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州市
충청북도 동북부에 있는 시.
1995년 중원군과 통합시를 이루었다. 옛 중원문화의 중심지로 중원고구려비 등 문화유적이 많다. 충청북도 내륙의 교통요충지로 충주 댐의 건설과 함께 수산관광의 중심지이자 담배와 사과의 주산지로서 농업과 함께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춘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주덕읍·살미면·상모면·이류면·신니면·노은면·앙성면·가금면·금가면·동량면·산척면·엄정면·소태면·문화동·성내동·성남동·성서동·충인동·충의동·교현동·용산동·지현동·호암동·직동·봉방동·칠금동·금릉동·연수동·목행동·용탄동·안림동·종민동·목벌동·단월동·풍동·가주동·달천동·용관동·용두동 등 1개읍 12개면 26개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문화동이다. 면적 983.73㎢, 인구 210,169(2003), 인구밀도 213.6명/㎢(2003).
연혁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낭자곡성(狼子谷城) 또는 낭자성(狼子城), 미을성(未乙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었으며, 6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세력확장에 따라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는 551년(진흥왕 12)에 이곳을 점령, 556년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귀족의 인척·자제 들과 육부의 호민(豪民)들을 이사하도록 하여 신라 북진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후 충주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중심 고장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으며, 고려초에 충주로 개칭했다. 983년에 12목을 둘 때 충주목이 되었으며, 995년에는 창화군(昌化軍)으로 바꾸고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가 1018년에 전국의 8개목 중 하나가 설치되어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254년(고종 41)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는 충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충주목이 되어 조선시대에도 충주목이었다. 그러나 명종·광해군·인조·숙종·영조 등 여러 시기에 모반 등으로 인해 유신현(維新懸) 또는 충원현(忠原懸)으로 개칭되면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충주의 별호는 대원(大原)·태원(太原)·예성(蘂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충주부 충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충주부가 폐지되고 충청북도 소속의 충주군이 되어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그러나 1906년 월경지 정리로 금목면·생동면·맹동면·법왕면·소탄면·지내면·대조곡면·두의곡면·사다산면·천기음면·감미동면·거곡면을 음성군으로, 불정면을 괴산군으로 이관하여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1908년 도청소재지가 청주로 옮겨갔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20개면이 13개면으로 통합되고, 일부 면은 제천군과 괴산군에 이관되었다. 1931년 충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56년에 충주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으며, 이때 충주군도 중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중원군과 충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도농통합시인 새로운 형태의 충주시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