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次玩龜亭壁上韻幷小序
삼가 완귀정 벽 위의 시에 차운하고 작은 서문을 곁들인다.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1664-1730)
康陵乙巳 大小尹之禍作 一時諸名流騈死文罔 獨員外郞安公棄官歸 搆亭二水之陽 而終老焉 扁之曰 玩龜 蓋喩意於物也 壬辰被燹 而廢者 且將二百年 幸而南冥曹先生所詠四聲詩 及李鵝溪絶句 傳於世 秖今鄕後生寶誦之 以爲永陽故事 頃年 員外公之孫 國子學正公 追感先德甚篤 卽其故址 而改築之 顔以舊號 使賢祖之遺風餘響 賴有稱述詩 所謂物替引之者 國子公其有之乎 不侫兄弟於國子公友也 平日相對 輒擧二老詩 爲我誦娓娓 仍責續貂 未幾 國子公不幸早謝 而金狄獨存 悲夫 今其遺胤諸君遣二子 問字更申其請 余不能辭 敢以拙語 錄副懇意 兼償亡友宿債云
명종 을사년(1545) 대윤과 소윤의 사화가 일어나 한 때의 이름난 선비들이 법망에 걸려 죽음에 내몰렸는데, 홀로 형조의 원외랑 안증(安嶒, 1494-1553) 공만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영천에 정자를 짓고 늙도록 살다가 삶을 마쳤다. 정자를 편액하기를 완귀라고 한 것은 대개 거북이가 위험하면 머리, 발, 네 발을 등껍질에 숨기는 것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폐허가 된 것이 200년이 다 되었는데 다행히도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읊은 7언 율시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칠언 절구가 세상에 전해져 지금도 영천고을의 후학들이 보배로이 외고 있어서 영천의 고사가 됐다.
근년에 원외랑공의 후손인 국자감(성균관) 학정(學正) 안후정(安后靜, 1659-1702, 호 성재省齋, 자 군경君敬) 공이 선조의 덕을 심하고 두텁게 추모하여 정자의 옛 터에 정자를 고쳐 건축하고 편액을 예대로 했다. 어진 선조가 남긴 바람과 남은 향기에 힘입어 칭송하는 시가 있으니 이른바 사물이 교체하면서 이끈 것이 국자감 학정 공에게 있는 것인가?
재주가 없는 우리 형제는 국자감 학정 공의 벗이다. 평소에 서로 마주하였는데 어느 날 문득 남명과 아계 두 분의 시를 들고 나를 위하여 외며 나에게 이어서 시를 짓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자감 학정 공이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시고 금적(金狄)만 홀로 남아 있으니 슬프구나!
지금 그의 맏아들과 아우들이 두 자식<안후정의 제5남 여기(安汝器)의 아들 신암(愼庵) 안경열(安景說, 1712-1779 자 殷老)은 17세에, 안후정의 제2남 여리(汝履)의 아들 만회(晩悔) 안경시(安景時, 1712-1794, 자 可中)는 18세에 훈지 양선생에게 수학했다.>을 보내어 우리 형제에게 글을 배우는데 다시 시를 지어 달라는 청을 하니 내가 사양할 수가 없어서 감히 졸렬한 말로 간곡한 뜻에 부응하고 아울러 죽은 벗의 묵은 빚을 갚는다.
*금적金狄: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말한다. 금적(金狄)은 진 시황(秦始皇) 때에 함양(咸陽)의 궁중(宮中)에 주조해 놓은 동인(銅人)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 계자훈(薊子訓)은 본디 선술(仙術)이 있었고, 일찍이 회계(會稽)에서 매약(賣藥)을 하기도 했었는데, 어떤 이가 장안(長安)의 동쪽 패성(覇城)에서 그를 만났는바, 그가 한 노옹(老翁)과 함께 동인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서로 말하기를 “이 동인을 주조하던 것을 보았는데, 지금 벌써 5백 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2》
雲鎖仙亭鶴返遲 구름으로 잠근 신선의 정자에 학은 더디 돌아오고
郊墟風物古今宜 성 밖 옛터의 풍경은 예나 이제나 좋구나.
朶頤豈舍渠靈處 어찌하여 너의 신령한 곳을 버려두고 턱을 빠트리는가.
曳尾須看自在時 모름지기 꼬리를 끌며 자재하는 때를 보아야 하리.
徵士有詩餘馥遠 징사(徵士, 남명 조식)의 시가 있어서 남은 향기가 멀리 전해지고,
賢孫肯構美談馳 현손이 정자 지은 미담은 세상에 전파됐네.
滄桑閱後方酬債 뽕밭이 벽해가 된 뒤에 시를 보고 시를 지으라 하지만,
却愧衰頹句未奇 쇠퇴하여 시구가 아름답지 못하여 부끄럽네.
*“자기(초구)의 신령스러운 거북이를 놔 둔 채 나(상구)를 보고는 턱이 빠져 침을 흘리며 부러워하면 흉하다.[舍爾靈龜 觀我朶頤 凶]” 《역경(易經)》 이괘(頤卦) 초구효(初九爻)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 이괘는 상괘는 간괘이고 하괘는 진괘이다. 이괘의 初九는 자신의 신령스러운 거북이를 버려두고 上九를 보며 턱을 빠트리며 침을 흘리며 부러워하면 흉하다. 고난의 길이지만 초구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윗사람들을 구원하고 길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이기동, <<역경>>, 성균관대출판부, 2015.)
*징사(徵士): 산림(山林)에 은거하는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를 임금이 부를 경우 쓰는 말이다.
宦家常說賦歸吟 관직에 있으면서 늘 귀거래사를 읊조렸는데,
却坐垂堂謾碎金 물러나 마루 끝에 앉아 한가히 아름다운 시를 지었네.
那似玩龜亭上老 어떻게 하면 완귀정의 노인처럼,
超然藏六任潛深 초연히 장육(藏六)하고 마음대로 깊이 은둔할 수 있을까.
*수당(垂堂): 《한서(漢書)》 원앙전(爰盎傳)에 “천금(千金)의 자식은 마루 바깥쪽에 앉지[垂堂] 않고, 백금(百金)의 자식은 난간에 걸터앉지[騎衡] 않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쇄금(碎金) : 황금 조각이라는 뜻으로, 간단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시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사안석(謝安石)의 단문(短文) 한 편을 보고는 “이것은 안석의 쇄금이다.[此是安石碎金]”라고 찬탄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世說新語 文學》
*장육(藏六): 위험하면 머리, 꼬리, 네 발을 등껍질에 숨기는 거북.
又幷小序
또 시를 짓고 작은 서문을 곁들인다.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1667-1732)
故友安國正曾 索其先祖玩龜亭韻 乃南冥曹先生所題也 未及和而國正爲泉下人 今累十年矣
遺胤子寬兄弟之子二妙君 時從小塾遊 更申舊囑 令人愴然起感 遂次之
옛 벗 국자감 학정 안후정은 일찍이 그 선조 완귀정의 운을 찾았으니 남명 조식 선생이 쓴 것이다. 그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지 못하고 국자감 학정 안후정은 저승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지금 수십 년이 지났다. 그의 자식 형제의 두 자식(경열(景說, 경시(景時))이 여기에서 공부하는데 다시 옛 부탁을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슬픈 느낌이 일어나게 하니 마침내 차운한다.
天際輕陰暮色遲 하늘가 어둑하게 석양빛이 더디고
迷茫岐路政非宜 어둠에 묻힌 갈래길은 참으로 옳지 않네.
先機(幾)自有山雷象 절로 있는 산뢰(山雷)의 이(頤)괘의 상을 미리 알아서
觀變要知悔咎時 변화를 살피고 뉘우치는 허물의 때를 알아야 하네.
肯爲(以)樓居忘北拱 누정을 짓고 살며 북쪽의 조정을 잊었고
不關江水任西馳 강물이 서쪽으로 마음대로 달려감을 상관 않았네.
賢孫宿債還多感 어진 후손의 묵은 빚에 다시금 느꺼움이 많지만
誰做文公脚下奇 누가 문공 다리에서 아름다운 시를 지으라고 하는가.
*幾, 以(훈지양선생문집)
*산(청도 동쪽 95리에 있는 雲門山), 뢰(凝江-호계-북안천)
*문공각하(文公脚下): 문공은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韓愈)를 말한다. 주자가 진부중(陳膚仲)으로부터 원주(袁州)의 학기(學記)를 지어 달라는 청을 받고 말하기를 “더구나 또 한 문공의 다리 아래는 문장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況又韓文公脚下 不是做文章處〕” 하였다. 《朱子大全 卷49 答陳膚仲》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에서 이를 설명하기를 “원주에는 한 문공이 일찍이 제영(題詠)한 것이 있는데, 진부중이 또 학기를 구하기 때문에 문장을 지을 곳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長郊高閣世多吟 긴 들녘 높은 누각 세세로 많이 읊조렸고,
徵士徽音可直金 징사(남명 조식)의 빛나는 시는 금에 값하네.
若識主人裝點意 주인이 그 뜻을 꾸미고 점검할 줄을 안다면,
雲門何必勝江深 운문산이 어찌 반드시 깊은 강보다 낫겠는가.
*휘음(徽音) : 휘금(徽琴)이라는 거문고 소리인데, 여기에서는 그와 같이 아름다운 시.
-훈지양선생문집 권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