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 사랑은 홀로 말한다 -
사랑은 혼잣말
깨고 나면 달라질까 미리 두려워
어설픈 낱말까지 떠올리며 그리는 마음이야
곧 이어질 노랫말처럼 설레다가
여전히 마주치면 야무진 일상의 굴레
보고 싶은 만큼 만지고 싶어 안달인데
만질 수 없던 애달픔 눈인 듯 내리고
겨우내 소나무 어깨를 빌려 소복소복 쌓였다가
중력 겨운 달빛 아래로 우지직 무겁게 놓아버렸지
천둥벌거숭이 몸짓으로 끙끙 앓아누웠으나
참 사나운 꼬락서니 이리 중얼 저리 중얼
홀로 데운 손바닥 내밀어 봤지만
무량한 하늘로 던져진 어림없는 날갯짓
배회하는 밤거리 꼬리 긴 반딧불처럼 허우적대다
설익은 파란 뚫고 새벽녘 먼동으로 솟아오른
살짝 스쳐도 서럽고 뭉근한 사랑이여
눈길 둘 데 몰라 서글픈 사람이여
*김대의 - 남해 출신, 시집으로 ‘상처 십만 원어치’‘달뜨기 능선, 비켜선 구름’ 등, 전 필봉 문학회 회원
친구, 민수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서긴 쉽지 않았다. 그날 술자리, 동기생에게서 얻은 그의 전화기로 몇 번을 전화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문자로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최 림, 이라고 밝힌 후에야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가 있는 곳은 놀랍게도 예전, 유희와 함께 군수품 수송을 위해 찾아갔던 남해의 내나로도 근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나로도에서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외나로도였다. 수려한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의 풍광과 해수욕장이 자리 잡은 이곳은 사철 따뜻하여 낚시꾼들과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는 곳이었다.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낸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무산 시를 떠났다. 남해 고속도로를 따라 그곳으로 가는 내내 나는 그때 그녀와 함께했던 짧지만, 운명적인 만남을 기억했다. 그날 나는 밤 바닷가에서 그녀와 달콤한 입맞춤을 했고 서로의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아직도 내 귓가에 들리던 그녀의 웃음소리와 몸에 기억된 달콤하고 상큼한 그녀의 체취가 지금 되살아나는 듯했다.
세 시간 반 정도의 운전 끝에 마침내 나는 그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앞으로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버티고 있는 조그만 어촌 마을회관 앞이었다.
“최 림? 최 시인.”
그는 내 손을 덥석, 하고 잡았다.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한 그의 얼굴은 햇볕과 바람에 몹시 그을려 있었지만, 표정은 무척 밝았다.
“시인이라니. 내가 시 안 쓴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부끄럽다.”
“하하. 이게 얼마 만이냐? 우리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보고. 오늘이 처음이지? 물론 동창들 통해서 네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만.”
그는 자기 집으로 가자며 날 안내했다. 하지만 나는 초면에 그의 집으로 가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냥, 이 근처에서 밥이나 먹지. 빨리 온다고 미처 아무것도 사지 못했는데.”
그러자 그는 화를 내었다.
“무슨 소리야? 육지에서 손님이 왔는데 누추한 집이지만 집으로 모셔야 그게 도리지. 그리고 우리가 무슨 예의를 따질 사이냐? 사오긴 뭘 사와? 정 미안하면 저기 가게에서 소주 몇 병만 사 와. 안주는 집에 가면 푸지다.”
그의 말에 나는 별수 없이 가게에서 소주와 음료수 그리고 과자 몇 봉지를 사서 그를 따라갔다.
그의 집은 해수욕장 맨 끝 언덕 위에 있었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집이었지만 마당이 있고 나름대로 운치 있는 집이었다.
“여보! 인사해요. 오늘 오기로 한 내 친구, 최 림 시인. 한때 전국 고교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친구랍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잘 오셨어요.”
그의 새 부인이었다. 소문대로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주변에 있는 평범한 주부 같아 보였는데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아! 한 분 더 소개하지. 얘는 내가 이 여자와 살면서 덤으로 얻게 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아이야. 미림아! 아빠 친구니까 인사해야지.”
그때 마루에서 나를 지켜보던 딸아이가 하나 있었다.
“안…녕…?”
한눈에 봐도 중증 장애인이었다.
“그래, 어릴 때부터 저랬나 봐. 성품은 아주 고와. 미림아. 이젠 방에 들어가 있으렴. 아빤, 이 아저씨랑 마루에서 한잔할 거야.”
의외였다. 그는 이 여자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장애 아이도 자신이 품은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비닐봉지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꺼내 그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하더니 이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간단한 술상이나 좀 봐 줘요!”
“네.”
그나 아내나 말을 높이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그는 이런 친구였다. 상대가 누구든, 귀천에 여부없이 존댓말을 하는 성품이 좋은 친구였다.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의 권유로 문예반에 가입했을 때도 그는 처음엔 내게 말을 높였다.
“많이 놀랐지?”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했다.
“처음엔 좀 그랬어. 하지만 오늘 와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동창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나는 네 결정을 존중해. 그래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온 거고.”
그는 내 말에 웃었다.
“어떻게 사는지 직접 확인하려고?”
그때 그의 아내가 술상을 들여왔다. 미역무침, 톱 무침, 파래, 조개 등 모두 이곳에서 나는 해산물이었다.
“같이 드시죠?”
“아니에요. 두 문인께서 말씀 나누시는데 감히 제가.”
그녀는 진심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를 사양했다. 결코, 과장된 언동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요즘 여자와는 달리 남편에 대한 예의와 겸손이 몸에 배어있었다.
“여기서 글 쓰구나.”
나는 그녀가 문인 운운하는 게 그런 것 같았다.
“소설을 집필하고 있어. 정말 오랜만이지. 대학 졸업하고 은행 들어가서 내내 먹고 살겠다고 지랄하는 바람에 그동안 아예 손 뗐거든. 그래도 최 시인은 가끔 인터넷에 시를 올리잖아. 몇 해 전엔 어떤 공모전에도 당선되었고. 그때 그대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직장 다니면서 시나 소설을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하하. 나는 직장을 때려치우니 이젠 꿈을 이루어지네.”
“이런 결정 내리는데 힘들지 않았어?”
내가 정말 묻고 싶은 말이었다. 이 질문이 어쩌면 이다음에 내가 내릴 결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바람결에 그녀, 유희의 얼굴이 스치고 있었다.
“자! 한 잔 들지.”
그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든 듯 얼굴이 상기되었다.
“물론, 많이 힘들었어. 지금도 그래. 아직 전처와 이혼이 마무리되지 않았거든.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행복해. 저기 있는 저 여자. 그래, 예쁘지도 많이 배우지도 않았어. 게다가 장애인 아이를 키우는 과부임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이 여자를 만나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배웠어. 사람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 이런 게 살아가면서 얼마나 중요한지. 예를 들어볼까? 난 은행에 다니면서 결근 한 번 하지 않았어. 고객에겐 친절했고 상사로부턴 인정받는 착실한 직장인이었어. 가정에도 충실했다고 봐. 그런데도 아내는 내게 무슨 불만이 있는지 매사에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내 마음에 상처를 줬어. 퇴근 후에 습작하는 내게 돈도 되지 않는 소설을 쓴다는 불평부터, 내가 쓴 작품을 보여줘도 읽기는커녕,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다고 비판만 했었지. 그런데 저 여자는 달랐어. 내가 쓴 짧은 글 하나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고 꼭 읽어 주었어.”
나는 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나는 그에게 힘내라는 의미로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말을 마친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났다. 나는 사랑에 관한 한, 어떤 편견과 선입견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국내의 손꼽히는 대학을 나와 최고의 직장에서 근무하던 그는 어느 날,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여러모로 비천한 계급의 이혼녀와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런 그와 비교해 과연 나는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두려움이 앞섰다.
“당연히 후회는 안 할거지?”
“물론! 나는 이곳이 좋아. 대학 다닐 때 이곳에 MT를 온 적이 있었어. 여기는 서정적인 바다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있었어. 그때 나는 결심했지.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한 후, 기회가 되면 꼭 이곳에 들어와 살 거로 생각했어. 난 여기서 소설을 쓰고, 고기를 잡고 텃밭은 가꾸면서 아내와 조용히 살고 싶어.”
그는 기분이 좋은지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후엔 무산 시로 돌아가고 싶어, 일부러 절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뭐든지.”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런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용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추구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분명 두어 번 찾아지. 너 또한, 오늘, 날 찾아온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거야. 참! 오늘 네가 온다, 하니 요 옆에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오고 싶어 해. 괜찮지? 잠시 만나 봐. 그 친구에게 많이 배울 거야. 우리 또래니까 말이 잘 통해.”
그는 내 대답도 듣기 전에, 휴대전화로 방금 말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오후쯤 무산 시로 돌아가려는데 행여, 새로 온 사람으로 인해 술을 더 마시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럴 즈음, 마침 회사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한 일이 생겼으므로 휴가 중에 미안하지만, 회사로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어떡하지? 급히 가봐야겠는데.”
그러자 그도 친구를 불러놓고 난감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직장 일로 가야 한다 하니 그는 더는 잡지 않았다.
“하! 아쉽네. 네가 만나보면 정말 도움이 될 친군데. 할 수 없지. 다음에 셋이서 한잔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 다음 기회는 결코, 오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필요한 경비만 빼고 지갑에 있는 돈을 다 뺐다. 그리고는 받지 않으려는 그의 아내에게 겨우 건네주었다.
“상담료야. 오늘 정말 좋은 말 많이 들었어. 이다음에 올 터이니, 그때 그 친구랑 한잔하자고.”
나는 아쉬워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마당을 나왔을 때 저만치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아마 민수가 말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역시 민수처럼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한 차림이었다.
남해 고속도로 막바지 무산 시 근처에서 속도를 높여 회사로 갈 때였다. 사무실 연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떡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얼마 전에 유희가 통관한 A 업체 물품 있잖아요.”
“그래, 알아. 필리핀으로 수송하는 거잖아. 내가 결재했지.”
“네. 그런데 그 업체 사장이 통관서류가 잘못되었다고 다짜고짜 운송계약을 파기한다고 지금 난리에요. 그 바람에 유희도 지금 우리 사무실에 와 있어요.”
“알아.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들어가고 있잖아.”
“빨리 오세요. 사장님이 유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다 보니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요. 유희가 울고 있어요.”
“유희가 울고 있다고? K 관세사 대표는 옆에 없어?”
“그 대표님은 미국 출장 중이잖아요. 어쨌든 빨리 오세요. 지금 이 일을 해결할 분은 과장님밖에 없단 말에요.”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