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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재외동포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가작
엘리엇
김태영
엘리엇의 생일이 다가왔다.
주말에, 진유는 스포츠용품 매장으로 갔다.
엘리엇은 박지성의 팬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와 모자를 샀다.
아홉 살 또래 아이들을 눈여겨보았다가 약간 큰 사이즈를 골랐다.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조끼를 샀다.
작년까지는 켈리에게도 같은 것을 사서 보냈다.
이제 열두 살, 사춘기 소녀에게 스포츠 웨어를 보내기가 뭣했다.
시내를 걸어 시청 쪽으로 올라갔다.
책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점을 지나쳤다.
악세사리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팬시용품점을 지나치고 말았다.
백화점에 다다랐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봐둔 것이 있었다.
케주얼 자켓이었다.
주황과 분홍의 중간색이었다.
물감으로나 크레파스로는 만들기 어려운, 파스텔로나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 애매한 색깔을 길이가 짧으면서 날렵한 디자인이 덮어주었다.
켈리가 좋아할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가격도 괜찮았다.
네거리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을 기다렸다.
건너편 신호등 아래에 백인 노부부가 서 있었다.
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유람선이 들어오는 날이면 가는 데마다 가슴에 표식을 단 노부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막연하게 바다를 떠돌다가 땅에 내린 노인들은 부지런히 걸어다녔다.
그들은 꼭, 손을 잡고 다녔다.
좋은 날씨였다.
대학교 쪽을 올려다보았다.
백팩을 맨 젊은이들 몇몇이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왔다.
충분한 가을인데 햇빛이 여전히 따가웠다.
낮에는 더운 듯하다가 해가 지면 야속하게 추웠다.
서너 사람 저편에 동양남자가, 아니 한국 남자가 서 있었다.
한국남자는 중국이나 일본 남자와는 완연히 달랐다.
촌스럽거나 못생기지 않았는데 왠지 후줄근하고 표정이 딱딱했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스카이 타워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눈살을 모았다.
남자의시선이 진유의 선글라스에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신호가 바뀌었다.
남자는 사람들 틈에 섞여 대각선으로 건너갔다.
급한 볼 일이 있는 사람처럼 팔을 저었다.
진유는 해마다 엘리엇의 생일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남편 친구의 사무실로 가져가면 그 친구가 서울로 보내주었다.
삼 년 만에, 작년에 처음으로 잘 받았다는 답장을 받았다.
엘리엇의 사진을 함께 보내왔다.
진유는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보았다.
지갑을 꺼낼 때마다 먼저 지갑에 뽀뽀했다.
진유가 엘리엇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10시 30분, 남십자성 유학원으로 갔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이마 위에 걸치고 있었다.
잠자리 눈처럼 크고 둥근 선글라스였다.
열두어 살 된 사내아이가 게임기를 들고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강부장의 소개로 여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여자는 몸을 반만 일으켰다.
여자는 샤넬 핸드백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자는 일어났다 앉으면서 빠르게 진유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선글라스도 샤넬이었다.
아이는 게임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이의 눈동자가 거의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아이는 입술을 핥으며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샤넬이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로 가면서 강부장에게서 서류파일과 봉투를 받았다.
주차장에서 샤넬은 스스럼없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이가 뒷자리에 올라탔다.
진유는 두 사람 모두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보고 시동을 걸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갔다.
학교에 도착했다.
11시 8분 전이었다.
약속이 되어있다고 하면서 비서에게 명함을 주었다.
11시 1분에 교감이 나타났다.
교감이 털이 수북한 손을 내밀었다. 진유는 악수를 했다.
진유는 샤넬과 아이를 교감에게 소개했다.
교감이 다시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교감의 두툼한 손이 샤넬의 손을 감싸쥐었다.
샤넬이 수줍어했다.
아이와도 악수를 했다.
교감실로 갔다.
진유가 파일을 건네주었다.
교감은 연필로 짚어가면서 서류를 살펴보았다.
서류를 보면서 교감은 진유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진유는 지난주에 아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고 대답했다.
교감은 학비가 든 봉투를 떼어내면서 좋은 엄마라고 말했다.
교감이 사인 할 곳을 가리키며 샤넬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사인을 하면서 샤넬이 작은 소리로 진유에게, 교감이 뭐라고 했는지 물었다.
아이가 착해보인다고, 좋은 엄마라고 하더라고 대답했다.
샤넬은 교감에게 땡큐, 했다.
교감과의 접견은 20분 만에 끝났다.
아이의 입학수속을 마쳤다.
학교는 자기들이 요구한 학비를 가져온 아이를 받아들였다.
교감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반대 순서로 악수를 했다.
학교에서는 현지실정에 밝으면서 소통에 문제가 없는 에이전트를 원했다.
유학원에서는 고객에게 여러 학교를 소개했다.
판단은 엄마가 했다.
소통이 원활치 못해 크고 작은 다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학교는 점점 단호해졌고 엄마들은 억지를 부렸다.
그때마다 유학원은 매끄럽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 틈새가 바로 진유의 존재 이유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진유의 교사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교감에게서 받은 리스트를 들고 유니폼 센터로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샤넬이 진유에게 이민 온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진유는 앞을 보면서 이십 년이라고 대답했다.
샤넬은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샤넬은 이십 년 세월과 진유의 유창한 영어를 가늠하고 있었다.
유니폼을 샀다.
문방구로 갔다.
학용품들을 보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사올 걸 그랬다면서, 앞으로는 그래야겠다고 말했다.
학용품을 샀다.
12시가 넘었다.
샤넬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진유에게 권했다.
서울식당으로 갔다.
샤넬은 스스로 자신를 소개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의 환경은 거의 비슷했다.
남편들은 거의 대부분 대기업 직원이거나 무슨 연구소의 연구원들이었다.
연구소가 그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강남이나 분당에서 온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를 꼭 먼저 밝혔다.
일산이나 안양에서 온 사람들은 묻지 않으면 먼저 말하지 않았다.
샤넬이 이것저것 물어왔다.
진유는 상대가 불쾌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비켜섰다.
잠시 진유의 유창한 영어에 홀린 상태였고, 며칠 후에 제정신이 들고난 그들이 어떻게 변해갈지 진유는 잘 알고 있었다.
업무과 관계없이 진유의 호의가 제대로 받아들여 진 적은 별로 없었다.
진유는 자기 영역 안에서만 일했다.
칼국수를 먹었다.
궁금한 일이 있으면 유학원으로 연락하라고 하고 샤넬과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휴대전화로 남십자성 강부장에게 수속을 마쳤다고 알렸다.
진유는 동쪽으로 갔다.
이민회사와의 약속이 있었다.
역시 학교였다.
일가족이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익은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직원이 고객을 소개했다. 부부와 두 딸이었다.
부인의 핸드백은 구찌였다.
학교 담당자를 만날 시간이 되자 아빠가 뒤로 물러섰다.
같이 가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남자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아빠는 직원과 운동장 언저리에 남았다.
진유는 직원에게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
직원들은 아빠들의 담배를 막지 못했다.
이십 여 분만에 수속을 마치고 나왔다.
직원에게 유니폼과 학용품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구찌가 진유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진유는 명함을 주었다.
직원이 자동차에 따라와서 봉투를 건네주었다.
문을 닫아주면서 눈웃음을 쳤다.
그는 초등학교때 부모와 함께 이민을 왔다.
섹스폰을 잘 불어서 교민행사에 자주 나왔다.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다.
한때 한국에 가서 원어민 영어강사를 했다.
돌아와서 몇 군데 교민업체에 몇 개월씩 다녔다.
그가 이민업무를 시작한 지는 일 년쯤 되었다.
주로 고객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학교 안내를 하고 시내구경을 시켜주었다.
공항에도 나갔다.
그것은 결혼 전의 남편과 흡사했다.
결혼 전, 남편은 이민회사의 직원이었다.
진유는 공립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남편은 고객들을 데리고 왔다.
본관 현관 앞에서 몇 번 마주쳤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매끈한 차림이었다.
가끔 지나는 길이라며 혼자서 왔다.
퇴근시간에 주차장에 서 있기도 했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함께 마셨다.
어느 날, 남편이 와인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두 사람은 젊은 남녀였다.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전에 없던 반대를 했다.
남편보다는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소문이 좋지 않았다.
진유는 개의치않았다.
임신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잘 생기고 자상한 남편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은 할 일 없는 어른들 사이에 돌아다녔다.
진유는 남편을 사랑했다.
결혼식장에서 부모님은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다.
진유의 학교 근처에 방 두 개짜리 집을 구했다.
남동생이 한국의 무역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부모님은 주변을 정리해서 동생과 함께 떠났다.
떠나기 전에 뷔페에서 만났다.
엄마는 잘 살라고 했고, 진유는 잘 살겠다고 했다.
아빠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정부가 새로운 이민제도를 내놓았다.
돈을 가지고 와서 사업을 하면 그 실적을 보고 영주권을 주겠다는 제도였다.
한국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보였다.
남편은 흔치 않은 기회라고 했다.
기회가 왔을 때 돈을 벌자고 했다.
직접 한국으로 나가서 영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삼 년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엘리엇이 태어났다.
진유는 갓난아기를 안고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의 집에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결혼 전, 시어머니는 불쌍한 아이라고만 했고, 교회에 다니는 시어머니가 좋은 일을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여자아이는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네 살이었다.
켈리였다.
켈리가 남편을 아빠라고 불렀다.
불에 달군 쇳덩이를 손에 쥔 듯이 놀라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어머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떠올랐다.
진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남편이 요람 속에서 잠든 엘리엇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켈리가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시어머니는 절대로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남편이 한국으로 떠났다.
진유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진유는 학교에 나갔다.
돌아와서 유학생들에게 영어와 과학 과외를 했다.
오르막길을 갈 때 자동차가 힘들어했다.
앞 유리창 한쪽에 엔진오일을 교환할 거리를 적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삼천 킬로미터가 넘어있었다.
진유의 자동차는 칠 년 된 토요타 캠리였다.
단골 정비소로 갔다.
정비소에서는 이것저것 상태를 확인하고 엔젠오일을 갈아주었다.
자동차가 리프트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진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서 교민신문을 보고 있었다.
소파는 좁고 테이블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남자가 신문을 들고 책상으로 옮겨 앉았다.
옮겨 앉으면서 진유를 쳐다보았다.
눈살을 모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유는 첫눈에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금방, 지난 주말에 시내 횡단보도에서 보았던 후줄근한 남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남자가 사장에게, 아직 멀었느냐고 짜증스럽게 재촉했다.
사장은 퉁명스럽게, 홀아비가 뭐가 바쁘냐고 대꾸했다.
진유의 자동차가 리프트에서 내려왔다.
이십 분 가량 걸렸다.
앞유리 오른쪽 상단에 새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진유가 먼저 일어났다.
며칠 후,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야 기억이 제대로 났다는 것이 용건이었다.
남편을 통해서 이민수속을 했고 진유가 임시로 지낼 집을 구해주었었다.
진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잘 지내시느냐고 묻는 남자와 그 주말에, 커피를 함께 마셨다.
어음 기일도 없고 뒷돈도 없고 접대도 없고 파업도 없는 곳에서 남자는 먹고 사느라고 못했던 일들을 실컷 했다.
아침에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가 주고 와서 다리를 쭉 뻗고 책을 읽었다.
점심 때 혼자 라면을 먹고 나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오래 된 영화를 보았다.
오후에 딸아이를 데려다 놓고 낮잠을 잤다.
심심하면 바닷가에 가서 낚시를 했다.
다음 주말에 진유는 남자와 같이 트래킹을 했다.
낚시도 한 번 따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해변가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그날, 남자는 진유에게 자기 집 차고 리모콘을 주었다.
남자가 주어서 진유는 받았다.
받아서 핸드백에 넣었다.
넣은 채 다녔다.
솔직히 꼭 한 번, 몰래 남자의 집 앞에 가서 리모콘을 눌러보았다.
차고 문이 덜컥 움직였다.
얼른 다시 눌렀다.
도망치듯 돌아왔다.
남편은 돈을 보내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득이 드러나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는 이유를 대다가 나중에는 한국에서 아파트를 사두었고 돌아갈 때 팔면 돈이 된다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생활비는 진유의 월급과 과외 수입으로 충당했다.
살림을 주로 하는 시어머니가 은행카드를 관리했다.
시어머니는 늘 징징거렸다.
남편은 방학 때에는 꼭 오겠다던 약속도 잘 지키지 않았다.
첫 해에 열흘 다녀갔다.
그것이 모두였다.
전화를 하면 남편은 항상 바쁘다고 했다.
삼 년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이민제도를 악용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가 아이들 학비 혜택만 받고 돌아가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그럴 생각으로 오는 사람까지 생겼다.
이민법이 바뀌었다.
정부에서는 상향 조정된 영어점수를 요구하면서 조건을 까다롭게 했다.
남편은 그래서 고객이 줄고 일이 어려워졌다면서, 못해먹겠다고 했다.
사람도, 돈도 오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한국에 갔다.
큰댁 조카 결혼식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자리라고 했다.
가는 길에 장손을 친척들에게 보여주어야겠다면서 시어머니는 엘리엇을 데리고 나섰다.
시어머니는 켈리를 남겨두었다.
한 달이 지나서, 시어머니 대신 남편이 왔다.
집에는 오지 않고 호텔 커피숖으로 진유를 불러냈다.
머리는 여전히 기름을 발라 반들거렸다.
악어가죽무늬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몸에 꼭 맞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커피숖에서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당당했다. 너무 당당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남자 앞에서 진유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사랑해주세요, 제발 사랑해 주세요, 라는 말 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대신 엘리엇은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남편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도리어 켈리를 키우는 것이 어떠냐고 되물었다.
진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유가 한 발자국 다가서면 켈리는 한걸음 물러섰다.
어쩌다 진유가 끌어안으면 켈리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끼워 넣었다.
무엇이든 먼저 엘리엇 앞에 밀어놓았다.
동생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때서야 진유 눈치를 보면서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도 엘리엇이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돌려줄 준비를 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지고 싶으면 가지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켈리는 진유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은 눈앞에서 손목을 꺾어 시계를 보았다.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또 연락하지.
남편은 돌아서서 나갔다.
며칠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켈리를 데리러였다.
진유는 다시 한 번 엘리엇을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남편은 당연히 거절했다.
진유는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두 손을 짚은 채 울었다.
남편은 진유의 앞을 지나쳐갔다.
한 손으로 켈리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에 켈리의 여권을 들고 나갔다.
진유는 두 아이를 빼앗겼다.
아이를 찾아 한국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그들 앞에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을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한국의 부모님들에게는 더더욱 갈 수 없었다.
진유는 학교에 사표를 냈다.
은행 대출이 대부분인 집을 처분했다.
집안에 있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버렸다.
시골로 갔다.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반납한 책들을 트롤리에 싣고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제 자리를 찾아 꽂았다.
낡은 표지에 셀로판지를 붙였다.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이 요구하는 책들을 챙겨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한국 소설을 읽었다.
그곳에서 일 년을 지냈다.
달라졌으면 했는데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냥 흘려보내는 나날이었다.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복직을 할까 하다가, 생각 끝에 그만두었다.
동떨어져있던 자신을 생활 속으로 밀어넣었다.
교민신문에 광고를 내서 한국 아이들에게 과외를 했다.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서 가르쳤다.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몇몇 유학원과 이민회사에서 진유를 찾았다.
통역이나 번역 일거리를 주었다.
입학수속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조사장이 찾아왔다.
한때 남편의 동업자였다.
누군가에게 주소를 알려준 기억이 났다.
조사장은 남편이 돈을 빼돌리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보았다면서, 미리 짜고 한 일이 아니냐고 진유를 다그쳤다.
말투와 태도가 상스럽고 거칠었다.
조사장이 갑자기 테이블을 뛰어넘어 진유에게 달겨들었다.
커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눈을 질끈 감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움츠렸다.
반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밀쳐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티셔츠를 벗길 때 팔을 들었다.
씩씩거리면서 바지를 끌어내릴 때 엉덩이를 들었다.
조사장은 허겁지겁 아무 데나 더듬거렸다.
옷을 입은 채, 앞만 벌린 채 진유에게 엎어졌다.
허둥대다가 어느새 진저리를 치면서 떨어져나갔다.
고통도 느낌도 없었다.
입냄새 뿐이었다.
조사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다리 사이에 정액이 흘러내렸다.
식탁 위에 백 불이 놓여있었다.
그 자리에 두었다.
다시 오지 않았다.
시내에서 마주쳤을 때, 조사장이 먼저 외면했다.
새로 이민 온 가족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자는 입학수속을 마치고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진유는 이민회사에 말하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속았다며, 이럴 수가 있느냐며 진유에게 언성을 높였다.
진유가 늘 겪는 일이었다.
새 이민자들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이민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민회사들은 선을 그었다.
추가비용을 요구했다.
새로 온 이민자는 약속과 다르다며 따졌고, 회사는 심부름센터가 아니라고 버텼다. 한쪽에서는 사기꾼이라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촌놈들이라고 했다.
흔한 다툼이었다.
진유는 바쁘다고 했다.
여자가, 이를 어쩌냐고 되물었다.
대단찮은 일이었다.
전기회사에 전화를 거는 일과 인터넷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일주일만 살아보면 아니, 교민잡지만 잘 들여다보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뼘 두께 담 너머를 모를 때 막연하고 답답했다.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겁이 나고 어느새 바보가 되어 버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럴 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둘러서있던 식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백 불을 꺼내 테이블 위에 턱, 내려놓았다.
진유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돈을 쳐다보지 않고 일어서서 나왔다.
언제나처럼, 또 후회했다.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에.”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저에요.”
진유는 잠을 깨운 것을 후회했다.
“웬일로····.”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에서 반가움이 전해져왔다.
진유는 저녁에 집으로 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아서 전화를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는 가슴이 뛰었다.
“평일인데·····.”
진유는 괜찮다고 말했다.
남자는, 괜찮으시다면 좋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받았다.
진유가,
“저녁식사는 제가 준비했으면 하는데요.”
“저야, 고맙지만·····.”
남자는 청소를 했다.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빈 학교에 가서 막대걸레로 교실 바닥을 쓸어내고 진공청소기를 메고 교무실과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방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새 봉투로 갈아 끼웠다.
교직원 화장실 변기에 약품을 뿌려 솔로 문질러 닦았다.
가끔 세면대 벽에 걸린 통을 열어 비누액을 채웠다.
핸드타월과 화장지를 갈아 끼웠다.
종이 재활용 상자는 남자의 일이 아니었다.
혼자서 네 시간 걸렸다.
진유는 마켓으로 갔다.
돼지고기와 훈제 연어를 샀다.
식용유를 샀다.
소스 몇 가지를 샀다.
이것저거 살 것이 많았다.
그것들 말고도 사고 싶은 것이 많았다.
오랜 만에 돈을 썼다.
산 것들을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걸어서 쇼핑몰로 갔다.
주차장에 빈 자리가 많았다.
우체국으로 가서 공과금을 냈다.
커피숖을 지나갔다.
낯익은 아르바이트생이 인사를 했다.
옷가게의 진열장을 보면서 지나갔다.
가을이 깊어서 두터운 옷들이 많았다.
진유는 속옷가게로 갔다.
한참 고르다가, 검은색 브라와 팬티를 샀다.
북쪽 학생 집으로 가서 과외를 했다.
이민 온 지 이년 된 중학생이었다.
수학은 전교 일등인데 영어가 통 늘지 않는 아이였다.
특히 에세이를 어려워했다.
어휘가 많이 부족했다.
갈 때마다 단어 30개씩 외우도록 숙제로 내주었다.
문장도 외우게 했다.
동화책을 소리내서 읽도록 했다.
아이는 착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양념과 밑반찬 몇 가지를 더 챙겼다.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모서리를 쳐다보았다.
긁힌 생채기가 눈에 띄었다.
그림을 쳐다보았다.
액자가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샤워를 했다.
샤워기 아래에 한참동안 서 있었다.
머리를 말렸다.
향수를 쓰려다가, 그만두었다.
새로 산 속옷을 입었다.
남자의 집은 단층이었다.
울타리 안쪽에 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울타리 끝에 번지수가 적힌 우체통이 세워져 있었다.
거실인 듯, 불이 켜져 있었다.
큰길에서 리모콘을 눌렀다.
차고 문이 올라갔다.
차고 한쪽 벽에 신발장이 있었다.
그 옆에 낚시가방이 세워져 있었다.
시동을 끄고 차고 문을 내렸다.
계단에 남자가 서 있었다.
회색 면바지와 흰 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길을 비켜주는 시늉을 하면서, 남자가 웃었다.
웃고 나서 어울리지 않게, 인사를 했다.
남자가 진유에게 집안을 구경시켜주었다.
가장 안쪽이 부부의 공간이었다.
침실과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 그리고 옷장을 겸한 탈의실이 있었다.
침대가 잘 정돈되어있었다.
화장실 바닥에 물기가 없었다.
옷장은 많이 비어있었다.
다음은 메인화장실이었다.
안쪽에 욕조가 있었다.
오른쪽에 세면대가 있었다.
왼쪽에 좌변기가 있었다.
둘은 마주보고 있었다.
세면대 거울에 좌변기가 비쳤다.
‘공부중’ 이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다.
짐작대로 딸이 쓰던 방이었다.
책상 위에는 책 몇 권과 연습장이 놓여 있었고 연필통에는 색색의 필기구가 꽂혀 있었다.
붙박이장에 겉옷 몇 벌이 걸려있었다.
거실과 붙은 침실을 남자가 쓰고 있었다.
책상과 책장과 침대가 있었다.
책상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의자 팔걸이에 운동복이 걸려있었다.
거실에 소파와 텔레비전과 오디오세트가 있었다.
주방은 급히 정리한 흔적이 역력했다.
진유는 가져간 앞치마를 꺼내입었다.
밥을 안쳤다.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두부를 부쳤다.
훈제 연어를 얇게 썰어놓았다.
양배추를 가늘게 썰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시어머니도 없고 시누이도 없고 명절도 없고 촌지도 없는 곳에서 남자의 아내는 살림 사느라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아내는 화장을 했다.
한참 옷을 골라입고 나갔다.
골프장에 갔다.
사람들과 점심 내기를 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초원식당이나 강남가든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에 사는 엄마와 쇼핑몰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한국식품점이나 수퍼마켓에도 들렸다.
매주 목요일 오전에는 양노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아내는 늘 바빴다.
밥이 다 되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남자가 와인을 권했다.
진유는, 사양했다.
양념이 아쉬웠지만 찌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진유가 가져온 밑반찬이 아쉬움을 채워주었다.
남자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골고루 먹는데, 양이 적었다.
머스터드소스에 찍어먹는 훈제연어를 특히 잘 먹었다.
진유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남자는 커피를 탔다.
그릇이 몇 개 되지 않아 설거지를 금방 마쳤다.
앞치마를 벗고 손을 씻었다.
남자가 양 손에 커피를 들고 안방으로 갔다.
진유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거기에 어둠이 있었다.
남자가 창문을 약간 열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진유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창밖의 어둠 속에서 밀물과 요트를 찾아냈다.
밀물과 요트를 지나 시선을 멀리 보냈다.
거기에 도심의 불빛이 있었다.
화려하고 휘황했다.
진유는 버거움을 느꼈다.
시선을 거두었다.
딸깍, 소리가 났다.
남자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진유는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윤곽이 시야를 가릴 때, 진유는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자가 진유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진유는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진유의 머리를 감싸서, 안았다.
뺨에 단추가 닿았다.
억누른, 불규칙한 호흡이 느껴졌다.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어려웠다.
진유는 양 팔을 들어 남자의 허리를 감았다.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렵지는 않았다.
남자의 두 손이 진유의 팔을 쓰다듬으며 내려왔다.
남자가 진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유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진유는 남자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남자는 발끝에서부터 진유를 찾아왔다.
진유가 샤워를 하면서 몸을 씻는 반대순서였다.
남자는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진유를 찾았다.
블라우스가 풀어지고 스커트가 말려 올라갔다.
남자는 깊은 숲속을 가듯 오랫동안 옷 속에서 헤맸다.
진유가 침대 위에 쓰러졌다.
어느새 옷이 벗겨져 있었다.
새로 사서 입고 온 속옷이 떨어져 나갔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긴장했는데 초조하지 않았다.
창문이 열려 있는데 춥지 않았다.
밀물도 요트도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 회색의 하늘이 보였다.
남자는 조심스러워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남자의 몸에서 땀이 났다
진유는 몸을 활짝 열어 남자를 한껏 받아들였다.
진유의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남자가 진유의 목덜미를 물었다.
진유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났다.
진유는 서러운 기억을 떨쳐냈다.
고개를 젖혔다.
눈물이 거꾸로 흘렀다.
진유는 자신이 불쌍하지 않았다.
남자는 진유를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는 손으로 느끼지 못한 진유를 찾으려는 듯, 많이 닿게 하려고 비비면서 몸을 붙어왔다.
다시 진유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먼저보다 더 많이, 온 몸에 돋아났다.
진유는 남자의 목에 힘껏 매달렸다.
남자의 몸이 팽팽해졌다.
엄마가 왔다.
엄마는 공항에서 호텔로 곧장 갔다.
아버지 몰래 왔다면서 엄마가 흐느꼈다.
진유의 양말에 구멍이 나있었다.
엄마는 울었다.
“젊은 년이, 새파랗게 젊은 년이····.”
진유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엄마가 활짝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면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남자는 한 팔로 진유를 안은 채 스탠드 불빛 아래에 들어가다시피 하여 책을 읽고 있었다.
돋보기를 쓰고 있었다.
진유의 기척에 남자가 읽던 책을 가슴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진유 쪽으로 돌렸다.
남자는 진유를 다독여 주었다.
씨익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많이 생겼다.
진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다.
창밖은 묽은 잉크색이었다.
스탠드가 켜진 채였다.
남자의 돋보기가 기울어져 코 끝에 매달려 있었다.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진유는 남자의 팔에서 벗어났다.
담요 속에서 빠져나왔다.
유리창에 진유의 발그스레한 몸이 비쳤다.
남자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차고 문을 열었다.
시동을 걸고 전조등을 켰다.
남자의 구형 클라이슬러 찦 바로 뒤까지 후진했다.
리모콘을 누르고 드라이브웨이를 향해 핸들을 꺾었다.
울타리 밑에서 몸통이 검고 부리가 주황색인 주먹만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차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길 위에 엷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가로등들이 안개 속으로 이어졌다.
운전을 하면서 핸드백에서 리모콘을 꺼냈다.
머리 위 햇빛가리개에 꽂았다.
뺨을 만져보았다.
촉촉했다.
핸들을 잡은 손등을 쓰다듬어보았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아랫배를 문질러보았다.
편안했다.
일찍 출근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진유를 추월해갔다.
빨간 후미등이 빠르게 달아났다.
도심을 향한 고속도로가 안개 속으로 뻗어갔다.
저 뒤에서 불빛 두 개가 쫓아왔다.
남자는 오후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학교로 갔다.
돌아와서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털면서 냉장고 안을 기웃거렸다.
즉석 육개장이나 된장국에 찬밥을 말아먹었다. 설거지를 하고나서 집안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렸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책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다시 거실로 나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아니면 "로마의 휴일”같은 오래된 영화를 보았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깜짝 놀라며 깼다.
남자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
그건 진유도 같았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표를 쓰는 사람들처럼 같은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날, 별다른 약속이 없었다.
오전에, 얼마 전 꼭 좀 만났으면 한다면서 전화를 해온 학원으로 갔다.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원장과 수업시간과 급여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유는 수퍼마켓으로 갔다.
수첩에 적어둔 대로 식료품들을 샀다.
진유는 집으로 갔다.
집에 있던 양념과 마른반찬들을 상자에 담았다.
나가려다 돌아서서 찬장을 뒤졌다.
저울 옆에서 엄마가 아침마다 한 숟갈 씩 꼭 챙겨 먹으라고 가져왔던 홍삼엑기스를 찾았다.
그것도 상자에 담았다.
엘리엇이 엄마! 하고 불렀다.
남자의 집 빈 방이었다.
거기에 낯익은 침대와 책상,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바닥에 잔뜩 늘어놓은 장난감들 가운데 엘리엇이 앉아 있었다.
말꼬리를 약간 올려서 엘리엇이, 엄마! 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하아! 하고 웃었다.
진유를 닮은 통통한 볼이 발그레했다.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진유는 상자를 가슴에 안고 자동차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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