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멸
제츈 밀라레빠 존자께서 앞서 이야기한 모든 수행을 성취하셨을 때
딘의 깊은 골짜기에는 재산이 많고 높은 권세를 누리는 게세 짜뿌와라는 한 박학(博學)한 라마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지방의 유지로 모임이 있을 때면 언제나 상석을 차지하였다.
겉으로 그는 제츈에게 경의를 표하곤 했지만 내심으로는 제츈에 대한 질투로 속이 터질 듯하였다.
그는 한 계교를 생각해 내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츈에게 난해하고 유식한 질문을 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제츈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폭로시키리라.
갑인년(서력 1134년, 제츈의 나이 83세가 되던 해), 가을 상달에
마침 제츈 존사와 짜뿌와가 함께 초대된 큰 결혼 피로연이 있었다.
제츈은 하객들의 제1열 상좌에, 게세 짜뿌와는 그 차석에 자리하였다.
짜뿌와는 제츈이 마땅히 그에게 답례할 것을 기대하며 제츈에게 예배하였다.
그러나 제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츈은 항상 그의 스승 이외의 누구에 대해서도 예배는 커녕 답례조차 하지 않았고,
이때도 그는 언제나의 관습을 바꾸지 않았다.
게세는 한층 더 깊은 원한을 마음에 새겼다.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나 정도의 대빤디드[학자]가 그처럼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에게 능멸을 당하다니!
내 기어코 복수를 하고 말리라."
짜뿌와는 난해한 철학서를 꺼내어 제츈에게 이 같이 제의하였다.
"오 제츈이시여,
부디 이 책을 음미하여 글자 하나 하나를 잘 풀이해 주셔서 나의 의혹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제츈은 답하셨다.
"이 논리적 추론의 단순한 문자적 해석에 관해서는 당신 자신이 더 잘알 것이요.
그러나 그 참된 진리를 스스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여덟 개의 세속적 욕망과 개인적 자아의 그림자를 철저히 포기하고
니르바나와 삼사라[윤회]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임을 알아
깊고 조용한 곳에서 명상 수행하여 나를 정복하는 것이 필요하오.
암기되어 전해 내려온 문답이라는 형식을 기록한 말장난이나
지식의 궤변을 나는 배우지도 존중하지도 않소.
이러한 것들은 지적 혼란만 일으킬 뿐, 진리의 성취를 가져올 수 있는 진실한 수행으로도 인도하지 않소.
그러한 말장난에 나는 무지하오.
설령 내가 그런 것을 좀 알고 있었다 해도 훨씬 전에 잊어버렸을 것이오.
탁상 위의 공론을 귀중히 여기지 않은 까닭을 노래하고자 하니 부디 귀기울여 주시기를...."
영광스런 마루빠, 역경 삼장법사의
발 아래 예배합니다.
스승의 은총이 내리신 이래
나는 결코 한눈 팔지 않았네.
사랑과 자비를 오랫동안 숙고하다 보니
나라는 것, 너라는 것
다 잊어버렸다.
나와 나눌 수 없는 수호신께
오래 명상하다 보니
이 비천한 몸뚱이의 일, 다 잊어버렸네.
최상의 진리를 향해
오랫동안 명상하다 보니
책에 기록된 온갖 것, 다 잊어버렸네.
이생과 내생을 오랫동안 명상하다 보니
친구나 가족의 의견을 구할 필요,
다 잊어버렸네
깨달음을 향해
하나하나 새로운 체험을 쌓다 보니
온갖 교리나 교조, 다 잊어버렸네
불생·불멸·무주(無住)에
오랫동안 명상하다 보니
이런 저런 목표에 대한 갖가지 정의
다 잊어버렸네.
이 마음의 근본자리를 부처로 알아
오랫동안 명상하다 보니
마음이 만들어 낸 희망이니 두려움이니 하는 온갖 궁리
다 잊어버렸네.
자유 속에서 창출된 경지에 오랫동안
마음을 두다 보니
인습 같은 건 다 잊어버렸네
몸과 뜻을 오랫동안 살피다 보니
강자의 오만이니 불손한 작태니 하는 것,
다 잊어버렸네.
이 몸을 오랫동안
수행의 장으로 여기다 보니
사원의 안락함과 위안거리
다 잊어버렸네.
언어를 초월한 진리의 의미를
오랫동안 찾다보니
그 내력 조사하는 것
다 잊어버렸네.
오, 박학한 이여,
원컨대 그대가 이런 말들을
그대의 권위 있는 책에서 찾아내 보라.
그러자 짜뿌와는 말했다.
"그런 말이야 당신들 요가 교의에 따르면 대단히 훌륭한 것이겠지만
우리 학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는 당신을 매우 훌륭한 분으로 생각했는데 실망을 금치 못하오."
짜뿌와가 이렇게 말하자 그의 지지자들조차 짜뿌와애 대해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며 일제히 소리쳤다.
"오, 대덕이시여, 이 세상의 당신 같은 박학한 학자들을 다 합친다 해도
제츈의 옷자락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니 그분의 단춧구멍 하나도 메우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시오.
그리고 고리대금이나 잘 하셔서 재산 늘릴 연구나 하시오.
진리에 관한 한 당신에게는 그 좋은 향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짜뿌와는 매우 분해했지만 참석자들이 일치하여 제춘의 편을 들었으므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꾹 참고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었다.
'이 무식한 놈, 밀라레빠는 부처의 법을 속여 기이한 행동을 나타내고
허튼소리를 하여 많은 보시와 공물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내가 경전의 연구에 조예가 깊고 많은 재산과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능멸하고 나의 학문을 개똥보다도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다시는 그따위 짓을 못하게 하리라.'
이 같은 결심을 하고 짜뿌와는 그의 첩에게 값비싼 보석을 주겠노라고
설득하여 제츈에게 독약을 탄 우유를 바치게 하였다.
제츈이 딘의 암굴에 머무셨을 때 그녀는 이 일을 위해서 찾아왔다.
한편 제츈은 인연 있는 제자들과 신도들을 완성과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 임무를 마치고
이제는 설사 그가 독을 탄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해도 임종의 시기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짜뿌와의 첩이 독약을 탄 우유를 제츈께 공물로 바쳤을 때
그는 잔잔한 미소를 띄며 이를 받아 마셨던 것이다.
제츈이 아무 말도 없이 공물을 수락하자
그녀는 내심 제츈에게 투시력이 없다는 짜뿌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였다.
"약속 받은 보석은 손에 넣었는가?"
제츈이 이렇게 묻자 그녀는 양심의 가책과 공포감으로 떨기 시작하였다.
"네! 주여, 보석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제츈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그 독이 든 우유를 자신에게 돌려줄 것을 애원하였다.
그러자 제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론 나는 그대에게 돌려 주지는 않을 것이야.
나는 그대를 가엾이 여기노라.
내 수명은 이미 다 되었고 이제 할 일도 끝났다.
그대의 독이 든 우유가 내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대와 짜뿌와 두 사람이 이번 일의 모든 것을 깊이 참회할 때가 오리라.
그때가 되면 그대들도 고행과 수도에 전념할 것이다.
내가 지금 그대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들 두 사람은 한량없는 미래세
영겁토록 행복에서 멀어지고 지옥고가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공양물을 수락한 것이니라."
그러더니 독이 든 우유를 마셨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제츈은 발병하였다.
제자들은 제츈께 의사의 치료를 받을 것을 간원하고
스승의 쾌유를 비는 기도회를 열도록 허락하시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제츈은 이를 만류하셨다.
"수행자는 병을 수행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게 하여
고통이나 죽음조차도 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 밀라레빠는 은혜 깊은 스승, 마루빠께서 가르쳐 주신 특별한 행법에 의해
모든 장애나 불행을 친구로 만들었으므로 기도나 속죄의 공양물이 필요치 않다.
다섯 가지 독(욕망, 증오, 무지, 자만, 질투)으로 생긴 병을 다섯 신의 축복으로
바꾸었으므로 나는 약제 또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광명의 세계에 융합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이르른 것이다.
생애에 사악한 법을 쌓아 올리고 그 결과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는 세속 사람들은 기도나 의술로써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헛되이 노력한다.
제왕의 권력, 미인의 매혹적인 용모, 부자의 재보 혹은 겁쟁이의 민첩함과 웅변가의 변설로도
이 불변하는 인연법의 집행을 방지할 수는 없으리라."
이와 같이 제츈께서는 그를 위한 어떠한 치료나 기도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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