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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 멸망과 거짓선지자, 쌍방과실!
렘 14:1-22(13-18)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선민의 멸망과 거짓선지자, 쌍방과실!’ 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좀더 국어 문법에 맞게 말을 하려면 선민과 거짓선지자 멸망에 대한 쌍방과실 이렇게 얘기하면 정확할 겁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드셨습니다마는 가수 중에서 하춘화씨 아시죠? 그 하춘화씨가 생애 처음으로 지은 시가 있습니다. 좀 코믹한 분위기에서 유머러스하게 지은 시예요. 그런데 재미있고 또 의미가 있어요.
그 시의 제목은 ‘인생은 쌍방과실’입니다.
개미 눈곱만큼 주면서
쳐 쓰기만 한 커피
내가 시켰으니... 쌍방과실
외박하고 싶단 말을
사랑한단 말로 돌려하는 우리 남편
내가 꼬셨으니... 쌍방과실
지 돈은 지 돈이고
내 돈도 지 돈일 딸년
내가 낳았으니... 쌍방과실
지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인 손주
내가 낳은 것이 낳았으니... 쌍방과실
아아~
정녕, 인생은... 쌍방과실
저는 본시 시를 자주 읽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춘화씨가 생애 처음으로 쓴 이 쌍방과실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어요. 마지막 부분에 지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인 손주 그리고 이 부분, 내가 낳은 것이 낳았으니... 쌍방과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아아~ 정녕 인생은 쌍방과실....
오늘 본문은 참 심각한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마음에 어떤 흥미를 잡아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쌍방과실에 대한 부분이에요.
여지없이 14장 오늘 본문도 이 선민 유다의 악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내용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정말 너무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의 기근의 심판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식수, 동물의 음료, 또 농사에 필요한 어떤 농업용수 전혀 찾아볼 길이 없는 기근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풍요와 다산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숭배했는데 찾아온 것은 기근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찾아올 것을 알고 동족의 고통을 예레미야가 마음으로 느끼면서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내용은 이러한 기근 심판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좀 봐주세요. 하나님!” 하고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답변하시고 또 다시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답변하시고 이렇게 예레미야의 중보와 하나님의 답변이 기근 심판이 앞에 나오면서 반복되어 뒤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기근 심판에 대해서 첫 번째 중보기도는 이런 거예요.
“하나님, 언약 백성입니다. 당신의 언약 백성인 만큼 무슨 소 닭 보듯이, 길 가는 나그네가 그저 먼 산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듯이 그렇게 보지 마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일이니까 어떻게 좀 봐주세요. 심판과 멸망의 정도를 좀 감해주세요.” 기도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10절에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기 때문에 안 된다 말씀하십니다.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면서 이렇게 너를 통해서 예언과 심판의 어떤 경고가 주어지고 있어도 그들의 발걸음이 지금 당장도 멈추지 않고 있지 않냐.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며 그 길을 걷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지 않냐. 그러므로 내가 저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다시 중보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백성 유다가 이렇게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며 지금도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걷는 이유가 선지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칼과 기근의 멸망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 말도 안 된다. 오직 너희의 앞날은 너희의 미래는 희망찬 평강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가 가고 있는 길을 계속 가면 된다.
분명이 앞에 어그러진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랬는데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선지자들이 와서 백성들에게 일컫는 말을 들어보면 너희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 반드시 그 끝에 희망에 찬 평강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어그러진 길을 걸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이 뭔 잘못이 있겠습니까? 지도자급에 있는 선지자들이 그렇게 예언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렇게 따라 간 것이니까 정상을 참작해주세요. 라고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대답이 멸망의 책임은 50:50 이다. 그래서 똑같이 거짓선지자들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 자기 마음이 지어낸 말로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전한 거짓선지자들에게도 칼과 기근으로 멸망을 줄 것이고 그 거짓 예언들을 받아들인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칼과 기근으로 멸망시켜서 예루살렘 거리에 시체들을 흩트려 놓을 것이다.
하춘화씨의 인생은 쌍방과실을 읽을 때는 너무 코믹하고 재미있었는데 이 쌍방과실이 갑자기 백성과 거짓선지자들에게 적용되니까 무서워요.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입장으로서는 내가 거짓선지자가 아닌가 라는 두려움이 있고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지금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고 있긴 하지만 저분이 잘못 말씀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 말을 듣고 아멘 아멘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간다면 거짓선지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똑같이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도대체 이게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분별해내서 어그러진 길에서 벗어나겠느냐. 두렵잖아요. 쌍방과실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 6)
소자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쌍방과실을 얘기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자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소자의 뜻이 뭔지 솔로몬의 기도에서 나와요.
왕이 된 뒤에 20세 약관에 너무 중차대한 책임을 지게 된 솔로몬이 산당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출입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듣게 해주세요.” (왕상 3:7)
소자가 뭐예요? 출입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지금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백성들의 악행이 거짓선지자에 조금도 못지않게 악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예 단정을 지어버리십니까?
어그러진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소자의 자리가 아니라 출입을 알지 못하는 솔로몬 20세 때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해서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그게 어그러진 길입니다. 그 길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이 와서 등을 떠밀고 혹시 그 길을 걸을 때 미래가 불안해지면 거짓선지자가 와서 니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미래에 확실하게 니가 원하는 성공과 니가 원하는 형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라. 이루어질 것이다. 등 떠밀어 준 것 뿐이라는 겁니다. 소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내가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더 열심히 걸으라고 등 떠밀고 격려하고 강화해준 것이 거짓 예언자들이었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이유는 너무 달콤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그러진 길을 걷고 있는데도 어그러진 길을 모르면서 걷고 있기 때문에 거짓 예언자의 말이 너무 달콤하게 들린 것은 내게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향하여 올곧게 걷고 있는데 거짓선지자가 끼어들어서 나를 잡아 끈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거짓선지자 거짓선지자 할 거 하나도 없어요. 교회에서 분쟁만 일어나면 으레 목사님 반대편은 다 목사님을 향해 거짓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 거짓선지자를 이제까지 왜 싸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선지자로 인정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쌍방과실이에요. 비난할 거 아무것도 없어요.
거짓선지자가 어떤 존재냐 라는 것은 우리가 나중에 23장에 보면 전적으로 거짓선지자에 대해 나옵니다. 그때 가서 우리 얘기해요. 오늘은 거짓선지자가 포커스가 아니라 예레미야의 중보기도에 대해서 백성들이 거짓선지자의 말에 현혹되었으므로 정상을 참작해달라는 그런 중보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거절하신다는 이 점을 우리가 살펴보는 겁니다.
백성이 걸어간 어그러진 길 이게 도대체 뭐냐?
길이라는 게 뭘까요? 길 많이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길,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있고, 요즘은 또 인도를 절반을 나눠서 자전거 길을 따로 만들었더군요.
그런데 우리 사람에게 지금 이 어그러진 길이라고 말씀하신 이 길은 우리 마음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지마는 그 인생의 길을 걷는 것을 어떻게 걸어갑니까? 우선적으로 우리 마음이 생각을 통해서 걸어갑니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걸어가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생각은 길의 끝을 향해 걸어갑니다. 길은 언제나 목적지가 있게 마련이지요.
내 인생 길을 걸어가는데도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목적지가 예를 들어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 부자가 된다는 목적지를 향해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 그 길을 우선적으로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생각으로 걸어갑니다.
지금 난관이 부딪쳤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까 생각을 통해서 생각이 발전되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점점 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그러진 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지가 틀린 길을 말합니다. 목적지가 틀린 길을 걸어가면서 그 길을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또 생각 뒤 끝에 행동이 따라옵니다. 생각이 물론 짧은 사람도 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도 있고, 바둑알을 둘 때 장고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금방 금방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어요. 생각을 통해 걸어간다, 쉽게 말하면 생각이 발걸음이라는 겁니다.
10절에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그 발걸음이 바로 우리가 목적을 향해 생각하는 것, 즉 내가 이루고 싶고 소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그러지지 않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백성들이 다 알 수 있었다는 거예요. 쉐마, 이스라엘 사람이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밥을 먹을 때든지 이마에 표를 삼고 손목에 기호를 삼고 그러면서 외우고 다녀야 할 말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마지막 끝에 있는 목적지가 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아직 나의 상태가 그런 상태가 아니지마는 언젠가는 내가 하나님 한 분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될 날이 있을 것임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게 뭐예요? 언젠가는 돈을 벌어서 내가 돈이 정말 흡족하게 될 만큼 있게 될 날이 있겠지 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완전히 배부를 날이 있겠지, 하나님이 계시면 내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날이 있겠지 라고 소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일류대학 들어갈 날이 오겠지 라고 꿈꾸며 유치원 때부터 과외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게 어그러진 길이지요.
바른 길과 어그러진 길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고 어그러진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하는 게 생각이에요.
어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허리띠가 있는데 그 허리띠를 아나돗에서 600km가량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변에 숨겨둬라. 600km라는 그 당시의 공간 개념으로는 엄청난 거리라고 그랬습니다. 그 거리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인데 멀어져 간다는 것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곧 그 발걸음이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돈을 원하고 건강을 원하고 자녀의 일류 커리어(career)를 원하고 여러 가지 원하는 것들이 있어서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걸어갈 때에 생각을 합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발걸음이에요.
그러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아니에요. 생각하면 안 돼요. 생각이 하나님을 버리는 길입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에요. 그래서 우린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화해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란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이 순간에는 무엇을 해야 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잡혀 가더라도 걱정하지 말 것은 미리 무엇을 말할까 생각하지 말아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너희가 해야 될 말을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세요.
하나님과 대화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생각은 독백입니다. 그러나 대화는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간의 교통이에요.
그러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으로 대화하세요. 생각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생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유프라테스 강까지 멀리 가는 거예요.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멀리 간 상태에서 기도합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내가 원하는 이 어그러진 길인지도 모르고 이 길의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려면 아, 이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래서 하나님을 찾으면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12절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그러진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 이 길이 좋다고 내가 결정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서 복음으로 주어지는 이유 그게 왜 복음입니까?
우리 마음이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상태가 될 만큼 하나님을 많이 갖고 많이 느낄 수 있기를 소원하는데 도대체 내 속의 죄악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이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거예요. 자식에 대해서 생각할 때 생각 자체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거예요. 생각이 시작될 무렵에 십자가를 기억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면 땅에서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시작을 합니다. 우리 처지에서 다시 말해서 돈 없는 처지, 병 든 처지, 자식이 말썽인 처지에서 시작하지 않고 기도가 왜 하늘에서 시작합니까?
십자가에서 죽고 시작하라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곧 선민이요 참 교인이니까요. 무조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시작점입니다. 십자가에서 이 땅에 대해 생각이 죽고 마음이 죽으면 당연히 내 마음은 하늘에 가 있게 되지요.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내 마음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잔뜩 남게 해주세요. 하나님으로만 기쁘게 해주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러분, 이 말을 우리가 이렇게 바꿔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성공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성공 쉽게 말하면 부자가 내 부자됨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그런데 하늘에서는 내가 부자 될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하늘에서는 내가 100살 까지 살도록 정해져 있지 않아요. 무병장수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하늘에서는 내 아들 딸이 일류대학 들어가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게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이 정한 가치 기준에 따라 성공을 말하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다 성공해요.
그러나 성공의 그림과 성공의 내용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나는 돈 없이 평생 살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나는 100명의 교인을 넘지 못하는 목회자로 끝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나는 때로는 내 속의 죄악 때문에라도 병이 발병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뜻. 그 뜻이 길입니다. 그래서 잠언 3장 6절에서는「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은 허수아비를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 길이 뭐에요? 하늘의 뜻이에요. 하늘의 뜻이 정해져 있고 그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죽어야 하늘에 도착하고 하늘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서 제 길을 갈 텐데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의 말은 지금 예배드리러 온 교인들의 마음이 원하고 있고 가고 있는 그 걸음을 계속 걷게 해줍니다. 하나님 믿으면 이 땅에서 우리가 소원하고 있는 부자를 향해 갈 수 있고 우리 자녀들이 다 잘 될 수 있고 만세에 복을 받을 수 있고.... 이럴 수 있어요??
그럼 사도 바울은, 베드로는,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레미야는 뭡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도 왜 이 모양으로만 삽니까? 그런데 사도들 중에 불평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기독교는 부자되게 해주는 종교가 아니라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내 자식들을 일류가 되고 엘리트가 되게 해주는 종교가 아니라 일류와 엘리트에 대한 소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종교에요. 이 사회가 나를 엘리트라고 말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게 기독교며 참 선지자가 하는 일이 그겁니다.
지금 교인들이 사랑하는 길이 어느 길입니까?
돈 많이 버는 길이에요. 그건 예외 없어요. 무병장수의 길이에요.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정한 대로 잘 되는 길이에요.
이 길을 다 걷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길을 걷는 게 생각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걸 고스란히 받아서 밀어줍니다. 봉사하고 충성하세요. 십일조 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곳간 문이 터져 나갈 정도로 다 쏟아 주십니다.
이게 거짓선지자들의 말입니다.
돈이 많이 주어질 수도 있고 적게 주어질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벌거나 적게 벌거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복이기 때문에 자식이 복일 수 있고, 애인을 만나면 기쁠 수 있는데 왜 하나님 만나면 기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복입니다! 이렇게 외쳐야 됩니다.
그러므로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는 생각을 버립시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죽었음을 인정합시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야 됩니다!!!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이 땅이 끝난다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활절 전 고난주간에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설교할 수 없다고 하면 주님의 십자가로 날마다 죽으면서 살지 않는다는 얘기고 주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붙잡을 만큼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면 십자가를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선민의 멸망은 거짓선지자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거짓선지자는 자기 자신으로서 거짓을 예언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에요. 그러나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내가 거짓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쌍방과실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누가 누구를 향하여 영적 세계 안에서 거짓이라 비난을 하겠습니까? 다 내 속의 죄악 때문인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해주시고, 거짓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기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여 걸어가는 길을 바로 걸어갈 수 있는 참 하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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