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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하순(11수)
하루시조 141
05 21
삼각산 푸른 빛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삼각산(三角山) 푸른 빛이 중천(中天)에 솟아 올라
울총 가기(佳氣)란 상궐(象闕)에 부쳐 두고
강호(江湖)에 잔(盞) 잡은 늙은이란 매양(每樣) 취(醉)ㅎ게 하소서
삼각산(三角山) - 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북쪽에 있는 ‘북한산(北漢山)’의 다른 이름. 백운대(白雲臺),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景臺)의 세 봉우리가 있어 이렇게 부른다.
중천(中天) - 하늘의 한 가운데.
울총 – 울울창창. 큰 나무들이 아주 빽빽하고 푸르게 우거진.
가기(佳氣) - 자연의 상서롭고 맑은 기운.
상궐(象闕) - 대궐을 아름답게 부르는 말인 듯.
부쳐 두고 – 보내 놓고.
강호(江湖) - 강과 호수. 자연(自然). 세상(世上).
벼슬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래도 상서로운 기운이 궁궐에 항상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요.
삼각산은 문학작품에서 한양(漢陽) 즉 서울을 상징하는 지명입니다. 속담도 여럿 있지요. ‘삼각산 밑에서 짠물 먹는 놈’이라는 말은 인심 사나운 서울에서 먹고살아 온 놈이라는 뜻으로, 인색하고 매정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삼각산 바람이 오르락내리락’이란 말은 바람이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뜻으로, 거들먹거리면서 하는 일 없이 놀아나거나 출입이 잦음을 비웃는 말입니다. 요즘엔 잘 안 쓰는 말입니다. ‘삼각산 풍류(風流)’라는 말은 출입이나 왕래가 잦음을 이르는 말이고, ‘삼각산넘이하다’는 북쪽으로 도망하다는 뜻인데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서울 북쪽의 삼각산을 넘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시조 풀이 할 게 없으니 괜스레 삼각산 타령이나 했군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2
05 22
상사로 병될 님을
무명씨(無名氏) 지음
상사(相思)로 병(病)될 님을 잊어 무방(無妨)하건마는
정녕(丁寧) 한 굳은 언약(言約) 다시금 새로와라
지금(至今)에 고장난명(孤掌難鳴)ㅎ기로 그를 설워
상사(相思) -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함.
무방(無妨) - 거리낄 것이 없이 괜찮음.
정녕(丁寧) - 태도가 친절함.
고장난명(孤掌難鳴) - 외손뼉만으로는 소리가 울리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혼자의 힘만으로 어떤 일을 이루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지금은 헤어져 홀로 지내고는 있으나, 친절히 내게 해준 약속은 생각할 적마다 새롭습니다. 그러니 어찌 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설령 상사병(相思病)에 걸릴지언정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외손뼉으로 소리 낼 수 없는 지금 형편이 서럽기만 할 뿐입니다.
고장난명은 각기 떨어져 있을 때는 그리움을 대신하는 말이고, 붙어지낼 때는 행여 싸우기라도 할 적이면 말리면서 쓰는 이중적 얼굴을 지닌 말이로군요.
종장 끝구절의 생략은 시조창법에 의한 것으로 ‘하노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3
05 23
석상에 오동 베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석상(石上)에 오동(梧桐) 베어 님의 얼굴 새겨내니
형체(形體)는 여전(如前)하나 성음(聲音)이 돈절(頓絶)이라
아마도 상사일념(相思一念)은 나뿐인가 하노라
성음(聲音) - 목소리.
돈절(頓絶) - 편지나 소식 따위가 딱 끊어짐.
상사일념(相思一念) - 서로 그리워하는 한결같은 생각.
오동을 베어내어 님의 얼굴을 새기면서 님 생각을 골똘히 했답니다. 상사(想思), 곰곰이 생각하는 일. 남녀간으로 그 공간을 옮기면 비로소 ‘죽고 못 사는 일’이 됩니다. 상사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작품 속 주인공은 그런 상사일념이 자기 혼자 빠진 미궁(迷宮)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군요.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상사 상태가 아니거나, 상사로부터 헤쳐나오는 중이라고 봐야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4
05 24
선두에 술을 싣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선두(船頭)에 술을 싣고 고기 낚는 저 어옹(漁翁)아
생애(生涯)란 어디 두고 낚대만 잡았는다
평생(平生)에 부럴 일 없더니 너를 부러하노라
선두(船頭) - 이물.
어옹(漁翁) - 고기 잡는 노인.
생애(生涯) - 살아있는 동안. 평생(平生).
바야흐로 바닷일하는 사람을 ‘뱃양반’이라 치켜세우는 시절 곧 여름이 닥쳐옵니다. 이 작품 속 어옹을 부러워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고관대작(高官大爵)일 것입니다.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이물에 술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낚대에 걸린 고기 떼내자마자 회쳐서 안주 삼아 술 한 잔, 크허 맛 좋구나. 아마도 이런 상상이 가능한 탓일 것입니다. 다음은 생애를 던져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지 않는 상황, 몰라라 해도 괘념치 않을 때에야 비로소 생애를 팽개칠 수 있겠지요. 부러워하는 쪽, 고관대작은 아직도 국사(國事)로 부심(腐心)하고 있을 테지요. 어쩝니까, 부러워하면 진다는데.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5
05 25
세상 만사중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세상(世上) 만사중(萬事中)에 제일난사(第一難事) 내 일이야
오매사복(寤寐思服) 그린 정(情)에 신명(神明)곳 알으시면
지금(至今)에 원작비익조(願作比翼鳥)로 평생동락(平生同樂)
제일난사(第一難事) - 가장 어려운 일.
오매사복(寤寐思服) - 자나 깨나 늘 생각함. 오매불망(寤寐不忘).
신명(神明) - 하늘과 땅의 신령(神靈).
비익조(比翼鳥) -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아니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 남녀나 부부 사이의 두터운 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금슬(琴瑟)이 좋기로는 하늘에선 비익조요,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라고 한답니다. 초장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바로 자신의 일이라고 깔아놓고, 중장에서 그리는 정인(情人)이 있다고 하고, 종장에서는 비익조가 되어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절절한 원(願)을 신명께서 아실 것이라고, 제발 들어주시라는 염(念)을 읊었습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창법에 따른 것으로 ‘하리라’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6
05 26
세상에 약도 많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세상(世上)에 약(藥)도 많고 드는 칼이 있다 하되
정(情) 버힐 칼이 없고 님 잊을 약(藥)이 없네
두어라 잊고 버히기는 후천(後天)에 가 하리라
버힐 – 벨.
후천(後天) - 뒤에 오는 세상. 후세(後世).
어차피 이생에 맺은 인연이니 정을 떼겠다고 설칠 것 없고, 님을 잊겠다고 설레발 떨 일 없겠다. 모두 모아 후세에 가져간 다음에 어찌 되든 하겠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전생(前生)이 있었고 차생(此生)이 있고 또 후생(後生)으로 이어진다고 믿는 일은 어쩔 때는 참 편리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다만 망각(忘却)의 강(江)을 건너면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약이고 칼이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른다면 오늘 미뤄둔 후생의 계획 또한 감감할 뿐이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7
05 27
세상이 말하거늘
무명씨(無名氏) 지음
세상(世上)이 말하거늘 떨치고 돌아가니
일경황전(一頃荒田)과 팔백상주(八百桑株) 뿐이로다
생리(生利)야 부족(不足)ㅎ다마는 시름없어 하노라
일경황전(一頃荒田) - 거친 밭 한 두둑.
팔백상주(八百桑株) - 뽕나무 팔백 그루.
벼슬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간 사람의 자족(自足)을 노래했습니다.
왜 물러났느냐고요. 세상이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떨치고 돌아섰답니다. 사실 세상 즉 관로(官路)는 여럿이 모인 곳이니 당연히 말이 많습니다. 그러려니 견뎌야죠. 생계도 걸려 있거니와 파당(派黨)의 역학관계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때려치운 모양입니다. 그만큼 거칠 게 없이 올곧게 살아온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거친 밭 한 두둑과 뽕나무 팔백 주를 앞에 두고 셈을 합니다. 이익을 내기는 뭐해도 당장 걱정거리가 없어 좋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8
05 28
세우 뿌리는 날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세우(細雨) 뿌리는 날에 자지(紫芝)장옷 부여잡고
이화(梨花) 핀 깊은 골로 진동한동 가는 각씨(閣氏)
어디 가 뉘 거짓말 듣고 옷 젖는 줄 모르느니
세우(細雨) - 가랑비.
자지(紫芝) - 지초(芝草). 자주색 염료(染料).
장옷 - 예전에,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에 얼굴을 가리느라고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려 쓰던 옷. 초록색 바탕에 흰 끝동을 달았고, 맞깃으로 두루마기와 비슷하며, 젊으면 청ㆍ녹ㆍ황색을, 늙으면 흰색을 썼다. 본래는 여성들의 겉옷으로 입다가 양반집 부녀자들의 나들이옷으로 변하였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새색시의 결혼식 예복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장의.
진동한동 - 바쁘거나 급해서 몹시 서두르는 모양.
각씨님의 부산한 행동을 묘사했습니다. 가랑비 오는데도 외출을 감행했으니 피치 못할 상황이니 싶다가도 종장에 ‘거짓말’이 나오는 걸로 보아 귀가 여린 여인네를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그 각씨님이 작자의 짝이면 참 난감한 일이고요. 각씨님 행한 곳이 이화골 깊은 동네라니 사연이 사뭇 궁금해집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49
05 29
내 쇠스랑 잃어버린 지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쇠스랑 잃어버린 지 오늘조차 찬 삼년(三年)이오러니
전전(轉轉)듯해 문전(聞傳)하니 각씨(閣氏)네 방안에 서 있더라 하데
가지(柯枝)란 다 찌어 쓸지라도 자루 들일 구멍이나 보내소
쇠스랑 -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 풀 무덤 따위를 쳐내는 데 쓰는 갈퀴 모양의 농기구. 쇠로 서너 개의 발을 만들고 자루를 박아 만든다.
외설적 농담을 농기구에 빗대어 표현하였습니다. 초장은 잃어버린 쇠스랑 이야기를 꺼내면서 벌써 오늘까지 만 3년이 넘었다고 하였습니다. 중장은 잃어버렸던 쇠스랑 소식을 전하고 전하여 들었거늘 지금 각씨네 방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종장의 농담이 외설적입니다. 쇠스랑 다 찢어발겨도 좋으니 자루 박을 구멍이라도 돌려달라는군요.
자루 들일 구멍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고 생각했거늘, 기실 따지고 보면 잃어버린지 3년이라든지, 각씨네 방에 서 있더라든지도 외설을 담기 위한 보조장치였는가 싶기도 하네요.
무명씨 작품이 지니는 자유분방함,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작품 배경 등을 이해하고 읽어야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50
05 30
술이 취하거늘
무명씨(無名氏) 지음
술이 취(醉)하거늘 송근(松根)을 베고 누워
저근덧 잠들어 꿈 깨어 돌아보니
명월(明月)이 원근방초(遠近芳草)에 아니 비친 데 없더라
저근덧 – 어느새.
원근방초(遠近芳草) - 주변의 향기롭고 꽃다운 풀.
술과 연관된 작품은 아주 많습니다. 술이 곧 일상(日常)이었으니까요. 왜 이 작품을 읽고서 오수(獒樹)의 의견(義犬)이 생각날까요. 옛사람들, 술을 먹을 줄 알고, 또한 먹을 수 있는 형편이고 하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주인을 구한 충견(忠犬)이 저는 목숨을 잃고, 하여 비에 새겨 기억했다는 전설(傳說)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흔한 소나무는 굵은 뿌리가 땅 위로 울퉁불퉁 뻗어가기에 거기 머리 베고 누워 취기(醉氣)를 견딘 한 사내의 풍경이 글에 환합니다. 뿌리가 겉으로 드러날 정도면 나이깨나 든 소나무입니다. 기운이 깨끗하여 더불어 쉴 만하지요. 깨고 나니 달 밝은 밤이군요. 낮에 잠들어 밤에 깨니 자못 생경했겠습니다. 술은 깨기 위해 마신다는 역설이 있기도 합니다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51
05 31
시비에 개 짖은들
무명씨(無名氏) 지음
시비(柴扉)에 개 짖은들 이 산촌(山村)에 긔 뉘 오리
죽림(竹林) 푸르르니 봄 새 울음소리로다
아희야 나 볼 손님 오거든 채미(採薇)갔다 사뢰라
시비(柴扉) - 사립문.
채미(採薇) - 고사리 꺾기.
산중에 사는 노인이 고사리 꺾으러 가면서 아이에게 일러주는 말이 종장이며, 이 작품의 주제로군요. 이 궁벽(窮僻)한 산촌에 누가 오리오만은 행여 뉘 오거든 공손하게 ‘사뢰라’ 일러두는 것입니다.
채미(採薇)라는 말에서는 충신(忠臣)의 대명사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생각나니, 작중 노인도 지조 높은 선사(禪師)라는 느낌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손수 해결하는 일만 없다면 이슬만 먹는다는 매미 선(蟬)자 선사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시조 한 편 남겨놓고 노사(老師)의 봄날은 갔겠습니다 그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시조는 시절가조의 줄임말로 때 時자 고를 調자를 씁니다. 요즘말로는 유행가 정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