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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090316
제목: 별거녀의 결혼반지
본문: 시14:1-7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별거녀의 결혼반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별거와 동거. 실제 별거와 동거, 실제라고 하는 차원에서 별거와 동거의 문제 재미있는 묘한 관계가 있는 것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2005년도에 노무현대통령시절에 정상명씨가 검찰총장으로 내정되었을 때 그 정상명씨에 관한 기사가 나온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 정 내정자가 부인과, 부인과 주민등록상 21년 동안을 별거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그 이유를 캔 거예요, 이제.
검찰총장으로 내정이 됐으니까 혹시 무슨 부동산투기와 관련되어있지 않겠는가, 해서 검찰총장으로서의 자격을 이제 시험대에 놓고 살펴보기 위해서 그 뒷조사를 해봤어요.
그랬더니 주민등록상 21년 동안 별거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한해도, 아니 하여간 기록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 별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면 주민등록상으로는 그 부인과 정 내정자가 다른 곳에서 사는 것, 별거처럼 되어 있느냐, 했더니 참, 기가 막힌 일이죠.
한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역술인의 말을 듣고 잘못된다고, 가정의 해가 미친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이사를 열두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거예요. 그 기간 동안에. 21년 동안.
부인이 열두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상으로는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별거인으로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같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이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이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별거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민등록상으로는 같이 사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제 그 학교 동창 중에, 동창 중에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 이제 가정이야기를 하는데, 고등학교 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별거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회사에서 중역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연말이라든지 때가 되면 파티를해요. 그 파티 때가 되면 어머니가 오셔서 같이 가는데 파티 때 입고 갈 옷과 파티 때 끼고 갈 반지라든지 귀걸이 같은 걸그때그때 돈이 많은 아버지가 사서 준비해뒀다가 집에 들어와서 그걸 끼고 입고 하는 것을 이 제 친구가 늘 봤던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사이가 좋은 부부라고 회사에 정평이 나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 친구가 그 소리를 듣게 됐는지 그것은 뭐 알 수 없습니다마는 아주 사이가 좋은 부부로 소문이 나있는데 같이 살지를 않습니다.
때만 되면 파티석상에 같이 가기 위해서 어머니가 등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거녀의 결혼반지. 실제로는 같이 살지 않아요.
그런데 결혼한 것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상태로 갖고 와보면 하나님과 우리 주님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교인입니다. 주민등록상 동거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동거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는 이런 말이 나와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어리석다는 것, 멍청한 거 아닙니까?
멍청한데 지식이 없어서 어리석다고 하지 않아요.
사리분별이 모자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아요.
다윗이 어리석다고 하는 얘기는 우리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리석다고 하는 말과 아주 달라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IBM회사에서 수뇌노릇을 해도 그 사람마음에 하나님이 없다하면 어리석은 자라 이겁니다.
삼성인력개발원원장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 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LG연구소의 소장이라도 그 사람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면 그 사람이 미국에서 무슨 박사학위를 받고 나왔든지 간에 하나님이 없다하면 멍청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dumb이라는 겁니다. dumb.
관점이 그렇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없다는 그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홈채플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과 없다, 라고 말하는 것 내지는 하나님이 없다, 라고 내 마음에 이르는 것과 하나님이 있다, 라고 마음에 이르는 것,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도 없고 아무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요.
그리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생활을 하는 가운데 전혀 무신론자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별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하고.
그런데 표방하기는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고 주민등록상에는 동거하는 것으로 나와 있어요. 실제로는 별거에요.
하나님과 실제로는 별거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라고 믿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과 동거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에요.
이게 진짜 문제에요.
차라리 이론적으로도 없고 실제로도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게 할 가능성이나 있어요.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알고 하나님과 동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과 동거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구제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한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진짜 하나님이 계신 앞에서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진짜 하나님이 계심으로써 마땅히 나타나야 될 행동과 나타나야 될 말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게 무슨 뜻이 있고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아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온갖 여자와 다 함께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집에는 들어오는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지어주는 밥 한 끼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주민등록 떼어오라면 주민등록등본에는 그 여자가 아내로 되어서 주민등록이 기재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교인이라고 하는 주민등록등본을 떼어갖고 다니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별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별거하는 것과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아주 쉬워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살면 하나님과 별거하고 있는 것이에요.
집안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든지 건강에문제든지, 사업상의 문제, 장사의 문제든지, 직장의 문제든지 하여간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살아서 나와 함께 계시고 천지를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그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라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내 앞에 있다면 그분과 함께 실제로 동거한다면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생각이라는 것은 독백이에요. 독백.
나 혼자 나에게 말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다고 하고 내가 당면하는 모든 문제를 실제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주체라는 것을 믿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걸 안다면 절대 사람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생각은 독백이기 때문에.
대화할 수밖에 없어요. 대화가 뭐예요? 기도.
반드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의견을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결정적으로 별거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젠 줄 아십니까, 여러분?
에덴에서에요. 에덴에서.
왜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별거가 시작이 됩니까?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별거. 왜 시작이 되는 겁니까?
인간이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자기가 자기 일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면서.
내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면서 하나님과의 별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동거의 관계로 다시 회복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전부 자기가 생각합니다.
자기 일에 대해서.
이게 뭐예요?
결혼반지 낀 별거녀에요. 실제로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어리석다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라는 말을 해요.
그러면 이 말의 반대되는 말이 뭐예요, 여러분?
솔로몬의 경우를 치면.
하나님, 내게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리석음과 지혜가 대별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지혜의 뜻이 뭐라고요, 여러분?
하나님, 듣는 마음을 허락해주시옵소서. 듣는 마음을.
그러므로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 내가 생각해서 행동하는 모든 순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라고 라벨이 붙여져 있어도 그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 하는 무신론자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것이에요. 내가 생각하고.
지금 하나님이 옆에 계신데 어떻게 내가 독백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옆에 계신데.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당면한 모든 문제의 열쇠를 갖고 계신 분인데 어떻게 내가 독백할 수 있습니까?
내 자식은 이렇게 되는 게 좋겠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얘기라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어요.
어리석음과 지혜가 서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란 뭡니까? 듣는 마음입니다.
들으려는 마음이 없이 생각하며 행동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없다, 라고 선언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에요.
말로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아버지인데 우리의 표정이 그 꼴이에요?
하나님이 아버지인데 우리 마음의 상태가 그렇게 불안해야 되요?
이게 말입니까? 뭡니까? 이게 말이에요?
무신론자에요. 무신론자에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라고 말을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볼 때 티끌 같은 문제 때문에 마음 가득히 근심의 폭풍을 안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무신론자에요. 그 순간에는.
그걸 뭐라고 하는 지 아십니까?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거예요.
실제로 살면서 하나님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게 실천적 무신론자에요.
이론적 무신론자가 있어요. 아예 없다. 유물론자들이나 진화론자들. 하나님 없다.
차라리 그 사람들이 더 구제의 가능성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왜?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생각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고쳐줄 방법이 없는 거라, 이게.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어리석어요. 어리석은 게 뭐예요?
하나님께 듣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대화를 중단한 거예요.
지금 내 앞에 하나님이 계세요.
지금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유신론자들이 실제로 무신론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신학자들이 역사상 신 존재증명이라는 짓을 많이 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을 해요?
실제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신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면 뭐하겠다는 거예요. 이건 뭐와 같은 거냐?
실제로는 별거하고 있으면서 주민등록등본 상에는 동거로 되어있다고 주민등록등본 떼어다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같이 살고 있는 걸 증명하라. 주민등록등본 갖다 내는 거예요. 실제로는 별거하면서.
차라리 나대지 않고,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그 정상명 검찰총장이 부인과 21년 동안 주민등록상에는 별거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같이 살고 있는 것,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이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실천적 무신론자들.
지금 하나님이 없다, 이르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이렇게 말해요.
입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마음이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마음이 없으면 뭐라 말하는 거냐?
내 마음에 하나님 없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낸 뒤에 하나님을 호출합니다. 하나님을 호출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내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하면서 호출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내 문제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 현장에 이 순간에는 하나님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멀리 계신 하나님을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문제가 있는 곳으로 호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신론자지요.
이 문제가 있고 문제가 주어져있는 시추에이션, 그 상황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묻지 않아요. 내가 생각해요. 이 문제의 답을.
그 다음에 하나님을 멀리서 하나님이 없는 이 시추에이션으로 하나님을 불러오는 겁니다.
이런, 이런 악랄한 무신론자가 어디 있어요.
부패한다, 그래요. 부패.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니, 라는 말이 나와요.
부패, 왜 부패할까요?
빛이 차단돼서 어둡습니다. 거기 습기가 가해지면 온갖 곰팡이와 벌레와 뭐 하수도 있지요. 하수도.
하수도 영화에서 가끔 보면 쥐들이 그렇게 꼭 등장을 해요. 하수도에.
쥐들도 잽싼 쥐들도 아니고, 깨끗한 쥐들도 아니에요.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쥐들 보면 좀 깨끗하잖아요.
그런데 하수도 쥐들은 축축하게 몸이 다 젖어가지고 털이 막 이렇게 엉겨붙어갖고 아휴, 막 구역질이 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그렇게 되요. 하수도처럼. 왜?
빛이 차단됐는데 물이 있는 거예요. 온갖 더러운 오물이.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면 없다고 인정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에요. 끊어졌어요. 그런데 어떤 습기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의 죄악의 습기가 올라오는 거예요. 죄악의 습기가.
그러니까 하수도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우리 마음이.
하수도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걱정이고 근심이고 불평이고 불만이에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뭘 합니까?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건강을 그만큼 붙들어주시고 그러니까 까불어대요. 내가 움직이면 된다나?
한번 다리몽뎅이 부러뜨려봐야 정신 차려요? 뭐 어디라도 뭐 암이라도 한번 생겨봐야 그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올래요?
그저 하나님 없다고 하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비로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가만히 놔두고 그만큼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시니까 이 세상 모르는 거라, 이게.
내가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거라.
하나님이 간섭도 안하고 내버려두시니까 건강한 거예요.
사업도 잘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 잘됩디까?
나는 통계적으로 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이 더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왜?
하나님이 건드리시고 간섭하시니까.
너, 자꾸 그렇게 살래?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백성에 대해선 잘 먹고 잘살아라,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까짓 거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 입장에서.
조물주,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좀 잘 먹고 잘사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까짓 거 줘버리죠. 선택하지 않은 백성은.
그러나 선택한 백성들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서라도 당신을 지금 이 앞에서 바로 이 현장에서 인정하도록 만드시지요.
실천적 유신론자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존재를 증명할 분이 아니에요.
그분은 끼어 안아야 될 분이에요. 포옹해야 될 분이지 그분의 존재를 주민등록등본 떼어다가 증명할 분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별거하고 계시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있다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별거하면서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내 생각이 멈춰지는 곳에 계십니다.
내가 그냥 앉아가지고 있으면서 생각을 안 하는 것은 멍청한 거예요.
어떻게 생각을 그러면 안 해야 됩니까?
생각을 하지 말라며? 맞아요.
그러나 생각을 그냥 안 해서 안하는 것은 멍청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안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안 해야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냥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생각이 없는 놈이에요. 그야말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서 생각을 하지 마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해내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 왜?
내가 생각하는 주체로서 극악무도한 죄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고백하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그냥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죄인으로써 멍청한죄인이고 생각을 하는 것은 죄인으로써 교활한 죄인이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내 죄를 인정하고 그리고 죽으면 이제 하나님과 대화를시작할 수 있는 생각의 멈춤이요, 거기서부터 하나님과의 동거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도 주님 십자가에 꼭꼭 매달려서 내 생각이 계속해서 죽고 지금 이 앞에 계신 내 하나님과 동거하는 복된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물론 하나님이 있다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모든 문제와 모든 과제와 모든 순간들을 내가 먼저 생각하고 마치 지금 내 옆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부르고 외쳐대며 하나님을 호출하며 살았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생각을 멈춤으로 진정한 실제의 하나님과의 동거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첫댓글 먹고 싶어 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