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살인범 당신을 체포합니다”
톰크루즈 주연‘마이너리니 리포트’
.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 26일 개봉)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크루즈의 이름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영화다.
지난달 미국에서 개봉하자마자 인터넷 영화사이트 IMDB 관객 평점에서 역대 좋은 영화 250편 중 80위에 올랐고, 영화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머리와 마음을 모두 만족시키는 성공작”이라고 평했다.
긴 상영 시간(2시간 25분)과 계속 집중해야 하는 내용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웃기는 영화가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추천하기 어렵다.
‘예언에 근거한 수사’ 흥미 더해
하지만 적절한 지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톰 크루즈의 팬이라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는 영화다.
∇살인없는 미래 = 2054년. ‘프리 크라임(Pre-Crime·범죄예방)’ 시스템 덕분에 워싱턴DC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0%다. 예지자들의 예언을 근거로 ‘미래의 살인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체포한다는 것이 프리 크라임의 기본 개념.
스필버그 특유의 상상력 번뜩
6년 전 아들을 잃은 뒤 프리 크라임의 신봉자가 된 수사반장 존 앤더튼(톰 크루즈).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음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예언을 듣고 결백(곧 시스템의 오류)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3명의 예지자 중 한명이 내놓은 소수의견인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찾아내 무죄를 입증하려고 예지자 아가사를 납치한다. 여기에 시스템 내에서 완전 범죄를 꿈꾸는 과거의 살인 사건이 엮이며 그는 음모에 빠지게 된다.
스필버그는 특수효과 등 볼거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드라마(범죄+추리)와 인간 이야기(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괴로움)에 초점을 맞춰 긴장과 재미를 동시에 주고 있다.
▽원작 VS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느’는 SF영화인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의 원작자인 SF작가 필립 딕의 동명 소설이 원작.
그러나 주인공의 상황과 프리 크라임 개념만 원작에서 따왔을 뿐 영화의 90%가 스필버그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심지어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 여부도 원작과 다르게 설정됐다.
주연 앤더튼은 원작에서는 뚱보에 대머리이고 젊은 아내를 의심하는 멋없는 중년이지만 영화속에서 젊고 매력적이며 아이를 잃은 고통에 시달리는 아버지로 바뀌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또는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설정은 ‘ET'부터 ’AI'까지 스필버그가 즐겨 사용해온 것. 이 영화도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주의 냄새를 풍기나 동심의 세계에 머물렀던 스필버그의 기존 SF와 달리 피(살인)와 불륜의 섹스 묘사가 곁들여지면서 ‘어른스러워’졌다. 등급은 15세 이상.
또 영화는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해 처벌하는 법적 모순, 운명을 미리 알고 미래를 바꾸는 선택의 문제, 홍채만으로 신분이 확인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품고 있으나 스필버그는 이를 고민하기보다 ‘적당히 진지한’ 선에서 매듭짓는다.
자기 부상 자동차 등 볼거리 풍성
▽2054년의 미래 모습은?= SF영화의 즐거움은 미래 사회에 대한 엿보기.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상상력 가득한 볼거리가 풍부하다.
건물 벽을 타고 수평 이동을 하는 자기 부상 자동차, 행인의 홍재로 곧장 신원을 확인한 뒤 고객의 이름을 부르며 호객하는 광고판, 범인 추적과 탐색에 사용되는 전자 거미인 스파이더...
하지만 스필버그는 첨단 미래 생활을 펼쳐 보이면서 유머도 잊지 않았다. 2054년에도 감기만은 어쩔 수 없는 걸까.
“감기 치료제는 언제 나오나”라는 대사와 함께 앤더튼의 상관인 버기스가 마시는 것은 꿀을 탄 허브차. (강수진 기자) 동아일보 2002년 7월 12일 금
.
.
.
이상용의 영화보기
‘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 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래 사회는 ‘프리크라임’이라 불리는 범죄 예방시스템을 통해 살인 발생률이 제로에 이른다. 그런데 소설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영화는 미래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영웅 앤더슨(톰 크루즈)의 노력을 통해 ‘프리크라임’ 시스템이 신회할 수 없는 것으로 끝맺어진다.
반면 소설은 모든 상황이 프리크라임의 예언 속에 들어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끝가지 신뢰를 얻고 유지된다. 딕의 주인공은 결코 영웅이 아니다. 그가 묘사한 앤더슨은 시스템 속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오락성을 감안한다면 결말의 차이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 문제는 결말에 이를는 과정과 앤더슨이 시스템을 수호하는 배경이다. 영화는 앤더슨이 6년 전 유괴된 아들 때문에 ‘프리크라임’에 헌신했다고 설명한다. 원작은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제기된 설정이 더 그럴 듯 하지 않은가. 감정적으로는 그렇지만 이성적으로는 소설이 더 논리적이다.
원작의 주인공 앤더슨은 ‘프리크라임’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영화 속 앤더슨은 아들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일에 헌신했지만 애초부터 시스템 자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소설 속 앤더슨에게는 시스템은 자식과 같다. 그는 시스템을 배신할 수 없는 처지이다.
현실은 소설에 가깝다. 현대인은 현대 매커니즘의 수호자를 자청한다. 시스템은 우리들 스스로가 양육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범인(凡人)들에게도 영웅이 될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카프카나 딕을 따르자면 영웅보다는 벌레인 ‘그레고리 잠자(’변신‘의 주인공)’가 되기 쉽다.
영화가 보여준 시스템의 문제는 보다 깊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스필버그의 영웅이 수호하는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가족’이다. 그런데 이 가족 속에는 타이을 향한 배려가 빠져있다. 딕의 소설을 가족이든 사회든 상관없이 시스템이면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앤더슨 국장은 ‘프리그라임’시스템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순간 가장 먼저 직장 동료인 아내를 의심한다.
반면에 영화 속에서 앤더슨과 아내는 아들의 유괴 사건 이후 이혼한 상태이며 영화가 진행되면서 가족은 통합된다. 사회의 시스템은 파괴되고, 가족은 단결된다. 블록버스터가 되풀이하는 가족 이기주의이자 아이러니다. (영화평론가) 2002년 7월 25일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