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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서론
호1:1
선지서는 총 17권인데 이해하기 쉽도록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나뉩니다. 대 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예레미야 애가 5권이고, 소선지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2권입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는 어떻게 나누었는가? 대선지서는 기록된 말씀이 많은 것이고, 소선지서는 기록된 말씀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호세아가 12소선지서 중 맨 앞에 기록되어진 이유도 이 책이 그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 중에서 가장 기록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가랴서가 호세아서보다 조금 더 길지만 내용이 포로 시대 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서의 저자는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호세아서를 기록하면서 자기가 어느 왕 때 활동했는지를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호1:1절‘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는 자신이 예언했던 시대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를 통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서 주님이 마지막 오신다고 해도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한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호세아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호세아를 통하여서 음란한 이야기도 하겠습니다만 부끄러운 것 같아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내면서 은혜를 받았으면 합니다.
다니엘서 이후에 나오는 12책은 소선지로 부릅니다. 소선지서란 말은 그 성경들이 덜 중요하거나 영감이 부족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 책들은 선지서보다 그 분량이 적은 것 뿐입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와 예레미야서에 비해 짧은 책들입니다. 소선지서의 메시지가 대선지서에 비해 간결하기는 하지만 똑같이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시대 이전에 이런 12책들은 함께 한 두루마리로 만들었으며 집합적으로 12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서론부분을 다루어 봅니다.
1.호세아서의 서론과 명칭
호세아의 이름은 구원이란 뜻이며 이스라엘의 북왕국을 위해 섬겼습니다(역시 가장 큰 지파 에브라임으로도 부름). 외적으로 그 나라는 번영과 성장의 시기를 누렸지만 내적으로는 도덕적인 부패와 영적인 간음이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하도록 지시를 받았는데 그의 가정생활은 하나님의 백성의 불성실함에 대한 정확하고 비극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의 선지자 사역의 반세기 동안 호세아는 반복하여 그의 삼중 메시지를 되풀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죄를 혐오하신다’,‘심판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고하게 선다’입니다. 호세아, 여호수아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은 모두 같은 히브리어 어근에서 왔습니다. 호세아(hoshea)란 말은 구원을 의미하나 예수아와 예수는 부가된 사상을 포함하는데 예수는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서 호세아는 그 나라가 우상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갈때만 구원이 가능함을 제시하였습니다. 2명은 헬라어에서는 호세아이며 라틴어로는 Osee입니다.
2.호세아서의 주제
호세아서에 나타나는 주제는 심판과 사랑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강력한 심판을 예고하시면서도 심판 후에 또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예언합니다. 호세아는 가정과 자연으로부터 몇 개의 이미지를 들어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치도 난잡한 아내, 무관심한 어미, 사생아, 은혜를 모르는 아들, 고집센 어린 암소, 어리석은 비둘기, 무성한 포도나무이며 들포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완고함도 인간의 이해의 능력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고갈시킬수 없었습니다.
3.호세아서를 쓴 목적
호세아서는 그 특징이 호세아라는 한 가정을 통해서 아내된 이스라엘을 향한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늘 쓰시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로 인해 받는 여러 가지 수치와 고충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 하시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적 목적으로는 호세아는 불성실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교리적 목적으로는 본서는 의식주의의 무용, 인간의 타락 그리고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론적 목적은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11:1), 그의 백성의 유일한 구주(13:4), 죽은 자로부터 우리를 속죄하신 자(13:14; 참고, 고전 15:55)로 소개하지만 두드러지게는 우리의 자비로우신 애인이시며(11:4) 타락한 자의 치유자(6:1)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4.호세아서의 중요한 단어, 요절 그리고 장
중요한 단어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왕적인 사랑’입니다. 요절은 4: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도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11:7-9절‘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중요한 장은 4장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진리의 지식을 떠나 이방 이웃의 우상숭배를 따랐습니다. 본서의 중심은 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다한 그 날, 천국에 올라가서 이 땅에서의 행적을 들추어 볼 때, 상주감리교회에서 섬김의 모습을 볼 때 또 상주감리교회에 남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믿음의 후배들이 먼저 간 선배들 신앙의 업적을 평가할 때 과연 어떤 이름으로 남기를 원하십니까? 허울 좋은 화려함으로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버린 북 왕조의 이름으로 기록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알차고 풍성한 하나님께서 소망을 두었던 남 왕조의 이름으로 남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에서 새로운 항로를 결정하시고 결단의 키를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험한 파도를 만날 것이고 무섭게 몰아치는 광풍과도 맞딱뜨릴 것입니다. 암초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추위와 배고픔의 암흑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치 있는 남 왕조로 살기를 결심한다면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담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던 사람이 호세아 선지자였고 그렇게 외쳤던 사랑의 기록물이 바로 호세아서인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도 신앙의 아름다운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멋진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
호1:1
1.호세아서의 메시지
크리스챤의 세계관의 요인들입니다. 호세아서는 반역과 죄 그리고 언약과 구속의 세계관의 범주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시는 원인은 여인의 남편(하나님)에 대한 부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바알)과 간음하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를 구원할수 없는 백성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서처럼 충분히 가르치는 성경은 없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호세아의 신론은 남편과 아내의 비유에 근거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이 다른 신을 열애하는 것을 영원히 관용치 않으십니다. 그는 반드시 불성실을 심판하십니다. 동시에 그의 언약백성을 위한 사랑은 영원히 인내하시며 어느날 에브라임(북왕국)은 반역을 치유받게 될 것입니다(14). 마태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한 호세아의 역사적 언급을 애굽에서 예수님이 나오실 그림자로 인식하였습니다(호11:1;마2:15). 성경은 이 책에서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인간입니다. 고멜의 간음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모두 인간의 부끄러움과 죄의 어두움을 묘사합니다. 호세아의 고멜에 대한 예외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본서는 6:6에서 구원의 성격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동물의 희생을 드리는 제사는 결코 구원에 관한 성경적 이해의 한 면이 될 수 없습니다. 인애로 번역된 말(히브리어 chesed)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함합니다.
2.호세아서의 개요
1-3장 까지는 음난한 아내와 성실한 남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신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스르엘, 루하마, 그리고 로암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폐하실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사하게 하나님은 그들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흩으실 것입니다. 고멜은 다른 애인을 구하고 호세아를 버릴 것입니다. 그녀의 죄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녀를 노예시장에서 사서 회복시키겠단느 이야기들입니다.
4-14장 까지는 음란한 이스라엘과 성실하신 여호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 때문에 호세아는 그의 백성의 죄를 통한 하나님의 슬픔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멜을 위한 그의 왕적 사랑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죄의 함정으로 떨어졌으며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지막 호소를 대적하며 강퍅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 모두를 범했으며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거룩한 하나님에 의해 기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그들을 고치시고 구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7:1, 13). 그러나 그들의 거만과 우상숭배로 배반하였습니다.
9-10장은 하나님의 평결이 소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그들의 흩어짐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므로(4-7장) 그들은 회오리바람을 거두었다(8-10장). 이스라엘은 회개를 거부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지체할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4-7장), 공의로우시다(8-10장). 그러나 그는 역시 사랑하시며 은혜로우시다(11-14장). 하나님은 징계하실 것이나 그의 끊임없는 사랑 때문에 그는 긍극적으로는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하실 것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느냐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라(11:8; 14:4).
3.구속사적 의미
호세아에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먼저 이스라엘은 음녀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국가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하고자 음란한 열정을 쏟고 있다고 지적합니다(호4:1-2; 호12:8; 호13:2). 결국 그들은 열방의 물질주의가 주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은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악의 병은 스스로는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그들을 깨우쳐야만 했으며, 그 병을 치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돌아옴에 대하여 호12:6은 하나님만 바라볼 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리하면 의를 비같이 내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호10:12).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에서 그들을 돌보시고 계시를 주시며 가나안을 정복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보다 가나안의 문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계신다고 호세아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은 회복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호세아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세 가지의 구속사적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언약갱신입니다. 이 언약 갱신은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을 변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ym[al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가 ym[ (암미; 너는 내 백성이다,호1:10; 2:1)가 되고, la[rzy(이스르엘; 피흘림)이 하나님께서 풍요를 주신다는 뜻(호2:22, 23)으로 되며, hmjral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가 hmjr (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로 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의 저주가 축복으로 변했습니다. 이들의 새로운 이름을 정리하면 내 백성, 소망, 긍휼 등이며, 이들은 하나님의 새 백성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새 백성입니다. 이 새 백성은 신랑과 신부의 개념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언약 백성은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신부, 즉 새 백성으로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창조 언약과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언약의 혜택을 모두 베푸십니다. 이는 신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한 상징들을 이해하게 합니다(엡5:26,27; 계21:2,9; 계22:17).
새 지도권입니다. 호세아 첫 부분에 유다 왕을 나열함(호1:1)과 남북이 통일됨으로써 북이스라엘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호1:1)그리고 이스라엘이 돌아와서 다윗 왕을 구한다는 것(호3:5) 등은 호세아의 사상이 다윗 계통임을 가리킵니다. 즉 다윗의 혈통에서만 예수그리스도(메시야)가 올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언약의 새 백성에 대한 지도권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주가 될 것입니다(호6:6). 이는 이방이나 유대 모두에게 속한 것입니다(롬10:1).
저는 앞으로 저에게 주어진 설교 시간을 통해 이 호세아서를 함께 나눌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절절한 그 사랑을 담은 이 책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부요한지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소망을 담은 주인공의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르실 때 여러분 그렇게 결심하시길 축원합니다.
음란한 여자
호1:2
고멜은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입니다. 고멜이라는 의미는 ‘끝’,‘마지막’,‘완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극심하였던 여로보암 2세 시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려고 호세아 가정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1:2절‘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그래서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배우자가 딴 사람에게 마음 빼앗기지 말고 자기만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부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호1:2절‘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아니 하나님께서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더욱이 자식까지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니. 여기서 ‘음란한 자식’은 누가 아비인지 모르는 사생아를 말합니다. 아니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귀의 말 같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에 순종하여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습니다.
오늘 본문에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명령을 하시고, 또 그 선지자들은 그 엉뚱한 명령에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 하나 하나님의 명령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라, 하라’고 하실 때 모두들 괜찮은 순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도 역시 하나님의 2가지 명령에 괜찮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첫재 명령은 장가 가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정통성이 있는 가정에서 바르게 교육 받은 사람이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만 배우며, 하나님만 섬기며 살았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상대대로 예수만 섬기는 집안에서 아주 훌륭하게 자란 총각입니다. 늘 하나님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총각입니다. 그런 총각에게 하나님께서 더디어 결혼을 명령하십니다. 얼마나 이 총각이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2절에 ‘비로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말씀입니다. ‘비로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어쩌면 장가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매해 주신 분이 음란한 여인입니다. 얼굴이 못생긴 여인도 아니고, 돈이 없는 여인도 아니고, 음란한 여인입니다. 차라리 얼굴이 못생겨도 좋겠습니다. 돈이 하나도 없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가 아니고, 음란한 여인입니다.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나님은 중매를 쓰십니다. 여기서 ‘음란한’이란 ‘창기가 될 가능이 있는 기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모르게 바람을 피우는 정도가 아니라 창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명령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살아온 호세아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명령입니다. 세상의 온갖 때가 다 묻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틀림없이 살림을 잘 못할 것이고, 자식들 교육 똑바로 못할 것이고, 시부모 잘 모시지도 못할 것이고, 형제간에 우애도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그런 여인을 아내로 중매하십니다. 그리고 더 창피스러운 것은 창기짓을 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누가 뭐라고 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순종함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음란한 여인만은 싫습니다’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 바보라도 좋으니 음란한 여인만은 싫습니다’하고 투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하였습니다. 여기에 호세아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순종은 구원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구원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도 항상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그것은 거룩해야 할 이스라엘백성들이 음란한 백성이 되었다 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싸움을 말리다 말리다 안 되니까, 그래, 싸워라. 하고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출3:7,10절에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남이 아니라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주시면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출20:2절‘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11:45절‘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나는 네 하나님이요, 너는 내 백성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출애굽한 백성들 사이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단일주의를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혼합주의.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들도 섬기고. 이것이 영적으로 음란 한 것이고, 간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고하셨음에도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방종교에 쉽게 유혹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특히 이스라엘백성들이 쉽게 미혹되었던 신은 바알 신이었습니다. 왜냐? 바알신은 농사의 신이기에 바알을 섬기면 농사가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제사 후 여인들과 무차별적인 성행위가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성 행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바울이 힘을 내어서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고 바알 제사장들이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쉽게 유혹된 것입니다.
거짓 종교들의 공통점, 현재 문제 해결에 둡니다. 소위 복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복음입니다. (욥1:9-10) 그리고 도저히 현재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안보일 때에는, 현실도피. 내세에만 관심을 두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현실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신자가 무엇입니까? 신자란 주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자신과 함께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곳이 깊은 산골이든 번화한 도심이건 신자는 어디에서든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함을 믿습니다. 심지어는 예배당 안이건 술을 파는 술집이건 어디에나 주님이 계시고 내가 있는 그곳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신자의 신자됨이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성령 충만, 능력. 하나님이 복 주시면 신앙생활 잘 할까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여로보암2세를 통하여 나라를 크게 부하게 하시고, 과연 이스라엘백성들이 내게 돌아오려는가?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더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장사가 잘되니 더 바빠졌습니다. 예배드릴 시간이 더 없어졌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나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나는 그 분의 자녀’거룩한 백성으로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음란한 여자 2
호1:2
오늘날 우리는 많은 부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배당 안에서만 신자로 살아갑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주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서는 누구나가 다 성자인 척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다 거룩한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사기꾼도 도둑도 심지어는 살인자도 거룩한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 오기 전에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죄악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 죄악을 그대로 담고 이곳에 와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제가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보았을 때 전혀 범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거룩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평안하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베드로 같고 바울같고 요셉같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신자됨의 진가는 교회 안이 아니라 예배당 안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가려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터전은 예배당 안이 아니라 세상속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받은 은혜를 예배당 바깥인 세상속으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호세아를 한 번 보십시오. 그는 성전 안에서만 신자로써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서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호1:2-3에 보면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세아는 그가 살았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행했고 그 삶의 터전 가운데서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명령은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입니다. 그것도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음란한 것은 마누라 하나로 족한데, 거기에 자식까지 그런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저 같으면 여기서 한번쯤 하나님께 사정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나에게 너무나 가옥한 형벌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만 섬기며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 자식놈 만큼은 지 애미를 안 닮은 놈으로 낳게 해주십시오’하고 한번쯤 불평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진짜로 왜 이러십니까? 그럼 나 결혼 안 할 것입니다’ 하고 하나님께 대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괜찮은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왜 그런 자식을 낳아야 되는지를 친절히 설명해 주십니다. 설명하시지 않아도 호세아는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친히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그러니 그런 자식을 낳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나라’는 고멜, 호세아의 아내 될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 어미가 음행하니 그 속에서 나오는 아들도 음행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호세아 너 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대부분 자식은 어릴 때는 엄마쪽을 많이 담습니다. 성격이나, 행동이나, 생각하는 것들이 처음에는 엄마쪽을 많이 담습니다. 왜 그럿냐면 애기들은 어쩔수 없이 모유를 먹고, 모성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보다는 엄마가 좋고, 엄마를 담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잠자는 모습까지, 걸음걸이까지, 닮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 고멜은 ‘타락한 오늘의 세상’을 은유한 것이고,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문화가 나오고, 또다시 타락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주님은 말 없이 오셨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를 통하여 수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셨건만, 세상은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행음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주님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들에게 용서하시려고, 사랑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음행한 것을 다 알고 오셨습니다. 음행한 아들을 낳을 것임을 알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느껴야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 났겠습니까? 음란한 고멜과 별반 차이가 뭐가 있습니까? 어쩌면 아직도 음탕한 고멜의 자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있다면 아직도 음탕한 자식들입니다. ‘주여, 주여’하지만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하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면, 또다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음을 즐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면 얼마나 음탕한 세상입니다. 타락한 문화가 또 다른 타락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지 않고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혼하지 않고는 더 나은 사랑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동료를 죽이지 않고는 내가 죽게 될 판입니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양심을 버린지가 너무나 오래됩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권력과 명예를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음탕한 세상을 향하여 아무도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에 주님은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세상이 ‘타락한다’고 해서 우리까지 타락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주님 편에 있는 자는 살아남을 줄로 믿습니다. 진정으로 주님 편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십니까? 멸망의 자식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세상 속에서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그 속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십시오.
젊은이들 놀이중에 ‘진실게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놀이를 하는 동안에는 무조건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금술이 좋은 두 젊은 연인이 진실게임을 했습니다. ‘자기 나 좋아해’-응, 얼마나-‘하늘만큼, 땅 만큼’,‘자기 나 말고 누구 좋아 한 사람 있어, 없어’,‘있어’,‘누구’-‘자기 친구 영윤’ 그날 이후부터 ‘영윤’를 볼때마다 신경이 써입니다. 그리고 괜히 이 남자가 미워집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알고 찾아오셨습니다. 죄인임을 알고 오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해야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이 길은 가시밭길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들에게 앞으로 우리가 걸어 가야할 길이 평탄치 않고, 고통의 길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이고 할 일은 순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상한 하나님의 명령일지라도 순종해야합니다. 호세야는 더한 일에도 순종했습니다. 주님은 더한 고난에도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비록 그 고난이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순종의 삶이 가시밭 같을지라도, 생명을 면류관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 명령에 언제나 순종하며, 묵묵히 주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멜의 임신
호 1:3
호세아 선지자와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낳은 3명의 자식들과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세아의 자녀들에게 주신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지적하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 아이의 이름이 독특하다면 사람들이 물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얽힌 하나님의 메시지를 호세아를 통해서 설명을 듣게 됩니다.
호세아란 말은 구원이란 말에서 유래하여 ‘구원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여호수아의 본명기도 하나 여기 호세아는 브에리(땅에서 솟구치다)의 아들이라고만 밝히면서 아내 고멜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민 이스라엘의 가증한 전방위적 타락을 지적하면서 심판 경고 및 용서와 회복의 약속을 보여주며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을 배반하고 음란을 저지른 아내 고멜을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받아주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적 사랑을 예표합니다. 호세아에게 말씀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참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은 인간적인 사고나 상상력이나 의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만난 후, 선지자로 택정됨과 부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감동된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을 선포하는 사명자가 되었을 때, 호세아는 하나님께 전적 헌신과 충성된 주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임하였을 때, 기꺼이 기쁨으로 순종의 길로 행한 자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3절‘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했습니다.
그럼 고멜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고멜에 대해서 3절에서는 ‘디블라임의 딸’이라고 말씀합니다. ‘디블라임’은 호세아 장인으로 ‘한 쌍의 무화과 케이크’를 의미합니다. ‘고멜’은 ‘끝’이라는 뜻과 ‘완전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완전하다하는 것은 그녀가 죄악에 완전히 물들어 있음을 시사하며, 끝이란 이제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마땅한 자임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멜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신앙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와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호세아는 온 마음과 몸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을 따라 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곧 순종한 것이니다. ‘이에 저가 가서’라는 말씀은 사명자로서 진지하고 멋진 순종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믿음에 의한 순종의 사람으로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하심대로 ‘가서’라는 말은 그의 결혼대상이 음란한 여인 고멜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까닭은 무엇일까?
무명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 주심으로, 큰 사랑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대변자인 선지자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의 거룩한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사역을 시작한 자로써 하나님께 순종으로 시작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겪는 큰 아픔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설교자 자신이 설교한대로 살지못하는데서 느끼는 아픔입니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설교를 작성하고 말씀을 증거하지만 설교자 자신이 아직도 삶을 그 영적인 요구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데에 기인합니다. 두 번째 아픔은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서 느끼는 아쉬움에서 옵니다. 설교자는 설교한 만큼의 결실이 설교를 듣는 회중의 삶 속에 맺히지 않는 데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최근에 한 목회자가 설교집을 내면서 ‘접근이냐 접촉이냐’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제목입니다. 신앙 생활은 접근만으로 끝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내가 그 근처에 가 보았다고 해서 다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건 현장에 서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 모든것이 다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만져야 합니다. 그것에 내가 접촉이 되어서 짜릿한 감동에 빠져야 합니다. 접촉이 되어 감동을 받으면 삶이 바뀝니다.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을 나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인내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신앙 생활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인내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를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내로 대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에 대해 포기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인내력 배양방법을 가장 정확하게 터득하신 분이실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포기하고 싶으실까요?포기의 순간을 자주 만나지만 그 순간들을 거듭해서 넘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포기해도 좋을 모자라는 우리의 성격을 하나님이 그렇게 견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북쪽으로 올라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엉뚱한 기대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떠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신앙의 중심을 지키면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금 그들은 그런 형편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이루어 보려고 했지만 결과는 전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문란한 우상 숭배가 북 이스라엘을 점령해 버렸고 윤리와 도덕의 타락이 찾아 들었습니다. 이것을 비유하려고 호세아의 가정을 예로 들어 보이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를 맞아들여 결혼하는 이 이야기는, 바로 예루살렘을 떠나 가장 멋진 삶을 살아 보겠다던 이스라엘 백성의 외침과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결과가 발생한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장에서 지적한 대로 당시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는 시기였습니다. 남북으로 나눠진 후 이때처럼 부강한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음란에 음란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의 내용 그대로 호세아의 아내, 고멜의 음란한 삶은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타락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곧 신앙의 중심을 떠나면 아무리 물질이 풍부해도, 모든 일이 잘 풀려도 그 결과는 타락입니다. 결코 새로운 출발일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를 유의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자식만은 그렇지 않기를 호세아와 고멜이 결합한 결과로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중심으로 교회중심으로 목회자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인내하시며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더나서 잘되는 것 같아도 그것은 타락의 길입니다. 호세아를 통해서 잘 살펴보시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첫 아들 이르르엘
호1:4-5
하나님은 첫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의 친절한 배경은 무엇인가? 호세아의 세 자녀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회개하지 않을 때 받는 징계의 심화를 가리킵니다. 회개하지 않을수록 그 징계는 더 깊어만 간다는 뜻입니다. 특이 이 일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이므로 우리 육체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에 관한 관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육체에 부어주신 은혜에 문제가 생겨난다는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해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을 낳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4절, 6절, 9절)’ 하신 것입니다. 자녀들을 출산하면 대게 어머니가 이름을 짓고, 아버지가 자녀의 이름을 받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세 자녀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 것은 호세아 가정을 북 이스라엘 나라로 예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 하‘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람함이니라’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기 때문에 아버지 호세아는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으로서는 세 자녀의 이름을 받아드리기에 엄청난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이름이었습니다.
예로 서양에서는 지혜자 ‘솔로몬’ 왕의 이름을 자녀의 이름으로 짓는 경우가 드뭅니다. 까닭은 그는 바람둥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걸출한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로 걸출한 신앙인 아브라함과 요셉 등 같은 이름을 많은 부모들이 선호하는 이름입니다. 여하튼 호세아의 세 자녀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대변하고 설명하는 이름들이었기 때문에 호세아는 기꺼이 받아 인정하는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입니다.‘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으로서, 축복의 이름,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한다는 뜻을가진 이름인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발음은 비슷 하지만 전혀 엉뚱한 뜻을 가진 ‘이스르엘’은 저주의 이름이요, 완전한 멸망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신다’, ‘하나님이 쫓아버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중심을 벗어나면 모든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예루살렘을 벗어나 북쪽 그 어디에든 나라를 세우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중심을 떠나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이 되고 말 것입니다.
4절‘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했습니다. ‘이스르엘’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흩으심’이라는 뜻과 또 ‘하나님께서 심으시다(파종하다)’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르엘은 예후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이고 그 어머니 이세벨을 처단하여 개들이 그 시체를 뜯어먹고 두골과 발바닥 외에는 찾지 못할만큼 되었던 그 사건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활이란 군사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후가 이런 좋은 일을 했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면 꼭 그와 같이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다 흩어버리시고 처참한 최후를 장식하게 되며 힘을 상실하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이 최초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내용입니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으면 온갖 죄악에 저항하도록 육체에 부어주신 여러 은사와 능력들을 다 빼앗으시며 소멸하게 버려두십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은사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예후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히 많았습니까? 바알을 장려한 이세벨과 전국에 있는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인 강력한 개혁자입니다. 이처럼 은사가 임하면 열심히 생깁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된 것처럼 은사가 임하면 능력이 생깁니다. 권세도 생깁니다. 하나님께 마음 바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는 다면 예후의 오므리 왕가도 아합 왕조와 같이 될 것이라 했듯이 영적으로 죽어져서 영력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 전에 벌써 요람 왕이 아람군에게 상처를 받았듯이 조그만 일에도 마음의 상처를 잘 받는 현상이 옵니다. 더 심해지면 능력을 잃어버리는데 그 때 남는 것은 이세벨을 개가 먹어 두개골과 발바닥만 남듯이 빈 껍데기 지식만 남고 의식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능력 받았다고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흩으심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스르엘은 축복과 승리의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뜻은 판이하게 하나님의 흩으심이라는 나쁜 저주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므로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바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이 이름을 지어주셨는가? 북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송아지 우상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4절‘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했습니다. 예후는 아합의 가문을 징벌한 자입니다. 아합 왕 가문은 북 이스라엘에 조상적 섬겨왔던 금송아지 우상 외에 바알 우상숭배를 도입하고 적극 권장한 악독한 짓을 했습니다. 이러한 아합 왕의 가문을 이스라엘의 열 번째 왕이 된 예후가 엘리사의 생도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스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같이 여호와의 칼잡이가 되어 아합 왕의 집안과 모든 우상숭배자들을 몰살과 숙정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만 섬겨 사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후와 그 집안도 아합 왕과 그 집안처럼 금송아지 우상숭배 곧 여로보암의 죄악에서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르엘의 피(지난 날 예후가 이세벨을 죽이고 아합 왕의 70명의 아들의 목숨의 피를 흘린 곳 이스르엘<왕하10:1-11>)가 호세아의 맏아들 이름으로 부각되어, 이제는 예후의 집에 갚겠다(보응함, 처벌함)는 것입니다.
예후 왕이 아합의 집을 척결할 때의 행위를 하나님께서도 칭찬하셨고 잘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왕하10:30절‘여호와께서 예후에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했하였’다고 했습니다. 아합의 집 그 가문이 우상숭배로 이처럼 철저히 숙정되고 멸망을 받았다면, 자신은 그것을 경계 삼아 우상숭배를 철저히 멀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화가 되고 독이 되어 선지자 호세아의 맏아들 이름으로 지어져, 예후의 가문이 4대만에 아합의 집안처럼 쑥대밭이 된다는 예언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스르엘’은 나라의 망함과 쇠(衰)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이름입니다. 4절‘조금 후에 내가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했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전에는 아합의 집을 심판하는 곳이 되었지만 이제 예후의 집과 아울러 북 이스라엘 나라가 쇠하고 망하는 하나님의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폐할 것(솨바트=중지시키는 것, 끝내는 것, 전멸시키는 것)’이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집행될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5절‘그 날에’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는 날을 뜻합니다. 그 날이 오게 되는데, 그 날에는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하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활’이란 이스라엘의 군사력, 또는 국력인데 이를 하나님이 ‘꺾는다(솨바르=그릇이 깨어지데 산산히 부서짐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맏아들 이름은 ‘이스르엘’이라고 한 것은 북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바알 숭배를 계속하는 한 희망과 꿈은 일절 없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상기시키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 진노와 심판은 그들의 정권과 부귀와 영화를 다 없이하는 것이 되고, 그들의 존재까지 없이하는 심판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만 경외하시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의 삶을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궁휼이 여김받지못한 로루하마
호1:6-7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자녀들을 낳아보셔야 알겠지만 자식을 낳으면 기쁨과 감격이 있고, 그 자식의 미래를 꿈꾸면서 기대에 부풀어서 밤잠을 설치면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았는데 누구 자식인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주셨는데 하나같이 저주스런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2022.8.15.일쯤 티비 뉴스에 엄마, 아빠가 다 B형을 가지고 시험관 아이를 해서 낳았는데 태어난 아이는 A형입니다. 처음에 의사가 돌연변이라고 해서 그렇게만 알고 26년을 키웠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유전자 검사했는데 엄마것은 있는데 아빠것은 없습니다. 의사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고 의사는 도망가 대답이 없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벧후3:9절‘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오늘날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지체하고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벧후3:10절‘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했습니다.
두 번째 딸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는 것 뿐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면 이제 우리와의 관계는 끊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내용의 관계가 많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다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공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이라고 여겨도 그리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호세아의 둘째는 장녀로써 그 이름은 ‘로루하마’인데 장녀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6절‘로루하마’라는 뜻은 각주에 있는 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 이름을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부정사인 ‘로’가 붙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로 낙인찍힌 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강한 어조로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전적으로 그들과 그들의 모든 것을 치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호1:8에 보면 ‘젖을 뗀 후에’ 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출산한 아이에게 3년간이나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긴 수유기간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는 아이가 크고 커서 다 이상 산모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을 향하여 세속에서 벗어나 장성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려 세 번이나 계속되는 경고 앞에서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긍휼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일5:16-17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은 죄란 죄인 줄 모르고 지은 죄도 거기에 속합니다. 혹은 범죄하고 속히 회개할 때 사망이 오지 않습니다. 혹은 죄악의 초기 즉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한 대로 아직 초기에 머물 때 사망이 오지 않습니다. 그 때는 아직 양심의 율법이 작동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 회개하지 않으면 영적인 사망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긍휼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강한 어조로 긍휼히 여길 수가 없다고 천명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즐겨 찾지 않기 때문이다’ 암5:5처럼 금송아지 제단이 있는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찾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선지자의 증거에 귀를 기울려 순종치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 호세아는 자기 백성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외쳐 일깨워줍니다.
7절‘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유다에는 열왕기서에서 표현하여 주는 말씀과 같이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고 진심으로 행하는 코람데오의 삶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날마다 신앙점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께 자신있게 말합니다. 우리는 절기도 잘 지키고, 제사도 많이 풍성하게 잘 드린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 속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도 바알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상태에서 지키고 있으니 그게 무슨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드린다 절기를 지킨다고 하면 더 힘들어하시고 싫어하시는 겁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혹시나 그렇게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검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항상 십자가 앞에 있다고 하지만,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은 뒷전에 있고, 내 편한 것, 내가 좋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게 유익이 되는 것만 열심을 내고, 조금이라도 힘들고 유익 되지 못하면 집어던져 버리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주일예배도 잘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잘하고, 기도도 찬송도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겠지요.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 중심의 태도를 행세하거나 배워가는 곳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바른 삶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은 그런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의 태도를 지녀가시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호세아처럼 기가 막힌 상황을 당했을 때에,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언제까지일지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할 때에 나의 답답함과 참담함 속에서 이 죄악된 세상, 말도 안되는 일들이 무수하게 일어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기를 힘써 보는 경건의 노력을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런 참담한 심정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겁니다. 오늘도 참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모든 것을 겸허히 내려놓고, 주님 중심의 참된 믿음을 다져나가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버림받는 로암미
호1:8-9
마지막 세 번째 자식인 아들에게는 로암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그 의미는 9절에서처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젠 하나님께서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버리겠다고 말씀해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자식들을 통해 죄악된 현실을 지적하시고, 그래서 내가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까지 하셔도 이스라엘은 조금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의 자식들이 연년생이 아니라 평균적으로 서너살 터울이 지게 아이를 낳았다면 셋째인 아들이 태어날 때에는 적어도 6-7년 세월이 흘렀겠지요. 그런데도 이 긴 시간동안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회개의 메시지를 촉구해도 이스라엘은 전혀 변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최종적으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고, 나도 더 이상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선언해 버린 겁니다. 이스라엘과 맺었던 생명과 은혜의 언약이 파기되어 버리는 순간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민족은 망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돌이키지 않으려는 것은 스스로 패망의 길을 향해가는 지름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회개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로암미라는 이름은 그 뜻이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짖고 있는 상황에서도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신32:5절‘그들이 스스로 부패하였으니 그들의 반점은 그분의 자녀들의 반점이 아니요, 그들은 사악하며 비뚤어진 세대로다’이미 죄 가운데 사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라면 결코 죄와 상관하여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주님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까닭에 아무런 가책 없이 죄를 저지르기도 하며 그러한 행위들이 구원받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에 대하여 매우 단호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죄 가운데 사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요일3:8-9절‘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요, 죄를 지을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라’구원받은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디 북 왕국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은 알지만 죄 가운데 살다가 선지자들의 집요한 회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다가 멸망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호세아의 차남이요 셋째를 로암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9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했습니다. ‘로암미’의 이름의 뜻은 각주에 있는대로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도 마찬가지로 부정어 ‘로’가 혹이 붙어 있는 것처럼 붙은 재수 없는 이름이요, 저주가 붙은 이름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제 이스라엘과 맺었던 모든 언약관계를 청산하시겠다 즉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시겠다는 가장 강한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완전한 버림은 없지만 원수들에게 내어버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경험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지고 버림받은 듯한 불행을 경험합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완전히는 버리시겠습니까만 경험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악인은 행복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친히 자기의 편 팔로 그들을 애굽에서 아이를 건져내어 걸음을 가르치며 안으시며 아플 때 고치시며 먹을 것을 주시며 기르신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버릴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때리실 때에도 속으로는 울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히 포기하려다가도 그 마음은 불붙는 긍휼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무리 속을 썩인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식입니다. 우리가 그를 속썩이며 살지라도, 그런 우리를 그가 심히 책망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불붙는 긍휼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랑많은 아버지를 더 이상 실망시키는 자식 되지 맙시다. 우리들 모두 이 사랑을 받은 자식임을 기억하면서, 이제부터 속 썩인 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감동을 주는 착한 자식들이 다 되시기를 결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할 때에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레26:12절‘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암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히 구별된 백성이요, 선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 한 것입니다. 곧 이방인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적에서 제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인해서 주전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망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과 행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며 영화롭게 하는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을 표준삼하 거룩히 구별된 경건의 삶, 기도의 삶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암미’의 삶을 사는가?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범죄 할 때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여 현재 영적으로 받는 모든 고난을 다 이기시고 축복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아이의 이름은 앞으로 펼쳐질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상징입니다. 정말 암울하고 절망적입니다. 희망과 소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 호세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결혼과 출산을 통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축복과 사랑을 받아야 할 가정이 이렇게 저주와 절망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자녀는 3명이나 낳았는데, 여전히 남편과 자녀를 내 팽겨치고 밖으로 나돌아 다닙니다. 그때마다 다시 호세아는 아내를 찾으러 나갑니다.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입니다. 못된 여자를 찾아다니는 남자의 숭고한 사랑에 대해서 표현기 때문에 마치 여자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들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남성으로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멜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가정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이런 아내를 향한 호세아의 사랑과 용납은 정말 감동스럽습니다. 호세아서의 가장 핵심 메시지는 호3:1절‘다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에게서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난 성격과 부족하고 연약한 성품으로 인해 상대방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또 상대방의 이러저러한 성격으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먹고 ‘그래, 다시 사랑하자’하며 각오를 다지지만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와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라며 용서하고 용납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멜과 같은 인생
호1:8-9
죄악의 결과물이 무엇입니까? 로암미라는 것입니다. 음란한 고멜이 로암미를 낳았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음란한 고멜같지 않다. 나는 로암미를 낳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자기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는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사실 고멜은 누구의 이야기인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라고 하니까 어떤 분은 ‘나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구제받을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8절‘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8절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이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잉태하고 무엇을 내어 놓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멜은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를 자꾸만 낳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낳습니다. 지금 준비하여 잉태 하였다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의 생각이 모여서 하나하나 행동으로 나오고, 그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아무런 결과도 내놓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삶이 만들어 내는 어떤 결과를 보게 됩니다. 고멜이 음란한 일을 저지르자 그 결과 로암미라는 자녀가 나왔듯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사전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말 한마디가 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목사로서 내가 말한 것이 교인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결과는 내가 심는 대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멜이 음란한 행위를 통해 잉태한 아들은 ‘로암미’였습니다. 일단 잉태하면 그 결과로 아들이든 딸이든 자녀가 태어납니다. 9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자랑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누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을 평생 자랑합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경우에는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로암미’라는 아이가 나왔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로(Lo)’는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암미(Ammi)’가 아닌, 곧 나의 백성이 아닌 자녀가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불행입니다. 음란한 고멜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로암미’가 세상에 났습니다. 로암미는 사실 호세아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통해 엄청난 결과가 발생합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암미가 나을 수도 있고 로암미가 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멜과 로암미를 통해 깨닫는 교훈 묻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여러분에게서 어떠한 자녀들이 나오기를 바랍니까? 이것은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길 바라느냐는 말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가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만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 말들을 듣고 자란 자녀들은 매사에 굉장히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남에게 쏘는 말을 하여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말을 통해 엄청난 상처를 주고받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부들을 만나면 우리도 굉장히 날카로워집니다. 피곤합니다. 매사에는 결과가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는 고멜과 로암미의 경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우리가 고멜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나는 고멜이다. 어쩌면 고멜보다 더한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해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와 그 사랑을 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고멜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고멜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죄를 짓고도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죄에 대해 귀를 막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의 참맛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꾀뚫어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심장 폐부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머리털까지 모두 헤아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하라는 그 음성에 반응하고 돌이키라는 그 외침에 순종하고 새롭게 살라는 그 부르심에 헌신하여 ‘주여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받으소서’하고 자신을 새롭게 즐겨 드리는 것 외에는 은혜를 누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하나님께로 완벽하게 내어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상주감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인생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같이 한 번 자신의 마음을 한번 속을 들여다 봅시다. 자신의 믿음의 상태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한 번 살펴 봅시다. 여러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한 번 들여다 보십시오.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느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나는 고멜같지 않고 나는 죄 가운데 거하지 않고 나는 겸손하고 나는 참으로 주님 사랑하는 자 답게 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들여다 보면 들여다 볼수록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자신의 연약한 모습 하나님을 떠나 멀리 도망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몸된 지체들 형제자매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나에게 싫은 소리하는 그 사람 나의 심령을 찢어 놓은 그 사람 나를 업신여기는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하셨습니까? 그렇게 행한 모습이 보이십니까? 혹시 여러분 심령 깊은 곳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오직 여러분 혼자만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실만한 그 죄악된 모습이 보이신다면 그것들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로암미와 같은 자녀들을 낳지 않기를 바랍니다. 암미, 곧 ‘나의 백성’을 낳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나의 백성이 우리가 삶을산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40대는 너무도 명명백백한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이가 어리다고 봐줄 수도 없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자녀를 책임져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맡은 역할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책임져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잉태한 생각들로 인해 암미라는 자녀가 태어나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백성인 암미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상주감리교회 성도인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고멜과 같이 그 사랑을 배반하고 또 배반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그 사랑 앞에 무릎꿇고 다시는 그러하지 않겠느라고 다짐하며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까요?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세상의 쾌락만을 쫓던 고멜과 같은 어리석은 삶의 자세를 다 버리고 이 시간 예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지난날 행한 모든 죄를 진실로 회개하며 주님께 나가면 주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 주실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자리들도 회복시켜 주실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실 것을 믿으시고 고멜과 같은 우리들이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호1:10
호세아와 고멜의 결합을 주선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개인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원치 아니하는바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그런 민족들과 교류하면서 이방나라들과 연합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더 이상 차마 볼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는가 하면 당시 유다의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에게 ‘너는 지금 일어나서 저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서 자식들을 낳으라’ 이렇게 명령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순종하며 결혼을 합니다. 그후에 10절-11절에 계속하여 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도록 하셨는지 그 깊으신 뜻을 우리가 어느 정도 헤아려 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줄 믿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음란을 생각하면 그들을 흩어버리고, 더 이상 긍휼을 베풀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한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이 드리는 맘에도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받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그들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 숭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키 위하여 어쩔수 없이 사랑의 채찍, 사랑의 징계를 내리실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말에 ‘미운 자식은 떡 하나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자식이 사랑스러울수록 매를 들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3:16절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재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징계하십니까? 이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 하시는 것입니다. 징계가 없는 사람은 사생아라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실패를 당하고 아픔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도 멀리 멀리 떠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어쩔수 없이 사랑의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채찍과, 징계에 관한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722년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남유다는 130년쯤 후에 바벨론에 의해 망합니다. 이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한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성취될 줄 믿습니다. 10절은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하여 심판의 고난을 겪지만, 궁극적으로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르엘의 날이란 이미 4-5절에서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하신 대로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의 멸망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날은 특징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입니다.
호1:10절이하에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영적으로만 성취되는 경우입니다. 이 예언은 신령한 관점에서 보아 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창하게 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언약(창15:5)의 반복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창할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윗 솔로몬시대에 완성되었다 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이들이 BC722년 앗수르에 패망하고 이방으로 흩어진 후 헬라제국 로마제국등에 짓밟히고 노예상태로 살았지 이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번성은 맛보지 못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공허한 것, 허망한 것,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기에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줄 믿으시죠?
그렇다면 10절의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대속의 죽음의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통헤 세워진 신약교회를 통해 이루어진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오늘날 세계 방방곡곡에 세워지고 전해지고 있는 복음운동을 통해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신약교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연합한 자이며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을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참으로 신약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믿음으로 언약을 맺고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며 그 영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신약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참 이스라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뿐만 아니라 호세아와 맺은 언약을 어떻게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그리고 온전히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시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시는 줄 믿고 오래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 물 흐르듯 순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방해와 핍박과 환난을 거치면서 그 약속을 이루는 일에 헌신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노고를 받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무엇도 세상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약속을 좌절시키거나 무효화하지 못하였습니다. 한치의 오차나 착오도 없이 일점일획의 가감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호세아를 통해 재차 확정하신 그 일이 오늘 우리 가운데 실제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후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원까지도 변함없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위에 굳건히 서며, 그 말씀 안에서 우리의 삶의 길과 방향을 확정지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또한 말씀과 더불어 확실하고 굳건하게 세워질 줄 확실히 믿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온전히 할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 백성 노릇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 받아야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자기 사명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을 전하고 성령의 은혜를 전하는 책입니다.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마음의 성 안에 어떤 백성이 많으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인체도 좋은 항체와 균이 싸우고 있습니다. 항체가 이기면 건강하고 세균이 이기면 병이 듭니다. 면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매일 운동을 하라, 냉온욕과 지압으로 몸을 풀어라, 유기농 좋은 음식을 먹고 깊은 수면을 취하라, 늘 즐겁게 살면 건강이 온다고 말합니다. 우리 육신이 온갖 좋은 것으로 서비스 받을 때 건강이 오듯 우리 영혼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겸손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좋은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가질 때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늘 은혜 받아 안으로는 영육 간에 강건하시기를 바라며 밖으로는 새로 믿는 주의 백성들을 더 전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됨을 위해 헌신하라
호1:11-2:1
11절에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했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도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 나중에 유다가 멸망하지만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발될 때 두 나라는 거기서 하나되어 제 3차에 걸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성을 쌓고 통일 왕국을 이루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왕국이 오래 가지는 않고 국력이 약하다가 결국 로마의 지배를 받아 왕권이 간악한 헤롯의 손에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본 예언의 완전한 성취는 신약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역시 교회론과 구원론적인 두 면인데 교회론적으로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예언입니다.
11절에서 남쪽 유다자손과 북쪽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올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한 우두머리는 누구일까요?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을 주도한 스룹바벨로 보면 그 땅 즉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 이스라엘로 올라올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것과,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실 때 그 땅 즉 죽은자들의 무덤에서 다시 올라올 것 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두머리가 누구이며 그 땅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게 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때에는 분열이 치유되고 일치된 영으로 한 지도자를 따르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 솔로몬 사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이후무수한 전쟁과 갈등과 다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날에는 그들이 일치하여 하나되고 화목하게 되며 한 영으로 한지도자를 따르며 한 목표를 지향하는 삶을 살 것을 회복의 구체적인 면모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하아레츠:가나안땅)에서 올라오리라’는 말은 마치 봄이되면 식물이 땅을 뚫고 올라와 그 땅 표면 전체를 덮을 정도로 번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현재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추구한다면,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이 통전 즉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해 부분을 깨닫고 통합 즉 둘 이상의 단위가 하나로 물리적인 통합을 이루는 것과 통섭 즉 화학적 혼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물질로 거듭나는 통섭 즉 넘나듬의 사고방식으로 하나됨을 이루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복주실줄 믿습니다.
상주감리교회의 성도의 하나됨은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은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세울 것이며, 세상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원동력이 될 줄 믿습니다. 엡4: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하신 말씀처럼 이러한 일치와 연합은 그 자체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을 토대로 하나님께서는 참돈 부흥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회복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호1:11:b-2:1에보면 회복된 이스라엘의 면모에 대해 세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이라 합니다. 다음은 형제에게 암미라 할 것이라 그리고 너희 자매에게 루하마라 칭 할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본문은 호세아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축복된 것,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르엘(יןרעאל)의 경우 그것은 비극적이고 저주스런 지명이지만 장차 하나님은 그것을 크고 영광스러운 땅으로 변모시킬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스르엘 즉 하나님께서 흩으셨다는 부정적인 말씀이 하나님께서 파종하셨다는 긍정적인 말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즉 아합왕의 왕궁이 세워진 곳이 앗수르에 의해 흩어짐을 당해 폐허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파종하실 때에 파종하시는 축복된 백성이 되어 그 심겨진 그들이 그 무덤과도 같았던 땅에서부터 올라와 번영과 형통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형제에게 암미(עמי)즉 나의 백성이라 할 것이라 합니다. 로암미 즉 내백성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셨지만 회복의 때에는 나의 백성 나의 민족이라고 그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던 처음의 상태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루하마(רחמה)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이며, 이는 고멜이 낳은 딸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즉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사랑 받는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너희 형제 너희 자매가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온전히 연합되어 서로가 서로를 형제처럼, 자매처럼 대우하게 된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을 받지 못했던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김을 받는 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로운 이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을 받고 전혀 새로운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된 줄 믿습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에 의지하여 구원 받은 성도들은 ‘거듭난 자’ 즉 다시 태어난 자라는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미라 하고 루하마라 하는 것은 성도가 과거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하기 위함인 줄 확실히 믿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저주스런 삶의 자리에서 나와 축복된 삶의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오직 그에 합당한 삶, 곧 축복된 삶, 빛된 삶,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내야 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이나 대중집회등을 통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일시적인 믿음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뿌리가 없어 새들이 먹어버린 거품과 같은 일시적인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호2:1절‘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르엘의 날에 이스라엘의 이름도 변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백성이 아니다’는 ‘로암미’가 ‘내 백성’이라는 ‘암미’로 변합니다. 그리고 ‘긍휼을 받지 못한 자’라는 ‘로루하마’가 ‘긍휼을 받은 자’라는 ‘루하마’로 변합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인생이 바뀜을 시사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 그 인격은 물론 그 환경까지 변했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 주실 것이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온전히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은혜를 받으십시오. 더 새로워지십시오. 더 죽어지고 순종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은혜 받으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늘 은혜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이스르엘의 날이 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로 생각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는 여러분의 삶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미래에도 함께 크게 됨을 먼저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줄 믿고 감사하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구속적 믿음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