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1 주일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가장 유명한 랍비 힐렐은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네 이웃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다만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과 비슷하지요. 또 다른 유명한 대가 중의 한 사람인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법의 원칙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 6,4-7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고백을 토대로 하느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ㄴ-30)
모든 유다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즉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성구갑을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리고 레위 19,18을 토대로 더하여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분리할 수 없고, 이 두 계명은 한 계명입니다.” 그러나 둘 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잘난 부분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한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잘하든 못하든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장점도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부족한 모습까지도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이인들의 사랑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진정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사랑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나 이 말씀은 완전한 칭찬의 상태는 아닙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는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머리로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요?
첫째로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에서 이웃의 범위는 제한적입니다. 곧 구약에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둘째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6,4-5)과 레위기의 ‘이웃 사랑’(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또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즉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이러한 의미에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야고보 사도가 증언하듯이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야고 2,17)이고,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죽은 믿음’과 ‘죽은 사랑’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야고 2,20 참조).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오늘의 강론을 갈무리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