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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귀신보다 예수님이 더 위험하다!?>의 줄거리:
설마 귀신보다 예수님이 더 위험할 수야 있겠습니까? 아니요.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 사람 자신이 느낄 때 예수님이 귀신보다 훨씬 더 위험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예수님을 위험하게 느낄 수 있어야 예수님을 바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험하심에 참 구주 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보다 예수님이 더 위험하다!?
(마8:28~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귀신보다 예수님이 더 위험하다!?> 좀 과격한 말이지요, 그렇지요? 좀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귀신보다 예수님이 더 위험하다’ 과연 그런 말이 성립될 수 있느냐?
좀 충격적이라서 느낌표, 의문이 가서 물음표를 썼습니다.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있겠나 하는 회의가 생기죠?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구세주이십니다.
구세주란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처하게 될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구세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귀신보다 더 위험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귀신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병이 걸리거나 사업이 안 되면 귀신이 가져다주는 화가 끼고 마가 끼었다면서 부적을 써서라도 귀신을 집안에서, 하는 일에서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우리의, 믿음의 사람이든지 불신앙인이든지, 귀신에 대한 입장표명이 너무나 너무나 오해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성품은 굉장히 귀신 친화적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믿지 않는 사람이건 믿는 사람이건 본성상, 굉장히 귀신 친화적 성품을 다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대로 맞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귀신, 마귀, 사탄에게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게 된 인간들의 성품 속에는 당연히 귀신친화성이 들어있는데 그 귀신이라고 하는 대상을 마주 대해서 상대하는 방법에 귀신에 대한 오해가 들어있고, 귀신에 대한 오해가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오해도 함께 들어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적어도 자연인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 예수님은 귀신보다 훨씬 더 위험하신 분이십니다.
근데 교회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고 예수님이 귀신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군지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올바로 성립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보다 더 위험하신 분입니다.
그 위험하신 분으로 알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더 좋은 분이다, 예수님이 좋은… 이거 무척 큰 오해가 들어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갈릴리 동편으로 가십니다.
도착하신 곳이 갈릴리 바다에서부터 동편에 남동쪽으로 한 10km 떨어져있는 가다라 지방이에요, 돼지 떼가 2000이나 된다고 마가복음엔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돼지 떼를 키운 것을 보면 유대 사람들이 돼지를 먹지 않고 부정한 동물로 여긴 것을 고려할 때, 이 가다라 지방은 이방지역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라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근데 이곳에 마을 바깥으로 귀신이 들린 자들이 무덤사이에 거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광폭한지 도저히 사람들이 그 사람들 근처에 갈 수가 없어요.
귀신들린 자들 근처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고, 알아서 기듯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해서, 그 수많은 돼지 떼가 바다로 빠져서 몰살돼버립니다.
이 사실을 보고 돼지 치던 사람들이 달아났다고 그랬어요. 달아나서 동네에 들어가서 이 사실을 다 고하게 되자 온~ 동네, 온~ 시내가 다 나왔다고 그러잖아요, 본문에?
온 시내, whole town 전체 시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나와 가지고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하는 이야기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여러분 이 사건에서, 이 사람들은 귀신보다도 예수님을 훨씬 더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어가 두 단어가 있어요.
뭐냐 하면 여러분, 30절에 보면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멀~리, 그러니까 귀신들린 자로부터 돼지 떼가 멀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 가까이 가서 그에게서 귀신을 좇아내고 계십니다.
근데 사람들이 와 가지고 예수님께 뭐라 그러시느냐 하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멀~리라는 단어와 지방이라는 단어, 몸을 입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입장표명이 공간을 표현하는 단어로 나타납니다.
귀신들린 자들은 광폭하고 무섭고 흉악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은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오히려 더 마태의 이 글을 기록할 때 성령에 감동된 뚜렷한 의도가 있는 거예요.
그 의도가 바로, 이 공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를 통해 초점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멀리’와 ‘지방’, 광폭하고 무섭지마는 귀신들린 자들은 멀리 두고 그냥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거리만 조금 멀리 두기만 하면 위험하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나와서, 모~든 온 시내 온 주민이 다 일치단결해서 하나의 뜻을 전하는데 ‘이 지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너무 위험한 분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 아예 떨어져 나가달라는 얘깁니다.
삶의 공간, 우리가 삶을 살면서 관계하고 있는 삶의 현장 마지막 경계 바깥으로 나가 달라는 겁니다.
귀신들려 광폭하고 난폭한 자는 그나마 거리를 조금 두기만 하면 함께 살 수 있고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덜 위험하다고 본 겁니다.
근데 와서 보고 나니까 어떤 현상이 발생했습니까?
그 광폭하게 무섭게 마가복음에 표현에 의하면 자기에게 생채기를 내고 자기 몸을 자해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쇠사슬로도 제어가 안 되는 그 광폭한 자들이 얌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있는데, 그 사람들을 그렇게 변하게 하신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보는 겁니다.
그 무시무시하게 귀신 들렸던, 군대귀신이 들렸던 자들을 얌전하게 만드셨는데, 귀신이 나가게 만드셨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나가달라고 얘기합니다.
자기들의 지방에서 아예 삶의 현장에서 떠나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보다도 귀신보다도 쉽게 말하면, 그 귀신들린 자들에게 귀신이 살고 있었으니까 귀신보다도 예수님이 더 위험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왜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귀신보다 더 위험합니까?
돼지 떼가 몰살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이유가 되어서 돼지 떼가 몰살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돼지 떼가 뭔데 이럽니까?
돼지 떼는, 마가복음에 보면 2000마리라고 합니다.
그 옛날 가다라 지방에 주민이 몇 백 명 몇 천 명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온 시내가 다 나왔다 그래 봐야 정말 뭐 3, 4천명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요, 몇 백 명 나왔을지 모르죠.
그런 조그마한 마을에 2000마리 돼지 떼란 엄청난 것이었을 겁니다, 그 양이.
그러므로 하여간 이 2000마리의 돼지 떼가 생활 기반이었어요.
주님께서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느라고 그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고 안정된 삶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재산 돼지 2000마리를 없애버리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귀신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보는 겁니다.
귀신은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살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 우리의 경제적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이 지방에서 나가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위험인물로 쳐버리는 겁니다.
아니 축출해버립니다, 예수님을.
왜? 생활안정을 위한 기반을 뺏어가셨으니까.
그럼 주님은 왜 구태여 귀신을 그런 식으로 쫓아냅니까?
아니 그렇게 아니라도 많이 쫓아 내셨잖아요? 꼭 돼지 떼를 이용하지 않아도, 왜 굳이 돼지 떼를, 그것도 돼지 떼로 들어가겠다고 귀신이 원하는 거였어요.
귀신이 원하는 거였는데 왜 귀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이 사람들에게는 생활에 기반이 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돼지 떼 재산을 다 없애 버리십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돼지에게 안수해 주셔서 돼지가 새끼를 10마리 낳던 것들이 20마리씩 낳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되잖아요?
‘예수님 쫓아다니면 돼지 새끼가 10마리 낳던 것을 20마리 낳게 되더라’ 그러면 구름 떼같이 몰려 들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왜 생활기반 자체를 없애버리십니까?
두 사람 건져내겠다고? 아니에요, 온~ 마을을 건져내겠다고 돼지 떼를 없애신 겁니다.
온~ 마을을 건져내시려고.
이게 무슨 얘긴지 아십니까, 여러분?
만약에 바로 이 앞에 이 가다라 지방 이야기가 기록되기 전에,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라’ 나무라신 뒤에 그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이 사건이 뜻하는 바 그 의미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은 무조건 배척해야 될 분입니다.
예수님처럼 위험하신 분이 세상천지에 없습니다.
귀신보다 더 위험하십니다.
그런데 이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왜 그렇게 위험한 분으로 느껴지실 수밖에 없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풍랑 만나 잠을 주무십니다.
모든 제자들이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인데, 밤새 풍랑 속에서 배를 어거해 나가려 하다가 지쳐 포기하고 두려움에 쌓여서 예수님을 직접 깨웁니다.
이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나무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의 시점 타이밍은, 풍랑 일고 있을 때, 잠자는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표현했어야 되는 것이지요.
이미 예수님께서 깨서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신 뒤에 풍랑을 잠잠케 한 사건은 -제자들은 놀라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그것이 초점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잠자는 것이 초점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왜 잠을 잤습니까?
똑같이 몸을 입고 있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그런데 마음이 몸에 매어있지 않고 이 몸과 몸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서 하늘나라 아버지 품에 계셨습니다.
마치 풍랑이 있는 바다에 난파한 배에서 사람들이 흩어져서 바다 물에 빠져있는 걸 구조하기 위해서 헬리콥터가 떠있을 때 헬리콥터 위에 있는 조종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마음이 빠져 나와서 하늘에 있었습니다.
몸에 묶여있는 마음들은 몸이 처하고 있는 이 세상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마음이 그 상황에 빠져서 헐떡거립니다마는, 마음이 빠져 나온 예수님의 마음은 마음이 하늘나라를 느끼고 있고 하늘나라를 보고 있고 아버지 품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몸이 풍랑 속에 있어서도 잠을 주무실 수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자, 이 사건에서 주님이 그러한 상태를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뭡니까?
풍랑을 잠잠케 하는데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풍랑 속에서 잠자는 데에 믿음의 효과가 발동한다는 것이에요.
믿음이 있다는 건 어떤 시점에서 표현돼야 됩니까?
풍랑 속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돼야 된다는 겁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돈 문제가 일어나면 돈 문제의 풍랑을 잠잠케 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 돈 문제 풍랑 속에서 마음이 하늘로 빠져나가서 마음이 느끼는 하늘의 포근함 속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라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주로 오신 분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결국 믿음이 뭡니까? 마음을 빼서 심장을 도려내서 드리는 게 믿음이에요.
심장을 빼서 드리는 게 믿음이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대처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몸에 매어있으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이 현실 상황 속에서 머리 둘 곳을 찾고 안정된 삶의 기반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 세상에서 마음이 딱 붙어가지고 세상에서 안정된 기반을 찾으려고 하면서 살아갈 때 예수님이 와서 하시는 일은,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 안정된 터전을 만들려는 모든 계획을 다 무산시켜 버리십니다.
왜? 마음을 하늘로 올려 빼내어 가셔야 되니까, 마음이 하늘로 가야 되니까, 이 몸이 부딪치는 상황 속에 빠져서 이 상황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되니까.
몸소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심을 통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무조건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이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돼지 떼를 기반으로 안정된 삶을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 돼지 떼가 사업이라도 좋고 장사라도 좋고 공부라도 잘해서 훌륭한 학벌을 기반으로 해서 안정된 삶을 살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이 땅에서?
하늘의 안정을 느끼고 하늘의 평강을 느끼려 하는 대신에 이 땅에서 안정된 삶을 구축하려고 하잖아요.
그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풍랑 만난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결단을 요구하시며 선택할 것을 제시하십니다.
‘마음을 계속해서 땅에서 안정을 찾고, 땅에서 안정을 찾을 만큼의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고 살고 싶으냐 아니면 이 세상에 풍랑이 일건 잠잠하건 상관없이 마음을 빼서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죽고 하늘나라로 가서 아버지 품에서 안정과 평화를 찾으려고 하느냐 선택해라’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냅니다.
생활의 기반을 없애고, 이 땅에서의 기반을 자꾸 떠나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요즘 우리나라의 교회보다 아니 온 세계의 교회보다 훨씬 더 앞서 있고 진보되어 있어요, 영적으로 볼 때.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았고 예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태냐?
내가 원하는 것에 빠져있어서, 취해 있어서 예수님이 주려 하는 것을 무엇인지 볼 생각을 않고 내가 원하는 것에 맞추어서 예수님이 주실 것으로 망상으로 만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겁니다.
과연 좋으신 예수님이실까요?
지금 마태복음의 전체진행이 어떻게 흘러갑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구축하고 싶고 원하고 이루고 싶은 것들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까?
아니에요, 쪽박 깨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족관계 위에 하늘의 동냥, 하늘의 은혜가 부어지도록 만드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 자체가 깨져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그런 새로운 관계로 새로 태어나게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 기존의 관계조차도 깨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귀신보다 더 위험하신 분이세요.
우리가 주님이 풍랑 만난 배 위에서 보여주신 대로 우리 몸이 처한 현실이 풍랑을 만나거나 안 만나거나 여기에 근거된 안정과 평화를 찾지 아니하고 마음이 하늘나라로 가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예수님은 귀신보다 훨씬 더 위험하신 분이세요.
여러분이 원하는 이 땅 위에서의 생활 기반을 다 돼지 떼 몰살시키듯이 몰살시켜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입장이 그런 거예요 주님의 입장이.
왜? 마음을 하늘나라로 건져내야 되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납니다.
실제로 돼지 떼와 같은 나의 사업과 장사 나의 모~든 이 땅에서 안정된 삶을 위해 구축하는 이 토대들을 다 제거하셔야 돼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너무 우리가 아파하고 너무 괴로워 하니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 마음만 온전히 세상에 대해 죽는 역사를 이루어 내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안정되어 보이는 삶의 여건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계속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음 붙이고 있는 삶의 여건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돼요, 떨어져 나와야 되요, 주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정녕 이게 안 되면, 정녕 십자가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안 되고 주님께서 선택하셔서 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제부터 시작 될 것이에요.
생활기반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일이 안되면, 시시각각 분초를 다투어서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그리며 ‘내가 주님과 함께 죽어서 이 세상에 대해 죽고, 내 마음에 내 인격의 사랑이 이제는 하나님께로 만 간다’라는 결단과 선택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끝까지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서서 우리의 생활기반 돼지 떼 2000마리와 같은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구축한 모든 여건들을 다~ 제거해 버리시는 위험한 예수님으로 등장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이 안 되는 게 귀신 때문에 마가 끼어서 그래요?
내 건강이 악화된 것이 집안에 귀신이 들어와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귀신 친화적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위험하신 분으로 등장하셔서 우리가 땅에 배 붙이고 살 수 있는 여건들을 제거해 나가시는 사랑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병도 들고 사업도 망하고 일도 안 되고 자식도 말썽을 부리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귀신친화성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우리가 귀신친화성이 전혀 없고 온전한 사람이라면 병든 게 귀신 때문이고 사업 망하는 게 귀신 때문 일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천성적으로 아담 이후에 귀신 친화적 성품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귀신은 멀리 있어도 같이 살 수 있는데 예수님은 아예 지방에서 떠나야만 될 수 있는 분으로 여길 만큼 귀신 친화적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 귀신 친화적 성품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 땅에서 독사의 자식이 어떤 자식이라고요?
땅에 배를 붙이고 다니면서 흙을 먹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마음의 배를 붙이고, 이 땅에서 안정된 기반을 확보하려고 하는 자들, 이게 바로 귀신 친화적 성품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아세요!
이 세상에서 성공과 형통을 주시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이 몸, 몸을 떠나서, 몸을 떠나서, 왜 그래요? 왜 자꾸 떠나라고 얘기합니까?
그게 인격적인 차원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이니까, 사랑이니까.
A라는 남자와 B라는 남자사이에서 고민하다가 A라는 남자를 접어버립니다.
B라는 남자에게 갑니다, A라는 남자에 대해 죽습니다, B라는 남자에게 가기 위하여.
사랑이에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왜 세상에 대해 자꾸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라고 애기합니까?
사랑,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며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날 각오와 결단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귀신보다 더 위험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한, 선민으로 생각하시는 한, 이제부터 여러분이 아직도 십자를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결단과 각오가 안 되어 있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안정된 삶을 위한 생활기반을 하나씩 하나씩 뺏어 가시는 분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 위험한 예수님이 최고의 사랑의 예수님으로 느껴질 수 있는 길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세상에 대해 죽는 자가 되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귀신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애인으로 느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을 제대로 주실 때에 우리가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귀신보다 더 위험한 분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배 붙이고 살겠다고 예수님을 좋은 예수님으로 착각하는 이 신앙도 아닌 신앙을 우리가 언제까지 유지해야 될지 주님 불쌍히 여겨 주셔서 깨우침을 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살아감으로 위험하신 예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신 구원의 예수님으로 느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