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감리교회 찬양대는(1960 찬양대 헌신예배.2019.3.17.)
대하 20:14-23
할렐루야
복음성가 하나 부릅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기뻐하라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찬송과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영적 호흡이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찬송생활과 기도생활을 계속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결국은 영적인 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풍성한 영적인 기적과 부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적군의 침입으로 유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를 앞에 놓고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이 기도와 찬송을 통하여 국난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역사적 내용에 근거하고 있으며, 찬양을 통해 기적을 만들고, 운명을 바꾸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모압과 암몬, 에돔 세 나라의 연합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해주신 기업이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을 아주 내쫓아 버리고 그들이 그 곳에서 살 계획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비장한 각오로 유다를 쳐들어 왔습니다.
대하 20:3절에‘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공포하였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의 침공을 받은 유다왕 여호사밧이 유다 온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6-12절 까지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15-17절‘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야하시엘의 계시는 위기를 당한 온 유다와 여호사밧 왕에게 경천동지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은 비단 유다 백성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치는 복음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로 메시야로 믿는 자에게 왕이 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므로 죄사함의 은총을 얻게되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허락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소식보다 큰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이 귀한 복음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에게 감사와 찬양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기도 응답은 야하시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임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의 전후를 살펴보면 여호사밧과 백성들은 기도와 찬송으로 침략해 온 암몬과 모압, 에돔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죽음의 무덤이 되어 아골골짜기가 될 뻔하였으나 오히려 승리의 골짜기로 바뀌어 졌습니다. 패망의 골짜기인 전쟁터가 될 뻔 하였으나 오히려 승리와 감사와 하나님의 도우신 증거가 있으므로 신바람나는 감사의 골짜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찬송을 부른 성가대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가대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주역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더욱 헌신적인 섬김으로 충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호사밧은 머리를 땅에 대고 백성은 몸을 굽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면서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당황해 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려 우리의 죄와 불신을 회개하며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백성과 의논하여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 앞에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습니다. 선지자가 ‘이 전쟁에서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한 말씀을 듣고서 여호사밧은 생각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임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의미로 그는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사밧과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상대 연합군의 입장에서 볼때는 생사가 오가는 싸움터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기는커녕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찬양을 하게 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친 짓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너무나 진지하게 전쟁터에서 찬양을 부르며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시간 찬양대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상주감리교회 찬양대원으로서 깊이 명심하셔야만 합니다. 오늘 내가 부르는 찬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나의 감정을 담아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음악적인 기교를 뽐내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노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22절에는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찬양대의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가대나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은, 단순한 우리의 감정을 건드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을 물리치고, 모든 연약함과, 질병과, 죽음을 몰아내는, 즉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태어난 찬양대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성가대(Hymnal Choir)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고,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찬양대로 말미암아 살아있고 은혜있는 예배가 되며, 살아있는 예배가 되게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찬송을 통한 역사적 승리의 사건을 통해 성가대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찬양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원하고 상주감리교회 성가대원들은 어떤 모습과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지를 살펴 보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상주감리교회 찬양대 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옷만, 가운으로 두른다고 거룩한 예복을 입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22장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였는데, 초대받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도 주인이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쫓아 내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거룩한 예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에게 세마포를 입혔습니다. 구별됨이지요. 왕이 입는 옷도 세마포였습니다. 구약에서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모두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역대하 5장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후에, 노래하는 자들을 따로 세워서 하나님께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세마포를 입혔던 것입니다. 세마포는 우리의 죄를 가리우고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표식이며, 자신의 정결함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세마포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흰 눈같이 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 어떠한 죄와 사망의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없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혈이, 바로 우리가 입어야 할 세마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예수님만이 나의 전부이시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의 진정한 예배, 진정한 찬양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택함 받은 노래하는 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예복을 입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예복’이란‘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희어진 옷’을 말합니다. 거룩한 옷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 뿌림을 받아 정결케 된 옷을 말합니다. 즉 성가대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사실을 온전하게 영접한 자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계7:13-14절‘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가로되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하였느니라’성가대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그 옷을 희게 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예수님을 온전히 구주로 고백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롬13:12-14절‘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성가대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옷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한 주간의 삶이 그리스도의 보혈에 합당한 삶이 될 때 그가 부르는 찬양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한 주간 내내 어두움의 옷을 입고 살다가 주일 날 잠시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살짝 바꿔 입고 찬양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받으심직한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찬양할 때는 찬양하는 당사자도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회중에게도 은혜를 끼치질 못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고 잠시 입안에서, 귓전에서 뱅뱅 돌다가 땅에 떨어지고 마는 노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가대원들은 한주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합당한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삶을 살도록 진지하게 투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찬양이 힘이 있고 그런 찬양이 하나님께 온전히 상달될 것입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거룩한 영인‘성령으로 옷 입음’을 뜻합니다. 즉 성령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채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채 부르는 찬양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주께 찬송하라는 말씀 앞에 성령충만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엡5:18-19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 성령으로 그 영혼이, 그 내면이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은 채 부르는 것은 참된 찬양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가대의 성가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상주감리교회 성가대는 모든 영적 전투의 장소에서 선두에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모든 영적 전투의 순간마다, 장소마다 가장 맨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의 ‘브라가 전투’에서 유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노래하는 자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가대가 전투의 선두에 섰습니다. 군대보다 앞에 섰습니다. 성가대가 전투의 가장 치열한 각축장이 될 선두에 섰습니다. 성가대가 서야할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성가대는 모든 영적 전투의 자리마다 선두에 서도록 명함을 받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따라서 성가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영적 전투가 이루어지는 모든 자리마다 선두에 서야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영적 전투의 각축장이 되는 자리란 어떤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는 전투입니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올라가는 영광을 가로막고자 갖은 수법을 다 사용합니다. 예배는 치열한 영광 탈환의 경쟁 장소입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린다는 가장 큰 표시는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성가대의 찬양이 있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찬양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따라서 성가대는 찬양을 할 때 바로 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전심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가대원들은 모든 예배의 자리마다 가장 모범되고 진실한 모습으로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성가 연습할 때는 참석하는데 정작 예배의 자리에 오는 것은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성가 연습을 하는 이유는 예배 시에 하나님께만 온전히 영광을 올려드리는 찬양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예배는 소홀히 하면서 연습 시간에만 나온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가 영적 전투의 치열한 각축장인 것을 깨달았다면, 성가대원들은 모든 예배의 자리마다 가장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사밧 당시 성가대는 군대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뒤로 물러나 찬양을 안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군대 앞에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어찌하든지 선두의 자리를 지켜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도 이 예배의 자리를 우선적으로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처한 어떤 상황에도 영적 전투의 각축장인 예배에 있어서 선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전쟁터에서도 선두를 지켜낸 여호사밧 당시의 성가대처럼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갖은 영적 전쟁의 각축장에서 예배를 사수해내는 성가대가 되십시오. 이왕 예배의 자리에 나왔다면 가장 진실되고 모범된 모습으로 선두에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믿음으로 가장 앞에 앉아 가장 멋진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양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지만 성가대원의 예배에 대한 모범적인 태도 그 자체로도 벌써 하나님께는 무한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도 중요한 영적 전투의 각축장입니다. 여호사밧 당시 전투에서 성가대를 앞세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영적인 전투의 자리마다 선두에 설 수 있는 힘의 근거는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결코 선두에 설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가대, 기도하지 않는 성가대원은 영적 전투의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서려고하는 영적인 소원도 없을뿐더러 설령 섰다 해도 앞장서서 선두에 서질 못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힘 있게 기도하는 성가대는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런 성가대원들이 모인 예배라면 그 예배는 이미 영적으로 승리한 예배이며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성가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리 ‘봉사와 섬김의 자리’에서도 선두에 서야 합니다. 모든 섬김의 자리, 봉사의 자리에서 묵묵히 가장 좋은 모범을 보이십시오. 성가대라고 해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자질구레한 일들은 기피한다거나, 남에게 미룬다든가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마신 컵, 그릇 등을 다른 사람에게 치우도록 미룬다든가, 성가대 가운이나 성가집 등을 무조건 어린 사람에게만 미룬다든가 하는 것은 벌써 선두에서 밀려나는 행동들입니다. 성가 연습이 끝나면 성가대 자리 하나하나 돌아보며 자리가 잘 정돈되어 있는지, 어디가 지저분한지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 역시 예배의 자리와 마찬가지로 사단이 노리는 장소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가대는 모든 신앙생활의 자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리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원래 성가대에게 부여된 정체성입니다.
3.상주감리교회 찬양대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성가대는 삶 자체가 찬양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찬양의 크기, 찬양의 무게, 찬양의 깊이가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라는 두려운 상황에서 그것도 군대보다 앞장서서 이들이 한 일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도와주십시오’라는 내용이 담긴 눈물 섞인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의 힘찬 찬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상황에서 언제나 신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영광의 찬양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이 찬양의 가사는 시편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가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시편 찬양의 주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호사밧은 다른 내용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역사의 영원성을 찬양하는 영광의 찬양만을 부르게 했습니다. 성가대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찬양, 은혜를 나누는 나눔의 찬양을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성가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참된 감사와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는 것이 성가대입니다.
여호사밧은 택한 성가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그 영광의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찬양이야말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19절을 보니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심히 큰 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성가대를 특별히 더 뽑은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너무나도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상대방은 이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무리였습니다. 전투력에 있어서도 상대방은 연합군으로서 그 세력이 막강하였습니다. 칼과 창으로 무장한 상대 전력 앞에 아무 무기도 없이 예복을 입고 앞에 서서 그들은 찬양만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가대 조직 전부터 이미 심히 큰 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크게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찬양의 힘을 믿었습니다. 찬양이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힘있게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는 자는 그 찬양도 참으로 힘있게 찬양합니다. 그가 어떤 찬양을 어떻게 부르는지 보면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가대는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깨끗한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다운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의 영혼과 내면이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가대는 영적 전투의 자리마다 가장 선두에 서야 합니다. 모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섬김과 봉사의 자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리마다 가장 모범되고 진실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우선순위와 선두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거짓없는 진실한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는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있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 그 자체를 찬양할 수 있는 성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은 그 찬양을 타고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성가대답게 살아가시면서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심으로 많은 영광 올려드리는 찬양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찬양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20:25-26절‘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쌔,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하고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얻은 것이 너무 많아 가져 갈 수 없을 정도의 재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것인가 하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을 보게 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우리가 거두어들이기 버거울 만큼의 축복들이 우리에게 덤으로, 보너스로 주어 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에게,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있는 자리는, 브라가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브라가는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브라가 골짜기는, 원래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헤쳐 갈 수 없는,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죽음을 경험해야 할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이, 오히려 축복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의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 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의 문을 여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찬양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고백, 신앙의 고백, 신앙의 간증으로 불리워질 때,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연약함이 떠나가고, 질병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찬양대가 오늘 헌신을 다짐으로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이러한 찬양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이 계신 곳은, 그 어느 곳일지라도, 어떠한 환경과 형편과 처지일지라도, 그 자리가 브라가 골짜기, 축복의 골짜기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