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낯선 음이 흘러나온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다. 폰을 어제 새로 바꾸어 달라진 멜로디가 익숙하지 않아 못 들을 뻔하였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니 둘째 딸이다.
'콜렉트 콜입니다. 통화를 하고 싶으면 상대방을 확인하시고 숫자 버튼 중 아무
버튼이나 누르......'
안내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마음이 급해서 아무 숫자나 꾹 눌렀다.
'아빠, 나 큰일 났다' 며 여느 때와 달리 정감 있고 애교 어린 목소리가 아니고 사뭇 긴장되고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다.
둘째 딸은 올해 대학 입시생이다. 그런데 지금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침에 출근한 직장? 에서다. 수능성적이 그다지 좋지를 않아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차선을 택했는데 그게 바로 치과병원이다.
둘째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만화를 좋아했다고 하는 말은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만화의 내용보다 그 안에 나오는 캐릭터를 더 좋아해서 책방에서 만화책을 빌려오면 늦게 갔다 주기 일쑤요, 툭 하면 그 만화의 캐릭터를 오려서 책갈피 사이사이에 숨겨 두었다. 그래서 책값을 물어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학교에 갔다 온 공책을 들여다보면 공책에는 어김없이 공주 같은 곱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오려 놓은 것이 발견되곤 했다. 수업은 안 듣고 온통 거기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아예 만화가로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만화를 그리려면 단지 남의 밑그림이나 그리지 말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네 이름으로 된 책을 내라고 하였다. 스토리 구성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을 키우려면 창의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니 다방면의 책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의외였다. 자기는 만화가는 싫다고 했다. 이런 대화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들어갈 때 까지 이어졌고 고등학교 2학년 이과, 문과를 선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럼 무얼 할 건데 하고 물어보면 아직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인문계를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조리학과를 간다고 했다.
웬 조리학과?.....
참말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학과를 선택했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너한테 안 맞는 것 같다고 말렸다. 덜렁대는 것도 있고 둘째는 어려서부터 접시도 자주 깨어 먹었다. 또 가끔 요리를 한다고 뭘 만드는 데 그다지 맛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고자 마음을 먹고 그 방면에 즐거움을 가지고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 자기만의 특유의 요리를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반대를 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려면 단지 생선 한 마리를 가지고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선의 속까지 속속들이 아는 해부학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론공부도 열심히 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큰아이도 전혀 생각지도 않게 지방대학의 생각지도 않았던 과에 가게 되었던 것처럼 조리학과 가지 말라고 그러는지 수시로 넣은 조리학과에 붙지를 못 하였다. 그리고는 겨울방학을 맞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서 시내에 있는 큰 호텔에 나가게 되었다.
호텔 홀에서 8시간이나 서 있다가 오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이는 무척 신이나 있었고 갔다 오면 있었던 일을 이른 봄의 참새 새끼처럼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조리학과에 적을 두고 있다고 했더니 그곳에서 사귄 사람들이 나중에 졸업하면 오라고 했다면서 들뜬 마음으로 한 달 가까이 다녔다.
그런데 거기서 일하면서 주방을 들여다보니 자신이 안 생겼는지 생각이 바뀌어서 아무래도 자기는 성격상 주방보다 홀이 더 체질에 맞는 것 같다면서 경영학 쪽을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수능점수였다. 둘째의 점수로는 서울에 있는 경영학과에 갈 만한 데가 없고 지방밖에 없는데 그것도 저 남쪽지방이라고 해서 한마디로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반대를 하였다. 첫째는 어쩔 수 없이 지방에 보냈지만 둘째까지 보내기 싫었다.
그래서 점수가 되는 대로 서울 수도권에 있는 아무 대학 아무 학과라도 좋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둘째 아이는 심기가 불편해 했고 나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중 집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둘째 아이를 찾는 남자 전화였다. 그동안 학원 같은 데서 둘째를 찾는 전화가 많이 와 선입견으로 왜 그러시냐고 좀 퉁명스럽게 대꾸를 했는데 학교에 000선생님이라고 하신다. 아이 담임 선생님한테 소개를 받아 전화를 했다고 하는데 둘째의 핸드폰이 통화가 안 돼 집으로 했다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일자리를 소개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일자리라니? 대학갈 아이한데 무슨 일자리......아무튼 둘째한테 연락을 해서 전화를 드린다고 하고 끊었다. 그리고 며칠 후 둘째가 선생님을 만나고 왔는데 치과에 다니면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의향을 물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를 다니면서 학원에 등록해서 일 년 다니면 정식직원도 되고 그 다음 현장근무를 착실히 하면 몇 년 안에 대학을 가기가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부모님의 의견은 어떠냐고 물었다. 대학 선택의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는데다 어차피 원하는 과에 못 갈 바에는 현장경험을 쌓으면서 미래를 설계를 해보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그래서 어제부터 출근을 한 것이었는데 첫 출근을 갔다 온 아이의 의중을 떠보니 알바 때의 그 신나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어째 마음이 좀 심란해 보였다. '난 역시 시끄러운 데가 좋은가 봐' 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하는 곳이 조용한 곳이라 알바 때처럼 마음 놓고 말도 못해서 쉽게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7시에 퇴근을 하고 알바 한 호텔에서 식구들을 식사에 초대를 했다면서 엄마와, 언니와, 동생과 같이 갔다가 밤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는데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자지 않고 무얼 쓰고 있었다. 안 자고 무얼 하냐 했더니 '보고서'를 쓴다고 했다. 무슨 '보고서'? 했더니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몰라, 몰라, 이걸 왜 내가 써야 하냐고 하면서 메모해 놓은 것을 옮겨 적고 있었다.
아침에 큰일 났다고 전화가 온 것은 어제 밤늦도록 쓴 그 '보고서'를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었다. '짜식이 그냥'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흘러나왔다. 학교 다닐 때도 뭘 잘 빠뜨리고 다니더니 미리 잘 챙기지를 못하고......어쩌겠는가. 갔다 줘야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려다고 추워서 차를 타고 가는데 신호등에 걸렸다. 그나마 집에서 가까워서 그렇지 만약 한 시간이라도 되는 거리라면 어쩔 뻔 했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부터는 잘 챙겨가라고 잔소리라도 해야지 하고 있는데 조수석에 놓아 둔 '보고서' 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유괘하지 않는 기분으로 '보고서' 쓰는 것을 보고 잤는데 무슨 내용을 썼을까 궁금해서 쓱 훑어보았다. 출근을 하고 유니폼을 받고 전화를 받고, 모르는 용어에 대한 의사불통 등이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알바 하던 곳에서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달리 조용한 곳이라 막연한 불안감으로 다가와 일순 후회 같은 것이 밀려왔는데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유니폼을 갈아입으라고 해서 입고 일을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딱딱했었나 보았다.
전화를 받는 일도 약간 신경이 쓰인 것 같았다. 어릴 때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말을 들은 둘째는 발음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더 위축이 되었나 보았다. 상대방이 잘 못 알아들을까봐 긴장도 되고 그래서 전화벨이 울리면 괜히 움찔거리게 되기도 하고 익숙지 않는 용어 때문에 잘 알아듣지를 못 한 것 같았다.
오늘은 어제 배운 것들을 물어보고 잊어버리지 않고 잘 해야지 하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지만 이 '보고서' 를 읽는 내 마음이 짠해져 왔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해 다 잘하겠거니 하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첫날부터 적응이 안 되어 마음고생이 되는 것 같았다.
주위에서 대학을 나와도 변변한 취직자리를 못 구해서 어중이떠중이가 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에 허락을 한 것인데 자기가 원해서 간다고 해도 말리고 아무 대학이라고 가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운전 중이라 세세히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보고서'를 보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잘 아는 길인데도 바로 가지를 못하고 지나치는 바람에 돌아서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보고서' 를 가지러 나오는 아이의 모습은 예의 그 싹싹함이 그대로 묻어나 밝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도 여러 상념들이 겹쳐져 와 혼란스러웠는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선택한 길 후회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기를 바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꿈도 키우면서 소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빌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