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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지음), 주해연(옮김), 글항아리, 2023.)을 읽고 나서
『전쟁 같은 맛』(그레이스 M. 조)이라는 제목에 이끌리어 이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그레이스라는 글쓴이(이하 그레이스)는 엄마이자 군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삶을 통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과 섹스, 젠더, 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했다. 글쓴이의 엄마는 성자와 성부와 성령처럼 유년기의 엄마, 열다섯 살 때 엄마, 30대를 함께 보낸 엄마 이렇게 세 명의 엄마를 만났다고 했다. 아름답고 카리스마가 넘치고, 영리한 엄마는 노련한 미시 정치가로 아버지 고향에서 인정받기 위해 지치지 않고 투쟁을 벌였다고 했다. 그런 엄마 덕분에 삶의 질은 더 나아졌다고 했다. 두 번째 엄마는 열다섯 살 때 “급성 정신병 삽화”라는 단계에 있을 때 만났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사회에서는 조현병 환자라고 하면 홈리스, 이해가 전혀 불가능한 존재 또는 살인자 등으로 인식했던 가장 역기능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비쳐질 때였다. 그레이스는 이런 엄마를 대할 때 두려웠지만 늘 한편으로는 내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두려웠다고 했다. 세 번째 엄마는 그레이스의 30대를 함께 하며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한국음식을 같이 만들기도 하고 가르쳐준 분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그레이스와 엄마는 함께 엄마가 어렸을 적에 했던 요리를 기억으로 찾아내면서, 그 길을 함께 걸어가며 같이 그 길을 찾아주었다고 했다. 그레이스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지만 엄마는 딸이 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박사가 된 그레이스는 37세에 정년이 보장된 교수가 되어서 한국전쟁의 유령에 대한 첫 저서를 출판했다. 그레이스는 엄마에게 영감을 얻어 제일먼저 엄마에게 표지 디자인 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미 엄마는 이 책을 보시기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우리나라는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문제에 대한 정답은 단일민족이나 백의민족이 정답이었다. 전쟁종전후로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니면서 무엇엔가 이끌리어 기지촌에서 일하게 된 여성들은 어쩔 수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혼혈아동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물며 이승만은 “양부인과 혼혈 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라고 공개적으로 비난까지 했다. 심지어 혼혈 아동을 구제할 곳은 미국인데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미국의 애국적 의무라고 선전까지 했다. 한국의 입양 프로그램과 한국 아이들은 공산주의 및 “아시아인의 인명 경시 풍조”로부터 구제한다는 미국의 캠페인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회복지사들은 입양 아동 모집 대상을 다른 주변화된 집단으로까지 확대해야 했다. 미국을 빈곤이나 인종차별이 없고, 누구나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신화적인 장소라고 상상했다. 혼혈 아동들은 호위호식하며 잘 커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학대받거나 양부모에게 맞아서 죽은 아이들도 많았다.
더군다나 남편이 없는 여성이 남자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한국에서 살아남기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봤을 때 군자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가 그동안 참고 살아낸 인내의 맛을 딸에게 느끼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미국으로 왔지만 한국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했던 엄마였다. 그리운 고향을 두고도 낯선 이국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끌어오다 외로움에 점점 지쳐갔던 엄마였다. 엄마는 한국 이민자인 심리치료사인 전 박사와 15년 만에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한국인이었다고 했다. “이 사람하고는 제대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치료사기 보다는 좋은 친구 같거든”하면서 희망적인 목소리를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회색빛 나라, 폭력적인 위탁 가정, 우리 목을 흙으로 채우고, 우리가 그걸 삼키는 법을 배우면 욕심이 많다고 비난하는 이 땅” 한국을 탈출했지만 미국에서도 엄마의 자체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제국군의 성노예로 끌려갔을 때 엄마도 일제 식민 지배하에 집과 땅을 일본에게 빼앗긴 채 온갖 강제노동에 착취되었다. 대부분 10대였는데 함부로 한국어를 사용하면 혀가 잘릴 수도 있었으므로 압제자의 언어를 말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야했다.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역사상 핵무기를 사용한 국가가 유일하게 미국이라는 나라였다. 미국의 ”대일전승기념일“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념일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허리에 38선을 그으면서 이북을 소련에 넘겨주고, 한국은 ”냉전 극장“이 시작되면서 대량살상 실험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도록 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사체만 300만 구라는 소름 끼치는 통계 아래에 전쟁 피해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만 갔다. 사망자 명단에도 올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사체가 심하게 훼손되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온 가족이 몰살당해 연고가 없게 돼버린 이들의 주검, 겉보기에는 자연사 같지만 실은 나라가 황폐화되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치하, 미국의 군사 헤게모니가 날로 기세를 떨치던 전후 기지촌에서 술을 팔고, 거기에서 성도 팔았을 젊은 여성의 모습을 연구하도록 했던 것은 두 번째 엄마였고, 이 연구를 끝내도록 했던 것은 세 번째 엄마였다. 한국에서의 추방을 시작으로 추방의 연속인 삶을 살아야했던 엄마는 식민 지배와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블루베리, 고사리, 버섯을 채집하느라 야산을 해매일 때는 그래도 엄마는 삶의 희망이 있었다. 만년에 조현병과 씨름하며 홈리스가 될 뻔했지만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엄마였다. 엄마의 집이 없어지고 임시 거처를 전전하거나, 오빠네와 우리 집에 같이 사는 등 늘 불안정한 삶에 놓여 있었던 이런 악순환이 된 폭력의 순환은 그레이스가 가족을 연구하고 자기 본인의 가족사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엄마의 기억을 떠올렸다. 영양이 부족한 엄마에게 분유를 건넸는데 분유는 “전쟁 같은 맛이야” 라면서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
엄마는 갓 지은 흰쌀밥에 마늘이랑 고춧가루를 풀어 얼큰하게 한 명태에 무를 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생태찌개를 좋아 했다. “이 맛을 40년 동안 못 봤지”하시는 것을 보면 고향의 그리움이 사무치도록 한으로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생태찌개에는 엄마의 갈망을 견디게 했던 외할머니의 손맛에 대한 기억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음식을 맛보며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으리라. 엄마는 김치가 먹고 싶어 양배추로 요리를 해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몇 시간씩 차를 타고 가서 배추를 구해서 쌀 한 가마니, 말린 콩, 고춧가루, 액젓, 굴소스, 새우젓, 신선한 콩나물로 요리를 만들었다. 엄마는 김치가 먹고 싶어 힘들고 괴로웠다고 했다. 미국 아이들에게는 김치대신 잡채를 준비하기도 하셨다. ”아이구, 답답으라!“고 하셨는데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엄마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적인 상황에 맞부딪치며 투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레이스가 김치를 먹을 때면 “안 매워, 그레이스야?” “오, 김치 잘 먹네! 착한 내 딸!” 이라며 기뻐하며 미소 짓는 엄마였다. 버섯과 고사리로 요리를 했고, 소고기에 미역을 넣고 국을 끓였다. 엄마는 원양어선을 탔던 나이 많은 아버지를 만났지만,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다 해줄 것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치즈버그 주세요”라는 영어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고 했다. 치즈버거는 영양실조 상태에서 미국인들이 냅킨과 담배꽁초에 남겨서 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엄마에게 치즈버거는 미국이 줄 수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징했던 것이다. 치즈버거는 엄마에게 병증인 동시에 치료법이었다.
엄마의 친정 오빠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실종되었고, 아버지는 암에 걸렸지만 치료할 곳도 없었고, 큰 언니 춘자 이모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기반 시설 부족, 식량 불안, 전후 생존자들의 고통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젊은 여성이 위암에 걸린 이유는 아마도 미군기지 쓰레기통에서 반쯤 먹다 버린 핫도그며 햄버거를 뒤져 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했던 한국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는 종전 후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거미랑 메뚜기 등을 먹었다고 했다, 또 어떤 때는 작은 새도 잡아서 불에 구워 먹었는데 살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기지촌으로 갔던 엄마는 미 해군기지에서 한국 소녀들에게 사탕과 향수를 주면서 손잡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들이 누리는 안락함에 감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삶이 먹을 것 없는 곳에서 사는 것보다 안락한 삶을 살 거라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보다는 식사 한 끼와 섹스를 교환하는 것, 음식을 암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다시 더 많은 음식을 사는 것, 음식보다 더 비싼 것을 사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성을 파는 것, 날마다 쌓여가는 빚더미 아래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 일들이었다. 명문가 여성이 아닌 다음에야, 젊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라곤 식모살이나 공장 아니면 미군 기지뿐이었던 시절이었다. 야망이 컸던 똑똑했던 엄마는 후자를 선택했을 거란 상상을 해본다. 결국 엄마는 전쟁 신부라고 불렀고, 사회가 더 경멸하는 미혼모였고, 기지촌 여성은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던 “외국인과 살을 섞은” 여성이었다.
오빠인 아들을 혼자 키우다가 아버지를 만나 내가 태어나자 엄마는 무척 좋아하셨다고 했다. 한국이 아닌 미국이라면 여자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컸다. 인종차별이라면 한국이 더 심했지만 고등학교 때 핀란드 이민자의 딸인 제니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 내 외모는 아빠랑 많이 닮았지만 백인들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는지 이들은 나의 외모를 보고 이들이 “칭크” “잽”이라고 불렀다. 성폭행은 친밀한 관계에서 당한다고 했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여성을 내 뜻대로 움직인다는 폭력을 행사하면 여성은 이런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도 문제다. 그레이스가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둔 여름 1년 동안 짝사랑했던 남자애의 집에 초대를 받고 그 애 집에 갔다. 친구는 대마초를 피우게 하더니 몽롱한 상태에 있는 그레이스에게 “성기를 빨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향해 “죽어버릴 거야!”소리쳤을 때 “아버지는 딸의 손을 비틀어 칼을 빼내고 엄마는 숨이 막혀 뒤로 물러서 있다가 결국 딸이 흘리는 눈물에 쓰러졌다.”이 사건 이후로 부모님과의 다툼과 첫 성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자살 시도를 할 뻔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학교폭력 가해자, 강간범, 외국인 혐오가들, 그리고 엄마가 겪은 온갖 부정행위를 생각하면 분노가 끓어오른다면서 20년, 30년이 지난 1986년을 그레이스는 엄마의 죽음이 시작된 해로 기억한다고 했다.
워싱턴주 셔헤일리스에서 살면서도 먹고사느라 애를 먹는 남녀노소에게 동점심을 느끼던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뉴저지주로 돌아갔던 날. 엄마가 입던 옷과 향수 비누를 보면서 3살 때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던 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짧게 자른 머리를 고데기로 스타일링 했고, 예쁜 고급 러플 블라우스와 정장 바지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엄마가 밤에 일한다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사람들이 너를 나한테서 떼어놓을지도 몰라.”이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지만 그 약속을 지켰다. 화장시킨 엄마의 유골을 오빠랑 반씩 나눠서 가져온 상자를 보고 엄마가 남긴 것이 고작 이것뿐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남겨준 것이 많았던 것이다. 아직도 “엄마가 남기고 간 속옷에서도 엄마 냄새가 났고, 슬픔의 물결이 다시 덮여 와서 “엄마! 엄마! 엄마!”이렇게 외쳐 보았다.”고 했다. “엄마, 다시 돌아와줘! 엄마!” 하니까 “그레이스야, 나 기억하지?”하며 엄마가 대답하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유령이었다고 하는 모습에서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게 만들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곳, 무능하고 폭력적인 남편이라도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지금은 내가 건강하기만 하면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해도 일한만큼 돈을 받는다. 틈틈이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배울 수 있고, 교회를 다니거나 취미활동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은 “고해의 바다”라 해도 내가 어떤 꿈을 꾸고 그 꿈을 잘 키워간다면 행복을 마음껏 담을 수도 있다. 『전쟁 같은 맛』이라는 책을 보면서 기지촌에서 몸을 팔던 여성, 특히 미혼모가 된 여성은 한국에서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좀 더 나은 미국으로 갔지만 밤에 자식을 돌보려고 몸을 팔아야하는 현실과 고향의 그리움에 마음이 답답했을 것이다. 침묵으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은 무의식에 씨앗처럼 심겨진 모양이다. 군자라는 여성은 병으로 시달린 남편과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많이 의지했던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던 군자라는 여인에게 잘 참고 잘 살아냈다고 힘찬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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