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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 서머셋 모옴
선장은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간신히 집어 넣었다. 주머니가 앞쪽으로 붙은데다 그는 아주 비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은시계를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키를 잡고 있는 카나카 원주민은 그를 슬쩍 보았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선장의 눈이 다가가고 있는 섬에 가 멎었다. 하얀 물거품 한 줄기가 산호초의 소재를 뚜렷하게 알리고 있었다. 그는 배를 통과시킬 수 있을 만큼 널찍한 통로가 산호초 사이에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가갈수록 자세히 보일 것이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한 시간 가량 남았다. 산호초 안쪽은 물이 깊어서 편하게 닻을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벌써 야자수 사이로 모습을 나타낸 마을 추장은 항해사의 친한 친구였으므로, 오늘밤 상륙 역시 유쾌할 것이다.
바로 그때 항해사가 다가왔다.
선장은 그에게 말했다.
"술을 한 병 가지고 상륙하도록 해. 아가씨들도 데려와 춤을 추고 말야."
"입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카나카 원주민이었다. 살갗이 검은 데다가 몸매가 단단해서 마치 로마제국 말기의 황제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다소 뚱뚱해지려는 기미가 보였으나 얼굴 윤곽은 뚜렷하고 말쑥했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선장은 쌍안경을 눈으로 가져가며 대꾸했다.
"이상하군.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이봐, 사람 하나를 돛대에 올려 보내 살펴보도록 해야겠어."
항해사는 선원 중 하나를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선장은 돛대를 향해 기어올라가는 카나카 원주민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카나카 원주민은 높은 파도가 이어져 있을 뿐 입구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장은 마치 본토박이처럼 사모아 원주민 말을 구사했는데 느닷없이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냥 저 위에 계속 있으라고 할까요?"
항해사가 물었다.
"도대체 저 녀석 할 줄 아는게 뭐야."
선장은 말했다.
"얼간이 같은 녀석, 뭐 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몰라. 내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지. 내가 저 위에 올라가면 당장 찾아내고 말 텐데, 제기랄."
그는 화가나서 가느다란 돛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야자수에 올라가 살다시피 한 원주민이라면 모르지만 뚱뚱하고 둔한 몸을 가진 그로서는 물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내려와!"
그가 소리쳤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죽은 강아지만도 못한 놈. 할 수 없지, 입구가 보일 때까지 산호초를 따라 좀 돌아 보는 수밖에."
그 배는 석유 발동기 보조 기관을 장착한 70톤짜리 범선이었다. 맞바람만 없으면 시속 4-5노트로는 항해할 수 있었다. 훨씬 전에는 하얀 색으로 칠을 했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얼룩이 져서 말할 수 없이 더러웠으며 몹시 초라해 보였다. 석유 냄새와 언제나 화물로 싣고 있는 코프라 냄새가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산호초에서 100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을 배는 항해하고 있었다. 선장은 기관사에게 입구가 발견될 때까지 산호초를 따라 계속 돌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몇마일쯤 달렸을 무렵 그는 자신의 배가 입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배를 돌리도록 해 다시 한 번 천천히 되돌아갔다. 산호초의 물결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날은 점차 어두워졌다.
선장은 바보같은 선원들을 원망하며 이튿날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서 정박할 수는 없으니 배를 돌려라."
배가 조금씩 바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해가 지고 말았다.
그들은 닻을 내렸다. 배는 균형을 잃고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에이피아 사람들은 얼마 안있어 그 배가 뒤집어져 타고 있던 사람들이 죽을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선주는 매우 큰 상점을 경영하고 있는 독일계 미국인인데 그 또한 제 아무리 많은 금상자를 실어주더라도 이 배만은 탈 생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덕지덕지 때가 묻은 누더기 같은 흰 바지에 얇은 흰 셔츠만 입은 중국인 요리사가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왔다. 푸른빛의 작업복 바지와 소매 없는 러닝셔츠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손목까지 문신을 한 팔뚝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제기랄,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다니."
선장이 투덜거렸다.
기관사는 아무말도 않았다. 두 사람 다 조용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선실에는 희미한 석유 램프가 흐르고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살구 통조림을 먹고 나자 중국인이 차를 날라 왔다.
선장은 여송연에 불을 붙이고는 갑판으로 나갔다.
섬은 밤하늘 아래 까만 하나의 물체가 되어 가로놓여 있었다. 별이 매우 아름다웠다. 파도소리가 여기저기 쉴새없이 들렸다.
선장은 힘없이 갑판 의자에 기댄 채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잠시 후 선원 서너 명 올라와 걸터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밴조를 들고, 한 사람은 콘서티나를 가지고나와서 연주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노래를 했다. 이런 악기에 맞춰서 들으니 원주민의 노래가 아주 이국적으로 들렸다.
이윽고 두 사내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쉴새없이 움직여야 할 만큼 손발을 빨리 움직였는데, 아주 원시적이고 관능적이었다. 몹시 육감적인, 그러나 그것은 정열을 동반하지 않은 관능이었다. 겉으로는 동물적인 것을 느끼게 하지만, 신비가 느껴지지 않은 이상야릇함, 바꿔 말하면 거의 어린애 수준인 천진함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도 피로에 지쳐 갑판에 누워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러자 주위는 아주 조용해졌다.
선장은 따분한 듯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선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열대야 때문에 그는 숨이 가빴다.
다음날 아침, 고요한 바다에 해가 떠오르자 어제 발견하지 못했던 산호초의 입구가 바로 동쪽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범선은 산호초 가운데로 들어갔다. 바다는 파도 하나 없었다. 산호초 사이를 깊숙이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물고기떼가 보였다.
선장은 닻을 내리고 아침 식사를 끝낸 뒤 갑판으로 나왔다.
구름 한점 없는 태양이 빛나고 있었으나, 아직 아침이라 공기는 상쾌하고 시원했다.
일요일이었다. 조용한, 모든 것이 휴식을 쉬고 있는 것 같은 고요가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푸른 나무에 덮인 해안을 보며 그는 나른하고 유쾌한 기분에 잠겼다.
잠시 후 잔잔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나는가 싶더니 그는 피우던 담배 꽁초를 바다에 휙 내던지며 말했다.
"상륙하겠다. 보트를 내려라."
그는 비척비척 사다리를 내려가서 보트를 타고 작은 만으로 향했다.
가로수로 심은 것도 아닌데 야자수가 자연스럽게 규칙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가에까지 죽 뻗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숙한, 그러면서도 들뜬 노처녀의 발레와도 같은 운치로, 지나간 시절의 야릇한 웃음을 회상하게 하는 그런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어 어느새 넓은 샛강의 가장자리까지 나왔다.
그곳에는 야자수를 통째로 열 개쯤 길게 이어 만든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 야자수들은 단지 다른 야자수의 나뭇가지를 강바닥에 거꾸로 꽂아 그것이 받침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둥글면서도 폭이 좁은, 미끄러지기 쉬운 통나무 위를 건너려면 조심스런 발디딤과 강단이 필요했다.
선장은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맞은편 숲사이로 서 있는 백인의 집이 보였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주의깊게 발 밑을 보면서, 통나무와 통나무를 이은 곳의 높낮이가 불규칙할 때마다 조금씩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마지막 통나무에 이르러 마침내 땅바닥에 발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너는 데만 열중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지요. 특히 이런 다리는."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보았던 그 집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머뭇거리는 것 같아서..."
사내는 입가에 웃음을 보이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농담이겠지요."
이제 자신감이 생긴 선장이 대답했다.
"실은 나도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진 적이 있소. 그래, 밤이었소.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총을 비롯한 모든 짐들을 모두 든 채 말이요.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에게 총을 맡기고 건넌다오."
그는 아무리 잘 쳐주어도 젊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염이 반쯤이나 하얀데다가 아주 야윈 사나이였다.
민소매 셔츠에 진바지, 구두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다가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닐슨씨가 맞나요?"
선장이 물었다.
"그렇소만."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살고 계시리라고 짐작했죠."
그는 선장을 작은 방갈로로 안내했다.
선장은 그가 권하는 대로 의자 깊숙이 몸을 실었다. 닐슨이 위스키와 컵을 가지러간 틈을 타 방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놀랐다. 그토록 많은 장서를 그는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책꽂이가 사방 모두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데 거기에는 책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또 커다란 피아노 위에는 악보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여러 가지 잡지들도 흩어져 있었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닐슨이 괴짜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꽤 오래전에 섬에 왔는데 그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다만 그를 좀 아는 사람들은 그가 괴짜라는 것에 누구 하나 이론을 달지 않았다.
그는 스웨덴 사람이었다.
닐슨이 돌아오자 선장은 말했다.
"책이 아주 많군요."
"책이라면 해를 끼치지 않고 안전하니까."
미소를 지으며 그는 대답했다.
"모두 읽은 책입니까?"
선장이 물었다.
"거의 대부분은."
"나도 책을 좋아합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를 오래도록 구독하고 있지요."
닐슨은 독한 위스키 한 잔을 손님에게 건넨 뒤 담배를 권했다.
선장은 그가 처한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도착했습니다만, 입구를 찾지 못해 외곽에서 닻을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이쪽으로 항해한 적은 없습니다만, 거래처에서 이쪽으로 보내는 화물이 있다고 해서... 그렇지, 그레이라는 사나이를 아십니까?"
"네, 저쪽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나이지요."
"그 사람이 통조림 주문을 많이 합니다. 게다가 이곳에 코프라가 있다고 해서요. 아무튼 회사 쪽에서는 제가 에이피아에서 빈둥거리게 두느니 이쪽으로 보내서 일을 시키자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나는 대부분 에이피아와 파고파고를 왕복하고 있는데 그쪽은 지금 한창 천연두가 도는 바람에 장사가 형편없습니다.."
닐슨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뭔가 이상해서 선장이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선장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집이군요."
"열심히 가꾸는 편입니다."
"숲을 잘 만드셨군요. 훌륭합니다. 코프라 값이 아주 좋으니까. 나도 예전에는 숲을 조금 가꾸어 보았습니다. 우폴루에서였는데, 하지만 그것도 팔아버렸죠."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무수한 책들이 알 수 없는 적개심 같은 것을 내보이는 듯 여겨졌다.
"그런데 조금 외로울 것 같군요."
선장은 말했다.
"익숙해졌습니다. 이곳에 온 지도 25년이나 되었으니까요."
선장은 묵묵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닐슨 역시 침묵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손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6피트쯤 될까, 체격이 좋은 사나이였다. 천연두 자국이 있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가느다란 혈관들이 푸른 그물처럼 얽혀 있고, 눈, 코, 입, 모든것이 뚱뚱한 살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 역시 살 속에 파묻혀 있었다. 머리는 완전히 벗겨져 뒤통수에만 거의 백발이 된 긴 곱슬머리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총명함을 느끼게 할 큼직하고 번쩍이는 이마였지만 그는 오히려 반대로 바보 같은 느낌이었다. 파란 플란넬 셔츠와 몹시 낡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는 깃이 벌어져 텁수룩한 붉은 가슴털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뚱뚱한 배를 불룩 내밀고는 역시 뚱뚱한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여간 단정치 못한 게 아니었다. 탄력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젊었을 때는 도대체 어떤 사나이였을까. 닐슨은 느닷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피둥피둥 부어오른 사니이에게도 즐거운 소년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선장이 위스키 한 잔을 다 마셔버리자 닐슨은 병을 그쪽으로 밀어주었다.
"자, 자작으로 합시다."
선장은 몸을 내밀어 커다란 손으로 병을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오셨습니까?"
선장이 물었다.
"글쎄요. 건강을 위해서였죠. 폐가 나빠서 1년도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었는데 지금은 아주 건강하다오."
"아니, 내 말은 왜 이런 곳에다 살 곳을 정했느냐, 그 말입니다."
"글쎄, 음 나는 좀 감상적인 편이오."
"하하하..."
선장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의 검은 눈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아마 바보같아 보이는 선장의 모습이 도리어 그에게 말을 계속하고 싶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당신은 다리를 건널 때 균형을 잡느라고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래봬도 여기는 아주 깨끗하고 좋은 곳이라오."
"네, 정말 훌륭한 집입니다."
"아아. 그런데 말이오. 처음에 여기에 정착하려 했을 때 이런 집은 없었소. 원주민의 움막이 한 채 있었을 뿐이오. 벌집처럼 생긴 지붕과 기둥, 빨간 꽃이 피는 울창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며, 주위에는 풀이 무성했지요. 저기 노랗고 빨간 금빛 잎사귀를 가진 저 나무 말이오. 저것이 무슨 무늬처럼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지요. 거기에 주위는 온통 야자수 숲이었는데 마치 여자처럼 새침하게 생긴 야자수가 물가에 서서 종일 자기의 그림자를 즐기고 있는 듯했어요. 그때는 나도 젊었다오. 25년 전이나까. 나는 생각했죠. 어차피 어두운 흙 속으로 들어갈 텐데 사는 동안만이라도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누리자고, 그 때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곳은 달리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요. 한 번 본 순간부터 완전히 매혹된 거지요. 울고 싶을 정도였어요. 아무튼 그 때 내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거든. 되도록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죽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곳이 조금은 차분하게 나의 운명을 맞이해주는 듯한 생각이 들었소. 이 섬으로 옮겨왔을 때는 그때까지의 내 생활, 스톡홀름이나 그곳의 대학, 그리고 본에서의 생활, 그런 것들이 갑자기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오. 모든 것이 남의 일같이 생각되어 그 박사니 뭐니 하는 자들이 열중해서 토의하는 그 '실재' 라는 것이 비로소 확실하게 내 것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1년, 앞으로 1년이다. 1년이 지나면 나는 죽는다 하고 말이오. 스물다섯 살이라면 어리석은 감상에 젖어들 나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인간은 오십이 되어야 비로소 현명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 시시한 얘기니까 마셔요."
그는 야원 손울 들어 병을 가리켰다.
선장은 컵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위스키 병을 잡으면서
"당신은 왜 조금도 마시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오."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물론 나도 취하기는 하죠. 좀더 고상하게 취하고 있는 셈이지만 결국 그것도 허무하긴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효력은 이것보다 훨씬 길고 좋으며 뒷맛이 개운한 것만은 확실해요."
"미국에서는 코카인을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더군요."
선장이 말했다.
닐슨은 코웃음을 쳤다.
"사실 백인은 나에겐 아주 귀한 손님이오. 오늘만은 위스키를 조금 마신다해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컵에 술을 조금 따르고 소다수를 넣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한참 지나는 동안에 알았소. 어째서 이곳이 이 세상답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 말이오. 이를테면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이곳에 사랑이 그 발을 멎게 한 일이 있었다오. 저 철새가 대양 한복판의 배 위에서 잠시 동안이지만 피곤한 날개를 쉬듯이 말이오. 내가 떠나온 고향에는 5월이 되면 목장에 산지나무의 향기가 풍기고 있듯이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여기에도 풍기고 있었소. 사람이 사랑을 했거나 고통스러워한 장소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미한 향기 같은 것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그러한 장소는 무언가 신비한 영혼의 힘을 얻어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닿는 것으로 생각되요. 이같은 생각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미소를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즉 이 장소는 말이오, 두 사람의 연인이 매우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웠던 곳이오. 그래서 내겐 이곳이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었소."
그는 양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어쩌면 나의 심미감에 대한 자만이었는지도 모르지. 청춘의 사랑과 그것에 어울리는 환경이 멋있게 어우러졌다는 오직 그것만으로 말이오."
그는 닐슨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선장처럼 머리가 둔한 사나이가 아니었더라도 사내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쩐지 자기의 말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그의 감정이 하는 말을 그의 지성은 하찮은 것이라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의 성격을 감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감상이 회의와 함께 있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최악이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가만히 선장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무언가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말이오. 사실 나는 당신을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글쎄요, 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하고 선장이 대꾸했다.
"그 점이 이상해요. 나는 아무래도 당신 얼굴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소. 바로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마음이 꺼림찍하고 견딜 수가 없단 말이요."
선장은 산처럼 커다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섬에 와 본 지 30년이나 되다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든요."
스웨덴 사람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한번도 가 보지 못한 장소인데도 뭔가 이상하게 익숙하게 여겨질 때가 가끔 있기는 해요. 당신을 만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아마 그런 거겠죠."
그는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소. 언젠가 전생에서라도 가까이 지냈는지 모를 일이지. 아마 당신은 고대 로마 노예선의 선장이었고, 나는 노를 저었던 노예였을지도 몰라요. 그련데 당신은 30년 전 이곳에 왔었다고 말했나요?"
"네, 정확히 30년 전에 이곳에 왔었습니다."
"그렇다면 레드라는 사나이를 알고 있소?"
"레드?"
"나도 그렇게 부르는 이름밖에는 모르오. 물론 직접 알고 있는 것도 아니오.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 사나이를 직접 만나기나 한 것처럼 익숙해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생생하게 말이오. 예를들면 몇십년이나 매일 함께 살아온 형제보다도 선명하게 그의 모습이 그려진단 말이오. 내 기억 속에서는 가령 파올로 말라 테스타나 로미오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소. 그런데 당신은 단테니 세익스피어니 하는 것은 읽은 적이 없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하고 선장이 말했다.
닐슨은 담배를 피우며 의자에 등을 기대 조용한 공기속으로 떠다니는 동그란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에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선장을 향하고 있었다.
볼썽사나울 만큼 뚱뚱한 이 사나이의 몸은 그를 견딜 수 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비만형이 흔히 보이는 다혈질적인 자기 만족, 추악하다고까지 생각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자꾸만 닐슨을 자극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바보 같은 사나이와 그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사나이의 그 심한 대조는 도리어 유쾌하기까지 했다.
"레드라는 사나이는 대단한 미남이었가 보오. 나는 그 무렵 레드라는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는 사람들, 물론 백인이지만 그 사람들과도 여러 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를 한 번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넋이 나갈 정도로 미남자였다고 말하던군요. 불타는 듯한 빨간머리, 그 때문에 모두들 그를 레드라고 불렀다오. 그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자연스러운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지요. 아무튼 말할 수 없이 멋진 빛깔을 가진 머리결이었음에 틀림없소. 옛날 라파엘 파의 화가들이 열중한 바로 그 빛깔말이오. 물론 본인은 그것을 자랑하지는 않았을 거요. 훨씬 더 순진한 청년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니까요. 하기야 뽐냈다 하더라도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겼겠지만, 키는 6피트 1,2인치쯤 되었을까, 전에 여기 있었던 원주민 집의 지붕을 받친 한복판의 자연목 기둥에 그의 키를 잰 칼자국이 있었소. 마치 그리스의 신상 같았을 거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한, 아폴로의 상 같은 모습이었지. 그 프랙시텔레스가 새긴 부드러운 곡선, 그것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었소. 그리고 신비할 정도로 매혹적인 여자와 같은 부드러움, 투명하다고 해야 할 흰 살결, 비단 같은 매끄러움, 마치 그것은 여자의 살결을 보는 것 같았소!"
"이래봬도 나 역시 젊었을 때는 살결이 흰 편이었는데요."
선장은 핏발이 선 눈을 번쩍이면서 말했다.
그러나 닐슨은 그의 말엔 아예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자기 말을 중간에 가로채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굴도 체격 못지않게 멋있게 생겼었소. 커다란 눈, 눈동자는 짙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소. 그래서 검은 눈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요. 그것 뿐이 아니었소. 붉은 머리를 가진 대다수의 사나이들과는 달리 검은 눈썹과 검은 긴 속눈썹이 깔끔하고 단정하게 자라 있었소. 입술은 마치 붉은 상처라도 보는 것 같았소. 그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소."
여기까지 말하고 스웨덴 사람은 마치 극적 효과를 노리기라도 하듯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오. 그만큼 아름다운 청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했소. 잡초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지 말라는 법이 없듯이 그의 존재는 벌써 세상의 모든 이치를 초월한 것이었소. 말하자면 그는 자연이 만든 훌륭한 우상이었던 거요. 어느 날 청년은 이곳의 작은 만, 아마도 오늘 아침에 당신이 지나왔을 그 작은 만에 상륙했소. 미국 해군의 병사였는데 에이피아에서 군함을 탈출했던 거요. 그리고 선량한 원주민을 설득해서 에이피아에서 사포토로 건너는 작은 배를 타고 왔다가 다시 통나무 배로 여기에 이르른 것이었소. 그가 왜 탈출했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무료한 군함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게 아니라면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아마 이 남해의 낭만적인 섬들이 그의 머리에 사무친 것이었겠지. 이 남해라는 곳은 때때로 사람을 이상한 매혹의 포로로 만들고 말거든요. 그리고 일단 이것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옴쭉달싹도 할수 없단 말이오. 어찌됐든 그의 내부 어딘가에 약한 구석이 있었던 게죠. 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푸른 언덕의 아담한 모양이나 푸른 바다는 마치 데릴라가 삼손의 힘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북방인의 강인함을 빼앗았던 거요. 아무튼 그는 도피하고 싶어했어요. 그의 배가 사모아를 출발할 때까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 숨어 있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작은 만이 있는 곳에 바로 원주민의 집이 한 채 있었다소. 그가 집앞을 서성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안에서 젊은 아가씨가 나와 들어오라고 말했소. 물론 그는 원주민 말은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아가씨 역시 영어를 할 줄 몰랐지요. 그러나 그는 아가씨의 미소와 아름다운 몸동작, 그리고 손짓 등을 통해 아가씨가 말하는 뜻을 알 수 있었소. 그는 뒤따라 들어갔소. 그가 돗자리 위에 앉자 아가씨는 파인애플을 잘라 그에게 건네 주었소. 좀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레드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가 전해들은 것이오. 아가씨와는 그 일이 있는지 3년 뒤에 만났지요. 그때도 처녀는 겨우 열 아홉살이 될까말까한 나이였소. 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소. 말하자면 무궁화의 그 정열적인 아름다움과 풍부한 색채, 마치 그것 같았소. 커다란 두 눈은 마치 맑은 물이 괸 종려수 그늘의 샘과 같았고, 검은 머리는 등까지 굽이쳐 흘러 향기로운 꽃 너울로 장식한 것 같았죠. 게다가 그 아름다운 손이란. 귀엽고 투명한 모양만으로도 그녀의 손은 우리들의 마음을 못 견디게 뒤흔들어 놓을 정도였소. 그 무렵엔 방긋방긋 잘 웃기도 했죠. 그녀가 특유의 기쁨에 가득 찬 미소를 짓기만 해도 우리들의 무릎은 벌써 이상하게 떨리기 시작했소. 살결은 마치 여름날에 무르익은 보리밭을 보는 것 같았소. 아아, 말로는 그 모든 것을 다 표현 할 수가 없소. 이 세상의 말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찬양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이 두 사람의 젊은이, 열여섯 살의 여자와 스무 살의 남자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소. 그야말로 깨끗한 사랑이었지. 동정이나 공통된 이해나 공통된 사상 같은 데서 오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한 줄기의 순수한 사랑이었소. 아담과 이브의 젖은 눈동자가 뚫어지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에 느낀 바로 그 사랑이었소. 이 세상에 기적을 행하고 인생에 무한히 깊은 의미를 주는 그런 사랑 말이오. 당신은 모르겠지만 프랑스의 총명한 소설가가 한 말이 있소. 두 사람의 연인들 사이에서 반드시 사랑하는 것은 한쪽 뿐이며, 다른 한 사람은 다만 그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오. 대개의 인간이 운명이라고 단념하지 않으면 안될 이 말은 슬픈 진실이라오. 그러나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지 않았소. 두 사람은 서로 함께 사랑하고 사랑을 받았단 말이오. 이들의 사랑이야말로 마치 조슈아가 이스라엘의 신에게 기도해서 태양이 그 빛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소. 모든 것이 희미한 옛날의 꿈이 되어버린 지금도 나는 그 젊고 아름답고 순수한 두 사람과 그들이 꽃피운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껴요. 마치 가끔씩 구름도 없는 밤에 보름달이 산호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볼 때처럼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만 같소. 완전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두 사람은 너무 어렸소. 아가씨는 남자가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레드라는 사나이는 순수한 젊은이였을 거요. 그의 마음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웠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소. 그러나 아마도 그는 태초부터 숲의 빈터에서 새끼 사슴들이 수염을 기르고 반인반마에 올라타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을 무렵,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목욕을 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살고 있는 숲속의 정령들처럼 정신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거요. 정신이라는 것은 귀찮은 것이니까. 정신이 성숙해지면 인간은 에덴 동산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레드가 이 섬에 왔을 무렵에는 백인들이 이곳에 몰고 온 전염병이 창궐해서 섬 주민들의 3분의 1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오. 그 아가씨도 가족을 모두 잃고 먼 친척 집에 얹혀 살고 있었소. 식구라고는 허리가 굽은 주름투성이의 할머니 두 사람, 젊은 여자 두 사람, 또 남자와 사내아이 하나였소. 레드는 며칠 동안 이 집에 숨어지냈소. 그러나 해안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소. 만약 백인이라도 만나면 자기의 거처가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아니면 같이 사는 사람들 때문에 두 사람만의 즐거움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몇 개 되지 않는 아가씨의 물건을 챙겨서 집을 나왔소. 그리고 야잣 그늘의 풀길을 지나 드디어 예의 그 샛강까지 오게 된 거요. 당신이 아까 건넌 그 다리를 그들도 건너야만 했소. 남자가 겁을 먹고 주춤거리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웃었소. 첫번째 나무를 건널때까지 아가씨의 손을 잡고 시도해보았으나 결국 그는 겁이 나서 되돌아갔지. 그는 옷까지 홀라당 벗고 간신히 건너기는 했소. 옷은 아가씨가 머리에 이고 왔소. 그리고 두 사람은 여기에 있던 아무도 없는 움막에 짐을 풀었소. 이 섬에서는 토지 소유권이라는 것이 복잡했는데 아가씨에게 움막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는지 아니면 소유자가 전염병으로 죽고 없었는지 나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오.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소. 잠을 자기 위한 돗자리 두개와 거울 조각, 찻잔 한두 개가 그들 살림의 전부였소. 이 즐거운 곳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가 있었소. 행복한 인간에게 역사는 없다는 말이 있지요. 행복한 연애에도 그런 것도 없었소. 그들은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너무나 짧았소. 아가씨에게는 그 지방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었지만 레드는 그녀를 샐리라고 불렀소. 여자는 곧 쉬운 말부터 영어를 배웠지요. 그는 종종 몇 시간이나 돗자리 위에 가만히 누운 채 그녀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소.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소. 그의 마음은 아마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거요. 섬의 담배나 판다누스의 잎으로 여자가 만들어 주는 담배를 그는 하루 종일 피웠지요. 여자가 풀로 익숙하게 돗자리를 만들고 있으면 그는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고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었소. 가끔 원주민들이 찾아와서 그때까지 부족간의 싸움으로 떠들썩했던 섬의 옛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가기도 했소. 때로는 그도 산호초에 나가서 아름다운 빛깔의 고기를 바구니에 가득 잡아 올 때로 있고, 밤이면 등을 들고 왕새우를 잡으러 가기도 했소. 움막 주변에는 피오가 우거져 있었고 여자는 곧잘 바나나를 구워 간단한 식사를 만들었지. 야자 열매로 맛있는 요리를 하기도 하고 샛강 근처의 나무에서도 과일을 땄소. 축제일에 그는 돼지를 잡아 돌 위에서 구운 요리를 만들었소. 그들은 샛강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밤이 되면 산호로 가서 커다란 노가 달린 통나무 배로 뱃놀이를 하기도 했소. 바다는 매우 푸른 색이었지만 해가 지면 호메소르가 그린 그리스의 바다처럼 포도줏빛으로 변했다오. 그러나 산호초 한 가운데는 남옥, 자수정, 취옥 등 가지각색의 색으로 시시각각 변하곤 했소. 그리고 노을이 지자마자 그런한 모든 것들은 금빛으로 변해 출렁거렸다오. 게다가 또 갈색, 흰색, 연분홍, 진분홍, 갖가지 산호의 빛깔이 있었으며, 그 생김새 역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오. 마치 지상의 꿈의 동산이라도 보는 것 같았소.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물고기는 지상의 나비라고나 할까, 어쨌든 모든 것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소. 산호초 사이에는 드문 드문 하얀 모래 바닥이 드러난 길이 있었소. 물이 맑을 때는 거기서 목욕도 할 수 있었지. 이윽고 황혼이 되면 그들은 손을 맞잡고 상쾌한 몸과 기쁜 마음으로 부드러운 풀길을 밟으면서 샛강으로 돌아왔소. 야자수 숲에는 무수하게 많은 구관조 떼가 끊임없이 노래를 하고 있었소. 거기에다가 밤이 되면 황금빛을 빛나는 하늘, 그것은 유럽의 하늘과는 다르게 매우 높고 넓게 보였소. 활짝 연 움막으로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고 기나긴 밤이 그들에겐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 짧았소. 여자는 열여섯, 남자는 스물이 될까말까한 싱싱한 젊음이었소. 이른새벽, 빛이 소리도 없이 움막의 기둥 사이로 들어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잠자고 있는 이 아름답고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소. 아침 해는 마치 그들의 꿈을 헐클어뜨리지 않으려는 듯 찢어진 큰 파초의 커다란 잎사귀 뒤에 숨어 있었소. 그러다가 페르시아 고양이가 앞발을 뻗어 장난치듯이 그들의 잠든 얼굴에 심술궂은 금빛 햇살을 화살처럼 던지는 거요. 두 사람은 졸음에 가득 찬 눈을 비비며 다시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의 미소를 띠지요. 이윽고 세월이 흘러 1년이 지났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소. 그러나 불타는 듯한 정열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소. 정열이라는 것은 무언가 한 가닥의 비애, 식어 버리고 말 용광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오. 이것은 처음으로 만남 두 사람의 젊은이가 서로의 가슴 속에 신의 모습을 다짐한 그 첫날처럼 그대로, 조금도 변치 않는 마음을 온통 쏟은 사랑이며 또한 깨끗한 사랑이었기 때문이오. 만약에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물었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에 종말의 날이 있으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거요. 사랑에 없어서는 안되는 또 다른 영원성을 믿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아마도 레드의 몸 속에는 최초의 순간부터 그 자신도 모르게 더더구나 여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는 권태라는 모양으로 성장해 가는 조그만 씨앗이 심겨져 있었던 것 같소. 어느 날 작은 만에서 온 원주민 한 사람이 바로 맞은편 바닷가에 영국의 포경선이 정박해 있다는 말을 전했소. '마침 잘됐군'하고 남자는 말했소. 호두나 바나나로 담배를 일이 파운드쯤 바꿀 수 없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던 거요. 날마다 지치지도 않고 샐리가 만들어 주는 판다누스 담배는 독하기도 하려니와 맛도 좋았소. 하지만 그에겐 무언가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게있었소. 별안간 냄새가 짙고 강한 진짜 담배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난 것이오. 벌써 몇 달이나 파이프 담배를 피워보지 못했으니까. 생각만해도 그의 입 안에 침이 고였소. 그때 조금이라도 불길한 예감을 했더라면 여자는 그를 가지 못하게 말렸을 텐데, 오로지 한결같은 사랑의 감미로운 술에 도취되어 있던 그녀는 자기한테서 남자를 빼앗아갈 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으로 갔소. 그리고 아직 푸르기는 하지만 달고 물이 많이 나오는 야생 오렌지를 커다란 바구니에 넘치도록 따가지고 왔소. 집 주위의 숲에서는 바나나와 야자와 빵을 만드는 열매와 망고를 땄소. 그것을 들고 그들은 작은 만으로 가서 흔들거리는 카누에 실었소. 그리고 레드는 이 소식을 들고온 원주민 아이와 함께 노를 저으며 산호초를 넘어 여자를 떠났소. 이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여지껏 돌아오지 않았소. 이튿날 원주민 아이가 혼자 돌아왔소. 울면서 아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소. 그들이 오랫동안 노를 저어 겨우 포경선에 닿자 레드가 배에 탄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소. 한 사람의 백인이 뱃전에서 내려다보며 그들에게 올라오라고 했소. 두사람은 싣고 온 과일을 가지고 올라가서 갑판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소. 레드는 무언가 백인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았소. 선원 한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서 담배를 가지고 올라왔소. 레드는 당장 한움큼 집어서 파이프에 불을 붙였소. 그는 맛있게 연기를 빨아들이더니 힘차게 내뿜었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무언가 말을 하는가 싶었고 그는 선실로 들어갔소. 원주민 소년은 신기해서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소. 그들은 술병과 컵을 가지고 왔소. 레드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소. 선원들은 무언가 그에게 묻고 있는 듯 했소.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웃고 있었소. 맨 처음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백인도 함께 어울려서 웃으며 레드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소.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 떠들고 마셨소. 시간이 흐르자 소년은 자신에게는 조금도 재미없는 광경에 싫증이 나서 갑판에 몸을 굽혀 그만 잠들고 말았소. 한참을 자다가 누군가 발길로 자신을 차는 바람에 눈을 떴소. 벌떡 일어나보니 배는 조용히 산호 가운데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소. 테이블 앞에는 두 팔 안에 머리를 묻은 채 깊이 잠들어 있는 레드의 모습이 보였소. 레드를 깨우려고 생각하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거친 손이 그의 팔을 잡았소. 무서운 얼굴을 한 사나이가 무슨 뜻인지 알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뱃전을 가리켰소. 소년은 다시 큰소리로 레드를 불러보았으나 붙잡혀 물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소. 소년은 가까스로 앞에 표류하고 있는 카누까지 헤엄쳐가서 카누를 의지해 산호초까지 밀고 갔소. 그리고 겨우 카누에 기어올라 울면서 돌아왔다는 것이었소. 모든 것은 확실했소. 포경선은 탈출자나 아니면 병자가 생겨 사람의 손이 부족했으므로, 선장은 레드가 배에 올라왔을때 계약을 부탁했지요. 하지만 그가 거절하자 술에 취하게 해서 그를 납치했던 거요. 슬픔에 빠진 샐리는 거의 미칠 것 같았소. 사흘 동안 밤낮없이 그녀는 눈물로 지새웠소. 원주민들은 진심에서 여러가지 말로 위로했으나 그녀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소. 음식을 먹지도 않았소. 그러다 결국은 지쳐서 벙어리처럼 우울한 허탈 상태에 빠지고 만 거지요. 그녀는 날마다 작은 만에서 그를 기다리며 지냈소. 행여나 레드가 무슨 구실을 만들어 탈출해오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산호의 물을 바라보고 있었소. 그리고 밤이 되면 피곤한 다리를 끌고 샛강을 건너 이제는 행복이 지나가버린 작은 집으로 돌아왔소. 레드와 만나기 전에 함께 살았던 친척이 다시 돌아오라고 권했으나 그녀는 그 청을 거절했소. 틀림없이 레드가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오. 넉 달이 지난 뒤 그녀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그만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소. 그녀가 앓고 있는 동안 도와주러 왔던 할머니가 그대로 움막에 남아 함께 살게 되었소. 그녀는 삶의 모든 기쁨을 빼앗기고 말았소.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고뇌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으나 그 대신 깊은 만성의 우울증에 빠졌소. 격렬하기는 하나 아주 변하기 쉬운 감정을 가진 원주민들 속에 이토록 언제까지나 일편단심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요. 언젠가는 레드가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그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소. 그래서 그녀는 변함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리고 그 가느다란 야자수의 통나무 밟는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그녀는 밖을 내다보았소. 언젠가는 그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소."
닐슨은 잠시 이야기를 중단한 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 여자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선장이 물었다.
닐슨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3년 뒤였소. 그녀는 어떤 백인과 사귀게 되었소."
선장은 잘찐 얼굴에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들의 통속적인 인생 행로이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닐슨은 증오에 찬 눈으로 상대를 흘끗 보았다. 어째서 이 뚱뚱한게 살찐 사나이의 말에 자신이 심한 반발을 느껴야만 하는지 그로서도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없는 그의 추억은 차례차례로 지난날의 기억을 가슴에 되살렸다.
25년 전이었다.
그는 술과 도박과 욕망에도 싫증이 나서 한때는 격렬하게 야심을 불태운 성공의 희망도 차가운 체념 속에 파묻어버리자고 마음먹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섬으로 왔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희망도 모두 버린 뒤였다. 이제는 다만 간신히 이어질 몇 개월간의 삶을 조용히 마감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만족하려고 남몰래 결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몇마일쯤 되는 해변의 원주민 부락 변두리에 가게를 열고 있는 혼혈인 상인 집에 묵고 있었는데, 우연히 정처없이 야자수의 숲속을 거닐다가 샐리가 살고 있는 움막 앞으로 오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숲속의 아름다움이 그의 마음을 고통스런 환희로 가득 차게 샜는데 그때 마침 샐리를 본것이다.
그는 이제껏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 검고 큰 눈에 가득 찬 슬픈 빛이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카나카 원주민은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미모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공허하면서도 슬픔에 찬 이 새까만 눈동자는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언가 어둠 속을 더듬는 영혼의 고뇌처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상인으로부터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마음을 더욱 동요케 했다.
"그 남자가 돌아올 것 같습니까?"
하고 닐슨이 물었다.
"아니요.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계약이 끝나려면 2년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마 그때쯤 여자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릴 겁니다. 어쩌면 술에서 깨어나 자기가 유괴된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미칠 것 같았겠죠. 하지만 결국은 웃으며 참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뭐 한 달쯤 지난 뒤에는 용케도 섬을 벗어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닐슨은 이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기 자신이 잘 생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남의 아름다움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는 그때까지 열렬한 사랑을 한 기억도 없었다. 그래서 이 두 젊은이들이 나눈 사랑은 그에게 야릇한 환희를 느끼게 했다. 말하자면 형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샛강의 움막을 찾아갔다. 그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부에도 취미를 가진 정열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때까지 이 지방의 언어 연구에도 적지 않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습관이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아 그는 그때도 마침 사모아어에 관한 논문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샐리와 함께 사는 할머니가 나와서 좀 쉬었다 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카바 술을 내놓고 궐련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어쨌든 말상대가 생겨 기뻐했으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의 정신은 온통 샐리를 향해 있었다.
문득 그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프시케 상을 떠올렸다. 바로 그 상과 닮은 모습의 선이 그녀의 얼굴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어린애를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처녀와 같이 아름다운 몸매를 간직하고 있었다.
여자가 그에게 말문을 튼 것은 두세 번 만나고 나서였다.
하지만 그 말이라는 것도 에이피아에서 레드라는 남자를 혹시 만나지 못했느냐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가 사라진 지 벌서 2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닐슨은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신히 굳은 의지로 매일이라도 샛강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몸은 샐리 곁에 없지만 생각만은 항상 그녀에게 날아가 있었다.
처음에는 죽음에 직면해 있는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며 다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그리고 때로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으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그의 사랑은 그를 묘한 행복에 들뜨게 했다. 그 맑고 깨끗함에 그는 더없이 큰 기쁨을 맛본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희미한 공상을 둘러싸고 그이상 그는 아무것도 그녀에게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맑은 공기, 일정한 온도, 충분한 휴식, 간소한 식사, 그러한 것들이 뜻밖에도 그의 건강을 호전시켜 주기 사작했다. 밤이 되면 신기하게 체온이 차차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기침도 줄어들고, 체중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 6개월 동안은 한 번도 피를 토하지 않았다.
그리고 별안간 그는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병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만약에 세심한 주위만 기울인다면 병의 악화를 막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희망과 서광이 비치기 사작했다.
다시금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들떴다.
그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활동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더라도 이 섬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약간의 수입만 있으면 다른 데서는 몰라도 여기서는 식생활을 해결할 것이다. 야자수를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돈은 된다. 그리고 책과 피아노도 보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민감한 그의 마음은 이러한 모든 일이 필경은 그의 가슴에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의 소원,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마저 숨기려는 애절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샐리를 갖고 싶은 것이다.
아름다움만이 아닌, 그녀의 슬픈 눈동자와 그 속에 담긴 몽롱한 영혼까지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으로 여자를 도취시키면 얼마 못가서 그녀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이미 허락될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고 있었던 행복을 지금 뜻하지 않게 기적처럼 얻고 보니, 그러한 행복을 그녀와 함께 나누고 싶은 꿈을 꾸게 된것이다.
결혼하자고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거절했으나 그것은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여자의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사랑이었다.
그는 먼저 할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주민들은 벌써부터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그의 청에 따르도록 여자에게 끈질기게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모두가 백인과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다. 거기에다가 일반적인 기준에 의하면 닐슨은 오히려 부유한 신분이었다.
닐슨이 하숙하고 있는 집 주인이 그녀를 찾아가서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레드가 돌아온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여자가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닐슨의 사랑은 더해갈 뿐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순수한 사랑이었던 것이 이제는 고통에 가까운 치정으로 변해갔다.
어떤 장애가 놓여 있더라도 극복해보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샐리에게 마음이 가라앉을 여유마저 주지 않았다. 애원도 해보고 화를 내보기도 하는 그의 끈질김과 끊임없는 설득과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설득에 드디어 그녀도 고집을 꺾고 동의 했다.
그러나 이튿날 기쁨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녀를 찾아갔을 때 여자는 레드와 살았던 움막을 깨끗하게 불태워버린 뒤였다.
할머니가 샐리를 욕하면서 그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손을 흔들어 말렸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움막이 탄 자리에 새로 방갈로를 만들고 , 피아노나 수많은 장서를 들여 놓으려면 유럽식 가옥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 그가 오랫동안 살고 있는 작은 목조 집이 만들어졌고 그는 샐리를 아내로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홀한 몇 주일, 오직 여자가 주는 것만으로 그가 만족했던 시기가 지나고 보니 그는 행복다운 것은 하나도 잡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변함없이 레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에 레드의 소식이라도 있으면 그의 애무, 동정, 관요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그야말로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를 버리고 레드에게 달려갈 것이다.
닐슨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슬픔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고뇌의 포로가 되어서 시무룩하게 자기를 거절하고만 있는 그녀의 고집스러운 자아를 향해 계속하여 힘껏 두드리고 있었다.
사랑은 이제 고통이 되었다. 친절로 여자의 마음을 녹여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돌처럼 단단했다. 또 어떤 때는 무관심을 가장해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그보다도 더 냉담한 것 같았다.
참다못해 화를 내고 욕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말도 없이 울기만 할 뿐이었다.
여자의 마음엔 그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는 드디어 영혼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 그가 여자의 성스러운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결국 그녀가 영혼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사랑은 오히려 날마다 탈출을 꿈꾸는 감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다만 문을 열고 - 열기만 하면 그것으로 되는데 - 대기속으로 내딛는 힘, 그것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지옥의 괴로움이었다.
이윽고 그는 희망도 아무것도 없는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사랑의 불꽃은 이제 모두 타버리고 만 것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 가느다란 통나무 다리에 눈을 옮기는 것만 보아도 그의 가슴엔 노여움이 치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조에 가까운 질투심이 생겼다.
이제 벌써 수십년동안 그들 두 사람은 다만 습관과 타성에 젖어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는 지난날의 사랑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빨리 늙는 이 섬에서는 벌써 그녀는 노인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제 그는 그녀에 대해서 사랑을 느끼지 않는 대신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여자도 그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 또한 오직 피아노와 책에 파묻혀 살았다.
이윽고 그의 회상이 말이 되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레드와 샐리의 슬프고 열렬한 사랑을 이제와서 돌이켜 보며 나는 생각한다오. 사랑의 눈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두 사람을 영원히 헤어지게 한 잔인한 운명에 대해 그들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그들은 고뇌에 찬 삶을 보냈을 거요.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이었소. 사랑의 진정한 비극이 뭔지 알지 못한 채 헤어졌으니 말이오."
"무슨 뜻인지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선장이 말했다.
"사랑의 비극은 결국 죽음도 이별도 아니란 말이오.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지난날에는 하루만 만나지 않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를 지금은 다시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그보다 무서운 비극은 없소. 사랑에 있어 진짜 비극은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말 상대는 분명히 선장이었으나 그는 선장에게 이야기를 건넨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해, 가슴 속에 품었던 생각을 말로 대신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눈동자는 뚫어지게 눈앞의 사나이를 향해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의 영상이, 지금 그의 눈앞에 보고 있는 이 사나이의 영상이 아닌 다른 한 사나이의 영상이 그의 눈망울에 생생하게 비친 것이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괴상하게 비치거나 아니면 형편없이 길쭉하게 보이는 무슨 도깨비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는데, 다만 이 경우는 바로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추하고 군살이 붙은 노인 속에서 그는 그림자처럼 아름다운 젊은이의 영상을 희미하게 본 것이다.
그는 뚫어지도록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연한 산책이 어째서 이 사나이의 발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그는 가슴 속에 일기 시작한 세찬 전율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엉뚱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설마! 설마 그럴 수가.
그러나 그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글쎄 이름을 들어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나 자신도 잊어버릴 지경이오. 하지만 30년 전에 이 섬 사람들은 나를 레드라고 불렀소."
조용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웃으면서 그는 비대한 몸집을 흔들었다. 그것은 어딘가 추악하기까지 했다.
닐슨은 소름이 돋았다.
레드는 매우 즐거워했다. 핏발이 선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닐슨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한 여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원주민 여자였다.
어딘가 범할 수 없는, 뚱뚱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살색이 검고 단단한 (원주민은 노쇠와 더불어 피부가 검어진다.) 하얀 머리결을 가진 여자였다. 검은 마더 하버드를 입고 있었는데 얇은 천을 통해서 묵직한 두 개의 유방이 보였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여자는 집안일을 두고 닐슨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대답했다.
자기가 느끼기에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그런 침착하지 못한 음성을 그녀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여자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는 별로 흥미도 없는 듯이 흘끗 보았을 뿐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아주 잠깐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닐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충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말문을 텄다.
"어떻소. 함께 식사라도 하시죠? 매일 먹는 음식이라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글쎄요."
레드가 말했다.
"나는 그레이라는 사나이를 찾아 물건을 넘겨주는 대로 바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내일 에이피아로 돌아갈 예정이어서."
"그럼 애를 시켜 길을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아, 대단히 감사합니다."
레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닐슨은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꼬마를 불렀다. 선장의 행선지를 말하자 꼬마는 앞서서 다리를 건너갔다.
레드가 뒤따라 건너가려 하자 닐슨이 말을 걸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뭐,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리를 건너는 그의 뒷모습을 닐슨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야자수의 숲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의 행복을 방해한 사나이가 바로 저 사람이란 말인가? 긴 세월동안 샐리가 사랑하며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바로 저 사나이란 말인가?
기가 막힌 일이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그는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속았다. 완전히 속았다.
실제로 방금 두 사람은 재회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는 웃기 시작했다. 서먹서먹한, 그러나 드디어 발작적인 웃음으로 변했다.
모든게 신들의 잔인한 장난이었다.
어느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모습뿐이었다.
샐리가 들어와서 식사 준비가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와 마주앉아서 억지로 몇 숟가락을 먹었다.
만약에 아까 그 의자에 앉아 있었던 비곗덩이의 늙은 남자가 그녀가 젊은 날에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했던,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연인이라고 말했더라면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전에 그를 불행하게 만든 여자를 아직 미워하고 있었을 무렵의 그였다면 오히려 기꺼이 말해버렸을 것이다.
그때 그는 자기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상대에게도 상처를 입혀주고 싶었다. 미움도 또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는 울적한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분은 왜 오신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지금은 나이를 먹은 뚱뚱보 원주민 여자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나는 무엇때문에 이 여자를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했을까?
이 여자의 발 밑에 내 영혼의 모든 보물을 던졌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들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낭비! 이게 무슨 낭비냐!
지금 그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모멸감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범선의 선장이야. 에이피아에서 왔다더군."
"그랬군요."
"고향에서 전갈을 가지고 왔는데 말야, 큰형이 많이 아프대. 가봐야만 될 것 같아."
"오래 걸리시나요?"
그는 단지 어깨를 들먹일 뿐이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