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일쾌사 제3수(老人一快事 第三首, 눈이 어두워져도 즐거운 까닭
/정약용丁若鏞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안혼역일쾌眼昏亦一快
/눈이 어두워진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불부송례소不復訟禮疏
/다시는 『예기』의 주석을 따질 필요 없고,
부득연역괘不得硏易卦
/다시는 『주역』의 괘를 연구할 필요도 없다.
평생문자루平生文字累
/평생 문자에 얽매였던 짐을,
일조능탈쇄一朝能脫灑
/하루아침에 능히 벗어 버렸다.
생증급고판生憎汲古板
/급고각의 판본은 미움을 내게 한다.
승두각섬개蠅頭刻纖芥
/파리 머리처럼 작은 글자를 새겨 놓았다.
육경교외거六卿郊外去
/육경은 교외로 나가 버렸으니,
재윤하시괘再閏何時掛
/두 번째 윤달은 언제 걸리려는가?
차재망경주嗟哉望經注
/아아, 경전의 주석들을 살펴보니,
후인의양화後人依樣畫
/후인들은 옛사람의 본만 따른다.
유지박송리唯知駁宋理
/오직 송대의 성리학만 반박할 줄만 알고,
불치승한주不恥承漢註
/한나라 주석을 이은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금무중화如今霧中花
/이제는 모든 글자 안개 속 꽃처럼 흐릿하니,
무번쌍결자無煩雙決眥
/두 눈 크게 뜨고 번먼하지 않는다.
시비기양망是非旣兩忘
/시비를 이미 다 잊어버렸으니,
변난수역해辨難隨亦懈
/논쟁하고 따지는 일 또한 게을러졌다.
호광여산색湖光與山色
/호수의 빛과 산의 아름다운 경치만으로도,
역족충안계亦足充眼界
/또한 내 눈앞의 세상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
나이들어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도 생각해 보면 즐거운 일
젊은 시절에는 경전의 글자 하나, 주석의 해석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살아왔다.
고전의 예기 』의 뜻을 따지고『 주역 』의 괘를 연구하며
옛사람들이 남긴 글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 애썼다.
때로는 작은 글자를 읽느라 눈을 크게 뜨고,
서로 다른 해석을 비교하느라 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니
그 모든 수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파리 머리만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새겨 놓은 책은 더 이상 읽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옛사람의 주석이 옳은지, 후세 사람의 해석이 그른지,
누가 누구의 학설을 반박했는지 끝없이 따질 까닭도 없다.
생각해 보면 평생 글과 학문에 매달리며 얼마나 많은 논쟁 속에서 살아왔던가?
이제는 눈이 흐려져 글자가 안개 속의 꽃처럼 보이니
그런 다툼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던 마음도 조금씩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학설을 반박하려는 생각도 줄어들었다.
그 대신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푸른 산이 있고 잔잔한 호수가 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과 계절에 따라 빛깔을 바꾸는 산은
굳이 어려운 글을 읽지 않아도 내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 준다.
평생 책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찾으려 했지만,
이제는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느낀다.
눈은 예전보다 어두워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한결 가벼워졌다.
보이는 것이 줄어들었다고 삶의 아름다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