2부의 출판을 서두르게 만들었으며 또한 소설 내에서도 위작에 대한 논박을 포함하게끔 만든다(제2부, 59장 이후). 제1부가 현실세계에 대한 글쓰기였다면 제2부는 책에 대한 글쓰기이다. 2부에서 거론되는 1부의 오류나 문학적 이론에 대한 토의와 검증은 『돈키호테』가 가설적 언어구성물이며, 돈키호테가 ‘종이 인간’(hombre de papel)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줌으로서 소설, 『돈키호테』의 존재론적 층위를 분명하게 규정시켜 준다. 한 텍스트가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하여 고찰하는 메타(meta)적 태도는 여전히 소설이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의 리얼리티에 뿌리박고 있는 장르라는 주장하는 태도에 반해, 이야기는 단지 이야기로서만 그 자체의 리얼리티를 제시하는, 다시 말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가공물(artifice)인 것이다. 한 글쓰기는 글쓰기 전체 역사 속에서 글쓰기이며, 또한 한 텍스트 내부에서도 글쓰기는 자아반영적인 형태를 취한다. 모든 책은 단 한 권의 책이며 단 한 권의 책은 모든 책인 것이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의도를 살펴보면 이러한 메타픽션적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첫 째로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재미있는 책을 쓸 목적을 분명히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둘 째로는 기사소설의 황당무계함을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사소설에 대한 패러디, 이상주의에 대한 조소, 씁쓸한 아이러니적 세계의 제시와 자유에 대한 찬양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는 문학이론의 탐구와 실천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글쓰기 형태를 확립하기 위해 기존작품의 평가와 앞으로 어떻게 작품을 쓸 건가에 대한 토론을 1부부터 진행된다. 제1부에서는 돈키호테의 서재(1:6), 후안 팔로메케(Juan Palomeque)의 여인숙에서 신부의 책에 대한 논평(1:32)과 교회참사원 간의 주고받은 문학토론(1:47)등이다. 제2부에서는 1부를 이미 읽은 사람들이 행하는 비평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제1부는 2부에서 벌어지는 문학토론의 장을 여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제2부는 1부에 관한 자의식적 소설(2:3), 책에 대한 책이다. 1부의 오류는 2부에서 거론되며 정당화된다. 삼손 카라스코의 오류에 대한 논평이다. 그러나 그토록 엄한 비평가들도 그렇게 나무라지만 말고 좀더 너그러이 그들이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작품에, 말하자면 찬란한 빛을 내는 태양의 표면에 있는 조그마한 흑점에 결점을 후벼파는 시선을 돌리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뛰어난 호머도 때로는 잠에 든다’(aliquando bonus dormitat Homerus)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 작품에 되도록 그림자를 적게 하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작자가 얼마나 큰 눈을 뜨고 있었나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사실은 까막사마귀였다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까막사마귀는 그 점이 붙어있는 얼굴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출판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위험이 대단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읽는 사람들의 누구에게나 만족을 주고 즐거움을 줄 만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 중의 불가능이니까요.(2:3, p.52) 『돈키호테』의 ‘오류의 미학’이 역설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소설이론과 실천으로서의 픽션은 삼손 카라스코와 돈키호테와 산초간의 대화, 몬테시노스의 동굴과 페드로 영감(Maese Pedro)의 가설무대 등에서 구조적으로 형상화되었다.(2:22, 24, 26) 1.2. 시점의 유희 다층적인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다양한 화자의 시점을 이용한다. 다양한 화자들 간의 시점 유희를 통해 이론적으로 오류와 실수에 대한 정정 가능성이 확보되며, 이들간의 관점의 차이로 야기되는 제(諸)현실에 대한 메타픽션적 토의가 끝없이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화가들 간의 유희는 『돈키호테』가 우연히 발견한 필사본의 번역본을 토대로 제2의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artificio narrativo)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장치는 전통적 기사소설이 발견된 필사본에서 시작하는 수법을 패러디이다. 무어인 사가(史家), 시데 아메테 베넨헬리(Cide Hamete Benengeli)를 첫 번째 원작자로 사가의 관점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며, 톨레도의 모리스코인(Morisco toledano)은 번역가로 아랍어를 스페인어로, 그리고 세르반테스는 그 번역본에 기초한 두 번째 작가로 허구화된다. 두 번째 작가는 모리스코인의 번역을 통해 이야기 전체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독자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지만 권위적인 작가로 군림하지 않는다. 이러한 저자, 역자, 화자, 독자들간의 유희를 통해 세르반테스는 단성적 소설이 아닌 다성적 소설세계를 전개해가며 모호함(ambigüedad)과 의구심(duda)을 창출해간다. 제2부 3장에서 돈키호테가 1부에서 행한 자신의 행적에 대한 평판을 들으려고 삼손 카라스코를 기다리며 생각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시데’라는 칭호에서 미루어 작자는 무어인이다, 무어인에게는 진실 따위를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재미없어졌다. 자기의 그리운 정이 조금이라도 음란하게 다루어져서, 자기가 그리워하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의 순결을 더럽히지나 않았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2:3, pp.45-46) 돈키호테는 무어 사가의 손에 의해 창조된 ‘종이의 인물’이다. 또한 돈키호테는 그의 행적에 대한 평판을 같은 차원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석사 삼손 카라스코에 의해 듣고자 한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다시 책 속의 인물이 되고 카라스코는 그 책의 독자가 된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차원의 전이(轉移)는 현실과 허구간의 경계, 그리고 허구간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작가인 무어인은 사가(史家)이다. 사가는 진실함만을 기록한다. 돈키호테의 무용담은 사가가 기록한 만큼 틀림없는 진실이지만 사가의 출신이 진실한 것이라고 모르는 무어인이다는 점과 대비되며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지고 만다. 더욱이 이 무어인의 기록은 번역자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그리고 ‘거짓말쟁이’인 시인(소설가)의 손을 거친 거라면 소설은 언어의 가설적 구조일 수밖에 없다. 꿈과 마법의 세계에 대비되는 현실세계, 하지만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는 유희의 공간이며, 더군다나 그 두 세계는 언제나 교차될 수 있는 하나의 인식과정인 것이다. 1.3. 유희적 구조 유희적 구조는 돈키호테의 광기에 의해서도 창출되는데, 기인(奇人)으로서의 광기는 르네상스문학의 주요한 테마이기도 했다. 르네상스기의 광기는 병이 아닌 특별한 통찰력이나 악마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있다. 두렵지만 매력적인 광인의 존재는 이중적이었다. 이러한 광기는 『돈키호테』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된다. 돈키호테의 광기는 편력기사에 관해서만 국한되며, 다른 분야에서는 분별력을 발휘한다. 광기와 이성적 분별력의 유희는 현실의 코드를 무력화한다. 이러한 돈키호테의 광기는 기사규칙에 따라 소설에서 코드화된 유희의 결과이다. 그는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이러한 법칙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미치광이인척하고 편력기사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사소설을 탐독하며 현실을 변형시켜 기사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정돈시킨다. 그의 모든 행위는 기사소설의 지침대로 여관을 성으로, 풍차를 거인으로... 우스꽝스럽게 끝나면 기사소설코드에 의해서 설명하며, 나쁜 마법사들이 자신의 영웅적 행동을 시기하여 현실을 마법에 걸었다고 해명한다. 2부29장의 「마법의 배」에서 보여주는 돈키호테의 태도는 그의 모든 행위가 기사소설의 코드에 따라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예들 중의 하나이다. 잘 알아두어라, 산초, 여기 있는 이 배는 틀림없이, 아니 그렇지 않을 까닭이 있을 수 없다만, 내가 타고 누군지는 모르나 지금 매우 큰 곤경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한 기사나 혹은 신분 높은 분을 구하라고 손짓하며 부르고 있는 배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기사도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활약하는 마법사에 대한 책의 형식이기 때문이다...<중략>...그러므로 산초여, 이 조각배도 그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매여 있는 것이다.(2:29, pp.246-247) 1.4. 상대론적 관점주의 상대론적 관점주의에 의한 소설적 유희가 창출된다. 라 만차의 어느 마을의 한 시골귀족의 이름을 짓는데 있어 키하다(Quijada), 케사다(Quesada), 키하나(Quijana), 키하노(Quijano) 등의 여러 이름이 거론된다. 실제 인물에 대한 이름이라면 명확해야 하겠지만 문학적으로 꾸며내는 이야기이니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냐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세르반테스는 소설의 존재론적 위상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 관습을 수용하긴 하지만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강조하는 세르반테스의 개성은 『돈키호테』의 첫 도입부분부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민담의 특징을 수용함. 출신이나 출생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전통적인 모델인 아마디스 데 가울라(Amadís de Gaula),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Lazarillo de Tormes)의 형식을 수용하여 돈키호테 델라 만차(Don Quijote de la Mancha)라 명명하긴 하지만 곧바로 이 전통을 부정하고 있다. 분명한 지명이나 출신을 밝히지 않고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만차라는 어느 마을에...<중략>...어느 시골귀족이 살고 있었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1:1, p.97)에서와 같이 사건은 기사소설처럼 머나먼 땅에서 일어나지 않고 만차에서 가까운 곳에서, 먼 시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제 일임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세르반테스는 결정론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현실을 창조함으로서,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자유롭게 하였다. II. 자성적 소설(self-consciousness novel) 소설은 실체(實體)가 아니라 언어적 가공물이다. 소설의 존재론적 비판이란 현실을 표상(表象)하는 목적을 지닌 형식자체를 기술적으로 다루어서 비판적인 탐색을 행함을 말한다. 이러한 자성적(自省的) 소설은 픽션의 존재론적 지위(status)에 대해 노골적으로 의심을 품으며 글을 쓰는 작가들의 오랜 전통이다. 이러한 자성적 소설의 전통은 세르반테스에 이르러 소설의 기법으로 획기적으로 자리잡으며(Tradición de la Mancha), 자아반영적 소설, 자성적 소설의 본류를 이룬다. 2.1. 역동적 기호로서의 현실 돈키호테는 책의 진실됨을 증명하기 위해 현실을 기호화한다. 현실은 마술에 걸려있어 어떠한 모습으로든 변형이 가능한 세계이다. 이렇게 마술에 걸린 세계는 카니발화된 세계이며, 또한 비재현적 세계이다. 언어는 현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마술을 거는 것이다. 즉 소설은 언어의 가설구조물로서의 소설(novela como construcción verbal)인 것이다. 세르반테스에게 있어 단어(언어)는 옛날의 마술적인 특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임의적이나 관습적인 구조로서 자신의 텅 비어있음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본다. 세르반테스에 있어 이러한 언어의 존재론적 이중성은 그가 고안한 새로운 종류의 서술구조에서 반영된다. 허구적 세계는 모방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상태)를 확인하는 모방에 대한 복합적인 회귀로 반복해서 변한다. 언어가 생산의 주체인 세계에서 애매하고 모호한 점은 첫 번째 저자나 번역가의 잘못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세르반테스는 얼마든지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산초의 당나귀( Rucio) 도난사건, 산초 아내의 이름 등은 세르반테스의 명백한 오류이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이러한 실수를 교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글을 차별화된 작가, 역자, 독자간의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한다(실수의 미학, 의도된 실수). 이렇듯 소설 속의 세계는 쓰고 지울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인 것이다. 소설은 자유로운 글쓰기로서 언어의 허구적 구조물이라는 소설의 존재론적인 성찰인 것이다. 허구적 인물(책 속의 인물, 종이의 사람)은 차원이 없다. 차원은 공간적 존재임에 반해 허구(fiction)는 연장의 세계가 아닌 사고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허구적 인물의 차원을 2차원(평면)적 차원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결정적인 예는 제1부 8장말, 비스카야인과의 결투장면을 작자의 원고부재의 이유를 들어 중단하고 발견된 시데 아메테의 원고에 따라 9장에서 연결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부분은 실제세계의 인과율에 적용 받지 않는 소설의 허구적 차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돈키호테가 몬테시노스(Montesinos)의 동굴에 내려가 경이로운 궁전에 사는 몬테시노스(스페인 로만세에 등장하는 영웅)의 영접을 받는 광경(2:22-23)은 환영과 꿈 그리고 현실이 뒤범벅이 된 세상을 보여준다. 보는 관점에 따라 현실과 꿈은 교차되며 한순간에 3차원적 세계와 2차원적 세계를 넘나든다. 즉 존재론적 무게가 뒤바뀌는 것이다. 현실은 기호화되며 무한한 변화가능성의 세계로 인식되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몬테시노스 동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돈키호테는 몬테시노스 동굴에서 깜박 졸았는데 깨어보니 화려한 궁전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긴 수염의 노인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는 바로 롱스보에서 전사한 기사인 두란다르테의 절친한 친구인 몬테시노스였다. 두란다르테의 시체는 대리석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두란다르테의 부인인 벨레르마를 수행하고 있었다. 몬테시노스는 란사로테와 히네브라 여왕을 포함한 여기의 모든 사람들은 메를린의 마법에 걸린 궁전에 갇혀있으며, 돈키호테에 의해 마법이 풀릴 것만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돈키호테는 산양처럼 뛰며 달리는 3명의 처녀를 보게되는데, 그녀들을 둘시네아와 두 명의 동네처녀였다. 그녀들의 모습은 산초가 그에게 소개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산초가 그에게 말한 것처럼 몬테시노스는 그녀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마법에 걸린 귀부인들이다고 해명했다. 둘시네아는 하녀를 통해 6레알을 빌려달라고 하고 그는 마법에 걸린 사람들도 돈을 필요하는가 의심을 하지만 가지고 있는 4레알을 빌려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산초는 돈키호테가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지 않았나 의심한다. 둘시네아가 마법에 걸려 추하게 되었다고 꾸며낸 자는 바로 산초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건 자가 마법에 걸린 꼴이 되어버린 격이다. 즉 현실은 기호로, 기호는 현실로 끊임없이 순환되는 꿈-현실의 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몬테시노스의 동굴’과 제2부, 25-26장의 페드로 영감의 인형극, 꼭두각시극(titerero)은 『돈키호테』의 전체 구조를 형상화하고 있다. 먼저 역사가인 시데 아메테 베넨헬리가 몬테시노스의 동굴 이야기에 대해 진위를 묻는 장면은 자의식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2:24). 그리고 꼭두각시 극의 공연을 관람하는 돈키호테는 관객(실제인물-독자)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인 연극을 관람한다. 하지만 처음엔 연극의 비현실성을 이해하는 듯하다가 점점 더 현실과 연극을 혼동하며 연극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그대의 이야기를 일직선으로 진행시켜라...”고 돈키호테가 개입하는 순간에는 서술의 층위는 지켜진다. 돈키호테가 관객의 입장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드로가 무대 뒤에서 “이 어른 말씀대로 해라..”고 개입하는 순간 서술의 층위(層位)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페드로는 인형극을 진행하는 서술자의 입장에서 관객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형극은 약자를 도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돈키호테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난장판이 되고 만다. “당신이 쓰러뜨리고 부수고 죽이고 있는 것은 진짜 무어인이 아니라 마분지로 만든 인형이요”(2:26) 현실과 허구는 교차되고 이야기의 층위는 혼합된다. 이렇게 꼭두각시 극은 『돈키호테』의 서술의 층위와 이야기의 층위를 나타내고 있다. 페드로 // Cide Hamete 소년 // Cervantes 인형(títeres) // 돈키호테 외 등장인물들 페드로와 시데 아메테는 원작자로서 전체를 통괄하지만 관객이나 독자에게 직접 사건을 전달하는 자는 해설가인 소녀이나 화자인 세르반테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전개는 인형과 작중인물로 형상화되어야만 한다. 이 개별 그룹들은 서로 다른 층위에 위치하고 있지만 인형극에서처럼 시데 아메테와 세르반테스 그리고 돈키호테는 같은 차원의 존재로 서로 교우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허구와 현실이 분명히 경계를 긋는 차원에서는 광기와 이성으로 분별되는 대립구조를 이루기도 하며 혼재되어 이른바 ‘장자의 꿈’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소설은 언어의 가설적 구조물로서 현실의 법칙과는 다른 언어의 유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몬테시노스 동굴과 인형극은 소설은 언어로 구성되는 허구적 세계임을 스스로 드러내어 소설의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돈키호테』는 자성적인 문학적 장치를 통해 소설은 언어로 구성된 인공물임을 보여준다. 문학비평이 『돈키호테』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소설의 존재론적인 문제란 이야기는 현실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꾸민 이야기라는 점이다. 허구와 현실의 교차는 마술을 거는 자(encantador)와 마술에 걸린 자(encantado) 모두가 마술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하는 유희라는 점을 고려하면 동일한 것에 대한 양면인 것이다. 놀이에 참가하려면 놀이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처럼, 돈키호테가 미쳤다는 사실에 작가와 독자가 약속을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독자나 작가가 작품의 허구성을 허구로 인정하는 것은 허구에 대한 작가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르반테스는 소설의 두 가지 전통의 창시자가 된다. 그 두 가지 전통은 생생한 사실주의와 과장된 문학적 환상의 병치와 모든 자성적 소설의 전례가 된 인공물(artifice)의 과시적인 조작이다. 돈키호테 역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존재차원을 보여주는데, 첫째는 고집스러운 이상주의자로서의 인류의 보편적인 이미지이며, 둘째는 가공적이며 허구적인 책 속의 인물 (2:6) ―영화의 제작과정을 드러내는 자의식적인 영화와 같이 돈키호테 자신 역시 그가 지켜본 과정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사실― 문학적 유희로서의 돈키호테이다. 2부 59장에서 시작되는 위작에 대한 시비는 자성적 소설의 극치이다. 아베야네다의 위작이 거짓임을 폭로하기 위해 1부에서 예고했던 행선지인 사라고사를 바르셀로나로 바꾼다. 또한 위작이 1614년 7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산초의 편지를 1614년 7월 20일로 하여 그 거짓됨을 폭로하기도 한다. 돈 헤로니모, 제발 부탁이니 저녁식사를 갖고 오는 동안 『돈키호테 데 라 만차 후편』을 한 대목만 더 읽읍시다...<중략>...그따위 아무 작에도 쓸데없는 것을 뭘 하려고 읽소, 돈 후안 씨? 『돈키호테 데 라 만차』얘기의 전편을 읽은 사람은 후편에 흥미를 느낄 까닭이 없잖습니까?...<중략>...그런데 이 후편에서 가장 재미없는 것은 벌서 둘시네아 델 토보소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돈키호테를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2:59, p.473) 이 대화를 엿들은 돈키호테는 노여움과 분함을 못 이겨 큰 소리로 외치며 그 진위를 묻게되며 그 출처가 아베야네다의 위작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이 위작임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지금 잠깐 읽어보아도 이 저자가 쓴 것에는 세 가지 비난받을 만한 대목이 눈에 띄는구려. 첫째는 서문 속에서 읽은 몇 마디 말투요, 둘째는 전체에 사용된 말이 이따금 관사 없이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아라곤 사투리라고 할 수 있으며, 셋째로는 이것이 가장 저자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오만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과오를 범하거나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나의 종자 산초 판사의 아내를 마리 구티에레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이름이 아니라 테레사 반사라고 하오. 이렇게 중요한 대목에서 과오를 범하는 저자라면 이 이야기의 도처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것으로 의심해도 상관없을 줄 아오만.(2:59, p.473-474) 그리고 더욱더 위작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고되었던 사라고사 대신 바르셀로나로 향하기로 한다. 『돈키호테』가 책에 대한 유희적 글쓰기임이 분명하게 밝혀지는 대목이다. 나는 결단코 사라고사에는 한 걸음도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하겠소. 그러면 그 신작 이야기의 작가가 늘어놓은 거짓말이 널리 세상에 폭로되어 사람들은 그가 그리는 돈키호테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2:59, p.476) 위작에 나오는 돈 알바로 타르페(Don Alvaro Tarfe)와 대화는 문학은 문학적 전통 속에서 산출되며, 글쓰기가 문학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문학적 이미지를 대상으로 행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위작에 등장한 돈 알바로 타르페를 만나 그와 함께 위작을 비난한다. 이는 세르반테스가 1614년에 나타난 위작을 잘 알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메타픽션의 정수를 보여주기도 한다. 위작에 등장하는 돈 알바로는 둘시네아의 마법을 푸는 방법으로 3300대의 매질을 해야하는 산초 판사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등 진짜 2부의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이에 돈 알바로는 자신이 아는 돈키호테는 진짜 돈키호테와 다르며 자신은 진짜 돈키호테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공증인 앞에서 법적 구속력을 지닌 구술서를 작성하게 된다. 위작과 대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에피소드에 따라, 또한 여정에 따라 이야기는 산술상으로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이러한 사건 나열방식의 이야기 전개는 피카레스크 소설 양식이기도 하다. 2.2. 대칭적 거울구조(estructura del doble) 『돈키호테』는 미메시스 이론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켜보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돈키호테의 눈이 현실을 변형시키는데 반해 2부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마법사의 농간에 의해서 그렇다고 한다. 주체적으로 현실을 변형시키던(마법을 걸던) 돈키호테는 이제는 변형된(마법에 걸린) 현실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돈키호테』 전체 구조를 통괄하고 있는 대칭적 거울구조에 따른 유희라 볼 수 있다. 현실은 꿈과 환상으로, 꿈과 환상은 현실로, 2부는 1부의 거울로, 세계와 언어의 관계는 끊임없이 층위를 바꾸며 순환한다. 이러한 이중성의 증식(增殖)은 자아반영적 소설장르의 최초 모델이다. 물론 이중성은 반영이나 모방이며 종종 진짜의 감춰진 양상을 드러내는 패러디적 모방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방의 본질과 미학적, 존재론적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픽션 양식에 있어 이중성의 발견은 아주 중요하다. 게다가 자의식적 소설가는 감춰진 자아의 타자성(他者)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신화적 분위기를 이용했던 작가들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지적유희로 이중성을 이용한다. 모방실험과 소설비평으로서 이중성을 이용하는 『돈키호테』는 인물의 이중성보다는 구조의 이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돈키호테가 몬테시노스의 동굴로 하강하는 것은 그의 편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전통적인 서사적 영웅의 지하세계로의 하강의 패러디이다. 산초와 시데 아메테는 돈키호테의 경험에 강력한 의구심을 품는다(2:27). 이러한 모험은 다시 목마, 클라빌레뇨를 타고 창공을 날며 산초가 경험했다는 환상세계와 상승과 하강이라는 이중적 짝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산초, 네가 하늘 위에서 보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어주었으면 싶거든, 내가 몬테시노스의 동굴에서 목격했다고 한 말을 너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더 이상 너에게는 아무 말도 않으마.(2:41) 지하세계로의 하강에 대한 패러디에 대한 패러디에 만족하지 않고, 세르반테스는 산초를 깊은 구덩이로 떨어뜨리면서 돈키호테와 산초의 경험을 이중화하고 있다.(2:55) “나한테는 커다란 재난이지만 이런 것이 우리 주인 돈키호테님에게는 아주 좋은 모험이 될 테지”(Esta que para mí es desventura, mejor fuera para aventura de mi amo don Quijote). 이렇게 산초가 처한 현실은 접두사를 통해 반대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추상적인 단어, 재난(des-ventura)과 모험(a-ventura)처럼 임의적인 픽션일지도 모른다. 하강에 대한 또 다른 패러디적 반복은 알티시도라의 거짓 지옥여행담이다. 그녀의 지옥여행담은 산초의 클라빌레뇨 환영과 돈키호테의 몬테시노스 로맨스와 동일한 하강구조이다. 하지만 그녀의 지하세계는 ‘공 대신에 속에 공기와 털부스러기를 채운 책’(2:70)으로 테니스를 즐기는 악마들의 텅 빈 세계로 변환한다. 이러한 내적 패러디의 중첩 속에서 세계는 거울의 조합이 된다. 패러디가 창작과 비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면, 거울도 역시 다양한 각도로 현실을 왜곡시킨다. 실제로 모든 것은 다른 것들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며 굴절이며 반영이다. 즉 문학에 의해서 중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중개(仲介)로 이루어지는 불안전한 픽션세계는 둘시네아에서 가장 잘 두드려진다. 둘시네아는 돈키호테 자신의 창조물이며, 그 스스로가 만든 이상적 픽션에 돈키호테가 헌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시네아의 환기는 새로운 유형의 문학과 현실간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하고 있다. 이름은 둘시네아, 고향은 라 만차의 엘 토보소 마을, 신분은 나의 여왕, 주군으로 우러러보는 여인이니, 우선 적어도 공주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소. 그 공주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이오. 그 여인에게는 세상의 시인이라는 인간들이 자기가 그리워하는 사람 위에 씌우는 찬미의 모든 형용이 있을 것 같지도 않는, 구름을 잡는 듯한 형용이 그대로 사실이 되어 나타나 있소... 여인의 범절로서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하는 태도가 내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한 사물의 도리를 터득한 사고를 가진 연후에 비로소 찬양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국 어디의 누구와 견준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오.(1:13) 돈키호테는 공주가 없는 라 만차에서 문학적 관습에 따라 둘시네아의 귀족적 지위를 확정하고 그것을 사실로 이해한다. 문학적 상투어로 구성된 둘시네아는 문학의 오랜 전통 속의 소재들로 조립된 완전한 문학적 구성물인 것이다. 하지만 둘시네아는 일상적인 시적 과장에서 희석되면서 순수한 언어적 조직체가 되어 이상화되며 돈키호테의 상상력 속에서 문학적 영역을 넘어 실제적 인물로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세르반테스는 관습적인 문학적 이미지 ―목가적 전통― 를 종합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 내고 있다. III. 결론 『돈키호테』는 책에 대한 패러디와 거울이다. 세르반테스에게 언어는 옛날의 마술적 힘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임의적이나 관습적인 구조로서 자신의 텅 비어있음을 확인하는 이중적 도구인 것이다. 즉 소설은 언어로 구성된 허구적 구조물인 것이며, 이런 점에서 소설의 현실은 평면적이다. 당연히 그 소설 속의 인물(책 속의 인물, 종이의 사람)은 차원이 없다. 차원은 공간적 존재임에 반해 허구(fiction)는 연장의 세계가 아닌 사고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허구적 인물의 차원을 2차원적, 즉 평면적 차원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실의 법칙은 그의 소설 세계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의 소설세계는 자신의 고유한 내적 법칙에 따라 자율적인 체계를 형성할 뿐인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이미 근대적 지평으로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르네상스기의 최고 수확들 중의 하나이다. 17세기의 세계관은 이미 견고한 토대를 잃어버린 탈중심적인 역동기였다. 말은 사물로부터 이탈되어 버렸으며 말은 사물들을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수직적인 세계는 무너져 버렸고 그 편린들만 방황하는 세계였다. 단 하나의 고정된 세계가 아닌 부유하는 세계들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세르반테스는 언어를 택했다. 그의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현실을 변모시키는 마법사의 언어이기도 했다. 글쓰기 행위가 현실을 만들어내는 작위적(作爲的)인 행위라면 소설은 언어로 구축된 문학적 전통과의 대화의 산물일 것이다. 결국 언어의 언어에 대한 글쓰기로서 소설을 말한다면 그 무엇이 소설에서 가능하지 않겠는가? 소설은 현실의 경험에 대한 글쓰기라기 보다는 문학적 관습 속에서 구축된 문학적 이미지에 대한 글쓰기이다. 따라서 『돈키호테』는 이러한 문학적 이미지와의 대화이며 상호텍스트성의 문학적 장치이다. 돈키호테는 책의 진실됨을 증명하기 위해 현실을 기호화한다. 현실은 마술에 걸려있어 어떠한 모습으로든 변형이 가능한 세계이다. 이렇게 마술에 걸린 세계는 모든 것이 가능한 카니발적 세계이다. 언어는 현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마술을 거는 것이다. 즉 소설은 언어적 구조물(novela como construcción verbal)인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기존의 문화체제를 패러디한 다음, 그 탈신비화된 틀 속에서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한 패러디’는 사실 기존의 가치체제 또는 기존의 절대적 진실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체제나 새로운 진실의 존재에 대한 회의(懷疑)까지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패러디와 자유분방한 유희를 통해 해체작업과 창조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데이빗 헤이만이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을 모더니즘의 거리두기(distancing)와 비교하여 ‘이중의 거리두기(double-distancing)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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