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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언덕에서 들러오는 소리(2186.2030.4.2종려주일)
요19:17-29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목사님도 사랑합니다--옆사람과 인사--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처형되는 장면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강한 질문 하나를 던질 수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왜 그처럼 십자가에서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것은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희생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부어야 할 진노의 화로를 그의 아들에게 부으시고 우리는 그의 사랑의 품에 안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엡2:16절‘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1:20절‘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가 없으며,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 구원의 클라이막스이며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더럽고 추한 죄를 일시에 해결하시는 소각장이요, 모든 죄인을 단번에 용서하사 구원하시는 구조선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십자가를 친히 감당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냈습니다. 오늘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슬픈 날이기도 하고, 가장 기쁜날이기도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거니와 고난절 없는 부활절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영광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직접 짊어져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하는 행사를 갖기도 합니다. 그것을 행사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부활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에 여러분이 정성껏 예물도 준비하시고 온 가족들을 총동원해서 예배를 드렸으면 합니다. 오늘은 흔히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은 고난의 주간이라고 해서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과 참회의 마음으로 십자가가 높이 세워진 갈보리 언덕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이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버림을 당하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배반당하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배반당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는 것은 마음의 고통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에게 배반당하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자 다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배반당하심은 우리의 외로움을 없애 줍니다. 온 세상이 나를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멸시 모욕 천대 침뱉음 조롱 구타를 당하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안에서 모든 수치를 없애기 위함이요 자존심을 통하여 고통을 이기게 함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자존심의 고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을 심하게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육체의 고통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고통을 일시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채찍을 맞으시는 고통,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 피흘림을 당하시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극치는 죽고 시체를 무덤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체를 무덤에 3일 동안 있게 되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음부에까지 내려간 예수님의 영혼은 음부가 감당치 못하고 사흘만에 예수님의 육체에 다시 들어와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의 고통은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가 당하여야 할 모든 고난을 예수님은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당하며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언덕에서는 사형집행자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로마군인들이 타고 다니는 말들의 울음소리, 예수와 강도를 사형시키기 위하여 동원된 군인들 소리, 기록에 의하면 약250여마리의 말과 500명 이상의 군인들이 모였다고 하고 유월절이기 때문에 군중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이들이 호령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사형을 시키는 소리가 들리는데 바로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이 박히는 망칫소리가 들려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수족의 살과 뼈를 부수고 들어오는 아픔을 당하시는 주님, 십자가위에서 살이 찢어지는 아픔,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참기여러운 목마름을 느끼시는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들의 소리도 들려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갈보리 언덕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목마르다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우리는 주님에게 무엇을 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종려주일이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왕으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실 것을 예언으로 보여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날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날 군중들은 예수를 향해 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고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이 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첫 발걸음이었습다. 그리고 이 한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고난의 한 주간을 살펴보면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①주일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고(눅19:28-44), ②월요일에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막11:12-14) 그리고 성전을 청결(마가 11:15-29)케 하신 사건이 있었으며, ③화요일에는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고(마23:37-39) 가룟유다의 흥정(막14:10-11), ④수요일에는 예수님에 대한 음모(눅22:1-6), 옥합을 부은 마리아의 사건(막14:1-11)이 있었으며, ⑤목요일에는 성만찬과(눅22:7-53), 겟세마네의 기도(마가 14:32-46), ⑥금요일에는 빌라도의 심문(눅23:1-5), 십자가의 죽음(막15:16-41), ⑦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셨다가(막15:42-47), 다시 ⑧주일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사에 있어서 이 한주간에는 가장 엄숙한 기간이고, 이 주간을 통해서 주를 위해서 충성된 결단을 갖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날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시려고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시는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평안함을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참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불멸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갈보리 언덕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고 고난 받으신 이유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 주어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데 있습니다. 요3: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극단의 방법으로 희생하여 사람들이 믿지 아니할 수 없도록 접근하여 오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희생인 것입니다. ‘자기희생’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사용하신 최후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희생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하노라’는 사실을 자기희생으로 증명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겠지’,‘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하니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믿겠지’십자가의 의미는 이렇듯 자기희생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어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요 마지막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힘없이 속수무책으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12영이 더되는 천군 천사들이 중무장하고 대기하고 있었기에 명령만 내리시면 일시에 저들을 진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로마 병정들의 포승을 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묵묵히 빌라도의 재판을 닫으신 까닭은? 묵묵히 그 더러운 놈들의 손에 뺨을 맞으신 까닭은? 묵묵히 침 뱉음을 당한 까닭은? 십자가에 살이 찢겨 지고 피가 쏟아져 희생의 제물이 되어서 묵묵히 감수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에 달려야만 우리의 죄 값이 청산되고, 그래야만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 질 수 있으니 이 방법만이 우리들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니 그래서 묵묵히 십자가의 형벌을 기꺼이 받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골1:20절‘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롬5:11절‘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이웃과의 화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웃과도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중간에 막힌 죄의 담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누가 죄의 담을 허물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중간에 죄의 담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허물어 주실 수 있습니다. 엡2:13절‘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사랑입니다.
오늘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갈보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누가 못을 박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빌라도 일까요? 요19장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또 채찍질하고 모욕하고 십자가 사형을 정하는 모든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유대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괴롭게 하였는지를 요19장을 읽으면 이들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죄질이 나쁜 사람을 꼽으라면 자기 이익 때문에 거짓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거짓 증언을 하는 증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고 억울하겠습니까?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죽을 죄를 짓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자기 입으로 여러번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시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며 만일 당신이 그를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아니하면 당신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라도는 무엇이 옳은가 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로마 군병들을 시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명했고 그래서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매질하고 머리 위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으며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회롱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빌라도는 오직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세상의 이익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책임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지금도 그 죄 값을 톡톡히 받고 있습니다. 아마 모든 인류 중에 빌라도 만큼 저주를 많이 받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2000년동안 모든 성도들은 예배 때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신앙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본문 요19:11절‘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양심이라도 있어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님의 처형을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예언의 말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빌라도와는 입장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더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죄를 작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일 때문에 그 후손들이 얼마나 극심한 죄값을 치렀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십자군 원정때 교황과 유럽의 왕들은 자신들의 교권과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당시 기독교인들을 충동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에게 복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십자군에게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했는지 모릅니다. 또한 그들은 세계 어디 가서나 멸시와 핍박을 받았고 결국 독일에 의한 전무후무한 유대인 대학살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장본인들일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만 비난할 것도 못되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그들에게만 전가시켜서도 않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었고 박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체포하여 이방인에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군중들을 선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처럼 엄청난 죄악을 범했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시면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쉽게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었고 또 열심도 대단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아들은 몰라보았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유대교도들처럼 형식에만 치우쳤지 생명을 잃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잘못이 있었고 모든 죄를 그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악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일까요?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채찍으로 매질을 했었고, 자색 옷을 입혀 회롱을 했으며 주먹으로 예수님을 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으며,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숨을 거두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또한 메시야가 어떠한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단지 죄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자들은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진짜 장본인은 누구일까요 ? 그는 바로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요19: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누구도 감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허락하시고 작정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진짜 장본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고통을 주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요3: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리고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아담의 원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타락한 죄인들입니다. 롬5:12절‘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망에서 영생으로 구원하시려고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짐을 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이 죄에 대하여 용서받고 영생을 얻는 일은 좋은 일이나 하나님께서 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대속의 제물로 죽여야만 하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는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더욱이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속죄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용서를 못하신다면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만도 못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이의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적인 일을 처리하는 인간에게 비교될 수는 없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법을 무시하시고 무조건 죄인를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재판관도 사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관대하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공적인 자격으로 법을 집행할 때에는 법대로 시행을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또한 공의 하나님이 우주의 심판 주로서 법을 집행하시는 분이 법을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증거 하기를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분명히 교훈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의식을 보면 소나 양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사는 인간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인간이 범하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이 희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구약의 많은 제사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 제물로 삼으시고 인간의 죄를 상관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믿는 자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롬3:25절‘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의 죄를 대 속할 화목 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희생하신 것입니다. 마20:28절‘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왔노라’, 딤전1:15절‘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롬4:25절‘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짐을 지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그는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벧전2:24절‘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진하여 나의 죄 짐을 십자가에 얹어 놓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갈보리 언덕을 향해 나의 죄짐을 지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요1:29에서 예수님을 향해 증거 하기를‘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 했습니다.
어느 아리따운 용모를 가진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의 어머니는 보기에도 흉칙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은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학교에는 절대로 오지 말라는 딸의 당부를 깜박 잊은 채 도시락을 갖다 주려고 어머니는 딸의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갔습니다. 친구들이 당연히 흉측한 얼굴을 한 그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당황해서 그만 우리 집 식모라고 대답하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느냐고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다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가 딸의 울먹이는 등 뒤에서 말 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얼굴이 흉측하게 된 것은 네가 갓난아기 시절에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 그만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불길은 사나운데 집안에는 어린 네가 있었단다 그 사실을 안 나는 앞뒤를 가릴 겨를도 없이 집안으로 달려들어갔고 안 방에 누워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 앉고 나오다가 그만 그 뜨거운 불에 심한 화상을 얼굴에 입고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그나마 생명은 건졌지만 얼굴은 이 모양이 되었구나, 어머니의 흉측한 얼굴에 대한 사실을 처음 듣던 이 여학생은 그만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부둥켜 앉고 울면서 ‘엄마, 용서해 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 그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기쁜 마음으로 자랑했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은 자기 어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불속에 있는 딸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은 조금도 아끼지 아니한 어머니처럼 죄로 인하여 지옥의 불길 속에 있는 나를 구원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장본인은 결국 우리 자신입니다. 흉측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도 사랑하는 딸이 불 속에 있지 아니하면 그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자들을 빌라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군병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원인은 우리 죄 때문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허락하셨으며 주님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므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 갈보리 언덕에서 ‘목마르다’하시는 소리를 들으신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또한 ‘다 이루었다’소리를 들으신 여러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지옥으로 영원히 갈 것인데 주님이 대신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이번 고난주간을 통하여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 보시면서 주님이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이기적인 것도 버리시고, 어려운 고통도 참으시고, 그동안 봉사하고 희생했던 것도 감사히 여기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찾아올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희생적이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셔서 우리 상주감리교회의 귀한 뜻을 생각하여 귀한 성도가 되시고, 높은 뜻을 생각하여 높은 사람이 되시고, 참 뜻을 생각하여 참된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는 면류관과 바꾸는 교환권이라는 믿음을 갖고 희생하더라도 끝가지 십자가를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제일 우선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교회에서 올바로 지면 ‘권위’가 생기고, ‘존경’을 받고, ‘영광’이 주어지고, 참 성도와 참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축복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고난주간을 잘 보내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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