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의의
‘온(蘊)’이란 쌓여 모이다[積聚]의 의미입니다. “색(色)”은 질애(質礙)가 그 의미입니다. 이 벽은 색법인데 사람이 여기로 걸어가면 벽의 성질은 비록 공하지만, 그 작용은 공하지 않습니다. 그 작용은 무엇일까요? 그 작용은 바로 질애이기 때문에 사람이 통과할 수 없습니다. 질이 있으면 장애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하기를, 불교가 말하는 ‘공’은 물질을 태워버리고 없어지고 파괴된 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바로 ‘공’이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색 뒤가 공이 아니라 그 본체가 공입니다.
“수(受)”는 영납(領納)이 그 의미입니다. 즉, 감수(感受)입니다. 6근이 6진을 마주 대하고 그 중간에 6식이 있는데, 6진 경계가 위(違)인지 순(順)인지 아니면 불위불순(不違不順)인지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위’란 자기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이란 자기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중(中)’이란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수(受)”는 안과 밖 경계의 괴로운 느낌ㆍ즐거운 느낌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영납(領納)’,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생활 속의 특수한 현상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만이야 말로 생활 속에서 늘 있는 현상입니다.
“상(想)”은 생각입니다. 느낌이 있으면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할까요? 내가 접수한 이 환경이 괴로운지 즐거운지 혹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인지를 생각에서 분별을 일으켜 구상합니다. 생각 상에 분별이 있으면 생각의 지도 아래서 갖가지의 조작이 있을 것입니다.
“행(行)”이란 조작하다가 그 의미입니다. 어떻게 조작할까요? 갖가지의 조치로써 괴로운 느낌ㆍ즐거운 느낌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에 대처하는 것이 바로 조작입니다. 외부의 좋은 경계를 접수하거나 외부의 좋지 않은 경계를 배제하거나 외부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경계를 용인하는 것이 바로 행의 작용입니다.
“식(識)”이란 요별(了別)하다가 그 의미입니다. ‘요별’의 의미는 외부의 갖가지 경계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이 위(違)인지 순(順)인지 아니면 중간인지를 어떻게 분별하는 것은 모두 ‘식’의 작용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말할 때 색수상행식 5온은 앞뒤 차례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외부 경계를 접촉할 때 5온은 모두 한 생각 사이에 있으며 모두 그 즉시입니다. 불교는 정신활동을 미세하게 분석하지만 실제로는 수상행식은 한 생각 사이에 완성되는 사유 과정입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複如是).”란 ‘수상행식은’ 모두 다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수상행식’과 다르지 않으며, ‘수상행식’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수상행식’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언어상의 생략입니다.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불생ㆍ불멸ㆍ불구ㆍ부정ㆍ부증ㆍ불감(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不減).”, 일체법의 공상(空相)은 일체법의 실체를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 모든 상(相)의 불가득성(不可得性)은 여섯 방면에 체현되어 있는데, ‘6상(六相)’이라고 합니다. “불생ㆍ불멸ㆍ불구ㆍ부정ㆍ부증ㆍ불감(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不減).”이 바로 일체 제법의 6상입니다. 진공묘유의 일체제법은 생겨남과 소멸을 떠나있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떠나있으며, 늘어남과 줄어듦을 떠나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이며, 하나의 법칙입니다. 그것은 우리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세계에서 지배 작용을 일으키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겨남도 소멸함도 없고,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습니다. 진리이기에 생겨남과 소멸함,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듦이 없습니다. 진리가 아니라야 생겨남과 소멸함,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듦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시고공중무색(是故空中無色),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무안계(無眼界),내지무의식계(乃至無意識界).”
이 단락은 6근ㆍ6진ㆍ6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ㆍ불구부정ㆍ부증불감(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不減)”의 제법실상의 대법칙 가운데서 일체법은 모두 이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미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면,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18계’도 없습니다. 공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ㆍ공ㆍ무상ㆍ무아(苦、空、無常、無我)의 도리에서 나타나 보이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5온ㆍ12처ㆍ18계가 없어 공한 것은 범부법으로서, 범부의 생명 경계입니다. 범부의 6근ㆍ6진ㆍ6식은 이 법칙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공성 이외에 또 6근ㆍ6진ㆍ6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無)” 자 하나로써 6근ㆍ6진ㆍ6식이 공하다는 본질적 규정성을 표현 서술하고 있습니다. 6근ㆍ6진ㆍ6식 본질성은 바로 “무”입니다.
“공(空)”자와 “무(無)”자는 의미상 구별이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현상 ‘무’ 자가 더욱 철저하며 더 궁극적입니다. 이 ‘무’는, ‘유’와 상대적인 ‘무’가 아닙니다. ‘있다 없다’가 없는 ‘무’입니다.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범부의 정신 경계와 생활 경계는 본질상 ‘공’이자 ‘무’입니다.
“무무명(無無明),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이 몇 마디 말은 12인연을 말합니다. 12인연은 연각(緣覺)의 정신 경계, 생명 경계와 수행 과정입니다. 연각의 수행 과정도 진공묘유라는 이 하나의 진리의 규칙 하에서의 실행입니다. “무”라는 최고 진리의 규칙 하에서 12인연은 그 자성이 본래 공합니다. 만약 12인연이 공하지 않다면 연각의 법도 궁극적이 아니며, 끌어올릴 수 없으며, 일체의 고통과 재난을 건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각과 성문은 아집(我執)은 끊었으나 아직은 법집(法執)을 끊지 않았기 때문에 비궁극적인 일면이 있습니다. 오직 “무”의 원칙이 끌어올리는 가운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집을 깨뜨려 없애야 비로소 더욱 높은 수행 층차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는 4성제 법문을 말합니다. 4성제 법문은 불교의 기본 법문이며, 성문이 닦는 법문이며 성문의 정신 경계ㆍ생활 경계입니다.
“고(苦)”는 우리 생명의 괴로운 과보입니다. “집(集)”은 괴로운 과보를 초래한 원인입니다. “고”와 “집”은 세간의 인과(因果), 즉 범부의 인과입니다. “멸(滅)”은 괴로운 과보가 영원히 소멸하고 괴로운 원인이 영원히 소멸한 정신 경계이며 생활 경계인 열반입니다. “도(道)”는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멸”은 성자의 출세간의 성과(聖果)이고, “도”는 성자의 출세간의 원인입니다. 괴로운 과보를 소멸하려면 먼저 괴로운 원인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즐거운 과보를 성취하려면 즐거운 원인을 닦아야 합니다. “‘고’를 알고, ‘집’을 끊고, ‘멸’을 흠모하고, ‘도’를 닦으면 [知苦、斷集、慕滅、修道]”, 성문의 성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공계(真空界)에서는 4성제법도 그 실체를 얻을 수 없어서 역시 “무”입니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은 보살의 정신 경계ㆍ생활 경계를 말합니다. “지(智)”는 보리이며, “득(得)”은 열반입니다. 지혜로써 열반을 얻음이 “지”와 “득”입니다. 여기서는 “무지역무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보살이 수행 과정 중에서 지혜로써 열반을 얻을 수 있지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자마자 유위법(有爲法)ㆍ유루법(有漏法)이 되어버립니다. 오직 집착하지 않아야 무위법(無爲法)ㆍ무루법(無漏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