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같은 수필을
김 학
수필을 쓰기 시작 한지도 어언 50여 성상이 흘렀다. 이만한 연륜이면 수필에 일가견을 가질 법도 하지만 아직도 습작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고지를 마주할 때마다 나의 재주가 모자람을 느낀다.
지금까지 수필의 탈을 씌워 발표한 작품이 8백여 편을 웃돈다. 그러나 자랑스레 내놓을 작품 하나 없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수필에 매달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 수필의 소재를 내 생활주변에서 찾는다. 놓쳐 버리기 쉬운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수필이라는 안경을 쓰고 살펴보면 좋은 소재가 되는 수가 많다. 소재가 발견되었다고 바로 원고지에 옮기지는 않는다. 노트에 메모를 하고서 꾸준히 자료를 모은다. 여과를 시킨다.
나는 전주비빔밥같은 수필을 쓰려고 노력한다. 갖가지 채소와 양념, 고기류를 적당히 섞은 다음 비벼야 제 맛도 나는 게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영양가로 보거나, 맛으로 보거나, 색깔로 보아도 먹음직스럽다. 수필도 그래야 하리라고 맏는다. 비빔밥을 보고 입맛을 느끼게 되듯이 독자가 수필을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야 한다. 비빔밥을 먹고 높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듯이, 한 편의 수필을 읽고 난 독자는 그 작품에서 정신적 영양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정신적 영양이란 공간대의 형성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나는 내가 써낸 수필이 옥양목 빛깔이기를 바란다. 울긋불긋 현란한 색채로 수놓은 비단이어도 안 되고, 피부에 해로운 화학섬유 같아도 안 된다. 아무리 두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담백한 맛이 담겨 있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나는 나의 수필이 숭늉 맛 같기를 바란다. 술처럼 알코올이 섞여 있지도 않고, 커피처럼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지 않으며, 청량음료마냥 톡 쏘는 맛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냉수같은 맹물이어서도 안된다. 고소한 숭늉 맛이어야 한다. 숭늉은 아무리 마셔도 부작용이 없다. 나는 그런 수필을 쓰려고 노력한다. 나는 물처럼 담담한 수필을 쓰려고 노력한다. 물방울이 모여서 내를 이루고, 냇물이 강을, 강이 바다를 이루듯 그렇게 매끄러운 수필을 쓰고 싶다. 물은 때로는 폭포가 되기도 하고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다독거려 결이 고운 수필을 빚고 싶은 것이다.
물은 항상 수평을 유지하려 애쓴다. 아무리 물그릇을 기울게 잡는다 해도 그릇 속에 담긴 물은 그 나름의 특성대로 수평을 유지한다. 나는 물이 수평을 유지하려 하듯 치우침이 없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수필을 쓰려고 한다.
나는 나의 수필에 진한 역사의식이 배어있기를 바란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거울이자 내일을 살아갈 우리의 삶의 지침인 까닭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고, 현재 없는 미래 또한 기대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역사의 강물은 내가 인양하고 싶은 수필이 무한대로 고여 있는 소재의 보고寶庫다. 나는 역사의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수필을 낚아 바구니를 채워 나가려 한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수필을 쓰려 한다. 현학적인 중수필은 나의 취향과 걸맞지 않다. 간결하면서 템포가 빠른 경수필에 호감을 느낀다. 공감도가 높은 소재, 이해하기 쉬운 언어, 간결한 문장으로 수필을 쓰고 싶다. 나는 제목부터 쓰고서 내용을 엮어 가지는 않는다. 내용을 마무리 지은 뒤에 알맞은 제목을 붙인다. 내가 다루고 싶은 주제가 설정되면 그 주제에 필요한 소재를 장보기 하여 수필이라는 식탁을 꾸민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감이 가는 산뜻한 제목을 차려낼 수가 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수필이라고 하는데 나는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수필을 나의 반려자로 여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남의 좋은 수필을 탐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나의 수필이 틀스럽게 승화되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영양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전북수필의 증인, 이제는 뵐 수 없는김학 선생님. 예전 전주 수필 세마나 갔을 때 반갑게 맞아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저도 옥양목같고 숭늉같은, 단순하지만 그윽한 글과 문장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비빔밥이 주는 이미지와 숭늉과 옥양목과의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 비유로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를 두고 비빔밥, 혹은 종합 선물세트라고 비유합니다
감동 한스푼, 코미디도 한스푼, 멜로도 살짝, 액션도 추가 이런 식이죠. 시간 잘 가고 재미도 있지만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벤허>나 <전쟁과 평화>같은 묵직함이나 혹은 아주 단순하고 밋밋하지만 삶의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들이 그리워지더라구요~
'쓸수록 어려운 것이 수필이다'라는 말에
공감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