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원고
(제목:“당신은 왜 국가에 반하는 일을 하는가?”?) 화정교회 박인환목사
1975년, 감리교신학대학 입학시험에 “로마서13:1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 나는 로마서13:1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였고, 성경을 펴놓고 보는 시험도 아니라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성경과목시험이 끝난 후에 수험생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며칠 전 정동제일교회 권사라고 하던 김종필국무총리가 TV 방송에 나와서 그 말씀을 인용하며, “데모를 하는 대학생들을 비롯한 국민은 물론이고 교회도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로마서13:1의 내용을 알지 못했거니와 집에 TV가 없었기에 김종필씨가 나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나는 고스란히 그 문제는 0점을 받았을 테고 김종필씨의 연설을 듣고 로마서 13:1에 대해 생각했던 수험생들은 그럭저럭 답안지를 채웠을 것이다. 아마 내가 로마서13:1을 알고 있었다면 김종필씨가 말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말로 답안지를 채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국가에 충성” “위대한 5.16혁명” “우리민족의 영도자 박정희대통령”이라는 말로 세뇌되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그 위대한 박정희대통령을 보고 왜 독재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었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종필총리가 권세를 가진 자에게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한 것은 바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었으나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였고, 군사정권에 힘을 실어주었다. 로마서13:1의 잘못된 이해와 적용은 역사 이래 수많은 독재자들과 악한 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명분으로 악용되어왔다.
꼭 4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국가의 권력을 쥔 권세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자기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여전히 인권을 탄압하고 반대자들을 핍박하며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닫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는 40년 전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세상권세를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 때는 불의한 정권에 대하여 말하고 싸우는 목사와 교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목사와 교회들이 더 보수화되어 있고, 조금이라도 국가권력에 바른 말을 하려고 하는 목사들은 종북.좌파로 매도된다. 그 동안 교회도 무언가 세상 것들을 많이 쌓게 되어서 그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염려하는 기득권층이 된 것인가?
세월호 참사 이후 1년은 한국기독교의 민낯이 고스란히 공개된 시간이다. 세월호 이후 몇몇 유명목사들의 부적절한 말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교회가 ‘세월호에 대해 보여준 태도는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수준과 이 사회를 향한 저급한 인식수준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교회에 희생자가족이 있기도 하거니와 세월호참사가 너무 엽기적인 참사이며 “왜?‘라는 의문만 해도 수 십 개가 넘는, 의혹이 많은 사건임에 틀림없기에 목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월호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말을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말은 “왜 당신은 국가에 반하는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장로에게도 들었고 목사에게도 들었다. 세월호 진상을 밝히기 위한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는 일이 ‘국가에 반하는’ 일이란다. 국가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며 하나님 이상 가는 절대자란 말인가? 그 말에는, 국가(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은 일이니 백성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무개념과 정권을 잡은 자들이 무슨 일을 하든 교회가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어설픈 정교분리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교회에 퍼져있는 ‘정교분리’ 사상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편리하게 통치하기 위해 조선기독교단을 만들면서 내세운 논리 아닌가?
국가(정권을 잡은 자)가 하는 일을 다 선한 것이고, 교회는 집권자들이 하는 일에 말하거나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그렇게 서슴없이 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말을 들으며 섬찟한 생각이 들곤 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채 힘 있는 자와 기득권자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집권당을 비판하면 “정치적”이라 하고 야당을 비판하면 “신앙적”이라 한다. 교회가 정교분리를 말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정치화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를 찾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오히려 힘 있는 권세자들을 향하여는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시곤 하셨던 사실을 오늘 한국교회는 잊어버렸는가?
“세월호유족들의 아픔은 이해한다. 그러나 진상규명운동 같은 것은 안 된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인식이다.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고 있다. 그것은 곧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 행동하면 안 된다”는 말과 다름없는 말이다. 일제시대, 남북분단의 지속과 군부 독재를 경험하며 국가권력으로부터 핍박받은 경험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이제는 알아서 순응하는 교회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세월호유족들의 아픔을 이해한다면서 정작 “우리들의 얘기를 들어달라”는 유족들의 호소는 외면하는 교회가 진정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습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곡된 정보의 탓도 있겠지만, 이 시대 대한민국백성은 세월호유족들의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죄를 짓고 있다. 세월호유가족을 이상한 별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생각하고, 세월호는 이 시대에 얘기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집권 기득권세력이 자기들의 치부를 감추고 자기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생산하는 여론조작의 결과물임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마저 사안을 바로 보지 못하여 세상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을 따라가고 있다.
세월호 희생 기독학생이 76명이다. 그들의 가족 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이사 가거나 교회를 떠났다는 것은, 교회가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교회는 힘 있는 자들을 견제하고 비판해야 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인 정부를 향해서라면 더욱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오히려 권세자들을 두둔하고 억울하게 강도만나 쓰러져 우는 자들에게 비판의 칼을 들이대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예수를 믿는 교회가 아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다. 마르크스 시대에 아편은 마약이 아니라 진통제였다. 어렸을 적,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어머니가 양귀비진액 말린 것(아편)을 좁쌀만큼 떼어서 물에 타 주셨다. 그 물을 마시자마자 설사가 그치고 아프던 배가 편안해졌던 기억이 있다. 아편은 원래 그런 식으로 진통제로 쓰였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진통제다”라고 말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말을 하면서 “종교는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교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아파하는 자의 아픔을 잊게 하는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가 과연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잊게해 주는 역할이라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우리가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오해하였던 내용,(즉 “종교는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세상의 실제적 상황을 잊고 구름 위에 집을 짓고 사는 허황된 착각을 일으키는 마약”이라는 인식)에 스스로를 맞추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교회가 지금 스스로 아편에 취해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국가권력을 견제하지 않고 비판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국가권력에게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참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세상의 불의에 눈 감고, 세속의 구체적 삶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마약의 역할 밖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2년 후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다. 한국교회를 위한 제2의 종교개혁이 꼭 필요한 때가 되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루터 당시의 유럽교회와 그렇게 닮아있는지... 루터 당시 교회는 세속적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것 때문에 교회의 생명은 잃어버렸었다. 한국교회는 이미 대한민국에서 거대한 권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미 숫자적으로 감소현상이 깊어지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힘이 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 국가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수구친일잔존 기득권세력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신장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도지사.시장.국회의원을 위한 조찬기도회’ 같은 것은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한다. 그러나 정치.경제권력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울부짓는 노동자들, 강정마을, 밀양사람들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않는다. 일제에 의해 인생이 파괴되어버린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한 관심도 없다. 소위 운동권 혹은 좌파로 매도되는 일부의 힘 없는 성직자들만이 그들을 위해 싸워주고 있을 뿐이다.
세월호 이후의 한국교회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본 회퍼의 말대로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 이며 세상을 위해 일할 때 진정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우리가 사는(교회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교회의 민낯이 세월호정국을 통해 낯낯이 밝혀졌다면, 이제는 진정 예수의 정신을 가진 거룩한 교회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백성의 부조리와 죄악이 총망라된 사건이며 세월호유족들은 그 한 복판에서 이유 없이 강도만나 쓰러져있는 유대인과 같다. 교회가 그들에게 관심가지고 찾아가고 싸매주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강도만난 동족을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안으로는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하고 도와야 하지만, 밖으로는 세월호와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국가의 책임을 당당히 물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결코 정치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이고 신앙적인 일이다. 예수님도 세상의 권세자들을 비판하셨다. 권력은 비판받고 견제 받아야 건강하고 정당하게 그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국가(정부)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위기의 정점에 올라서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기 시작한 것을 엄숙히 깨닫고 빨리 방향전환해야 한다.
지금처럼 세상 권세에 굴복하거나 할 말을 하지 않고 자기 몸 보신하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낮은 자와 소외된 자들을 찾으며 세상권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가르치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해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