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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
(창 6:9-2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너무나도 귀한 말씀 ‘두 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라고 하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함께 나누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보신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제나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냐? 또 내가 보기에 어떠냐? 우리가 우리 아이들, 우리나라, 우리 교회 보기에 어떠냐?
언제나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이 강포가 가득하고 패괴함이 온 땅에 덮여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두 개의 홍수!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더러워진 땅을 물청소를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홍수라면 사실은 그에 앞서 이미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죄악의 홍수, 강포의 홍수가 일어났었습니다. 패괴함, 즉 다 썩어 문드러짐의 홍수가 온 땅에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패괴함과 이 죄악의 홍수를 하나님이 물 홍수로 다 청소를 하시는 그런 대목이 이제 시작이 되는 거지요.
두 개의 방주!
노아가 잣나무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 놓은 그 방주를 우리가 흔히 생각합니다마는, 이미 노아 마음 자체가 방주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악의 홍수 가운데서 노아의 마음이 방주로 떠 있었던 그 모습을 그대로 바꾼 것이 바로 심판의 홍수 가운데 노아의 방주가 떠 있는 그런 모양입니다.
노아의 마음이 방주로서 세상에 살았던 그때의 모습을 다시 옮기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 위에서 떠 있는 진짜 방주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두 홍수, 두 방주를 함께 나누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노아를 향하여 당대의 완전한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우리가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정말 어떻게 보면 노아는 화려한 싱글(single) 이었다고 볼 수가 있어요.
온 세상 전 인류가 강포에 덮여서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썩어가고 있던 세상에서 홀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물 심판이 모든 걸 다 멸망시켜도 노아와 그의 가족만은 남겨 둘 정도로 그 가정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단한 거지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강남일대에서 모든 부모들이 달려가고 있는 모든 교육의 방법과 교육 열. 거기에서 혼자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나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 쉽겠어요? 쉽지 않아요. 그런데 온 인류가 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데 노아 가정 홀로 딴 길을 가고 있었다,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첫 번째 홍수. 이게 강포가 덮여 있었던 그 상태의 홍수입니다.
강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마스’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해치다,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해치는 것과 빼앗는 일이 사방팔방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이에요.
해치다, 빼앗다 하니까 우리는 흔히 강도와 도둑질 같은 것을 말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지금 현재 우리의 세상에는 하마스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다시 말해서 강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해치고 빼앗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나는 해치지 않았는데, 나는 빼앗지 않았는데, 나는 남의 물건을 빼앗고 다른 사람을 상해한 적이 없는데....
그러므로 하마스, 즉 강포를 행하지 않은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빼앗다, 해치다 라는 이 말의 더 깊은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
이 땅에도 지금 하마스, 즉 강포함이 가득합니다. 해치고 빼앗는 일이 가득합니다.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해치느냐에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강포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할 수가 있어요.
돈을 빼앗고 경제력을 해치는 것이라면 나는 강포를 행하지 않을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사람에게 복된 삶을 허락하시려는, 행복하고 기쁜 삶을 허락하시려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계획이 다 사람마다 있습니다. 타고난 저마다의 하나님의 복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싫든 좋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할 때에 내 마음이 오늘 노아에게 말한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지 않을 때, 하늘의 기운이 가득 차 있지 않을 때 필유곡절(必有曲折), 즉 어쩔 수 없이 옆에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때에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 가야 될 삶을 우리가 해치고 우리가 망가뜨릴 수 밖에 없는 일이 본의 아니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깨달아지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무의식 중에 말하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강포를 행하고, 해치고, 빼앗고 그들을 상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니라」(마 10:36).
사랑한다고 합니다. 생각하고 위해서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다 해치는 것입니다. 다 빼앗는 것이고 그들이 걸어가야 될 하나님이 복된 계획의 길을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밀어버리고, 괘도에서 일탈하게 만들어버리고, 하루 걸릴 걸 이틀 걸리게 만들고, 삼일 걸릴 걸 일주일 걸리게 만들면서 그들의 삶에 우리가 끊임없이 불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면서 장사하는 아주머니와 대화하는 가운데조차도 내가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서 그 아주머니가 내 얼굴만 봐도 하늘의 빛이 비치고 은혜가 될 수 있는 그런 상태로 하는 것과, 내 마음에 내 뜻과 내 계획이 가득 차서 하늘과는 단절된 상태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칠 때 만나서 인상을 끼칠 때 벌써 그것이 그를 해치는 것이라는 겁니다.
관계가 두텁지 않은 만큼 영향력 자체도 두텁지 않고 미약합니다마는 끊임없이 해치게 되고 강포를 행하게 되고 그것이 심지어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그래서 온 집안 식구끼리 나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둔감함을 통해서 둔감함 결과로 인해서 모든 가족들에게 말하고 행동하고 영향력을 미칠 때마다 그들을 해치고, 그들의 복된 길을 빼앗아 버리고, 그들의 복된 하늘의 분깃들을 우리가 망쳐버리고 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가 갑니까?
이것이 강포에요. 꼭 폭력을 휘두르고, 강도질을 하고 이런 것이 강포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세상은 아마 지금도 무지개를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두시고 내가 다시는 그렇게는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홍수를 통해서 다 쓸어버려도 마땅할 그런 강포가 범람하는 홍수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포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럽분!
방주!
이제 그러한 강포한 세상 그래서 썩어가요. 내가 빼앗고, 내가 상해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내가 방해한 그 자리가 상처가 되고 곪아서 패괴해진다.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곪아 터지는 거 아닙니까?
자식이 집을 나가고, 자식이 못된 아이들과 놀러 다니고 그러면서 타락해가고 그래서 내 마음이 썩고 내 자식의 마음이 썩고 경제가 썩고 모든 면에서 결국 그렇게 다 패괴함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하나님이 물로 쓸어버리실 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방주를 만들되 지금은 노아 홍수 나기 120년 전인데 방주를 만들라고 하고 있고, 비는 흔적도 없는 그런 땅에서 방주를 만들라 하고 있고, 잣나무로 만들라 하신 것을 보면 잣나무가 많이 있는 아마 어느 들판이나 숲 속을 지명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해가 쨍쨍한 홍수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것도 바닷가도 아닌 숲 속에서 배를 짓는데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키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상자 같은 방주를 만들게 됩니다.
이 방주의 형식, 방주의 설계도 이것이 바로 노아의 마음 상태를 또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의 홍수 속에서 떠 있을 방주. 어떻게 만듭니까?
길이가 140m, 높이가 14m, 넓이가 23m 정도. 꽤 크지요? 길이가 140m 정도면 축구장보다 긴 건데, 이 정도로 큰 방주를 만드는데 방주를 만드는 방법이 위에서 한 규빗 아래로 창문을 만들고 그리고 안에다가는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역청을 발랐다는 겁니다.
이 방주의 모습대로 우리 마음의 모습이 되어야 됩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마음이 방주의 모습으로 되어 있을 때 그 안에 누가 들어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들어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구원한다는 말이 맞지는 않습니다마는 온 땅이 썩어 문드러져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적인 섭리를 계속 수행해나가실 수 없을 때, 노아의 마음이 이 죄악의 홍수가 들어오지 못하는 방주가 되어서 그 노아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가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고전 3:16)이라고 바울이 말하는데 성전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노아식으로 말하면 방주였던 것입니다. 온 세상에 죄악이 범람해서 홍수를 이루고 있을 때 노아의 마음이 방주가 되어서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마음이 방주라고 하는 것과 노아의 방주를 비교해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 방주와 같은 마음이 된다고 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번 살펴보면 좋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이라야 될까요? 방주와 같아야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방주와 같아야 되는데
방주는,
첫 번째, 배인데도 불구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키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속에 내 인생의 방향을 찾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방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에요.
내가 방향을 정해놓고 이런 방향으로 간다고 정해놓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정한 방향으로 장애를 넘어서 내 인생을 끌고 가 주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을 고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키가 없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 갈 것인가,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어야 된다는 방향에 대한 인식이 내가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이 자유롭게 나를 끌고 가실 수가 없습니다.
방주는 키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 지면에 에베레스트 산정까지 다 덮어버리는 40일간의 어마어마한 홍수 뒤에 정확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착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이렇게 돼야 돼 저렇게 돼야 돼 라고 하는 방향키를 없애고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세요.
無방향으로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 마음은 방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쥐고 계심으로 키가 없어야 됩니다.
두 번째, 방주는 창문이 천장 바로 밑에 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0규빗이라고 하면 밑에서부터 29규빗 떨어져 창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옆의 시야의 눈높이에는 옆으로 통하는 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창문이라는 게 뭐지요?
집이 있으면 창문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주는 공간입니다. 의사전달의 공간입니다. 창문을 통해서 눈 내리는 것을 봅니다. 창문을 통해서 단풍이 지는 것을 봅니다. 안에 있지만 분명히 밖의 세계와 교감을 이루게 됩니다.
창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 창문을 내고 어떤 세계와 교감을 합니까?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TV를 켭니다. TV는 창문입니다. 그 창문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환경과 교감을 이루며 삽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문도 창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밖의 세계, 내 인식이 도달하는 밖의 세계의 이야기들을 신문이 담아서 우리들에게 교감으로 알려줍니다. 교감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노아의 방주, 마음이 방주인 사람은 그 창문의 방향이 어디입니까?
신문을 향해서, TV를 향해서 옆으로 뻗어있지 않고 창문이 위로 뻗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세계가 있고 첫 번째 외부의 세계를 어디를 보느냐?
위를 봅니다. 내가 교감해야하는 내가 교통해야하는 첫 번째 세계를 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창문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단순한 책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천국이라고 하는, 우리 외부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하늘나라에서 사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으로만 교통을 합니다. 왜요? 방향키를 없앴으니까요. 하나님만 방향키를 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세상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가야 될 방향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을 가도 굽이굽이 놓여져 있는 고속도로를 갈 때에 고속버스를 타고가면 그 능선을 골짜기를 따라갈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 보는 것처럼 우리 길 저 끝까지 보여요.
우리는 산이 막혀서 앞길이 안 보입니다마는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그러므로 우리가 교통해야 될 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옆의 세상과 교감을 이룰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과만 교감을 이루면 하나님이 방향을 결정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웃집 앞집 뒷집 모든 집이 다 저렇게 살더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하면 이렇게 가면 됩니다. 하나님은 끝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동시대인들은 사실상 그들의 앞을 볼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행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경향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흐름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만 따라가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문을 위에다 놓습니다.
그리고 역청을 발랐습니다.
이 세상의 풍조, 이 세상의 유행, 이 세상의 의식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청을 발랐습니다. 홍수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청을 바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침마다 지금 여러분 마음에 역청을 바르고 계시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기억하는 겁니다. 말씀의 제목을 기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무엇입니까? 두 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
두 개의 홍수, 두 개의 방주. 뭐였지?
아! 내 마음이 방주가 되어야 돼.
방주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되지?
아! 키가 없어야 되고 그리고 위에 창문이 나서 하나님하고만 교감을 해야 돼.
귀에 들리는 것 눈에 보이는 것 많이 있지만 그것들 보다 먼저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듣고, 그렇게 하려면 날마다 성경 말씀을 내 마음에 발라야 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지 않는 한 뚫고 들어옵니다. 이 세상의 풍조, 이 세상의 신념, 이 세상의 의식 이것들을 막아낼 수 있는 방수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날마다 바르지 않는 한 날마다 방주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방주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방주! 방주?
‘키가 없다. 위로 창문이 나서 위로만 교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안에 역청을 발랐다.’
이것만 기억해도 오늘 하루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 LIFE STYLE (0,1)!!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을 안 보고, 세상의 말을 안 듣고 그리고 세상의 유행과 세상의 신념을 안에다 바르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ZERO된다.
LIFE STYLE (0,1) TODAY!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이 방주가 되어서 강포로 가득찬 이 세상을 오늘 하루 이기며 멋지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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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말씀... 전하신 분과 옮겨 적으신분, 그리고 두분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화려한 싱글... 정말 어렵고 외로운 길인데.... 하나님 계시면 가능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